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열대의 짐승들 (5)
술타나는 몸을 뒤로 되돌리며 파이프의 뭉툭한 부분을 만지작거렸다.
“이제와 돌이켜보건대 거대한 생명들의 변화는 인간의 변화를 예고하는 징조였다. 그것들이 먼저 왕성한 생장과 상궤를 벗어난 강맹함을 보인 연후에, 사람이 뒤따라 초월적으로 굳센 힘을 쓰게 되었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번 역시 거대한 생명들에 뒤이어 사람에게도 새로운 힘이 주어질 수도 있을진저.”
이런 견해는 비단 이 골초만의 것이 아니었다. 증명할 방법이 마땅찮을 뿐, 현상에 근거한 추론이야 어려울 것이 없었으니까. 관련 암시장에선 살아있는 연구용 샘플들이 비공개 경매에 부쳐져 상상을 초월하는 고가에 낙찰되고 있었다.
경매를 비공개로 진행하는 이유는 셋. 첫째는 산 채로 거래되는 상품들이 멸종위기 적색목록에 올라있는 경우가 수두룩했기 때문이고, 둘째는 어디서 포획했는지가 알려질 경우 외교 분쟁을 촉발할 상품들이 많았기 때문이며, 셋째는 자연 속의 각성체들에게 병적인 집착을 드러내는 환경주의자들 및 사이비 종교단체들의 표적이 되는 걸 피하기 위해서였다.
‘하여간 자기들이 하면 로맨스지.’
나 같은 사업가들이 아무리 애를 써도 국가 차원에서 작정하고 행하는 어두운 사업들을 따라잡기란 어렵다. 그 국가가 북한 같은 병신 국가라면 분야와 시운에 따라 어찌어찌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국가의 이익, 국민의 대의가 그들의 사업을 정당화한다.
“어떤가, 그대여.”
술타나가 묻고 통역이 옮긴다.
“여의 말이 너무 섣부른 예단 같은가?”
“아닙니다. 그리 예상하는 사람들이 많지요.”
“신빙성은 높지 않지만, 그런 초인들이 곳곳에서 등장하고 있다는 소식들은 그대도 들어 알고 있을 것이야. 저 일본에서는 어느 사이비 교주의 후계자가 앉은 채로 서서히 떠오르는 기적을 보였다 하고, 북한에서는 모데라멘(최고 지도자) 낌*은이 「축-지-법」인가 하는 초능력을 얻었다 하더군. 땅을 줄이고 공간을 축소하여 먼 장소를 가깝게 만드는 힘이라 하던데. 사실이라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지.”
“…….”
바하사 인도네시아(인도네시아어)에는 축지법에 대응하는 단어가 없는지, 술타나는 북괴돼지의 이름과 함께 축지법이라는 단어를 원어 그대로 입에 담았다.
조선중앙통신에서 내보내는 영상자료들을 보건대, 그 인간형 돼지새끼가 출렁거리는 생체질량에 힘입어 각성능력자로 거듭난 것 자체는 사실이었다. 검은 모피코트를 입고 팔짱을 낀 채로 험한 설산을 평지처럼 주파하는 모습이 아무리 봐도 합성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천하를 쥐락펴락 어쩌고 하는 선전가를 깔아놓고, 공화국 최고 존엄께서 비밀리에 축지법을 수련하고 계신다고 떠들어대는 건 그냥 우스울 뿐이었다. 공간을 접어 삼천리를 일보에 내딛는 기적이라니. 그런 엄청난 마법은 원탁이 지닌 술식의 총록 「장엄한 황금의 책」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돼지새끼가 발을 구르니 눈사태가 일어나는 연출을 끼워 넣은 건 어이가 없기까지 했다.
스쳐가는 뉴스로 들었던, 서구엔 핑크 레이디로 더 많이 알려진 북한 아나운서의 선동적인 음성이 뇌리에서 되살아난다.
「경애하는 공화국 무력 최고사령관 김*은 동지께서는 동지의 축지법이 경지에 이르는 날 2백만 인민군과 함께 류성과 같이 날아올라 친미굴종 남조선 호전광들의 심장부로 무더기비처럼 쏟아져 내릴 것이라 말씀하시었다. 앞에서는 대화와 평화 너스레를 떨며 돌아앉아서는 광란적 무력증강 전쟁책동에 여념이 없는 남조선 괴뢰도당들은 최고사령관 동지께서 쓰시는 축지법의 력사적인 위력 앞에 허재비들처럼 흩어지고 쓰러져 죽을 것이며-」
통치자의 신격화와 군사적 위기 조성은 독재정권이 대내적인 안정을 확보하는 수단이다. 이 시대에 북한이라고 속이 편하겠나. 그들도 축지법 같은 허무맹랑한 소재를 들고 나올 만큼 마음이 급한 것이다.
예전이었다면 내수용 선전에서 그쳤을 이 허무맹랑한 주장이 술타나의 입에서 거론되는 건, 지금이 그만큼 혼란스러운 시대라는 증거였다. 지난해 상반기 전 세계를 휩쓸었던 중국산 폐병이 실은 초능력을 만들어내는 바이러스가 아니었느냐는 「뮤턴트 바이러스」 음모론이 떠도는 판국이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가?”
술타나가 내 침묵을 궁금해 하기에, 나는 적당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나도 그저 거래처를 몇 다리 건너온 소문으로 들었을 뿐입니다만, 일본 쪽 이야기는 사실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오호. 그러한가.”
술타나가 흥미를 보인다. 나는 가볍게 다시 긍정해주었다.
“그렇다더군요. 해당 교단의 교세가 대단히 빠르게 늘어나는 걸 보면, 공중부양까지는 몰라도 경쟁자들과의 차별화를 꾀할 무언가가 있기는 있는 것이겠지요.”
떠도는 소문들의 진위를 가리기 어렵게 만드는 건, 마법의 시대가 돌아온 이래 온갖 유형의 기적들을 주장해왔던 무수한 사이비 교주들의 존재다. 이중능력자들의 여명이 밝아올 시점임에도 기존에 풀린 허위정보들이 너무 압도적이어서 진실이 묻히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숨기는 경우도 많을 테고.’
동물실험에 관한 뉴스들을 보면서 스스로 삼갈 생각을 않는다면 그건 지능이 부족하거나 정신에 문제가 있는 인간이다.
술타나가 말했다.
“이야기를 되돌리지. 여는 예상한다. 장차 사람에게도 물을 다스리고 불을 일으키며 보이지 않는 힘으로 허공을 걷고 전류를 흘려 스스로를 지키는 힘이 생기리라고. 그날이 오면, 그대와 내가 합작으로 건조할 잠수정들은 능히 범세계적 물류혁명을 촉발할 수 있으리.”
이 여자가 입에 담는 건 당연히 암흑시장에서의 물류혁명이었다.
“인력으로 배터리를 충전하는 잠수정은 항주하는 내내 최고속도를 낼 수 있을 것이야. 그뿐인가? 더는 단속 따위를 두려워할 필요도 없어지지. 우리의 밀수선단 앞에선 어떤 국경장벽도 무의미할 터. 만에 하나 발각당하더라도, 분산된 감시자들의 힘은 집중된 선단을 능가할 수 없어. 각 잠수정마다 상품 적재를 조금 줄이고 무기와 전투원을 실으면 그만인 것을.”
합작에 물류혁명, 그리고 우리의 밀수선단이라.
“혹시 내게 기술이전 이상의 협조를 바라십니까?”
“바란다. 바라고말고.”
“…….”
“그대도 알다시피, 모든 시장은 선점하는 자에게 유리한 고지다. 그 고지가 얼마나 높아지는가는 규모의 경제가 얼마나 커지는가에 달려있지. 하여, 여는 그대와 손을 잡고 덩치를 키워 잠재적 경쟁자들의 출현을 미연에 차단하고자 한다. 중남미의 얼간이들이 저들의 앞마당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기 전에, 확실한 ‘우리의 바다’를 만들어두어야 한단 말이야.”
규모의 경제를 말한다는 건 유통단가를 다소 낮추는 한이 있더라도 지배적인 유통망을 건설하자는 의미였다. 쉽게 말해 힘을 합쳐 이 바닥의 아마존으로 거듭나자는 소리. 여기엔 장차 발생할지 모를 나와의 경쟁을 예방하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식기를 한쪽으로 밀어내고 깍지를 낀 나는 열이 오른 술타나를 바라보았다.
“뭔가가 더 있군요.”
“무슨 말인가?”
“내가 아는 당신은 단지 돈을 벌 뿐인 일을 가지고 이렇게까지 흥분을 할 분이 아니십니다. 왕실의 후예로서 체통이 상하는 일이잖습니까.”
“이런.”
“이 사람이 맞춰보지요. 당신의 목적은 한낱 이익 따위가 아니라, 유통단가를 낮추고 물동량을 늘려 시장을 키우는 것 그 자체일 겁니다. 죽음을 사고파는 우리의 시장은 커지는 만큼의 불안과 혼돈일 테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정답이야.”
순순히 인정한 술타나가 돌연 웃음을 터트린다. 공작새의 꼬리처럼 펼쳐지는 화려한 황금의 화관 위에서 금빛 꽃잎과 꽃술들이 웃음의 진동을 따라 흔들렸다. 연기가 가늘게 피어오르는 담뱃대를 쥐고 한참을 웃은 끝에, 술타나는 흥겨운 어조로 말했다.
“이거 즐겁구나. 이렇게 쉽게 읽혀버리다니. 벗의 현명함은 사귀는 자의 기쁨이지.”
“과찬이십니다.”
“그래, 맞아. 그대가 옳게 보았노라. 여는 역병처럼 번지는 혼돈을 소망한다.”
“왕국을 위해서?”
“왕국을 위해서.”
이건 이례적인 상황이다. 조화로운 합의를 지향하는 이 나라의 협상방식으로는 실무자들이 사전에 조율한 사항이 아니면 입에 올리지 않는 것이 정상인 까닭. 이 원칙을 어기는 자는 둘 중 하나다. 상대와 미리 조화를 이룰 줄도 몰라 상대를 난처하게 만드는 무례한 자이거나, 조화로움의 미덕을 모르는 외국인이거나.
그럼에도 이 금빛 골초가 무례를 범한 것은, 내 부하들에게 진정한 용건을 귀띔해주지 않은 것은 필시 나를 직접 보고서 결정을 내리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술타나 칸드라 키라나는 각성자였다.
이 여자는 나와 내 부하들의 마력장을 감지할 수 있다.
고로 이렇게 직접 대면함은 나와 내 조직이 이 시대의 변화를 얼마나 유연하게 받아들였는가,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는가를 가늠해볼 기회였다. 저 중국의 군경이 그렇듯이, 그리고 다른 모든 나라들의 군경이 다시 그렇듯이, 각성자로 대체해야 마땅할 인력을 단호하게 내치는 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니까.
이는 규율과 위계질서가 확실한 범죄조직에도 해당되는 사항이다.
“저 도시.”
칸드라 키라나가 담뱃대를 쥔 손으로 저택 바깥을 가리켰다. 나는 그 직선상 어딘가에 난개발의 극치인 어지러운 시가지가 있을 것을 알았다.
“잠비는 여의 것이야. 여의 것이 되어야만 해. 블란다(Belanda/네덜란드)의 제국주의 침략자들이 무너뜨렸고 공화국의 역도들이 돌려주기를 거부한 땅. 여가 탈환해야 할 잃어버린 왕국! 여는 저 도시를 갈망한다. 이 우스꽝스럽다 못해 처량하기까지 한 술타나 흉내에서 벗어나, 잠비의 정당한 왕좌에 오르고 말 것이야.”
이 꼰대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 실제론 누려본 적도 없는, 부모로부터 말로만 들어보았을 과거의 영광에 이렇게까지 진심일 수가 있다니. 이건 이것대로 진귀한 인간상이다.
한편으로는 재미있기도 하다. 21세기에 왕국을 도모할 사업을, 그 사업을 함께할 동업자를 가늠해보는 옛 왕실의 후예라.
“어떤가?”
술타나가 다시 묻는다.
“그대가 듣기에 여의 목표가 허황된 것 같은가?”
생각에 잠겨있던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오는 길에 보니 마을의 규모가 많이 커졌더군요.”
“그렇지. 많이 커졌지.”
“앞으로도 계속해서 커질 겁니다. 질서가 무너질수록 보다 직접적인 보호를 소망하는 자들이 늘어날 테니까요. 그러나 부패한 공화국은 모든 국민들의 기대에 부응할 능력이 없습니다.”
“요컨대 가망이 있다?”
“실효지배는 주권의 요람입니다. 법과 제도는 언제나 현실과의 타협이지요. 그러니 저 욕야카르타의 술탄처럼 주지사 자리를 세습직으로 겸하거나, 와조(Wajo) 섭정주의 귀족 평의회 수장이 누리는 명예 정도는 꿈꿔볼 만하지 않겠습니까? 그 정도만 되어도 당신이 술타나가 아니라 말하는 자는 없을 겁니다.”
인도네시아는 많은 토호들이 음양으로 옛 영광의 조각을 지켜내고 있는 나라다. 그리고 욕야카르타의 술탄은 개중에서 공식적으로 가장 큰 권력을 쥐고 있는 케이스로서, 영락한 왕실의 후계자가 꿈꿔도 좋을 목표의 한계점이라 해도 좋았다.
“너무 서두르지만 마십시오. 당신이 애써 부르지 않아도, 우리 시대의 혼돈은 반드시 우리를 찾아올 테니. 공공연한 악명은 당신께 도움이 될 것이 없습니다.”
이렇듯 듣기 좋게 말해주는 내 속내엔, 이 전근대의 망령에 사로잡힌 여자가 섣부른 행동으로 일을 망칠까 우려하는 마음이 깔려있었다. 이럴 땐 네가 옳다, 너는 할 수 있다고 속삭이며 심리적으로 같은 편에 서서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것이 최선인 법.
그리고 이게 거짓도 아니다. 슬금슬금 다시 고개를 들고 있는 아체 독립 세력에 더해 옛 술탄국의 후예까지 골치를 아프게 만들면, 인도네시아 정부가 타협을 택할 가능성은 충분했다.
객관적으로 볼 때 잠비는 썩 대단한 도시가 아니다. 잠비를 포함하는 잠비 주(州) 역시 그러했다. 그러니 술타나가 정부의 수위권을 인정한다는 전제 하에, 현지 여론이 술타나를 지지하기만 한다면, 정부로선 역사적 명분에 의거 세습직 주지사 자리를 내어 줄 수도 있는 것이었다. 사라졌던 술탄국이 명목상으로나마 부활을 맞이하는 셈.
‘그러면 나는 개국공신이 되는 거지.’
술타나가 무리수를 두지만 않는다면 잠비 술탄국의 부활은 내게도 이익이 된다.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이야기가 마냥 나쁘지만은 않은 이유였다.
“…….”
연통이 큰 파이프는 한 번 채워서 시가만큼이나 길게 태우는 게 가능하다. 파이프를 물고 눈을 감은 채 연기로 이지러지는 호흡을 이어나가던 술타나는, 숨결이 고르게 가라앉은 시점에서 하얀 날숨을 흘리며 눈을 떴다.
“그대의 말이 옳다.”
“그리 말씀하심은?”
“먼저 사람이 있은 연후에 일이 있다. 사업이야 우정이 있으면 언제든 함께할 수 있는 것. 본격적인 이야기는 땅을 빌려주고 시설을 세워 기술을 배우는 것부터 확실히 끝내고서 나누어도 무방하겠지. 그렇지 않은가?”
“맞습니다.”
“후후.”
술타나가 웃는다. 이는 내 사업장의 터를 쥐고 잠수정의 건조수량을 실시간으로 확인 가능한 영주의 여유였다.
잠시 후, 시종들이 쟁판에 커피를 올려 내어왔다. 터키 식을 닮아 물에 가루를 넣고 끓여냈을 뿐인 아주 진한 커피였다.
이렇게 차나 커피를 대접함은 만찬을 끝내는 신호와도 같았다. 먼저 잔을 비우고 조용히 끽연에 몰두하던 술타나는, 내가 빈 잔을 내려놓자 이런 제안을 던졌다.
“그대여. 기왕 터를 둘러보러 나가는 김에, 여흥으로서 여와 더불어 사냥을 즐겨보지 않겠는가?”
“갑자기 웬 사냥입니까?”
“갑자기가 아니다.”
술타나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하는 말.
“예로부터 사냥은 군주의 행사였지. 사람을 먹는 짐승을 죽여 백성의 안전을 보장하고, 조직적인 몰이를 통해 휘하의 정예함을 제고하며, 강력하고 위험한 맹수의 가죽을 벗겨 군주의 위엄에 더하는 일. 그러니-”
후우. 술타나는 담배 연기를 뿜으며 미소 지었다.
“훌륭한 군주는 우수한 사냥꾼이어야 하는 것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