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의사, 열사, 그리고 테러리스트 (1)
한국으로 돌아온 직후, 내가 기대를 걸고 있었던 1월 18일은 조용하게 지나갔다. 마샤트가 보기엔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날보다는 대통령의 날이 거사를 벌이기에 더 적합했던 모양. 이는 테러의 메시지를 누구에게 보낼 것인가의 문제였다. 미국 시민들인가, 아니면 백악관의 주인인가. 어느 쪽을 고르더라도 양자 모두가 사막의 사람들을 주목하게 될 테지만, 호소의 초점을 어디에 두는가는 거사 이후의 흐름에 크나큰 영향을 미칠 것이었다.
그런 맥락에서 초점을 백악관의 주인에게 맞춘 것은 좋지 않은 선택이었다. 여론이 중요한 싸움에서 보다 직접적인 대결구도를 선택하다니. 좋게 말하면 젊은 나이의 패기라 할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경험이 부족한 지도자의 오판이라 해야 할 터였다.
‘나에겐 오히려 잘된 일이지만.’
조만간 호칭에 전대(前代)가 붙게 될 추장의 용태는 조금씩 나아지기는커녕 하루하루 새로운 악화의 조짐들만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뇌진탕의 후유증이 결국 본격적인 치매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마샤트는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전화상에서 구슬프게 흐느꼈다. 멀쩡한 정신의 추장이 보았다면 미숙하다고 혼을 냈을 일이다. 아무리 할애비의 친구가 상대여도 그렇게 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건 잘못된 처신이라고.
여하간 일이 이렇게 되었으므로 이쪽에서도 준비를 할 시간이 추가로 주어진 셈이었다. 국경 밖으로 몸을 피하는 도망자들을 받아들일 준비를.
멕시코 방면의 사업보고서를 읽던 나는 수연이 가져온 커피를 마시며 말했다.
“슬슬 제독에게 운을 띄워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도망자들의 이송 루트 말씀이십니까?”
“그래. 우리끼리만 진행하다 보면 분명 수상하게 여길 위인이니.”
이는 마르띠네즈 제독의 이야기다. 그는 나와의 거래를 시작한 이래 스스로 공언했던 것처럼 바다에 대한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내 애들이 탄 배가 멕시코 서쪽 해역을 출입할 때마다 반드시 무선으로 들어온다는 인사말이 그 증거. 그 비뚤어진 애국자는 혹여나 자신이 팔아먹은 무기들이 멕시코 땅으로 돌아오지는 않을지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고 있는 것이었다.
‘계급에 비해 영향력이 비정상적으로 강하단 말이지.’
마르띠네즈의 계급인 후제독(꼰뜨라 알미란떼)은 다른 나라를 기준으로는 준장에 해당한다. 객관적으로 볼 때 낮다고 하긴 어려우나, 반대로 아주 높다고 봐주기도 어려운 그런 애매한 계급. 그런데도 그의 영향력은 자신이 맡고 있는 해군 제8해역(ZN-8)을 넘어 멕시코 북서쪽 영해 전반에 미치고 있었다.
그와는 단 한 번 대화를 나누었을 뿐이지만, 철철 흘러넘치던 증오와 독기는 뇌리에 아직도 또렷하게 남아있다. 그 심지를 감안하면 그가 제독에 오르기까지 온갖 시련과 우여곡절이 있었을 게 뻔하다. 보나마나 제독의 호칭을 얻고 나서도 여러 번의 진급누락을 당했겠지.
그렇다면 그를 개인적으로 추종하는 무리가 있다 한들 이상할 것이 없다. 어쩌면 계급을 초월한 호의로서 하급자를 대하는 상급자가 있을지도 모르고.
짐작컨대, 그의 감시능력을 뒷받침하는 것은 아마도 미국과 멕시코가 합동으로 구축한 해상감시체계의 존재일 것이었다. 멕시코 서쪽 바하칼리포르니아 반도 연해는 시날로아 카르텔의 잠수정들이 빈번하게 오가는 더러운 바다니까.
그간 마르띠네즈가 목격한 내 배는, 일단은 「사파이어 익스프레스」 외엔 한 척이 더 있을 뿐이다. 그간의 거래는 고작 3회가 이루어졌을 따름이고, 이는 두 척의 배가 피스톤 수송으로 감당 가능한 일정이자 물량이었으므로.
그러나 그가 소속 선사를 조회하여 확인했을 내 조직 소유의 배는 그 외에도 세 척이 더 있었다. 원주민 도망자들을 실어 나르는 데 있어서 도합 다섯 척이나 되는 배가 감시를 받는다는 건 생각보다 많이 불편한 일이었다. 다른 해역에서 활동하는 선단들도 각각의 일정과 운영계획이라는 게 있는데, 무턱대고 배치를 변경하면 필연적으로 상당한 손해가 뒤따르게 된다.
게다가 수송 도중에 단속을 당할 가능성까지 고려하면 아예 처음부터 제독의 협력을 구하는 편이 이익이라는 게 내 판단이었다. 다름 아닌 미국의 지명수배자들을 도피시키는 일이니, 미국의 시스템을 이용 가능한 협력자를 두어서 나쁠 것은 없지 않겠는가?
수연이 내 이야기에 동조했다.
“확실히, 우리가 카르텔과 거래를 하고 있다는 인상을 줘선 곤란하겠습니다.”
“받아들일 것 같나?”
“제독으로선 거절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잖아도 취급하는 상품의 품목 부족으로 고민이 많을 텐데, 우리 쪽에서 먼저 다른 선택지를 제시해주는 것이니까요. 그 상품이 미국의 수배자들이라는 건 미국을 싫어하는 제독이 오히려 반가워할 요소지요. 다만…….”
“다만?”
“아직은 근거가 없는 풍문에 불과하여 보고서에 싣지 않았습니다만, 신임 시장 페드로 산토스 산체스와 그 지지자들의 모임 「후앙의 군대(Falange de Juan)」가 출처불명의 정치자금을 지원받고 있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습니다.”
“출처는?”
“현지에서도 찌라시로 유명한 몇몇 타블로이드지들입니다. 단지 여러 지면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다뤄진 이야기인 만큼, 정치적 반대세력의 견제구를 넘어서는 진실을 담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흠…….”
배불뚝이 페루쵸, 페드로 산토스 산체스. 그리고 내 위장신분의 죽음이 남긴 나비효과의 결과물, 후앙의 군대. 이 둘의 이름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내 귀에 들어온다. 이런 종류의 흔적을 남기는 걸 강박적으로 싫어하는 나로서는 은근히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었다.
수연이 굳이 이 내용을 알리는 이유는 길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넌 그 자금이 제독에게서 나왔을지도 모른다고 보는 거냐? 내가 지불한 대금의 일부가 제독을 거쳐 페루쵸에게 흘러들어가고 있을지 모른다고?”
“다소 비약적인 추측이긴 합니다만, 예. 카르텔을 싫어하고 기존 정계의 부패에 염증을 느끼는 제독이라면, 카르텔의 횡포에 딸을 잃어버리고서 정계에 진출한 신임시장에게 남다른 기대를 걸어볼 수도 있으리라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이 같은 투자엔 아직 후원자가 없는 시장을 회유함으로써 푸에르토 바야르타를 확고한 자신의 영역으로 삼을 수 있다는 이점도 있습니다.”
“사실이라면 조금 곤란하겠군.”
나는 페루쵸가 자연히 도태당하리라 기대하고 있었다. 멕시코처럼 부패한 제3세계 국가에서, 힘없는 시민들의 지지 외엔 이렇다 할 배경이 없는 신출내기 정치인이 버텨봐야 얼마나 버틸 수 있겠는가 하고. 기존 정치판의 터줏대감들에게 일방적으로 이용당하다가 이용가치가 떨어지면 곧바로 삶아지지 않겠는가 하고.
이는 내가 페루쵸의 생사를 두고 고민할 적에 수연이 내놓았던 예측이기도 했다.
“죄송합니다.”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이는 수연.
“제 불찰로 형님께 불편을 끼쳐드리게 되었습니다.”
“되었다. 의견은 네가 내었어도 결국은 내가 결정을 내린 사안이야. 그러니 책임이 있다면 나에게 있는 것이겠지. 무엇보다, 당시의 네 의견이 그만큼 타당한 것이기도 했어.”
“…….”
“이렇게 떠들어봐야 결과론적인 이야기다. 공연히 자책하지 말도록.”
“예.”
“허리 펴고.”
“예.”
나는 따뜻한 커피잔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시장이 된 페루쵸에겐 그 나라에서 정치를 하는 데 필수라고 해도 좋을 「멕시코의 기름」이 부족했었다. 이제와 그 기름을 아낌없이 부어줄 후원자가 나타났다면, 정치인으로서 그가 누릴 수명이 현격하게 길어질 확률이 높았다.
‘어쩌면 정계의 혼란을 틈타 의외의 거물로 성장할 수도 있겠군.’
현 멕시코 정계는 여당 일각과 야당들의 심각한 비협조로 반신불수나 마찬가지인 상태에 빠져있었다. 영국을 중심으로 한 「FPDA+1」 치안유지부대를 대통령과 여당 지도부의 암중합의만으로 받아들인 후폭풍 때문.
자력으로 치안을 회복하기 어렵게 된 국가가 타국의 군사적 지원을 받아 상황을 정리하는 것은, 알고 보면 국제사회에서 의외로 빈번하게 일어나는 사건이다. 그러나 그런 경우, 실질적으로 단일국가에 의한 파병일지라도, 보통은 UN 안보리의 승인을 얻어 평화유지군 딱지를 붙이고 들어오는 게 정상이었다. 여기에 중립국 관전무관들이 붙어 감시를 수행하면 국제적 연대에 의한 군사행동이라는 명분이 갖춰지는 것.
그러나 「FPDA+1」의 치안유지부대 파병은 이러한 국제관례를 싸그리 무시한 사건이었다. 일단 그들의 외교적 지위부터가 절대로 UN과 같을 수가 없다. 그러니, 멕시코 내부에서는 대통령과 여당 지도부가 국가의 위신을 똥통에 처박았다는 비난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단지, 그 위신이라는 게 원래부터 있기나 했는지는 의문이다. 멕시코는 이미 한참 전부터 외국의 사법요원들이 국내를 활보하도록 허용해놓은 국가였으니까. 미국 마약단속국(DEA)만 해도 80년대부터 멕시코 내에 지부와 무장요원들을 두고 활동해오지 않았던가.
페루쵸, 페루쵸라…….
‘정 거슬리면 내가 다시 가서 죽여 버리는 수도 있지.’
대마법사가 몸소 나서서 암살을 하는데 누가 있어 막아낼 수 있을까. 부패한 국가에서 개혁을 외치는 정치인은 원한을 살 일이 많은 법. 가뜩이나 그 나라는 정치인들이 카르텔의 손에 살해당하는 게 일상인 마경이므로, 배불뚝이 신참자의 죽음에 분노를 할 사람은 많아도 의문을 품을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었다.
아니면 불사암을 유도해서 간접적으로 죽이는 방법도 있고.
생각을 정리한 내가 말했다.
“제독과의 신규 협상은 네가 알아서 팀을 꾸려라.”
“알겠습니다.”
“파키스탄으로 가는 배는 순항중인가?”
“예. 알 까심 측에서 카라치로 마중을 나오겠다 했으니 예상보다 협상이 빠르게 시작될 듯합니다.”
“잘됐구나.”
사무적인 대화를 나누며 전자보고서의 페이지를 넘기자 광저우의 경독들이 보내온 정보가 눈에 띈다. 개중엔 가오슈센 부서기가 「핀윈줘」에서의 접대 이후 내 체모와 체액, 지문 등을 채취하려다 실패하여 적잖이 당황했다는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었다. 린페이와 동침했던 호텔까지 뒤졌는데도 성과를 얻지 못해 아랫것들을 크게 질책하였노라고.
지문을 숨기는 건 내게 썩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손에 얇은 염동력 피막을 씌우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체모와 체액을 처리하는 건 그보다 더 쉬운 일이었다. 체모와 체액을 아예 없애지는 못할지라도, 보이지 않는 마력을 투사하여 DNA구조를 변형 내지 파괴해버리면 채취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어줄 수 있었다. 본디 내 육체에 속하였던 유기물들은 내 시야에서 다른 것들과 뚜렷하게 구분되는 색채를 품고 있기도 했고.
몇 장을 넘기니 린페이에 대한 보고가 짤막하게 실려 있다.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사진과 영상을 첨부하여 알려오고 있음. 정황상 자신에 대한 의심을 불식시키려는 의도로 해석됨.」
갸륵한 정성이군. 매일같이 “보세요. 저는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지 않습니다.” 하고 보고라도 하는 건가.
그래봐야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 그만두게 될 것이다. 제풀에 지쳐서라도, 혹은 몸이 멀어진 만큼 마음이 멀어져서라도.
‘오히려 다른 남자들과 뒹굴어주지 않으면 곤란하단 말이지.’
무릇 미인의 정보력과 영향력이란 침대 위의 노동으로부터 비롯되는 것. 따라서 린페이에게 있어서의 나라는 존재는 하나뿐인 소중한 상대이기보다 여러 남자들 가운데 가장 가치 있고 중독적인 하나인 편이 유익했다.
그리고 나는 그녀가 조만간 다른 사냥감을 물색하기 시작할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같은 상품을 여럿에게 팔아 자신의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하여. 그리고 내 마음이 틀어질 경우를 대비한 보험을 들어두기 위하여. 마지막으로, 쾌락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기 위하여.
내가 린페이에게 새겨준 쾌락은 통상적으로는 닿기 불가능한 영역에 있는 것이니, 지금쯤 그녀가 금단증상에 시달리고 있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쾌락을 찾는 과정에서 진짜 마약이나 건드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중국은 일반적으로 마약범죄에 엄격한 나라라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절반의 진실에 불과했다. 사형을 선고받는 건 마약을 제조하거나 유통한 자들뿐. 마약을 휴대하거나 투약한 사람에 대해서는 최대 15일의 행정구류와 2천 위안(한화 약 34만 원)의 벌금이 부과될 따름이다. 소지 및 투약에 대한 처벌은 오히려 세계적으로 가벼운 축에 드는 것.
이렇게 처벌이 가벼운 이유는 간단하다.
높으신 분들의 자제들이 마약에 손을 많이 대기 때문이다.
광둥성은 중국 내 마약유통의 중심지이므로, 린페이가 마약에 손을 대기도 그만큼 쉬운 환경이었다. 일단 마약에 손을 대고 나면, 사랑처럼 같잖은 화학적 작용은 보다 강력한 마약의 작용에 삼켜지기 마련.
내가 생각하기에, 이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남녀 간의 사랑이란 딱 그 정도의 감정에 지나지 않는다.
아닌 사람들이 이상한 거지.
비범한 것이거나, 미쳐버린 것이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