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의사, 열사, 그리고 테러리스트 (5)
아침식사 후 집무실로 돌아온 나는, 또 한 잔의 커피를 마시며 고급 위스키 글라스에 갇힌 각성체 거미를 관찰했다.
톡, 토독-
포획케이지를 대신하는 천연 석영유리는 모스 경도가 7이나 되는 단단한 소재였지만, 각성체 거미가 힘을 모아 두드릴 때마다 희미하게나마 하얗게 찍힌 자국들이 생겨났다. 이것만 봐서는 거미가 아니라 갯가재를 가둬두고 있는 듯하다. 글라스를 아령으로 눌러두지 않았다면 거미는 일찌감치 탈출에 성공했을 것이다.
거미가 투명한 벽을 두들기는 동안에도 거미의 방적돌기는 계속해서 반투명한 실을 뱉어내고 있었다. 난리를 치던 거미는 어느 순간 자세를 뒤집어 배설물처럼 쌓인 거미줄을 뜯어먹기 시작했다. 필시 저가 파묻혔던 거미줄 덩어리도 운신의 자유를 되찾은 후 먹어서 없애버렸을 것이다. 입이 닿지 않는 부위에 여전히 붙어있는 하얀 잔재들이 그 증거였다. 여기에 우둘투둘 부풀어 오른 불사암 덩어리가 몸놀림의 불편함을 가중시킨다.
이 병든 거미는 내게 자그마한 영감을 하나 던져주었다.
‘불사암에 의한 신경신호 교란과 생체기관의 오작동이라…….’
이건 잘만 하면 사냥꾼의 잡기가 되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마력투사를 통해 불사암의 한 갈래인 마력암을 유발할 능력이 있으니까.
물론 거미로 방적공장을 돌려보겠다는 식의 황당한 발상을 하는 건 아니다. 당장 눈앞의 이 거미만 하더라도 암세포의 덩치가 더 커지고 나면 지금 같은 기능이 유지될지가 의문이니까. 이 거미의 몸뚱이는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오류를 일으켰을 따름이다.
다만 매력적인 것은, 어디를 가든지 간에 현지의 생물자원을 활용하여 변수를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는 점. 예컨대 자연계에 흔한 생물독을 그때그때 손쉽게 배양할 능력을 확보해둔다면, 언젠가는 분명 소소하게나마 도움이 될 일이 있을 것이었다.
토독, 톡!
거미가 다시금 글라스를 두드린다. 새롭게 생기는 하얀 자국들은 이전에 생긴 흠집들보다 깊이가 얕고 희미했다. 거미의 체력이 점점 소진되고 있는 것. 생체질량도 처음 보았을 때에 비해 감소한 듯하다. 체내의 양분을 마구잡이로 끌어가는 암세포와 계속해서 분비되는 거미줄, 그리고 지속적인 탈출 시도가 원인일 터.
종에 따라 편차가 크긴 하지만, 거미목에 속하는 생물들은 한 번 배불리 먹고 나면 수개월을 공복으로 버티는 게 가능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즉 곰쥐 한 마리를 통째로 먹어치웠으면 적어도 며칠간은 팔팔하게 움직여야 정상이라는 뜻.
그러나 불사암은 증상이 심해질수록 발병한 개체에게 바닥이 없는 허기를 선사한다. 그리고 그런 허기에 사로잡힌 개체는 자연히 난폭한 식욕의 화신이 될 수밖에 없었다.
최근의 세간에선 이렇게 난폭해진 불사암 말기 각성체들을 다른 고위험 각성체들과 다른 명칭으로 부르는 모양이었다.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는 괴물, 「옴니페이거(Omniphagor/폭식체)」라고.
시간의 흐름에 따른 야생동물 각성체들의 불사암 유병률 증가를 고려해보면 그런 개체들이 특히 더 눈에 띌 때가 되었긴 하다.
이러한 폭식체들의 말로는 모두 동일하다. 먹어도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허기와 고통에 시달린 끝에 결국 남은 생명 모두를 암세포 덩어리에 빼앗긴 시체가 되어버리는 것.
눈앞의 거미는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를 더 버틸 수 있으려나 싶다.
불사암 덩어리와 거미 본체의 상호작용을 관찰하던 나는, 커피를 다 마셔갈 즈음 거미에 대한 관심을 끊고 모니터 화면으로 눈길을 돌렸다.
화면에 띄워놓은 문서의 제목은 이러했다.
「시무식 행사 관련 문서 - 예비 입사자 명단」
내 조직에서 한 해를 여는 시무식은 단순한 허례허식을 넘어선 중요 행사로 간주되었다. 조직원들과 나 사이의 개인적인 계약관계야말로 조직 전체를 결속시키는 중력 그 자체이고, 시무식은 그 계약관계-개인 대 개인의 유대를 주기적으로 재확인하는 절차였으니까.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은 모든 인간관계에 적용 가능한 경구였다.
또한 지난 1년간 새로이 조직에 들어온 녀석들을 조직의 우두머리로서 정식으로 인지(認知)해주는 것도 시무식 자리에서 행하는 일이었다. 조직의 규모가 커지고 또 체계가 확립된 이후로는 내 손을 거치지 않는 인재영입이 큰 폭으로 늘어난 까닭.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대개의 기적은 돈의 힘만으로 행할 수 있다. 누군가의 한을 풀어줄 때 반드시 마법사로서의 내가 필요하지는 않다는 말이다.
‘하나 최종적으로 옥석을 가려내는 건 대체 불가능한 나의 역할이지.’
그런 의미에서 올해의 시무식을 아직 치르지 못한 것은 썩 좋은 일이 못되었다. 비록 중국에서의 사냥이 내게 큰 이익을 안겨주었을지라도, 조직의 기율은 그 이익보다 더욱 중히 여겨야 마땅할 핵심적인 가치였으므로. 런던을 공략함에 있어 어느 쪽이 더 중요한가를 생각해보면 쉽게 깨달을 일이다.
하여 올해의 시무식은 설 연휴를 앞둔 기념행사와 겸하기로 결정했다. 시무식 치고 시일이 다소 늦어지는 거야 별수 없는 노릇. 행사를 치르고 난 다음엔 연휴 내내 마샤트의 동향을 예의주시하며 우리 측의 대응태세를 점검해야 할 것이다. 연휴가 끝난 바로 다음날이 다름 아닌 2월의 세 번째 월요일, 「대통령의 날」이기에.
그날마저 그냥 보내버리면 한동안은 거사를 일으키기 좋은 기념일이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예비 입사자 명단을 꼼꼼하게 읽어 내려갔다.
명단은 단순히 이름만 나열해놓은 것이 아니었다. 신상명세와 영입배경, 가산점 부여 항목, 한동안 함께 활동해본 동료 및 선임 조직원들의 평가 등이 함께 수록되어 있었다.
‘간만에 내부고발자 출신이 다 있군그래…….’
더러운 사회에서 종종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튀어나오곤 하는 내부고발자들은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유형의 원석이었다. 예컨대 일찌감치 고인이 된 경태의 아버지부터가 군대에서 내부고발에 나섰다가 철저하게 외면을 당한 경우였다.
이 사회는 정직하고 충실한 자일수록 도태당하기 쉬운 부조리한 무대다. 그 무대에서 특히 더 가혹하게 내쳐진 자들을 거두어 나에게만 정직하고 나에게만 충실하도록 길들이는 것은 그렇게까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국가와 사회에 대한 배신감이 뼈에 사무친 자들에게 대안적 운명공동체로서의 조직을 제공해주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처음 대면할 때부터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너의 사정을 다 알고 있노라고.
행사가 예정된 기간이 연휴 이전의 사흘이었기에 남은 기간은 고작 아흐레에 불과했다. 내가 기억력이 남다른 편이라곤 하나, 중요한 자리에서 실수가 없으려면 지금부터 짬을 내어 예비 신입들의 상세를 머릿속에 넣어두어야 할 것이었다.
재미없는 책을 읽듯 단조롭게 페이지를 넘겨가기를 약 15분. 화면 한쪽에 화상연결 요청을 알리는 알림창이 떠오른다.
경태 녀석이었다.
“무슨 일이냐?”
요청을 수락하고서 묻자, 모니터 속의 경태가 조금 곤란한 미소를 머금고 입을 열었다.
「시 공무원들이 또 「사유림 공적이용 동의서」를 들고 찾아왔지 말입니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평소처럼 산주(山主)가 자리에 없다고 하고 돌려보내면 될 게 아니냐. 뭔가 다른 사정이라도 있나? 그리고 그걸 왜 네가 보고를 해?”
「그게, 자꾸 소득 없이 돌려보내기만 하니까 이번엔 도지사가 직접 담판을 짓겠다고 찾아왔다지 뭡니까? 방송에 나와서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 현장에서 발로 뛰겠다느니 어쩌니 수시로 떠들더니, 이게 단순한 농담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담당하는 애들도 난처하니까 저한테 물어본 거죠. 일단은 제 아래에 있는 녀석들이니까요.」
“…….”
「하다못해 통화라도 연결해주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겠다고 한다는데……. 지지율은 떨어져도 꼴에 차기 대권주자 중 하나라는 인간이 의정홍보용 촬영 팀까지 끌고 와버린 터라, 무작정 기다리게 하거나 쫓아내기라도 하면 괜히 우리만 미운털이 박히는 게 아닌가 싶더라고요. 앙심을 품고서 “그래 오냐, 너희들을 본보기로 삼아주마.”라는 식으로요. 정치인들 거만하고 소갈딱지 좁은 건 만국 공통이잖습니까.」
“……곤란하게 됐구나.”
나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이 시국에 사유림의 공적이용이라 함은 당연히 공공의 안전을 위한 고위험 수렵활동- 즉 각성체 사냥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사를 비롯해 본사의 중추에 해당하는 시설들이 들어선 사유지는 사업상의 비밀유지를 위해서라도 함부로 외부인에게 개방할 수가 없었다.
하물며 은밀하게 밀입국시킨 위구르인들이 분산 수용되어있는 지금은 더더욱 그러했다. 헌터를 자칭하는 애송이들이 수시로 드나들게 되면 메리옘 그룹은 물론이고 튀뮈르 아지지, 쇼랏 압디카디르, 누르메멧 칸 등을 중심으로 하는 다른 그룹들의 관리에도 지장이 생기고 만다.
이 중에서 튀뮈르 아지지와 쇼랏 압디카디르의 그룹은 망명 위구르인 커뮤니티에 심어 넣을 계획이었다. 그리하여 장차 알림 샤히디가 드높은 명성을 얻었을 때, 위구르인 공동체 내부에서 바람잡이 역할을 하여 샤히디 그룹의 지지기반을 형성토록 하는 것이다.
누르메멧 칸의 그룹은 아직 구체적인 쓸모를 정해두지 않았으나, 쥐고 있으면 쓸 곳은 얼마든지 많은 카드였다.
‘죄다 해외로 보내버릴 걸 그랬나?’
공연히 해보는 생각이었다. 메리옘 그룹은 당분간 내게서 떼어놓을 수 없고, 나머지 그룹들은 관리에 들어가는 인적 비용을 최소화하고자 같이 밀입국시킨 것이니까. 알림 샤히디의 무리야 최대한 빠르게 테러리스트로 완성시켜야 하니 각종 무기와 장비운용이 편리한 해외의 교육장으로 내보낸 것이고.
“내가 직접 통화를 해보지.”
「괜찮으시겠습니까?」
“통화라도 연결해주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겠다고 했다면서? 도지사씩이나 되는 인간이 몸소 행차했으면 이쪽에서도 성의를 보여야지. 애들에겐 번호나 받아서 보내라고 전하도록. 전화는 내 쪽에서 걸겠다고.”
「음, 알겠습니다.」
“용건은 그게 다인가?”
「이거는 그렇구요.」
“또 뭔가 있나?”
「딱히 일이라고 할 것까진 아닙니다만, 그 왜 오늘이 강수혁 팀장 기일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쁘시겠지만, 오후에 수연 누님이 봉안당에 갈 적에 형님께서도 같이 가주시는 건 어떤가 해서요. 작년이랑 재작년에 봤을 때 혼자 가는 뒷모습이 좀 쓸쓸해보였지 말입니다.」
“쓸쓸해? 그 녀석이? 그럴 리가.”
「에헤이, 형님두 참. 그럴 리가라뇨. 누님을 그렇게 모르십니까?」
“…….”
「형님께선 제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현명하고 사려 깊고 지혜롭고 기타 등등 다양하게 우월하신 분이시지만, 가끔 보면 눈에 보이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평범한 것을 놓치시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지 말입니다. 형님의 사격실력만 해도 그거 때문에 일정선 이상으로 못 넘어가는 느낌이고요.」
“……사격술과 사람 보는 안목은 전혀 다르지 않으냐.”
「그러지 마시고 운이나 한번 띄워보시죠. 솔직히 형님 말곤 누님이 달가워할 사람이 없습니다. 저만 해도 강수혁 팀장은 이야기로만 들은 사람이고요.」
“생각은 해보마. 끊는다.”
「옙.」
통화가 종료되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문자로 연락처 하나가 들어왔다. 나는 IP 중계 시스템과 연결된 인터넷 전화기를 들어 문자로 받은 연락처에 전화를 걸었다. 만에 하나 번호가 추적당하는 일을 예방하기 위한 조치였다. 음성변조는 기본 옵션이었고.
분명 상대는 내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을 텐데도, 통화가 연결되기까지는 벨소리 한 루프가 다 돌고도 남을 만큼의 시간이 필요했다. 참으로 유아적이기 그지없는 기 싸움.
전화를 받은 상대의 첫마디는 적잖이 퉁명스러웠다.
「도지삽니다.」
나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날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이쪽 사유림 산주 되시는 분이십니까?」
“실질적으로 그렇다고 봐야지요.”
「실질적으로?」
“회사 이름으로 된 땅이고, 내가 회사의 경영인이자 최대주주이니까요.”
「그렇군요. 이름이 어찌 되십니까?」
“이름을 꼭 밝혀야 합니까?”
「예?」
“의정홍보팀인가 하는 사람들이 촬영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도지사께서도 통화를 녹음하고 계실지 모르고. 이 통화가 어찌 쓰일지 모르니 이름을 밝히고 싶진 않군요.”
「허.」
전화가 우륵우륵 울어댔다. 수화기에 대고 피곤한 느낌으로 한숨을 쉰 도지사는, 거의 아랫사람을 대하는 것에 가까운 어조로 이렇게 내뱉었다.
「선생님. 빨리 나와서 서명이나 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