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의사, 열사, 그리고 테러리스트 (7)
대화가 이렇게 흘렀으니 이번 쇼는 공개하기 글러먹었다. 괜히 시간만 낭비한 꼴인 포퓰리스트는 한참만에야 미련이 진하게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끝까지 서명을 못해주시겠다 이겁니까? 언제 어디서 각성체와 마주칠지 몰라 불안에 떠는 주변지역 주민들을 외면하면서까지, 꿋꿋하게 선생님의 재산권만 행사하시겠다고?」
“예. 지금으로선 그렇지요.”
「지금으로선? 나중엔 달라질 수 있다는 말로 들리는군요.」
“당연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고위험 수렵 배상책임보험 제도를 도입하고 해당 보험에 가입한 헌터들만 사유림에서의 활동에 관한 계약을 가능케 하는 법안이 만들어진 이후라면, 그때는 동의서에 서명을 하지 못할 것도 없겠지요. 보상액이 현실적으로 책정된다는 가정 하에 말입니다.”
「호오.」
도지사의 음색이 달라진다.
「고위험 수렵 배상책임보험 도입은 이 사람이 주장하는 것이지요. 알고 계셨습니까?」
“당연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도지사 강중성의 주장이잖습니까.”
「뭐라구요? 하하!」
이 제도의 핵심은 보험의 운영을 국가가 아니라 민간 보험사에게 위탁한다는 것이었다. 자동차보험처럼 가입의무가 강제되는 형태로. 공적 보험이 아니기에 여러모로 부작용이 많겠으나 국가재정 하나는 확실하게 아낄 수 있다.
‘그깟 보험 따위 사실 어찌 되든 상관없지만.’
공적 보험이든 사적 보험이든, 그런 제도가 도입될 즈음이면 민간 엽사들의 활동에도 제도적인 틀이 잡힐 것이다. 높은 확률로 기존의 성공사례들을 벤치마킹하겠지. 그 틀이 잡히고 나면 내가 굳이 엉뚱한 놈들을 내 땅에 들일 이유가 없어질 터.
결국 이건 시간을 벌 요량으로 적당히 구슬리는 말에 지나지않았다.
통화가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웃음을 터트린 도지사가 독백처럼 중얼거렸다.
「그걸 갖다가 사유림 출입 자격과 엮어 달라⋯⋯.」
"자연스러운 요구라고 생각합니다. 고위험 사냥에 뛰어드는 헌터들의 자질에 관해선 여러모로 논란이 많은 상황이잖습니까. 그러니 나 같은 산주들의 입장에서 최소한의 안정장치는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내가 언급한 자질 문제는 헌터라는 직종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헌터는 생명의 안전과 안정적인 벌이가 보장되지 않는 직업이다. 힘들고, 위험하고, 현시점에선 제도적인 보호장치마저 없다시피 한, 있는 거라곤 위험에 비례하여 높아지는 보상 뿐인 도박성 짙은 업종.
그 같은 도박에 문자 그대로의 목숨을 걸겠다는 사람치고 제대로 된 인생이 드물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선량한 위인이든 더러운 말종이든, 경제적으로 궁핍하고 그 궁핍을 해결할 다른 방도가 마땅치않은 자들. 그래서 자기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자산, 즉 목숨이라도 담보로 걸고 일확천금을 노리고자 나선 인생들이 전체 헌터들 가운데 최대다수 집단을 이루는것이다.
'그런 인생들이라 밀수에 손을 대기도 쉽지.'
세계 여러 나라들은 각성체와 그 부산물 일체를 전략적 생물 자원으로 간주, 모든 형태의 사냥과 유통을 공적인 감시 아래에 두고자 애쓰고 있었으나, 그러면 그럴수록 암시장에서 쳐주는 값이 높아지는 탓에 밀렵과 밀수를 근본적으로 차단하기가 어려웠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유행할 적에 현찰박치기로 방역 마스크를 쓸어가던 중국인들이 이제는 각성체 사냥물에 대해서도 똑같은 짓을 벌이고 있는 것.
그렇게 밀수를 하다보면 서로 간에 다툼이 빚어질 일도 많아진다. 거래선을 두고 싸우든, 사냥터를 두고 겨루든, 실제로 지난 한 주간 헌터들 간의 다툼이 뉴스를 타지 않은 날은 하루도 없었을 정도. 그러한 다툼들은 빈번하게 유혈을 등반한다.
그리하여 경태가 전하는 대중의 시각은 그들이 쓰는 경멸적 표현으로 축약할 수 있었다.
무장한 렉카충. 혹은 중장갑 용팔이들.
렉카충이 뭐고 용팔이가 뭔지 설명을 듣고 나니 과연 나올 이유가 있는 표현이구나 싶었다.
원시마법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잉태된다. 사이렌과 경광등을 불법으로 달아놓고 고속도로에서 역주행을 일삼는 사설 견인차 차주들. 사기와 생업이 동의어나 마찬가지인 중고차 딜러들 외지인을 잡아 두들겨 패면서 노예로 부리기로 유명한 어느 섬의 염전주들. 이런 자들에게도 마력의 축복-또는 저주-은 공평하게 깃드는 것이다.
도지사가 다시 입을 연다.
「일단 일리는 있는 제안이십니다만⋯⋯.」
"제안보다는 유권자의 요청이라고 해주시죠."
「하하. 그래요. 유권자의 요청. 좋지요. 하지만 저 전국사유림보호협회에서 요구하는 사유지 출입 요금이나 사유림에서 잡힌 각성체에 대한 지분 보장. 고위험 수렵과정에서 발생하는 수목손상에 대한 보상금 같은 것들은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거야 당사자들 간의 조정을 하거나 해야지요. 그리고 다시 한 번 말씀드리는데, 난 그 사유림보호협회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입니다. 친일파 후손들과 마찬가지고요."
「어허, 사소한 건 넘어가시죠. 내가 선생님께 말실수를 하긴 했습니다마는. 솔직히 선생님도 나한테. 이 강중성이한테 부적절한 태도를 보여주지 않으셨습니까? 그래, 우리 비긴 걸로 해둡시다. 사나이답게, 아시지요.?」
뻔뻔하기는.
「아무튼, 아까 현실적인 보상액을 말씀하셨는데, 가장 문제가 되는 게 수목손상에 대한 보상금입니다. 선생님께선 그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군요.」
"내 의견이 중요합니까?"
「정식으로 제도가 확립될 때까지 도지사라는 사람이 그냥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잖습니까. 도내 최대의 사유림 소유주이신 선생님 한 분만 협조를 해주셔도, 대략 한 1년짜리 단기계약만이라도 체결해주시면 제가 면이 서겠는데⋯⋯, 어떻습니까. 뭔가 방법이 없겠습니까?」
결국 중요한 건 위정자로서의 체면이었다. 이 거머리를 어떻게 떨쳐내야 나중에 귀찮아지지 않을까. 짧게 생각한 나는이렇게 대꾸했다.
"어떻게고 자시고, 받을 보상은 받아야지요. 수목의 각성여부는 차지하고서라도, 수목 손상 시 조달청에서 공시하는 조경수 가격은 쳐주셔야 나 같은 산주들이 사유림을 개방할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만약 그게 특별히 질이 좋은 각성수라면 시세만큼의 추가금을 지불하셔야 할테고."
「조달청 공시가에 각성수 추가금이라⋯⋯.」
"내가 무리한 요구를 하는 건 아닐 겁니다. 주택으로 치면 실거래가가 아닌 공시지가 기준으로 보상을 받겠다고 하는 거니까. 게다가 수목들은 실거래가와 공시가 사이의 차이가 큰 편이지요. 이 정도면 매우 양심적이지 않습니까.? 도청 측에서 그 손실을 보전해준다면 난 이 숲을 유해조수 구제단에게 개방해드리겠습니다."
「이것 참.」
도지사가 입맛을 다신다. 제안 자체는 온건하고 전향적이지만, 그럼에도 함부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제안이었던까닭이다.
'각성수에 대한 시세 기준 추가금이 마음에 걸리겠지. 예산도 부족한 마당에.'
각성수도 다 같은 각성수가 아니다. 능력의 형태와 불용마력의 방사여부에 따라 명백히 해수(害樹)로 구분되는 나무가 있는 반면, 유익함이 더 크다고 평가되어 정해진 가격 없이 경매로 주인을 정하는 익수(益樹)들도 존재한다.
예컨데 국토가 건조하고 사막이 많은 국가들은 마력으로 물을 붙잡아두는 각성수들의 가치를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잘만 하면 사막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녹지와 물길을 그저 평범한 식목사업만으로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것이다.
여기에 각성수들의 능력이 많은 경우 순수한 물에 대해서만구속력을 발휘한다는 점에 착안하여, 각성수를 이용한 해수 담수화나 오폐수 정화 프로젝트에 시동을 건 국가들도 존재했다. 아직 개념을 연구하는 단계에 불과할지라도 전망은 꽤 밝은 편.
또한 주술사와 한방 약제사들이 각성수의 섬유질과 수액으로 환약을 빚는 경우도 많다. 한때는 인류가 만병통치약이랍시고 라듐을 쳐먹던 시절도 있었으니 놀랍지도 않은 일. 치아 미백을 위한 라듐치약, 충치를 예방해주는 라듐 초콜릿과 비염을 호전시키는 라듐 분무 등, 옛 방사성 돌팔이(Radioactive quackery)들의 화려한 행적에 비하면 각성체 부산물로 약을 만들어 파는 주술사들의 사업은 얼마나 인도적인 사기행위란 말인가.
이제 막 만들어졌을 뿐인 새로운 시장은, 이렇듯 오일머니를 포함하는 다양한 출처의 자금 유입으로 하루가 다르게 규모와 활기를 더해가는 중이었다.
당장 밀림의 팽창을 저지하지 못 하면 나라가 망할 판인 열대의 국가들이야 돈이고 뭐고 폭파처리를 하느라 급급하지만, 개별 각성수의 위험도와 가치를 감정할 여유가 충분한 국가들은 사정이 다른 것이다.
어쨌든, 이런 시장의 형성은 산과 숲을 보유한 산주들에게 아주 큰 힘이 되어주고 있다. 손상된 수목의 실제 가치가 어떻든지 간에, 피해액을 부풀려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것.
정부가 사유림으로의 군대 투입을 꺼리는 이유 하나가 바로 이것이기도 했다. 병사에게 독박을 씌우자니 그건 또 그것대로 여론이 나빠질 터이고. 고심하던 도지사가 운을 띄운다.
「아시겠지만, 이게 그렇게 쉽지만은 않은 이야기입니다. 그냥 조달청 조경수 표준가만 받으시면 안 되겠습니까.? 지금 우리 재정으로는 그것도 부담스럽습니다만, 전년도에 그놈의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지출한 돈도 적지 않은데 올해도 경기가 영 좋지를 않아서 말입니다.」
"안 됩니다. 얼마 전 강원도 화천 인근 사유림에서 백억원대의 수목 절도사건이 벌어진 걸로 아는데, 내 숲에서 그런 일이 되풀이되지 말라는법 있습니까?"
「그걸 애국심과 노블리스 오블리주로 좀 어떻게⋯⋯.」
"아까 말씀드린 것 같은데, 나는 이 숲을 내 돈 들여 관리하고 있습니다. 이거야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아닙니까.?"
「아 글쎼, 공공행정으로 투명하게 이루어져야 국민이 신뢰를 하고 또 안심을 하지요. 자꾸 그렇게 사적으로 관리하겠다고 고집하시면 밀수를 한다는 의심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럼 최소한 도지사님이 보증을 서주시죠."
「어떤 보증을 말입니까?.」
"내 숲에 출입하는 헌터들이 문제를 일으킬 경우 그 피해는 도지사님 개인이 보상해주시는 것으로. 어떻습니까?"
「⋯⋯ 그거는 어렵겠고, 대신에 한시적으로 선생님 소유의 숲에서 잡히는 각성체와 그 부산물에 대한 지분을 30%까지 보장해드리지요. 그 왜 온라인 어플리케이션 플랫폼들도 관습적으로 30%를 떼어가니 사냥터 제공자도 그 정도까지는 받아갈 수 있지않은가 하는게 이 도지사 강중성이의 생각이고, 또 우리 도정이 양보 가능한 한계선입니다.」
"수목 보상금은 완전히 제외하고.?"
「말하자면 그렇게 되겠군요.」
"30%의 기준은 공공수매가가 기준입니까. 아니면 2차 판매가가 기준입니까.?"
「그야 뭐. 어쩔 수 없이 공공수매가 기준으로⋯⋯.」
"도지사님 스스로도 좀 너무한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애국심으로 희생을 강요하는 데에도 정도라는 게 있습니다."
「음⋯⋯.」
"게다가 상식적으로, 그렇잖아도 낮은 공공수매가에서 사냥터 주인에게 30%를 떼어줘야 한다고 들으면 엽사들이 더욱 밀렵을 하고 싶어지지 않겠습니까? 사적으로 관리하는 것만 못한 결과를 낳을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군요. 아닙니까?"
「⋯⋯.」
논리와 명분 모두 밀리는 상황에서 끈덕지게 달라붙던 포퓰리스트가 한숨을 내쉰다.
내가 끝까지 서명을 하지 않으면 해수 구제단이 막무가내로 들어오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혐의가 사유지 무단 침입에 그치더라도, 여러 번에 걸친 전과를 쌓았다간 나중에 공식적인 헌터 자격을 얻을 대 불이익을 받을 가능성이 높았으니까.
과연 이 나라가 전과자들에게 무기소유를 허가할 것인가?
하물며 그 전과가 재물손괴, 은닉, 절도로 넘어가면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다. 이 것이 산주들이 날려대는 고소장이 강력한 무형의 장벽으로 작용하도록 해주는 원동력 가운데 하나였다.
오늘만 사는 인간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겠지만.
"비록 서명은 해드리기 어렵겠습니다만, 도지사님이 이 상황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정치후원금을 좀 드리지요."
「내가 도지사이고 선거철도 아닌데 말입니까?.」
"같은 당에서 뜻을 함께하시는 의원 분들이 계실 게 아닙니까. 사람을 한둘 골라 내 회사로 전달해주시면 해당 후원회에 익명으로 2천을 꽂아드리겠습니다."
「익명 기부는 1회 한도가 겨우 10만원 밖에 안됩나다마는⋯⋯.」
"내게도 뜻을 함께하는 동료와 임직원들이 많으니 그깟 한도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결국은 돈이다.
처음부터 돈을 내밀었다면 이빨도 먹히지 않거나 훨씬 바싸게 치이거나 했겠지만, 지금은 이거라도 받고 빠지는 게 상책이라는 생각을 할 것이였다. 당의 어른으로서 당원들에게 용돈을 챙겨주는 건 위신에 도움이 되는 일이니까.
보복능력을 갖춘 상대에 대한 구두약속은 일반적인 구두약속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도지사는 못 이기는 척 타협을 받아들였다.
「그렇게까지 성의를 표하신다면야, 뭐, 어쩔 수 없지요. 불가피한 상황이 발생하기 전까진 산주님을 믿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걸로 뜬금없이 들러붙었던 정치적 거머리가 원한을 품을 일은 없을 것이다. 덤으로 직급 낮은 공무원들이 괜한 발걸음으로 내 애들을 귀찮게 할 일도 없어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