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172화 (172/561)

#20. 열대의 짐승들 (12)

각성체 코끼리의 맹렬한 돌진이 열대의 밀림을 선형(線形)으로 초토화시켰다. 비록 각성수들을 피해 구부러지는 선일지라도 인간 따위가 항거할 수 있는 힘은 아니었다. 술타나의 사람들은 몰이꾼과 라스카르를 불문하고 하나같이 기가 질려 몸을 피하기에 바빴다.

그나마 용기 있는 일부가 분분히 물러나는 와중에도 뒤를 돌아보며 사격을 가하였으나, 그래봐야 전투 코끼리의 두꺼운 장갑 위에서 무의미한 불꽃만 튀길 따름이었다. 빛나는 예광탄 줄기들을 마구잡이로 도탄시키는 전투 코끼리는 이 순간 신화적인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Menghindarkan diri! Cepat!”

누군가가 뒤쪽으로 손짓하며 황급히 내지르는 소리. 술타나 측의 방어전면이 삽시간에 지리멸렬하게 흐트러진다. 각성능력자들이 제6의 감각으로 느끼는 전투 코끼리의 존재감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해일과도 같은 것이었다. 시각적인 충격만 감당하면 끝인 일반인보다 압도당하기 쉬운 측면이 존재하는 셈.

그래서 코끼리 기수는 내 애들의 침착한 대응에 조금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이 새끼들은 뭔데 겁을 안 먹지? 하는 느낌. 그러나 대마법사의 존재감에 익숙한 내 부하들이 새삼스럽게 각성체 코끼리의 마력장에 겁먹을 이유는 없었다.

까강, 깡!

미리부터 준비되어있던 예비대의 사격이 기수에게로 집중된다. 스스로 움직일 필요가 없어 탈것과 비슷한 수준으로 중장갑을 두른 기수였으나, 장갑 아래의 몸뚱이까지 탈것 같지는 못하였으므로 초음속 중량탄 세례를 포함하는 집중사격이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다양한 구경의 탄자가 전신을 두들겨대는 아픔. 특히 니트로 익스프레스는 꽂히는 자리마다 시퍼런 피멍이 찍히도록 만들었다. 탄두가 둥글어 관통은 못할지언정 펀치력 하나는 독보적인 것. 이에 몸을 웅크린 기수는 무전기를 쥐고 신경질적으로 윽박질렀다.

“Jahanam! Datanglah segera jangan ayal, banci!”

대충 분위기를 보니 뒤쪽에서 몸을 사리는 놈들을 불러들이는 외침인 모양이지만, 그렇게는 두지 않는다. 나는 쉴 새 없는 저격으로 최대한 광범위한 제압을 유지하고자 했다. 적의 전진을 완전히 차단하지는 못하더라도 부하들에게 시간을 벌어줄 순 있을 것이었다.

펑! 수연의 사격에 기수가 쓰던 지휘용 무전기의 본체가 박살났다. 이런 줄도 모르고 수화기에 소리를 질러대던 기수는, 한 박자 늦게 부서진 본체를 확인하곤 화를 내며 수화기를 집어던졌다. 그러더니 좌석 측면, 장갑으로 방호되는 수납공간으로부터 40밀리 유탄발사기(M79)를 끄집어냈다.

투웅-!

금속성으로 울리는 특유의 발사음. 그러나 유탄은 엉뚱한 방향으로 튀어나가 아무도 죽이지 못하는 폭발을 일으켰다. 발사 직전 수연의 차탄 사격으로 조준이 틀어진 탓이었다. 높은 나무 위에서 내리꽂는 저격은 보다 낮은 위치의 기수를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었다. 세 번 연속으로 재장전에 실패한 기수는 제 부러진 손가락을 보며 울화통을 터트렸다.

‘이러니까 전차를 먼저 들이밀지 않는 건데.’

중장갑 코끼리의 역할은 주력전차와 유사했다. 그리고 시가지나 밀림처럼 장애물이 많은 환경에서 전차가 홀로 돌출하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때문에 보통은 보병의 엄호하에 전차를 전진시키거나, 강렬한 포화로 장애물을 초토화시키면서 나아가는 게 원칙이다.

지금의 저들은 다만 코끼리의 가공할 힘 덕분에 버티고 있을 뿐. 짤막한 상아에 기다랗게 벌어지는 칼날을 끼운 코끼리는 고개를 흔드는 것만으로도 반경 2.5미터의 부채꼴 살상지대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평범한 나무는 굵기가 얼마이든 칼질 한 번에 토막 치는 위력이라, 사람이 칼날에 닿을 때면 방어구의 유무와 무관하게 두 쪽으로 갈라졌다.

이런 칼질을 1초에도 여러 번 해내는 게 강화계수 10을 넘기는 각성체 코끼리의 육체능력이었다. 훙훙 후웅 휘두르는 소리가 날 때마다 칼날에 밀린 바람이 주변 수목의 가지들을 흔들었다. 공기의 일그러짐이 통상시야로도 보일 지경이다.

빠우우우우-!

난폭하면서도 영리한 동물답게, 기수의 고통을 인지한 코끼리는 각종 장애물에 의지하며 보다 저항이 약한 쪽으로 파고들려 들었다. 다름 아닌 술타나가 버티고 있는 방향으로. 기다란 코에 사로잡힌 라스카르 하나가 압착기에 넣은 과일처럼 으스러진다. 코끼리가 쓴 안면장갑에 붉은 핏물이 쫙 튀면서 한 폭의 흉흉한 현대미술이 완성되었다.

내가 보기에 이 맹수는 사기 개념을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람이 쓰는 언어를 종류별로 구분할 만큼 영리한 동물이니 그 정도 잔머리를 굴리기가 어려운 일도 아닐 터.

무전망에 경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눈을 쏴, 눈을! 뚫지 못해도 좋으니까!」

노리는 건 기수가 아니라 코끼리의 눈이었다. 전투 코끼리의 눈은 두께가 무려 10센티나 되는 알루미늄 유리로 보호받고 있었으므로, 니트로 익스프레스가 아니라 철갑탄을 장전한 대물 저격총을 가지고 오더라도 뚫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러나 경태가 바라는 건 탄흔을 찍는 것이었다. 하얗게 찍히는 탄흔으로 시각을 차단해버리면, 장님이 된 코끼리는 절대로 지금과 같은 폭력을 행사할 수가 없다.

최선을 다한 나의 광역제압에도 불구하고, 술타나 쪽의 화망이 뭉개지면서 적의 전진이 본격화되었다. 나는 각성수의 소행으로 위장한 물안개를 일으켜 연막차장을 대신했다. 이제 수연의 역할은 나에 대한 근접경호로 전환되었다. 안개를 넘어오는 놈들을 신속한 사격으로 쏴 죽이는 것.

농밀한 안개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야 바깥이 알 바가 아니었으니, 나는 마력을 태우는 불로 가깝게 침투하는 적들의 시야를 교란했다. 이는 수연에게 안개 속 적의 위치를 보여주는 감적의 일환이기도 했다. 이 정도의 술식 투사는 대마법사의 존재감을 노출시킬 필요가 없었다.

빠웃! 뿌우우우-

전투 코끼리가 제자리에서 거칠게 머리를 흔든다. 경태의 노림수가 적중하여 시야가 탄흔에 가려진 것이다. 이렇게 되자 술타나의 부하들도 전열을 재정비했다.

콰콰쾅!

술타나의 몰이꾼들이 몰이용으로 휴대한 다이너마이트들의 폭발. 이러한 폭발들이 중장갑을 뚫고 직접적인 타격을 주지는 못하였으되, 눈이 보이지 않는 코끼리가 신경을 곤두세운 채 뒷걸음질을 치도록 만들 수는 있었다. 공업용 폭발물이 터지는 굉음은 강화된 고막으로도 견디기 힘든 괴로움이고, 장갑 위를 때리는 충격파는 총탄의 피격과 격이 다른 위협이었으므로.

이렇듯 전투 코끼리의 기세가 죽자, 가깝게 육박해오던 적들의 움직임에도 곧바로 제동이 걸리게 되었다. 목숨 아까운 자들이 재차 눈치를 보며 몸을 사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에 쐐기를 꽂은 게 바로 기수의 추락이었다.

콰앙!

심지를 짧게 잘라 점화한 다이너마이트가 공중에서 폭발하자, 폭압을 지근거리에서 얻어맞은 기수가 악 소리를 내며 굴러 떨어졌다. 이때 측면으로 늘어진 고삐, 케블라 로프를 붙잡고 버티려 든 게 결정적인 실수였다.

쿠쿠쿠쿠쿵!

고삐가 한쪽으로 당겨지자, 눈이 보이지 않는 코끼리는 제 꼬리를 물어뜯으려는 개처럼 미친 듯이 제자리에서 회전했다. 결국 몇 초 버티지 못하고 줄을 놓쳐버리는 기수.

“Unang!”

외마디 비명을 지른 기수는 곧 지대를 평탄화하는 질량에 찍혀 명을 달리했다. 콰직 콰직 찌그러지는 갑주와 그 사이에 끼어 터지고 으스러지는 육체. 각성능력자의 몸뚱이가 질기고 튼튼하다 한들 장갑차 무게의 광란 아래에선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죽어서 마력회로가 증발한 다음에는 더더욱 그러했고.

우득-! 으지직-

깊게 함몰되었던 방어선이 정상을 되찾아가는 가운데, 코끼리가 제 코로 안면장갑을 붙잡아 뜯어내기 시작했다. 눈이 보이지 않는 게 어지간히 답답했던 모양. 마침내 코끼리의 한쪽 눈이 불완전하게나마 바깥을 보게 되었을 때, 그 시선의 연장선상엔 5미터를 뛰어오른 경태의 모습이 있었다.

“죽어!”

맹렬하게 던져진 폭탄투창이 전투 코끼리의 관자놀이에 명중한다.

거의 동시에 경태의 대퇴부에서도 붉은 피안개가 피어올랐다.

“……!”

망할. 난 순간적으로 뒷골이 서늘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폭탄투창의 성형작약이 터지며, 집중된 폭발압력이 코끼리의 골통을 꼬챙이처럼 뚫고 들어갔다. 뼈가 부서지며 만들어진 자잘한 파편들이 무른 뇌를 엉망진창으로 헤집어놓는다. 그럼에도 뇌 용적이 커다란 코끼리는 단번에 절명하지 않았다.

「부상자 발생! 경호실장 피격!」

나는 반 박자 늦게 들어오는 보고에 날카롭게 반응했다.

“데려와! 빨리!”

경태의 부상은 심각한 것이었다. 문외한들은 허벅지에 탄을 맞는 걸 우습게 알지만, 대퇴부의 동맥이 끊어지면 빠르게 조치하지 못할 경우 그대로 죽는다고 봐야 한다. 게다가 대퇴골까지 손상되어 주변부의 출혈까지 심한 상태.

널브러져 죽어가는 코끼리 위로 반격탄이 날아갔다. 경태를 쏜 사수가 피를 뿜으며 쓰러진다. 총을 내려놓은 수연은 나무 아래의 부하가 던져주는 경태를 붙잡아 내 옆으로 짐짝처럼 끌어다놓았다. 그러곤 허리춤에 차고 있던 트라우마 키트를 펼쳐놓는다.

“아욱! 누님. 살살 좀-”

“시끄러워. 그런 짓은 부하를 시켰어야지.”

“하지만 솔선수범이라는 게 있잖습니까.”

“잊은 것 같은데, 넌 형님께 우선순위가 높은 자산이야.”

“그건 그렇죠. 제가 형님께 좀 중요한 사람이긴 합니다.”

살아있는 주둥아리와 달리, 경태의 안색은 벌써부터 백짓장 같았다. 한창 전투흥분상태였던 각성능력자의 심장이 부상 직후 피를 세차게 밀어낸 까닭이었다. 이를 깨달은 경태가 제 신체강화를 억제했으나, 이미 비정상적으로 많은 혈액이 빠져나간 다음이었다. 그리고 각성능력자라고 해서 혈액량이 많은 것은 아니다. 잃어버린 피를 복구하는 속도가 빠를 뿐.

탄성으로 인해 말려들어간 혈관을 찾으려면 핀셋으로 상처 깊숙한 곳을 헤집어야 했다. 손을 거의 쑤셔 박다시피 해야 하는 수준. 회로 출력을 넉넉하게 쓸 수 있는 상황이었으면 경태의 마력장을 중화하고 염동력으로 혈관을 끌어내어 「생명」 술식으로 접붙였겠지만, 지금은 내 마력장을 각성수의 마력장보다 크게 전개할 수가 없는 처지였다.

그나마 탄이 깨지지 않고 다리를 관통한 건 불행 중 다행이라 하겠다.

“모르핀.”

술타나의 무기고에 보관되어 있었던 트라우마 키트는 한 세대 이전에 나온 미군의 의무병과 보급품이었다. 당연히 우리 조직이 많이 취급해본 상품이기도 하다. 내 지시에 수연이 모르핀 마개를 따자, 경태가 손을 내저었다.

“그냥 참겠습니다. 벌 받는 셈 치고.”

“……알았다.”

마약성 진통제는 가급적 맞지 않는 편이 좋기는 했다. 모르핀을 갈무리한 수연이 제 손수건을 둘둘 감아 경태의 입에 밀어 넣었다. 입 막힌 경태가 엄지를 치켜든다. 깨끗한 물을 모아 손을 씻고 마력을 태우는 불로 도구를 살균한 난, 속으로 고개를 저으며 수연에게 지시했다.

“너는 이제 지휘를 맡아라.”

“예.”

끄후우우우우-! 경태의 막힌 입에서 억눌린 비명이 터져 나온다. 내가 거침없이 핀셋을 쑤셔 박은 탓이었다. 그나마 황금기의 눈이 있어, 혈관의 잘린 단면을 잡아내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다. 평범한 의사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멸균 식염수로 피를 씻어내며 손끝의 감각에 의지해 한참을 헤매었을 것이다.

최소한의 마력 운용으로 다섯 호흡 만에 잘린 혈관을 접붙인 난 이어서 뼈와 근육, 신경손상, 혈류량까지 회복시키는 데 전념했다. 목표는 전투가 끝나기 전에 이 중상을 후유증이 남지 않을 만큼의 경상으로 호전시키는 것이었다. 마력운용의 한계치가 명백한 데다, 술타나의 사람들 중에도 경태의 피격을 목격한 자들이 많을 터라 완치를 시키고 싶어도 시킬 수가 없었다.

흐으으으…….

근 1분여에 걸쳐 가장 고통스러운 고비를 넘긴 경태가 맥 빠지는 숨소리를 흘린다. 기운 없는 손길로 물고 있던 손수건을 빼낸 녀석이 누운 채로 고개를 숙이는 시늉을 했다.

“감사합니다, 형님.”

“됐으니까 다음에나 조심해라.”

“옙.”

총성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방어전이 어느새 추격전으로 전환된 까닭이었다. 한정된 마력량에 맞게 즉석에서 「생명」의 코드를 최적화하며, 나는 경태를 치료하는 데 최선의 주의를 기울였다.

정말이지, 하마터면 아주 큰 손해를 볼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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