#21. 의사, 열사, 그리고 테러리스트 (13)
참으로 피곤하게도, 날이 바뀐 다음의 린페이는 실내에서만 보낸 하루를 보상받겠다는 듯 다양하게 돌아다닐 의욕을 드러냈다. 침대에서 더 뒹굴고 싶은 욕망을 꾹 눌러 참으며, 나 또한 즐거워하고 있다는 착각에 젖은 채로.
“저, 한국에 오는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이렇게 말한 린페이는 곧 수줍게 웃으며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사실 외국에 나와 본 것 자체가 처음이지만요.”
작은 귀걸이 하나조차 도금으로 달고 다니던 처지였으니 해외여행은 언감생심이었을 터. 그러므로 이 미끼는 이 순간을 진심으로 즐기고 있는 것이었다.
어제 내가 저의 아오자이 차림에 반응했다고 여기는지, 린페이는 돌아다니는 와중에 옷 욕심을 많이 냈다. 그리고 그러한 옷들 중엔 한복이 포함되어 있었다. 대여점에서 입어보더니 가지고 싶다고 투정을 부린 것. 본디 파는 물건이 아니었으되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일 리 없었으므로, 나는 린페이의 요청을 무난하게 들어줄 수 있었다.
그리하여 린페이는 여러 벌의 개량 한복과 여성용 철릭 원피스를 사 차량 운전 및 수행을 담당한 부하에게 맡기고는, 소매에 금박을 입힌 순백의 저고리에 연분홍빛 치마, 그 위에 코트를 걸친 차림으로 대여점의 문턱을 나섰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한국 사람인 줄 알 법한 모습. 행인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걸 보면 역시 상판 하나는 상등품임이 분명하다.
역병의 재유행으로 사람들의 발길이 드물어진 경복궁은 사진을 남기기 좋은 한적한 배경이었다. 내가 함께 찍는 것을 거부하자, 린페이는 아쉬움을 드러내면서도 내게 사진사가 되어줄 것을 부탁했다. 이에 나는 보유 상품의 카탈로그 사진을 찍는다는 느낌으로 피사체를 렌즈에 담았다. 대상이 무기인가 사람인가는 기본적인 촬영기법의 측면에서 의외로 큰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궁궐이 작긴 해도 아늑하고 익숙함이 있어서 좋네요. 다른 나라에 온 것 같지가 않아요.”
가벼이 던지는 한마디에 은근한 간보기가 녹아있다. 린페이가 말하는 아늑함과 익숙함은 문장에 끼어 내 색채를 가늠하는 리트머스 종이와도 같았다. 이는 딱히 감출 필요조차 없는 무가치한 색채여서, 난 여상한 어조로 말을 받았다.
“자금성에 비하면 확실히 작지.”
단순히 면적의 크고 작음을 넘어선 밀도와 구성의 문제.
“양식상의 문화적 공통분모가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고. 조선만 한 체급으로 자금성 같은 궁궐을 지었다면 폭정과 사치의 증거밖에 안 되었을 거야.”
각성수 관리 차원에서 베거나 뽑아버린 조경수들이 많아 밀도의 차이가 더 크게 체감되는 측면도 있었다. 북악산 자락과 닿는 경계지대에선 무상으로 이용 가능한 노동력인 군인들이 지저침투 방지용 석축공사에 투입된 모습들도 눈에 띄었다.
린페이가 빙긋 웃는다.
“중국은 큰 나라니까요. 탈모에 걸린 사람들의 머리 면적만 합쳐도 서울의 열 배를 넘을 대국인걸요. 그만큼 나라가 크니까 궁궐도 클 수밖에요.”
“……?”
어디서 주워들은 농담인지는 몰라도 굉장히 이상한 기준으로 비교를 하는군. 벗겨놓은 사람 머리가죽의 면적을 대충 5백 제곱센티미터쯤으로 잡고 암산을 해봐도 서울 면적을 채우려면 백이십억 명이 넘는 대머리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식의 페르미 추정이 다소 정확도가 떨어지긴 하나, 서울의 열 배 운운하는 게 개소리임을 증명하기엔 모자람이 없었다.
중국인들이 모두 대머리가 된다면 구 두세 개 면적쯤은 채울 수도 있겠다.
“어디, 사진은 잘 나왔나요?”
폰을 넘겨받아 궁궐을 돌아다니며 찍은 사진들을 확인한 린페이는 미묘하게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늘이 좀 화창하지 못해서 아쉽다……. 우리나라보다야 좀 낫긴 한데, 그렇게까지 많이 나은 건 또 아니네요.”
그야 중국에서 온 공기이니 중국과 비슷하겠지.
“휘 오빠가 보기엔 어떠세요?”
“피사체가 좋으니 나머지는 다 좋아 보인다.”
“피. 그걸 쓰시고서 잘 보이긴 하시고요?”
이는 내가 쓴 짙은 선글라스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짓궂은 표정으로 손을 뻗는 린페이.
“자, 저를 좀 더 자세히 봐주세요. 제가 벗겨드릴게요.”
난 뻗어오는 손을 붙잡아 사납지 않게 아래로 밀어냈다.
“밖에서는 안 돼.”
“앗챠…….”
손을 거둔 린페이가 민망한 미소를 머금는다.
“그러고 보면 오빠는 처음 만났을 때도 묵경을 쓰고 계셨죠. 어둑한 실내였는데도.”
“직업이 직업이니까. 항상 만에 하나를 대비하는 거지.”
“좋네요. 전 오빠처럼 매사에 신중한 남자가 좋아요. 기댈 수 있는 듬직함이 있거든요. 비밀스러운 매력도 있고.”
제 실수를 무마하며, 린페이는 내 팔을 꼭 끌어안고 다음 장소로 가자고 보채었다.
궁궐 밖 한옥마을의 거리를 거닐며, 린페이는 괜찮은 사진이 찍힐 때마다 수시로 SNS에 업로드했다. 이는 필시 감시자들에게 내 동선을 전달하는 간접적인 수단일 터. 경복궁에서부터 붙은 미행이 이러한 추측을 증명한다.
‘사전에 지침을 받았겠지. 처음 행선지는 경복궁으로 잡고, 그다음엔 가능하다면 SNS를 써보라고.’
린페이 본인은 그 이유도 모르고서 쉬운 부탁이라 생각하며 요청을 수락했을 터. 나는 이를 짐작하면서도 굳이 막으려 들지 않았다. 마치 방심이라도 한 것처럼.
그러나 이 나라는 내 앞마당과도 같은 곳. 본사로 돌아갈 적에 추적을 따돌리는 것쯤은 어려운 일도 아니다. 저들은 내 위장사업체의 정보조차 알아내지 못할 것이다. 타고 나온 자동차조차 위장용 번호판을 달고 있으니까. 저들에게 있어서 내 조직은 언제까지고 상세 불명의 「무명회사」로만 남아있어야 한다.
가오슈센과의 관계를 고려할 때 미행을 대놓고 찍어 죽일 순 없다는 게 조금 불편할 따름. 단순히 추적에 실패하는 것만으로도 나를 감히 얕보지 못할 것이다.
점심은 미슐랭 가이드에 이름을 올린 한식당에서 해결했다. 불가피한 시간낭비라면 하다못해 입이라도 즐거워야지.
린페이가 궁금하지도 않은 제 주변사를 쉴 새 없이 조잘대는 와중에, 코스의 마지막에 나온 찻잔을 기울이며, 나는 때때로 시계를 곁눈질하여 시간을 확인했다.
‘끔찍할 정도로 느리게 가는군.’
이 순간이 지루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해질녘에 기다리는 소식이 있는 까닭일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돌연 옆에서 들려오던 재잘거림이 끊어졌다.
“오빠. 저랑 있는 시간이 지루하세요?”
린페이의 낯짝에 떠오른 불안함. 나름 티를 내지 않으려 했음에도 티가 나는 구석이 있었던 모양이다. 속으로 한숨을 삼킨 나는 임기응변으로 대응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반대요?”
“책을 읽을 때도 내용이 흥미로우면 남은 페이지가 얼마나 되는가를 수시로 확인하게 되지. 점점 줄어만 가는 페이지를 야속하게 느끼면서.”
“아…….”
내 대응이 나쁘지 않았는지 린페이의 볼에 홍조가 오른다.
“페이 너는 그런 경험이 없었나?”
“이, 있어요. 후후.”
손가락을 모아 꼼지락거리는 품새는 꾸밈이 아닌 안도와 기쁨을 담고 있었다.
사건은 북악길 팔각정에서 벌어졌다.
린페이가 서울의 노을과 야경을 보겠노라 오른 팔각정은 중국발 미세먼지로 인하여 썩 좋은 경치를 보여주지 못했다. 곱게 저무는 석양을 배경 삼아 기억에 남을 입맞춤을 나누고 싶었다던 린페이는, 한숨 한 번으로 아쉬움을 정리하고는 내 손을 붙잡고 팔각정 2층의 레스토랑으로 이끌었다.
「거 무슨 산책 나와서 신이 난 강아지 같네요. 목줄로 주인 끌고 다니는 소형견이요.」
외부로 드러나지 않는 형태의 인이어 리시버. 이 리시버로 들어오는 경태의 개소리에, 나는 녀석이 있는 쪽으로 슬쩍 나무라는 시선을 던져주었다.
레스토랑 내부는 팔각정 바깥과 마찬가지로 한산하기 짝이 없었다. 각성체 야생동물 출몰의 위협이 있는 명승지에 사람이 많으면 이상하겠지. 그것도 세계적으로 역병이 도는 와중에.
지이잉-
핸드폰이 진동하는 소리. 린페이의 폰에 도착한 건 한 통의 평범한 광고 문자였다. 그러나 이 문자를 본 린페이의 심박은 약간의 변화를 보였다. 모종의 약정된 신호인 모양. 태연함을 가장하여 이런저런 신변잡기를 늘어놓던 린페이는 잠시 후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 화장실 좀.”
끄덕여준 나는, 린페이가 화장실에서 무슨 행동을 하는지를 지켜보았다.
좌변기가 있는 칸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근 린페이는 곧장 누군가와 메신저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시간이 경과한 메시지는 자동으로 삭제되는 형태의 메신저. 몇 마디 나눈 린페이는 창백해진 안색으로 액정을 두드렸다.
「잠깐만요. 그런 이야기는 없었잖아요?」
해석하면 이렇지만 급하게 치느라 오타투성이인 문장. 이름이 없는 상대는 이렇게 대꾸했다.
「시키는 대로 해. 네가 연기만 잘하면 포섭대상이 어떻게 반응하더라도 손해를 볼 일은 없으니.」
포섭대상은 나를 가리키는 것일 터. 린페이는 울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너무 갑작스러운걸요!」
무슨 일인가 하니, 공산당 중앙선전부가 린페이의 SNS 계정에 접속하여 게시물을 일부 수정했다는 것이었다. 한복을 입고 찍은 사진 몇몇에 「중국의 전통의상」, 「옛 명나라의 복식」 따위의 해시태그를 달아놓고, 중국공산당의 온라인 친위대 격인 「우마오당(五毛党)」을 동원하여 단시간에 화제의 중심으로 올려놓은 것. 지금은 그 게시물들을 재료로 한중 네티즌간의 싸움을 붙이는 중이라 한다.
상대는 냉정하게 대꾸했다.
「갑작스럽거나 말거나, 몸 성히 돌아오고 싶으면 최선을 다해야 할 거야. 한국이 땅이 좁아 치안이 좋다곤 해도 결코 예전 같지는 않으니까.」
즉 나를 실망시켜 혼자 힘으로 귀국을 해야 할 처지가 되면 공항으로 가는 길에 몰매를 맞을 수도 있으리라는 협박이었다.
‘과장이 심하군.’
저쪽이 아예 없는 소리를 하는 건 아니었다. 이 나라의 치안이 악화된 것 자체는 사실이니까. 한국의 경찰은 이제 실탄을 빈번히 사용하는 집단으로 변모했다.
그러나 아직은 인구 10만 명당 살인 건수가 4.3명에 불과할 만큼 양호한 치안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 한국이기도 하다. 비록 이게 전년도 대비 다섯 배 이상 급증한 수치라고는 해도, 40을 넘어선 세계평균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닌 수준. 이마저도 통계 자체를 내놓지 못한 나라들이 적지 않은 상황에서의 비교였다.
하지만 중국인인 린페이가 느끼기는 다를 수밖에 없다. 평소 살아오던 환경과 거기에 맞춰진 감각이라는 게 있으니. 말 한마디 잘못 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 들어가는 감시사회에서, 시비가 붙으면 칼부터 꺼내드는 군상들의 터전을 일상적으로 접하며 자라온 인생인 것을. 더욱이 최근의 중국은 예전보다 훨씬 더 험한 대륙이 되어버리지 않았는가.
따라서 린페이는, 모든 메시지가 삭제된 후, 겁에 잔뜩 질린 채 바들바들 떨며 내가 기다리는 자리로 돌아왔다.
“어, 어떡하죠? 제가 큰 실수를 저질렀어요…….”
내게 반감을 살까 봐 겁먹은 마음이 반, 주변의 모든 시선을 무서워하는 마음이 다시 반일 터. 그러므로 뚜욱 뚝 떨어지는 눈물은 굳이 꾸며낼 필요가 없는 진실이었다.
“무슨 일이지?”
모르는 척 물어본 나는, 린페이가 더듬더듬 늘어놓는 표면적인 자초지종을 듣고서 짐짓 눈살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그게 뭐 어쨌다고?”
“……기분 나쁘지 않으세요?”
“어디서 기분이 나빠야 하는지를 모르겠다만. 그깟 옷 쪼가리가 어느 나라 것이든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고.”
심드렁히 달래는 말엔 내 진심이 녹아있다. 내게 손해가 되지 않는다면, 난 이 나라가 아예 망해버려도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정말로 망해버리면 손해를 보지 않을 수가 없겠지만. 우선 부하들의 생활기반부터가 개판이 나버릴 게 뻔하다.
“어쨌든 이대로 더 돌아다니기 곤란해졌다는 건 알겠다.”
자리에서 일어선 내가 선글라스를 벗어 린페이에게 씌워주자, 살짝 움츠린 린페이가 동그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돌아가지.”
휘청거리며 일어난 린페이는 주차장까지 가는 짧은 길을 영겁처럼 느끼는 듯했다. 위험을 감지한 동물처럼 전 방위로 신경을 곤두세운 채, 내게 기대는 방향을 달리해가며 불특정다수의 시선으로부터 자신을 숨겨보려 애쓴다.
가오슈센 그 인간, 도구를 꽤 험하게 다루는군.
무슨 계산이었는지는 알 만하다. 저가 겪어온 사내들을 기준으로 나를 해석했겠지. 설령 내게 말 같지도 않은 애국심이 있어 ‘실수’를 예민하게 받아들였다 쳐도, 잘못했다고 울면서 비는 미인을 보면 당연히 누그러질 수밖에 없으리라고.
여기서 예외인 자가 드무니 중국의 인간낚시가 나날이 성공을 거듭하는 것이다.
그러나 미처 준비되지 않은 미끼를 이런 식으로 굴리다간 자칫 낚싯줄이 끊어져버릴 수도 있다. 뭐, 일가의 생사여탈권을 틀어쥔 공산귀족 입장에선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숙소로 돌아온 린페이는 허겁지겁 입을 맞추며 몸과 몸이 얽히는 대화를 갈망했다. 내가 저에게 정이 떨어지지 않았음을 육체적인 반응으로 재확인하고 싶은 눈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