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의사, 열사, 그리고 테러리스트 (6)
이 새끼 봐라? 나와서 서명이나 해라?
“내가 왜 그래야 합니까?”
「왜냐니? 그걸 지금 몰라서 묻습니까?」
도지사는 짐짓 날카롭게 반응했다.
「유해조수 각성체 구제는 국민들의 생활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당신 같은 산주들이 여기서부터는 내 땅입네 하고 길을 막고 경고판 꽂고 담벼락을 세우고 철조망을 둘러 쳐놓으니, 나름 좋은 일 하겠다고 나선 헌터들이 사냥감을 제대로 쫓을 수나 있겠습니까? 무작정 쫓아 들어갔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재산권 침해이니 사유지 무단칩입이니 하면서 법정공방으로 홍역을 치러야 하는 마당에?」
“어쨌든 재산권 침해는 맞지 않습니까?”
「어허- 이 사람 이거.」
쯧쯧 혀를 차는 소리.
「이보세요, 선생님. 개인의 재산권보다 중요한 게 국민들의 생명권이에요, 생명권!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각성체의 위협에 노출된 채 불안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 말입니다! 이 일대의 임야가 그, 얼마, 얼마라고?」
전화 너머에서 도지사가 제 보좌관쯤 될 인간과 문답을 주고받는다.
「470헥타르? 거 넓기도 하네. 아무튼 470헥타르가 선생님 회사 소유로 등록되어 있던데! 도내 최대의 사유림 소유주가 협조를 안 해주면, 예? 무슨 수로 우리가 주민들의 안전을 보장하겠습니까? 오죽하면 도지사씩이나 되는 내가 서명 받겠다고 여기까지 발걸음을 했겠습니까? 그만큼 국민들이 절박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요컨대 그 절박한 위기감을 이용하여 인지도와 인기를 얻으러 왔다는 소리였다.
“개인의 재산권보다 국민들의 생명권이 중요하다……. 그거 참 좋은 말씀이로군요.”
「말로만 좋다고 하지 마시고 행동으로 보여주시죠. 좋게 좋게 갑시다. 예?」
웃기는 인간이로군. 난 눈으로는 화면을 보면서 질문을 던졌다.
“한 가지 묻겠습니다. 도지사님은 재산이 얼마나 되십니까?”
「그건 왜 물어봅니까?」
“적어도 30억은 넘지요? 작년쯤인가, 뉴스에서 얼핏 그렇게 본 것 같은데. 전년도에 비해 그 정도 늘었다고.”
「그러니까 그거는 왜…….」
“그 돈 쓰면 살릴 수 있는 목숨들이 많을 겁니다. 예컨대 이 나라에서 생활고로 자살을 택하는 사람들이 매년 수천 명씩 쏟아지는 걸로 아는데, 30억이면 최소한 그 사람들 먹는 걱정은 덜어줄 수 있겠지요. 값싼 정부양곡만 대어줘도 감지덕지하고 먹을 테니.”
「아니, 잠깐.」
“우선 도지사님부터 한 10억쯤 자발적으로 풀어보십시오. 개인의 재산권보다 국민들의 생명권이 소중하다고 하신 분께서 설마 싫다고 하진 않으시겠지요?”
「그거랑 이거랑은 완전히 다른 문제입니다!」
“뭐가 다릅니까? 결국은 누군가의 재산권을 희생해서 많은 사람을 살려보자는 이야기인데.”
「다르지! 내 돈은 정당하게 모은 재산이고! 당신 땅은 부당하게 얻은 재산이고!」
이건 또 무슨 개소리인지.
내가 범죄조직의 우두머리이긴 하지만, 이 인간이 그런 사실을 알고 말했을 리는 없었다. 이 땅을 소유한 사업체는 철저하게 합법적인 영역에서만 활동하고 있었으니까. 만약 내가 음지에서 벌이는 사업이 노출되었다면 나를 찾아올 것은 도지사 따위가 아니라 경찰특공대 내지 원탁이 파견한 사냥꾼 부대여야 정상이었다.
그리고 도지사가 정당하게 재산을 모았다는 건 웃기지도 않는 개소리에 불과했다. 내가 아는 이 인간의 비리만 해도 얼마인데.
내 같잖아 하는 침묵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도지사가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묻는다.
「역시 찔리는 구석이 있으신가봅니다, 선생님?」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무슨 말씀이긴! 당신이 친일파 후손들이랑 한패인 걸 내가 모를 것 같습니까? 이 도지사 강중성이가?」
“……뭐요? 친일파?”
「모르는 척 마십시오! 당신 이전에 이 땅을 소유하고 있던 인간이 친일파 후손이었다는 건 내가 다 알아보고 왔습니다! 선생, 문제 있는 숲이고 산이라는 사실을 알면서 사들인 거 아닙니까? 그런 줄 몰랐다고 우기면 정부로선 환수조치를 취할 수 없다는 점을 악용한 것이지! 땅의 원래 주인은 거래가 끝나자마자 가진 돈 싹 긁어서 해외로 날라버렸고!」
“그랬습니까? 난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만.”
사실을 말하자면 알고서 사들인 게 맞다. 그 친일파 후손은 환수를 피하고자 몸이 달아있었고, 급매물로 나온 산과 숲은 시세보다 낮은 가격이었으니 이득을 보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지. 그러나 아까와 마찬가지로, 도지사로선 이러한 내막을 간파할 방법이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합법적이었던 거래에 괜한 트집을 잡고 있는 것이다.
“정황만 가지고 넘겨짚는 건 적당히 해주셨으면 합니다, 도지사. 친일파 후손들과 한패라니 모욕적이기까지 하군요. 난 그냥 시장에 나온 매물을 사들였을 뿐입니다.”
「넘겨짚어요?」
도지사가 코웃음을 친다.
「최근 사유지 무단침입이니 산림훼손이니 해서 고소를 남발하는 인간들 중 많은 수가 친일파 후손들이라는 건 팩트로 밝혀진 사실이에요! 그리고 개인 산주들의 대정부 집단행동을 이끄는 전국사유림보호협회 간부들도 과반수가 친일파 후손들이지요! 당신, 그들이랑 일절 관계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그것도 나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집단행동에도 관심 없고요. 나는 다만 내 권리를 존중받고 싶을 따름입니다.”
처음 듣기는커녕 아주 잘 알고 있는 일이며, 당장은 그들의 집단행동에 관심이 없어도 장차 필요해졌을 때 이용해먹을 생각 정도는 있다. 사업상 그들 중 몇몇과 교류한 적이 있으니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도 가능하고.
그러나 현 시점에서 날 친일파 후손들과 엮는 건 억지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도지사가 추궁한다.
「허. 그럼 여기서 날 가로막고 있는 이 능력자들은 뭡니까? 선생님 혼자 이 능력자들을 고용해서 월급 줘가며 부리고 있다는 말을 믿으라는 겁니까?」
확실히 경계를 지키는 내 부하들의 존재는 다소 수상하게 보일 여지가 있었다.
‘이 나라에서도 빨리 민간 영역의 고위험 사냥 산업이 활성화되어야 하는데 말이지. 중국식의 사영엽사병단이든, 미국식의 민병대 조직이든.’
그래야 내 조직이 조직의 영역을 지켜도 의심을 받을 구석이 없어질 터.
지금은 급한 대로 자격 여부와 무관하게 고위험 사냥을 허용하고 있는 과도기라, 개인 단위의 수렵활동이야 어쨌든 법적으로 승인받은 민간 엽사단체라는 건 존재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정부와 각 지자체가 주먹구구로 운영하는 유해조수 구제사업단이 있을 뿐인 것이다.
나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대꾸했다.
“그들은 내가 땅 주인으로서 책임을 다하고자 고용한 엽사들입니다. 그 증거로, 이 근방에서 각성체 관련으로는 크게 민원이 없지 않았습니까?”
「말은 똑바로 합시다. 땅 주인으로서의 책임이 아니라 돈을 벌려고 하신 거겠지요. 고위험 사냥의 결과물을 정부와 지자체가 독점적으로 수매하는 정책이 마음에 안 들어서, 저 중국의 약재상들이나 동남아 아프리카 카리브 해 이런 동네 무당들한테 직접 밀매로 팔아먹으려고! 그러는 편이 훨씬 더 돈이 되니까!」
“점점 도가 지나치십니다.”
「선생님이야말로 도가 지나칩니다. 담당 공무원들이 여기를, 어? 선생님을 벌써 스무 번도 더 찾아왔다고 그래요! 그런데도 서명을 안 해줘서 결국 이 도지사가, 응? 이 강중성 도지사가 직접 찾아왔는데! 엊그제는 저 남쪽 충주에서 이 일 맡은 공무원이 업무 부담을 못 이겨 자살까지 했다는데!」
그놈의 도지사 타령은.
「어디 이번에도 한번 그냥 돌려보내 보시지요! 세무조사든 밀렵이랑 밀수 관련한 집중조사든! 털려서 먼지 한 톨 안 나올 자신 있으면 이 도지사 강중성이를 그냥 돌려보내보시라 이 말입니다! 나는 도지사로서 도민들의 생활안전 보장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할 테니까!」
“그럼 돌아가십시오.”
「뭐요?」
“난 정말로 자신 있으니 돌아가시라 했습니다. 세금이야 표창을 받을 만큼 성실하게 냈고, 내 땅에서 잡힌 각성체들도 쥐새끼 하나 빼놓지 않고 인근 환경부 출장소로 가져가 보상을 받도록 지시했습니다. 거리낄 게 없으니 두려운 것도 없군요.”
「……흐음.」
침착한 어조로 당당하게 말하니 도지사의 기세가 누그러진다.
명예훼손과 협박, 직권남용 등으로 고소를 당하는 한이 있어도 대중을 선동하고 뉴스의 헤드라인을 차지할 수만 있다면 남는 장사라는 계산에서 한바탕 쇼를 벌이러 왔을 터이나, 내가 정말로 깨끗하다면 이득보다 손해가 더 커질지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을 것이었다.
물론 딴에는 승산이 높다고 여겼겠지. 돈 많은 자들 치고 뒤가 구리지 않은 인간은 희귀동물에 가깝고, 완고하게 서명을 거부하는 데에도 밝히지 못할 이유와 따로 믿는 구석이 있으리라 봤을 테니. 여기서의 믿는 구석이란 돈 많은 다른 산주들과의 연대를 말함이다.
산주들의 수가 그리 많지 않고, 개중 친일파 후손의 비중이 적잖은 것은 사실. 그러므로 내가 다른 산주들과 연락이라도 하고 있다면 친일파와 엮어버리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사실관계를 떠나 대중을 끓어오르게 만들 수만 있으면 그만인 것이다. 무릇 대중은 시간이 흐른 후 뒤늦게 정정되는 사실에 대해선 처음만큼의 관심을 두지 않는 법이니까. 뭐야, 그런 거였어? 실망이네. 하고 넘어가버릴 따름.
‘아니, 이 건이 화제로 떠오르면 전국사유림보호협회인지 뭔지도 당연히 목소리를 내겠지. 내가 연락을 실제로 하고 있는가 여부와는 상관없이.’
그럼 대중들은 자연히 나와 친일파 후손들이 한패라는 인상을 받게 될 터. 머리로는 아닌 걸 알아도 가슴으로는 그렇게 느끼고 마는 것이다.
이는 대권주자가 행하기에 꼭 바람직하지만은 않은 전략이지만, 다른 후보에 대한 지지선언으로 키 메이커가 될 요량이라면 지저분한 논란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후보직 사퇴를 동반한 지지선언은 대개 상대에게 자신의 열성지지층 표를 더해줄 뿐 악평까지 옮겨주진 않는 까닭이다.
친일파 후손 지주들을 징치하느라 오명을 뒤집어쓰길 마다않는 정치인의 이미지. 그런 이미지를 얻기 위해서라면 다소의 논란은 감수할 만하다. 친일파 프레임 씌우기에 더해, 경제적 여유가 없는 대중들의 보편적인 정서, 부유층에 대한 적개심을 건드려주면 만사형통이리라 생각했을 게 뻔하다.
「선생님, 우리 얼굴이나 보고 이야기를 하십시다.」
천박한 포퓰리스트가 누그러진 음성으로 달래는 말.
「내가 그래도 천삼백만 도민들을 대변하는 도지사인데, 예의상 얼굴은 보여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대로 전화통화만 하고 물러나는 건, 경태 식으로 표현하면 가오가 살지 않는다 이거겠지. 실무자들만 왔을 땐 통화조차 불가능했던 사람이 그래도 도지사가 오니까 만나는 주더라. 자기가 발로 뛰니까 역시 달라지는 게 있지 않으냐? 이런 식으로 포장을 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 시답잖은 의도에 어울려주기엔 내가 너무 바쁜 사람이었다.
“드릴 말씀은 다 드렸습니다. 이제 와서 얼굴을 본다고 달라질 게 무엇이겠습니까? 돌아가셔서 세무조사를 하시든 조사단을 파견해 밀렵과 밀수 여부를 점검하시든 편하신 대로 하십시오. 내가 협조할 의무가 있는 부분들에 대해선 협조를 해드릴 테니까요.”
「어허.」
이 인간이 또 건방지게 혀를 찬다.
「선생님! 저는 지금 국민을 대하는 예의를 말하는 겁니다, 예의! 국민의 생명권이 달린 중요한 문제를 전화 한 통으로 대-충 무성의하게 넘겨버리는 건 사람으로서 예의가 아니라 이 말이에요! 아시겠어요?」
“그러는 도지사님은 내게 예의를 지키셨습니까?”
「무슨 소리요?」
“재산권보다 생명권이 소중하다는 말씀은 맞습니다. 하지만 여기가 무슨 중국이나 북한도 아니고, 그게 무조건 윽박질러서 해결을 볼 일은 아니지요. 도지사께선 민주주의 법치국가의 공무원답게 절차적 정당성을 갖춰서 협조를 요청하셨어야 합니다.”
「그 절차적 정당성을 갖추겠다고 동의서에 서명 받으러 온 거잖소! 이 내가! 도지사 강중성이가!」
“위력으로 받아내는 서명이 정상적인 동의라면 저 일제의 을사늑약도 정상적인 조약이었겠습니다. 혹시 내가 지금 도지사가 아니라 이완용 선생과 통화를 하고 있는 겁니까?”
「뭐? 이완용? 당신 지금 말 다했어?! 이거 모욕죄야, 모욕죄!」
“일대일 통화에서 모욕죄가 성립하는지는 미처 몰랐군요. 나는 내가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여기는 내가 모르는 법률이 적용되는 다른 나라 땅이었던가 봅니다.”
「이, 이 사람 이거 못쓰겠구만. 나이도 나보다 젊을 것 같은 사람이-」
“애초에 날 친일파 후손들과 한패라고 몰아세운 건 도지사님 쪽이 먼저였습니다. 도지사님은 나를 친일파로 몰아도 괜찮고, 내가 도지사님을 이완용 같다고 하는 건 안 괜찮습니까? 도지사가 되면 혹시 면죄부라도 몇 장 나옵니까?”
「당신 진짜-」
“이 통화는 나도 녹음 중입니다. 신중하게 말씀하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
연속으로 말을 잘라 먹힌 데다 반박할 논리도 마땅치 않은 도지사는 씨근덕대기만 할 뿐 당장 무언가 말을 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나는 이 인간을 사적으로 알고 있다. 정확하게는 위장신분 중 하나로 도박판에서의 교분을 쌓았다고 해야겠지만.
지금 이렇게 성난 멧돼지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는 해도, 단지 기분이 더럽다는 이유로 손해를 볼 싸움을 들이받아 버리는 멍청이는 아니다. 오히려 이익만 얻을 수 있다면 사적인 원한 따위 감탄이 나올 만큼 가볍게 치워버리는 이성적인 인간이지. 자본주의의 짐승이자 처세술 좋은 정치인.
이 나라의 국민들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들만 보고서 위정자들의 멍청함을 욕하지만, 그 멍청해 보이는 언동들은 언제나 위정자들 자신의 보이지 않는 이익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었다.
정치인들은 보이는 것만큼 멍청하지 않다. 다만 사고방식이 다르고 살아가는 세계가 또 다를 따름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