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170화 (170/561)

#20. 열대의 짐승들 (10)

수상한데.

무엇보다, 이제 와서 긴장의 생체징후들을 내보일 이유가 뭐란 말인가?

어떤 사냥꾼이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직 사냥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무수한 각성수들이 내뿜는 마력과 마력장들이 내 시각적 인지능력의 수용한계를 잡아먹었으므로, 이 울창한 밀림 한가운데에서 나의 가시거리는 고작 이삼백 미터 내외에 불과했다. 유타의 거대한 포플러 클러스터로 들어갔을 때보다야 훨씬 나은 시야이긴 하나, 이 자리에서 수상한 몰이꾼들의 배후에 무언가가 더 있는가 여부를 파악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난 시선을 잠시 거두어 가까운 자리로 되돌렸다. 술타나의 인력은 한데 모여 철수를 준비하는 중이었다. 조금만 있으면 하루의 네 번째 기도를 올릴 시간. 술타나는 사람을 부려 마르고 평탄한 자리를 찾도록 지시했다. 여기서 기도를 마치고 움직일 작정인 모양이다.

옆으로 다가온 수연이 차분한 어조의 한국어로 묻는다.

“뭔가 신경 쓰이는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음. 확실치는 않지만, 몰이꾼들 중에 딴생각을 품은 연놈들이 있는 것 같다.”

이에 경태가 예민하게 반응했다.

“딴생각이요?”

“하는 짓만 봐서는 이쪽을 넓게 감싸는 화망을 짜려는 것 같다만……. 숫자가 겨우 마흔이야. 고작 저 규모로 들이치려는 건 아닐 테고. 이번 사냥에 앞서 저것들이 모종의 이중계약을 맺었다고 가정하면, 곧 새로운 전력이 저쪽 편에 합류하겠지.”

나는 짧게 생각한 뒤 추가로 덧붙였다.

“혹은 이쪽으로 합류한 몰이꾼들 중에 배신자가 섞여 있다거나. 안팎에서 총질을 해대면, 숫자의 차이가 얼마나 나든 견뎌낼 재간이 없으니.”

습격을 계획한 게 나라면 반드시 그리했을 것이다. 술타나를 인질로 잡는 데 성공할 경우 총질을 주고받을 필요 자체가 없어질 터. 상정 가능한 가장 깔끔한 형태의 승리다.

그러므로 백 미터 거리에서 산개하는 마흔은 곧 도착할 세력을 위한 안내인들이기도 할 것이었다. 교전이 벌어질 경우, 이쪽에 숨어든 배신자 동료들을 피아식별로 가려내려면 저편에도 같은 패거리가 남아있어야 마땅하니까.

경태의 표정이 찌그러졌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형님의 감이 맞다면, 목표는 저 꼰대겠죠?”

“아마도. 호랑이만으로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지.”

그렇다고 목표가 나와 내 애들일 확률은 희박했다. 비밀유지를 위한 많은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내 신분과 동선이 어떻게 노출되었다고 한들, 날 추적할 동기가 있는 세력들 중에서 현지인 용병들을 암살자로 보낼 법한 집단은 존재하지 않는 까닭.

예컨대 런던의 제국주의자들이 내 소재와 정체와 행적을 파악하고서 원탁내각의 이름으로 사형을 언도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네들이 내각의 대의원과 동급인 대마법사를 죽이고자 검증되지도 않은 용병을 고용한다는 건 웃기지도 않는 농담이다. 황금기의 눈을 확실하게 회수하고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는 원탁 자체의 전력을 파견하는 게 최선이었다.

‘차선으로 영국 정부의 지원을 받을 수는 있겠지.’

다른 걸 다 떠나서, 그들이 계획한 함정이라고 보기에 이 상황은 너무나 허술했다. 빠져나갈 구석이 좀 많이 보여야 말이지.

경태가 묻는다.

“지금은 얼마나 멀리까지 보이십니까?”

“대충 이삼백 미터쯤.”

“……형님 눈에 습격의 전모가 들어오고 나서는 때가 너무 늦겠습니다. 이쪽 꼰대에겐 어떻게 언질을 줘야 좋을까요?”

“어떻게든 주의를 일깨워주고, 그 다음엔 이쪽으로 기어들어온 배신자를 잡아다 족쳐보는 수밖에.”

“잘 안 될 때를 대비해, 애들에게 바깥에서 기어들어오는 놈들을 집중적으로 마크하라고 지시하겠습니다. 우선 조용히 경계선부터 설정하고요.”

기습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로서, 내부로 파고든 배신자의 발포만큼이나 적당한 것도 드물다. 인질을 사로잡았으면 하늘을 겨누어 공포 몇 발 갈기고 말 것이고, 사로잡는 데 실패했어도 이쪽이 혼란에 빠진 직후에 공격을 개시할 수 있으니까.

반대로 말하면, 그 최초의 총성만 저지해도 적의 계획을 시작부터 꼬이게 만들어줄 수 있는 것. 이는 기선을 제압하는 동시에 이쪽의 전열을 정비할 시간을 벌 방편이다.

생각에 잠겨있던 수연이 의문을 제기한다.

“조금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뭐냐?”

“하필 지금 움직이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오는 길에서 마주친 지형들을 감안할 때, 저들은 지금보다 유리한 조건에서 기습을 가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며칠 전부터 시작된 사냥에 처음부터 내통자가 있었다고 가정할 때, 단순히 주력의 도착이 늦어 공격이 지연되었으리라 생각하긴 어렵지요.”

“처음부터 기도 시간을 염두에 두었다면?”

“사냥이 이때쯤 끝나리라는 예상은 예상이라기보다 예언에 가깝습니다. 만약 아직 사냥이 진행 중이었다면, 저 여자로선 다 몰아놓은 사냥감을 두고 기도를 올리기보다 사냥을 마친 연후에 참회기도를 올리는 쪽을 택할 확률이 높지 않았겠습니까?”

경태와 수연이 술타나를 두고 꼰대니 저 여자니 하는 건, 듣는 귀들을 의식하여 술타나라는 단어를 입에 담지 않기 위함이었다.

“뭐, 그런 건 나중에 생각해도 늦지 않겠지. 새로운 놈들이 눈에 들어오는구나.”

경태와 수연에게 보이는 것을 간략히 전달한 나는, 술타나에게 다가가 모르는 척 운을 띄웠다. 여기 모인 인원이 전부인 게 맞느냐고. 몰이사냥의 규모를 감안할 때 아무리 봐도 몰이꾼들의 머릿수가 비어 보이는데, 혹여 미처 합류하지 못한 인원이 있다면 오는 길에 무언가 사고가 발생한 게 아니겠느냐고. 이 말을 들은 술타나는 갸우뚱 하더니 제 부하를 불러 몇 마디의 문답을 주고받았다. 이렇게 문답이 오간 후엔 몇몇 인원들이 부산스레 돌아다니며 주인의 지시를 이행했다.

잠시 후.

“이상하도다.”

꼰대의 미간에 주름이 잡힌다.

“그대의 말처럼 숫자가 비는구나. 무전으로는 금방 합류하겠다고 하는데, 거리만 놓고 보면 진즉에 도착했어야 정상이야. 무언가 일이 있느냐는 물음엔 똑바로 대답하지도 못하고…….”

비록 라스카르만큼 정예하진 않을지언정, 술타나가 몰이꾼으로 고용한 사냥꾼들 역시 각성능력자 집단이긴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땅이 거친 밀림지대라도, 육체가 강화된 사냥꾼들은 수백 미터의 거리를 수십 초 만에 주파할 능력이 있었다. 또한 몰이꾼 역할을 맡을 정도면 이 숲의 붙박이 위험요소들은 남김없이 파악하고 있는 게 정상.

그러니 분명한 사유도 없이 합류를 늦추면서 말로만 곧 도착합니다, 하는 40인의 몰이꾼들이 의뭉스러움 그 자체일 수밖에.

라스카르들의 분위기가 날카로워지자 몰이꾼 및 짐꾼의 무리 사이에서 동요가 일어났다. 당연하게도, 그렇게 동요하는 자들 가운데엔 남들과 유독 다른 색채의 긴장을 보이는 자들이 존재했다. 교감신경의 활성화로 동공이 확장되고, 본능 차원의 무의식적인 작용에 따라 안구의 움직임이 활발해지며, 심박과 체온의 상승으로 인해 같은 더위 속에서도 남들보다 많은 땀을 흘리는 등. 이러한 생체징후들은 꼭 황금기의 눈이 아니라도 섬세한 관찰력만 있으면 잡아낼 수 있는 것들이었다.

술타나 칸드라 키라나는 사람이 다소 전근대적일 뿐 무능한 인간이 아니었고, 부하들은 충분히 유능하였으며, 숨어든 배신자들은 전문적인 잠입 훈련을 받지 못한 아마추어들이었다.

술타나가 웃으며 중얼거린다.

“아하……. 이것들 봐라?”

이로써 술타나는 내 앞에서 두 번째의 창피를 겪게 되었다. 게다가 이 두 번째의 수모는 먼젓번에 비하기 어려울 만큼 크다. 속에선 체통에 억눌린 격노가 부글부글 들끓고 있을 터. 군주의 미소 뒤에 자리한 냉기를 느꼈는지, 통역을 맡은 크툿이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린다.

“너.”

술타나가 냉막한 손가락질로 배신자 하나를 지목했다. 이 나라에서 손가락으로 사람을 가리키는 건 상대에게 모욕감을 주는 몸짓이었다.

“그리고 너.”

손가락질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어깨에 총을 걸고 라스카르 한 무리를 뒤따르게 한 술타나는, 어느새 사냥감처럼 한데 몰아진 몰이꾼들 앞을 거닐며 사형선고 같은 손가락질을 이어갔다. 이 여자가 과연 얼마나 정확하게 짚어낼까 하고 지켜보던 난, 하나를 제외한 전부를 색출하는 안목에 속으로 후한 점수를 매겨주었다.

그러곤 내 손가락질을 더하여 부족함을 채워주었다.

“술타나. 내가 보기엔 여기 이 사람도 수상한 구석이 있습니다.”

“그러한가.”

꼰대가 끄덕이자 라스카르 대원들이 내가 지목한 몰이꾼의 무장을 해제했다. 이처럼 무기를 빼앗긴 몰이꾼의 수는 모두 합쳐 열일곱이었다. 상황이 터졌을 때 뒤통수에 총을 겨눌 인간의 숫자로는 많아도 지나치게 많은 것이었다.

난 노파심에 한마디를 더했다.

“총은 쏘지 마십시오. 신호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여라고 그걸 모르겠는가.”

이렇게 말하면서도 술타나는 다마스커스 패턴 장식이 들어간 자신의 엽총을 고쳐 쥐었다. 사형수에게 겁을 주려는 것일지, 아니면 그저 화가 치미는 까닭일지.

어느덧 기도 시간이 되어 곳곳에서 진동 알람이 울어댔다. 몇몇 사람들이 황급히 알람을 끈다. 술타나는 나무그늘에 자리한 채 숲 저편의 하늘을 보며 혀를 찼다.

“무기가 없는 짐꾼들은 기도를 올리도록 하라. 라와나와 같은 자들의 눈을 속여야 하느니.”

라와나와 같은 자란, 욕심 많고, 사악하며, 부도덕한 데다 불성실하기까지 하여 항상 다른 이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하류인생이란 뜻이었다.

이 지시에 따라 짐꾼들은 하늘이 열린 자리를 찾아 양탄자를 깔고 뻣뻣한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라스카르 대원들은 은밀히 교전을 준비하는 동시에 배신자들을 심문했고, 배신자들을 제외한 나머지 몰이꾼들을 전면으로 내몰았다. 미처 색출해내지 못한 배신자가 있을 가능성을 고려한 것이다.

이는 사실상의 고기방패 취급이었으나, 몰이꾼들은 감히 반항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지역사회에 기반을 둔 직업집단답게 서로 다른 소그룹들 사이에도 연대책임의식이 존재하는 듯하다. 표정들을 보면 딱딱하게 굳은 것이 주눅이 들었다기보다 화가 난 것에 더 가까웠다.

술타나에겐 유감스럽게도, 배신자들은 많은 것을 알고 있지 못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행동에 돌입하기 전 발각당할 가능성이 있는 침투조에게 필요 이상의 정보를 알려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지직, 직-

배신자들의 무전기들이 잡음과 함께 속삭이는 언어들을 뱉어낸다. 통역을 들을 것도 없이, 녹음 저편의 배신자들이 동료들에게 이쪽의 상황을 묻는 말들일 터. 술타나의 턱짓에 라스카르 대원 하나가 허리춤에 찬 나이프를 뽑는다. 앞서 죽인 호랑이의 발톱처럼 안쪽으로 크게 굽어지는 칼날. 첨예한 날 끝이 목줄기에 닿자, 배신자는 식은땀을 흘리며 답신을 보내었다.

이게 제대로 된 답신이었는지, 숲 저편의 동태는 잠잠함을 유지했다.

나는 속으로 실소했다.

‘애쓰는군. 시키는 대로 복종해도 결국은 죽을 텐데.’

이렇게 시간을 벌어도 적들의 공격이 마냥 미루어질 리는 없다. 늦어도 통상적인 기도시간이 다 경과하기 전엔 습격이 시작될 것이었다. 그쯤 되면 저편에서도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모를 수가 없을 테니.

이 불안정한 고요가 깨지기까지는 앞으로 5분도 채 남지 않았다.

“그대여.”

꼰대가 미소를 머금고 하는 말.

“시간이 없으니 자세한 전말은 나중에 들려주리라. 적들의 정체가 무엇이든, 이제부터 맞이할 싸움은 어디까지나 여와 여의 사람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로다. 손님을 화란에 끌어들임은 올바른 예절이라 하기 어려운즉, 그대에겐 이 우스꽝스러운 싸움에 손을 보탤 이유가 없으며, 그대가 다친다면 그것은 여의 수치에 해당하리. 하여 권하노니, 그대는 그대의 사람들과 먼저 돌아가 있으라. 여는 예의를 모르는 불청객들을 징치하고서 그대를 뒤따라갈 것이야.”

이곳 풍습으로 예의를 모른다는 말은 체통을 잃지 않는 한도 내에서 입에 담을 수 있는 최대의 비난이었다.

술타나가 짐짓 여유를 부리고는 있으나, 몸에서는 신경을 곤두세운 인간의 냄새가 났다. 상세를 모르는 적과 맞서는 게 부담스럽지 않을 리 없잖은가.

반면 정체불명의 적들은 이쪽의 화력과 규모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을 터. 따라서 미리부터 습격을 계획한 적들의 세력은 술타나의 세력을 상회할 가능성이 높다.

‘유일한 변수가 나와 내 애들이지. 저쪽은 내가 동행할 줄을 몰랐을 테니까.’

어차피 적들이 이쪽의 퇴로를 차단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는 만큼, 나를 먼저 보내주겠다는 술타나의 말은 그저 말뿐인 배려에 지나지 않았다. 먼저 가있으라는 소리를 곧이곧대로 들으면 그건 내 지능이 심각하게 부족한 것.

정말로 내 머리가 모자라서 배려 고맙다며 잽싸게 몸을 빼면, 그건 그것대로 술타나에게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후방에 적의 별동대가 있다면 결국 나도 자연스레 교전에 참가하게 될 것이요, 없다면 퇴로의 안전을 대신 확인해주는 셈이므로.

즉 이 배려 같지 않은 배려는 내게 빚을 지지 않으면서 내 도움은 도움대로 받는, 최선까지는 아닐지언정 차선이라고는 봐줄 수 있는 방책이었다. 최악의 경우, 나와 내 애들이 적 별동대를 붙잡아두는 사이 술타나의 세력만 다른 길로 빠져나가는 수도 있었다. 적의 추격에 따른 위험부담마저 나에게 떠넘기면서.

아니면 나를 미끼삼아 적을 몰아놓고 적을 역으로 포위해버리는 수도 있겠다. 술타나의 성미엔 이쪽이 더 어울릴 터.

내게 황금기의 눈만 없었어도 모두 맞아떨어질 계산들이었다.

이 와중에도 체면을 챙기는 꼰대가 아니꼽긴 했으나, 어쨌든 지금의 난 이 꼰대를 몸 성히 살려놔야 하는 입장.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어려울 때의 친구가 진정한 친구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는 지금 어려운 처지가 아니다. 여의 라스카르는 일당백의 전사들이므로. 라와나와 같은 자들 만 명이 몰려온들 여에게 작은 상처조차 입히지 못하리.”

“그럼 더더욱 문제가 없겠군요. 이제부터의 총질은 사냥의 연장선상이라고 생각하도록 하지요. 단순한 여흥 말입니다.”

“……그대의 뜻대로 하라.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먼저 물러나도 좋다.”

꼰대는 이번에도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어느 때보다 더 진심으로 웃어보였을 뿐.

술타나가 입은 고전적인 디자인의 베이지색 수렵복은 목덜미와 등짝이 땀으로 진하게 젖어있었다. 가장자리엔 하얀 소금기가 말라있다. 냄새를 맡고 들러붙는 모기들을 신경질적인 손짓으로 쫓아내며, 술타나는 나와의 상의 하에 부하들의 배치를 조정하여 전투준비를 마무리 지었다.

슬금슬금 땅거미가 지는 적도의 하늘 아래, 음영이 짙어지는 열대의 밀림 속에서 불청객 같은 조우전이 다가오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