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171화 (171/561)

#20. 열대의 짐승들 (11)

정체불명의 적들은 이 순간에도 규모가 불어나는 중이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충분히 붙어볼 만한 전력차였다. 시야는 제한되고 감각은 교란되는 환경에서, 바깥에서보다 가시범위가 축소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반경 삼백 미터를 투시하는 황금기의 눈은 나와 내 애들에게 크나큰 전술적 우위를 부여한다.

그리고 사수로서의 나 개인은 수백 장의 이파리를 뚫고 저격을 해내는 비대칭 전력이다. 단 한 명의 저격수가 때로 한 개 사단의 발을 묶듯이, 내가 날리는 저격탄은 적의 움직임을 광범위하게 둔화시킬 수단이었다.

툭, 투둑.

갑작스럽게 쏴아아아- 쏟아지기 시작하는 열대의 소나기. 굵은 빗줄기들이 온갖 활엽수와 야자수들의 이파리를 때리며 요란한 소음을 만들어냈다. 태양이 지평선을 기웃거리는 시점이었으므로 길어봐야 일이십 분 쏟아지고 말 짧은 강우였다.

내가 물러서지 않을 것을 알기에, 경태는 적과의 접촉에 앞서 내 위치부터 입에 담았다.

“형님께선 누님이랑 같이 저 나무 위로 올라가 감적(監敵)이랑 저격, 그리고 전반적인 상황통제를 해주시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세부적인 지휘는 제가 맡고요.”

감적은 적의 위치를 확인하여 아군에게 전달하는 역할이다. 보통은 저격수와 쌍을 이루는 감적수가 있어 바람의 방향과 세기, 표적과의 거리, 탄의 예상 낙차 등을 계산하여 저격수에게 전달해주지만, 내가 행하는 감적은 문자 그대로 적을 감지한다는 의미로서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조기경보에 가까웠다.

저격이든 감적이든 하는 자리는 높을수록 좋다. 그래서 경태가 지목한 장소란 앞서 호랑이가 몸을 숨겼던 바로 그 각성수 위였다.

“어떻습니까?”

경태가 재차 물어보기에, 나는 가볍게 끄덕여주었다.

“알았다. 다치지 않도록 조심해라.”

“옙.”

“부상자가 생기거든 곧바로 데려오고. 한 명이라도 죽으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야.”

“알겠습니다.”

죽은 식인호랑이가 마력을 품은 나무에 올라 스스로의 마력장을 은닉했던 것처럼, 나 또한 내 존재감을 숨긴 채 제한적인 종류의 마법을 제한적인 위력으로 행사할 수 있을 것이었다. 예를 들어 물을 다스리는 거인의 술식을 각성한 나무의 조건반사로 위장한다거나, 수관의 사각지대에서 「생명」을 사용하는 등.

나는 짐꾼이 지고 온 탄약 상자를 수관의 중심으로 올렸다. 굵은 가지들이 전 방위로 갈라져 이루는 수관의 가운데, 맹수가 몸을 뉘었던 오목한 자리는 두 사람이 넉넉하게 자리를 잡을 공간이었다. 통역인 크툿은 경태와 함께 가까운 위치에 자리 잡았다.

이 시점에서 적아의 간격은 백 미터 이하까지 좁혀졌다. 난 당장이라도 적 선두그룹을 노려 방아쇠를 당길 수 있었다. 그러나 정말로 그랬다간 몇 분간에 걸쳐 나 혼자만 공격을 가하는 처지에 놓일 것이었다. 내 저격에 노출된 적들은, 아군 경계선과 접촉하기까지의 수십 미터를 그야말로 굼벵이처럼 기어오는 수밖에 없을 터이기에.

고로 첫 저격탄을 날리는 건 교전이 개시된 이후여도 늦지 않다. 원래는 인내가 다한 적들이 접근을 개시한 순간 드론부터 격추시켜야 했겠지만, 세차게 쏟아지는 비는 드론의 비행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악천후였다.

뻔히 눈에 보이는 놈들의 접근을 방관하기를 잠시. 이쪽 진영의 전위를 맡은 몰이꾼들은, 남은 간격이 30미터 이하로 줄어들고서야 간신히 적의 선두를 포착했다.

“Tembak sesuka hati!”

카카캉! 드디어 울려 퍼지는 최초의 총성. 거친 빗발 사이로 금속성의 소음이 메아리친다. 직후, 종으로 쏟아지는 물빛 폭우 아래 횡으로 그어지는 철갑탄의 빗발이 더해졌다.

몰이꾼들의 주된 무장은 군에서 흘러나왔을 낡은 이탈리아제 자동소총(BM59)이었다. 흠집 가득한 목제 개머리판만 봐도 벌써 수명이 다한 총기들이었으되, 수십 미터 이내의 교전거리에선 명중률을 따지는 게 무의미했다. 각성체, 또는 각성자를 죽일 위력의 총탄을 연발로 갈길 수만 있으면 충분한 것이다.

콰앙!

총구 가까운 빗방울들이 충격파에 흔들린다. 다음 순간 내가 노린 표적의 이마가 핏빛으로 폭발했다. 0.7인치 니트로 익스프레스는 사람에게 쏘기엔 지나친 과잉화력이었으므로, 착탄을 목격하는 적들에게 그만큼의 충격을 선사할 수 있었다. 한 발 한 발이 머리통의 반절을 부숴버리는 폭력. 경악한 주변이 반응하기도 전에 나는 또 하나의 인생을 속사로 끝내주었다. 대가리가 터진 자리마다 창백한 공포가 번져나간다.

이 공포야말로 이 순간의 내게 주어진 으뜸 패였다. 전 방위에 걸쳐 고르게 머리통을 깨주는 것만으로도 적 전반의 실질적인 화력이 급격하게 감소했다. 거북이처럼 머리를 집어넣은 적들은 이제 엄폐물 밖으로 총만 내놓고 총질을 해대었다.

쾅!

내가 조준한 사선 끝에서, 엄폐물 위에 총을 걸고 3점사를 당겨대던 손가락이 끊어진다. 이쪽으로 불을 뿜던 소총이 부품 단위로 박살나 흩뿌려지는 모습. 손가락을 잃은 놈은 그 상태로 몇 초간 멍하니 굳어 있다가, 피투성이가 된 손을 감싸 쥔 채 침과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눈에 들어오는 족족 추가로 손가락들을 끊어주니 적의 사격이 더욱 방어적이고 부정확하게 변모한다.

공자와 방자가 역전된 것만 같은 느낌이다.

‘베트남이 따로 없군.’

월남전의 전장이었던 열대우림에서, 미군은 베트콩 하나를 죽이기 위해 평균적으로 2만 5천 발의 실탄을 소모했다. 그러나 동일한 조건에서 저격수들에게 필요했던 실탄의 양은 고작 1.3발에 불과했다.

2만 5천 대 1.3.

지금의 적들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격차는 이보다도 훨씬 더 클 것이었다.

간혹 초고분자 폴리에틸렌 방탄방패에 의지하여 튀어나오려는 용감한 적들이 있었으나, 전신사이즈 방패를 가지고도 모든 각도를 완벽하게 방어할 순 없는 법이었다. 내가 화력을 할애할 것도 없이 경태와 경태 이하의 집중사격으로 정리된다.

“Jangan mundur, maju terus! Ke muka! Ke muka!”

장비만 봐도 간부급인 놈이 겁에 질린 부하들에게 총구를 들이대며 위협하는 광경이 보인다. 빨리 나아가라고 재촉하는 모양새. 악을 쓰는 소리가 다 들릴 만큼 거리가 가깝지만, 장애물로 인해 도무지 골통을 깰 사각(射角)이 나오질 않는다.

부하들을 저딴 식으로 다루는 조직 치고 견실한 조직을 본 적이 없는데 말이지.

꾸준히 다른 표적들을 쏘며 기회를 노리던 나는, 찰나 간 엄폐물 밖으로 나온 방탄투구 끄트머리를 조준하여 방아쇠를 격발했다.

콰앙!

불티가 튄다. 초음속 중량탄의 펀치력은 투구 모서리를 치는 것만으로도 목이 돌아가는 충격을 줄 수 있었다. 전혀 대비하지 못하고 있던 충격에 비틀거리는 표적. 이로써 머리가 더 드러나는 순간 나는 곧바로 차탄을 때려 박았다. 캉! 하는 울림과 또 한 차례 튀는 금속성의 날카로운 불꽃들. 지정사수 소총으로 쏘는 철갑탄도 거뜬히 막을 만큼 두꺼운 풀 커버 방탄투구는, 그러나 해머로 후려친 것처럼 푹 들어가 주인으로 하여금 불길한 코피를 흘리도록 만들었다. 골수가 진탕이 된 표적은 균형감각을 상실하여 네 발로 기는 짐승이 되었다.

철컥. 개방된 약실에서 탄피가 솟고 초연이 올라온다. 난 재장전을 마친 즉시 네 발 짐승의 몸통을 2연발 속사로 두들겼다. 둥그스름한 탄두가 꽂히는 자리마다 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러진다. 짐승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평균 이상으로 두꺼운, 각성 능력자 특유의 방어구가 도리어 고통만 늘려주는 상황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이 표적을 본보기삼아 집요한 잔혹함을 투사할 수 있었다.

흙이 거칠게 부서졌다. 필사적으로 기어 다시 몸을 숨기려던 짐승은, 바로 눈앞의 땅을 부수는 탄에 겁먹곤 엉엉 울면서 도망치는 방향을 바꾸었다.

패닉에 빠진 짐승이 엄폐한 부하들을 향해 손을 뻗는다.

“Tolong! Tolong!”

저게 도와달라는 뜻이었지, 아마?

나는 짐승이 뻗은 손을 터트렸다. 또 한 차례 터져 나오는 비명. 핏물이 빗물에 씻겨나가면서 날카롭게 부서진 뼈가 드러났다. 달랑거리는 새끼손가락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하다. 웅크린 부하들은 보이지 않는 창살 속의 상급자를 도우려 들지 않았다. 그저 잔뜩 졸아든 눈으로 바라보고만 있을 따름.

뜨거운 열대의 우기에 방어구를 껴입는 건 괴로운 일이다. 각성한 능력자라도 더위가 괴로운 건 마찬가지니까. 그래서 네발짐승의 방탄 방어구는 머리와 몸통을 단단히 감싼 게 전부였다. 고로 사지를 노리면 금방이라도 끝장을 낼 수 있겠으나, 내겐 이 짐승을 죽일 마음이 없었다.

우측 아킬레스건을 끊는 사격을 마지막으로, 나는 짐승에 대한 관심을 거두었다.

‘비명을 지르는 살아있는 스피커 노릇이나 해라.’

상급자로서의 발언력을 지닌 스피커는 제 생존본능을 해소하고자 지휘체계 전체에 부담을 줄 것이었다.

나와의 무전으로 적의 현황을 꾸준히 통보받은 경태는, 여력이 남는다고 판단했는지 방어전면에서 인원을 빼어 예비대를 보강했다. 적에게도 아직 전면에 내보내지 않은 예비전력이 있었으니, 그들이 돌격해오는 결정적인 국면에서 카운터를 칠 전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 와중에 적들 일부는 전투가 시작된 이래 줄곧 모종의 비전투적인 행동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빠직-!

각성능력자의 힘으로 던져진 돌이 줄기가 굵은 각성수의 곁가지 하나를 부러뜨린다. 이에 각성수가 물안개를 끌어 모으고 주변의 웅덩이를 흔들어 요동치게 하자, 돌을 던졌던 놈은 낮은 포복으로 나무까지 기어가서는 밝은 색채의 푸른 표식을 붙여놓았다. 못 따위를 박아 고정시키는 게 아닌, 수중에서도 사용 가능한 접착제를 써서 나무를 추가로 자극하지 않는 방식이었다. 눈에 잘 띄는 사이즈의 표식엔 오늘의 날짜가 적혀있다. 표식의 색은 마법적 능력의 종류를 나타내는 것일 터.

‘패스파인딩이로군.’

요컨대 이것들은 지금 자기네 돌격대를 위한 진입경로를 설정하고 있는 것이었다. 괜히 위험한 나무를 건드리는 일 없이, 최대속도로 치고 들어와 돌파력을 극대화하도록하기 위하여.

몸을 사리던 적의 예비전력은 소나기가 가늘게 잦아들 즈음에야 비로소 싸움터에 진입했다.

이들을 선두에서 이끄는 것은, 옛 소련제 4연장 대공포(ZPU-4)를 등짝에 올린 한 마리의 중장갑 전투 코끼리였다.

빠우우우우-!

전신에 장갑을 처바른 각성체 코끼리의 포효가 비에 젖은 숲을 진감케 한다. 농담이 아니라 가까운 이파리들이 바르르 떨리고 맺혀 있던 물방울들이 후두둑 쏟아질 만큼 엄청난 소음. 갓 태어난 새끼조차 중무장한 인간보다 무거운 짐승답게, 달려드는 일보 일보가 작은 지진처럼 느껴질 만큼의 땅울림을 동반했다. 필시 나무에 붙은 표식들의 의미를 학습했을 이 코끼리는, 표식이 없는 야자수 한 그루를 뿌리째 뽑아 집어던지며 전장에 난입했다.

이러한 등장이 있을 것을 미리 귀띔 받은 내 부하들조차 잠시 당황할 만큼의 시각적인 충격이었다.

21세기에 실전을 뛰는 전투 코끼리라니. 마법의 시대가 돌아오기 이전엔 누가 상상이나 해봤겠는가.

대공포좌에 앉은 기수가 탈것과 더불어 함성을 지른다.

“알라 후 아크바아아아아아-르!”

콰콰콰콰콰-! 4연장 대공포가 불을 뿜기 시작하자 전장의 소음은 이제까지가 장난이었다는 듯이 급격하게 치솟았다. 축지법 쓴다는 돼지새끼가 제 고모부를 갈아버릴 때 쓴 고사포의 화력은 이쪽에 광범위한 제압을 걸기 충분했다.

그러나.

카카카칵!

나와 수연의 저격, 그리고 경태 녀석의 신기에 가까운 속사가 대공포의 급탄부 4개소를 찌그러뜨리면서 대번에 탄약 공급이 끊어진다. 교전거리가 수십 미터에 불과한 밀림 한가운데로 방패판도 없는 대공포를 끌고 나온 멍청함의 대가였다. 기세가 올라 반쯤 엄폐를 풀었던 졸개들은, 몇 명분의 대가리가 연속으로 터져나가자 언제 용기를 냈냐는 듯 다시 움츠러들고 말았다.

어떻게든 급탄 장치를 살려보려 애쓰던 코끼리 기수가 탄통을 걷어차며 신경질을 부린다.

“Sial! Sial! Rongsokan sial ini!”

이렇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회로구조를 보건대 강화계수가 거뜬히 10 이상은 될 각성체 코끼리는 그 자체로 강력한 파괴력을 발휘하는 생체병기였다. 소구경 소총탄쯤은 맨살로도 튕겨내다시피 할 괴물. 이런 괴물이 중장갑까지 두르고 있으니 니트로 익스프레스로도 유의미한 타격을 가할 수가 없다.

성난 기수가 케블라 밧줄을 당겨 신호를 보내자, 혈관에 흥분제가 도는 코끼리는 덩달아 성이 나서 발을 구르며 귀를 접고 코를 둥글게 말아 올렸다.

이는 과거 귀족적인 스포츠로서의 사냥을 즐긴 스승새끼의 기억 속에 있는 행동 패턴이었다.

저 코끼리는 이제 곧 돌진해 들어올 작정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