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162화 (162/561)

#20. 열대의 짐승들 (2)

자카르타는 가라앉는 도시였다. 3천만의 생활과 3천만의 욕망이 연약한 지반을 무겁게 내리눌러, 거주영역 전체가 시시각각 눈에 띄게 꺼져가고 있는 것이었다. 금이 가는 도로와 금이 가는 건물, 해마다 반복되는 심각한 수준의 수해(水害)는 이제 자카르타의 일상이라 해도 무리가 없을 지경이 되었다.

크툿이 미소를 지으며 풀어놓는 사정은 바로 그런 일상과 맞닿아있었다.

“당신께서 거쳐 가실 예정이었던 숙소가 안전점검 문제로 잠시 출입이 통제되었기에, 급히 대체할 장소를 물색해야 하게 되었습니다. 미리 연락드리지 못한 점 송구합니다.”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지. 알겠소.”

여기서 말하는 숙소는 말 그대로 동선 세탁을 위해 거쳐 가는 장소일 뿐이다. 나는 부하가 건네주는 선글라스를 끼고 모자를 착용했다. 준비된 숙소에선 나와 비슷한 체구에 동일한 복장을 입은 부하가 대기하고 있을 것이었다.

크툿에게선 일체의 긴장감도 찾을 수 없었다. 거짓일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뜻. 그래도 경태는 연락을 시도하여 계획변경의 상세와 사실여부를 확인했다. 그러곤 보기 드물게 차가운 표정으로 꾸짖는다.

“이보십시오, 황 부장님. 일 똑바로 안 하실 겁니까? 문자라도 먼저 보내놓으셨으면 제가 착륙과 동시에 확인할 수 있잖아요. 근데 이걸 형님께서 직접 확인하시게끔 만들어요? 제정신입니까? 어떻게, 나중에 본사로 소환 한번 해드릴까요? 아주 쾌적한 보수교육을 약속드리죠.”

꾸짖는 통화가 길지는 않았다. 동선을 세탁한 뒤 공항으로 돌아와 다음 항공편을 타려면 시간이 마냥 넉넉한 게 아니었던 까닭이다.

모두가 입국수속을 완료한 후, 우리는 준비된 차량을 타고 시가지로 진입했다.

수 년 만에 다시 보는 자카르타의 풍경은 인상적이었다. 도시가 침몰하고 있음에도 끊임없이 올라가는 고층건물들. 지반 침하가 가속되거나 말거나 온갖 곳에서 무제한적으로 지하수를 퍼 올리는 강력한 펌프들. 이로 말미암아 본래의 평평함을 잃고 물결치듯 구불거리게 되어버린 도로 위엔 세계적으로 악명이 높은 교통체증이 문명의 무게를 더하고 있다. 기반 자체가 기울어버린 시장에서 상인과 손님이 흥정을 벌이고, 1층의 절반이 물에 잠긴 채 방치된 2층 가옥은 사실상 단층 건물로 기능했다. 오늘의 가난에 치여 내일을 생각할 겨를이 없는 배고픈 자들과, 당장의 이익에 눈이 멀어 목전까지 닥친 파멸에 눈감는 배부른 자들. 이들이 이루는 거대하고 파멸적인 조화. 이 도시가 보여주는 것은 초유기체로서의 인간 군집이 지닌 속성 중 하나였다.

이런 도시이기에, 만에 하나라도 붙었을지 모를 감시를 따돌리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오래지 않아 호텔에 도착한 나는, 변복을 하고 차를 바꿔 탄 다음 시내를 돌아 다시 공항으로 향했다.

“아들은 잘 지내고 있소?”

내가 묻자, 크툿은 여전한 미소로 답했다.

“물론입니다, 바팍. 당신께서 집을 지어주신 덕분에 조금의 부족함도 없이 살고 있습니다. 저도 아버지로서 부끄러움이 없게 되었고요.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해 유감이오.”

“어인 말씀을. 당신께는 언제나 고마운 마음뿐입니다.”

술타나가 사랑하는 인도네시아의 전통 속에서 사람에겐 누구나 지위와 역할이 존재한다. 나와 처음 만났을 때의 크툿은 그저 흔하고 값싼 접선책에 지나지 않았으되, 내가 술타나와 관계를 맺은 순간부터, 크툿은 그 관계를 이어준 중개자이자 관계 그 자체로서 새로운 지위와 역할을 얻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내가 만약 술타나와 교류를 할 때 크툿을 거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크툿에게 공개적인 모욕과 창피를 주는 짓이 되어버린다. 크툿이 속한 공동체 전체로부터 암암리에 손가락질을 당하게 되는 건 덤이었다.

서구식 계약관계에 익숙한 동종업계의 외국인 사업가들은 이러한 정서를 이해하기 어려워한다. 아니, 애초에 이해할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다. 접선책의 역할은 접선이 완료되면 그걸로 끝인 것이다. 클라이언트와 직접적인 연락망을 구축할 수 있는데 왜 굳이 매번 중개인을 거쳐야 한단 말인가?

그렇기에 그들이 술타나의 호의를 얻는 데엔 명백한 한계가 존재했다.

‘범죄조직의 대가리들이 이런 쪽으로 약하단 말이지.’

현지문화에 대한 몰이해는 언제나 사업의 걸림돌로 작용한다. 머릿속에 든 거라곤 오직 이익밖에 없는 범죄조직의 대가리들은 상대도 매양 자신과 같으리라 믿는 경향이 강했다.

첫 만남에서부터 칸드라 키라나의 ‘꼰대스러움’을 감지한 나는 다르게 행동했다. 지역사회의 전통과 정서를 파악한 다음 파악한 그대로를 실천으로 옮겼고, 이는 술타나를 자칭하는 꼰대를 흡족하게 만들었다.

이게 아니었으면 그녀가 나를 친구라 부를 일도 없었을 터. 언제까지고 도의를 모르는 이방인 취급만 받았을 게 뻔하다.

“도움이 급한 일이 있다면 언제든 내게 전하시오. 부하들에게 최대한 편의를 봐주라 일러두리다.”

관계 그 자체인 사람의 지위를 높이는 건 내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다. 내 말에 크툿은 조용한 미소로 화답했다.

이후 나는 크툿에게 술타나의 근황을 물었다. 뭔가 달라진 점은 없는가 하고. 이에 크툿은 말을 아끼며 그저 크게 달라진 점이 없다고만 했다.

‘적어도 미신에 휩쓸려 광기에 사로잡히진 않은 모양이군.’

자세한 근황은 기대하지도 않았다. 사람은 평등하지 않으며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함부로 입에 담아선 안 되는 것이 또 이들의 전통이었으니까.

다만 나는 마법의 시대가 사람을 바꿔놓았는지 궁금했을 따름이었다. 비록 껍데기는 이슬람일지언정 힌두교와 원시 토속신앙의 색채가 진하게 남아있는 나라가 인도네시아이므로, 이런 쪽으로는 미리미리 주의를 기울여둘 필요가 있었다. 크툿의 진술만으로는 판단의 근거가 부족하였으되, 크툿 자신이 윗물을 헤아리게 해주는 아랫물이었고 그간 거래조건을 조율해온 부하들로부터도 특별한 보고가 없었으니 안심해도 좋을 것이다.

공항에 도착한 나는 가판대에서 영자신문 「더 자카르타 포스트」를 한 부 구입했다. 현지의 분위기를 읽는 데 현지의 언론보다 나은 것도 드문 법.

지나가는 사람 둘 중 하나는 스마트폰이 없는 나라답게, 인도네시아의 신문은 몰락의 길을 걷는 구시대적 매체 따위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충만하고, 그렇기에 견실하다. 나는 활자가 인쇄된 종이의 냄새로부터 약간의 안정감이 드는 것을 느꼈다. 요즘은 도통 인쇄된 활자를 읽을 기회가 없었다…….

오랫동안 공산당을 탄압해온 나라의 신문은 중국의 관영언론들이 전하지 못하는 수많은 소식들을 담고 있었다. 당장 1면부터가 중국 군경의 민간인 학살 사건을 다루고 있다.

「세기의 진실공방 : 위대한 승리인가, 거대한 학살인가?」

표제 이하의 본문은 중국 정부가 주장하는 광저우에서의 승리가 수많은 비무장 민간인 학살로 점철되어 있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더 많은 증거들이 드러나는 중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러한 증거들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촬영자가 밝혀지지 않은 많은 수의 사진들.

극적인 구도의 사진 한 장엔 이런 설명이 붙어있다.

「노인, 여성, 어린아이 등 비무장 민간인들을 향하여 발포하는 중국 공안. 중국 정부 대변인은 이들 전원이 각성자로 이루어진 반정부 폭도들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진실이 무엇인가 하면, 사실 대부분의 학살극은 죽은 인형술사의 힘으로 연출된 것이었다. 나는 사진만 보고도 ‘비무장 민간인들’의 정체가 시체인형의 무리임을 알 수 있었다.

하나 이러한 진실을 마법에 무지한 자들이 알아차릴 순 없는 노릇이었고, 중국은 이제까지보다 더한 외교적 고립을 피하지 못하게 되었다. 주변국들의 반중-혹은 공중(恐中)여론과 인도적인 차원의 공분이 더욱 들끓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저런 나라가 패권을 쥐게 되면 과연 무슨 꼴을 겪게 되겠느냐는 것. 이런 상황에선 각국의 친중파도 목소리를 내기가 곤란하다.

나는 절반쯤의 휴식을 겸하여 탑승대기시간 내내 활자를 읽는 데 몰두했다.

마법의 시대가 돌아온 이후, 전 세계의 신문들은 공통적으로 두께가 두꺼워졌다. 이는 분야를 불문하고 전해야 할 소식과 다뤄야 할 쟁점들이 급격하게 많아진 탓. 전문적인 취재를 하는 언론들의 두 번째 전성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지면을 늘렸음에도 불구하고, 큼직한 기삿거리들을 제외하면, 서로 다른 신문들은 대개 서로 다른 화제들로만 채워져 있었다.

「미국이 자국 내 중국 공산당원들의 자산에 대한 2차 현금화를 예고하다.」

「나날이 폭등을 거듭하는 해상보험요율 - 「국제 P&I 클럽」에 속한 보험사들은 현지시각 10일 오전, 런던에서 공동성명을 내어 민간 선박의 군사력 수송에 관한 국제법 개정을 국제사회에 촉구했다. 현행 국제법에 따르면 특정 국가의 군사력을 수용한 민간 선박이 타국 영해에 진입하는 행위는 군사적 침공 행위로 간주될 수 있어, 현역 군인을 탑승시켜 상선을 보호하는 일이 불가능했다…….」

「해상경호원이 각성능력자들의 유망 직종으로 떠오르다. 아이테릭 필드(Aetheric Field)의 직경과 강화계수 값이 큰 경력자의 몸값은 1주일에 무려 3만 달러를 넘는 것으로 알려져…….」

「원 챔피언십(One Championship) 페더급 전 챔피언 응우옌 칵(阮克)이 자택에서 숨진 채로 발견되었다. 주변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각성 능력자들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설 자리가 사라졌는데, 자신은 각성자가 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며 극심한 절망감을 토로해왔다고 한다. 경찰은 이러한 증언들과 현장에 남은 흔적들을 토대로 자살에 무게를 두고 수사를 진행하는 중이다…….」

「영국은 중국에게 홍콩특별행정구 국가보안법 폐지 및 국가보안법에 따라 수감된 민주화 인사들의 석방을 권고했다.」

「번화가 한복판에 출현한 각성체 바다악어 - 지난 4일 홍수가 발생한 이래, 자카르타 시가지 곳곳에서 각성체 늪지 생물들로 인한 인명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때문에 시가지 일부 구획에선 침수 현장의 복구가 그 어느 해보다도 느리게 진행되고 있으며……」

반절이나 읽었을까. 수연이 다가와 내 주의를 환기했다.

“형님.”

“벌써 시간이 됐나?”

“아뇨. 다른 일입니다.”

멀지 않은 크툿의 귀를 의식한 수연이 내게 닿을 듯한 거리에서 속삭이는 말.

“본사 전산팀으로부터 예의 그 USB에 관한 중간보고가 올라왔습니다.”

예의 그 USB라 함은 초계함 지에양의 함교에서 내가 직접 회수한 영국 놈들의 킬러 USB를 뜻하는 것이었다. 주장강 일대에 배치되었던 인민해방군 초계함과 첨단장비들을 일시적으로나마 멍텅구리 표적으로 전락시키고, 대함미사일 트랩으로 날 거의 죽일 뻔했던 그 물건.

조직 본사 전산팀의 자원이 양적으로든 질적으로든 일반적인 기업들보다 우수한 수준이라곤 해도, 영국쯤 되는 나라에서 국가 차원의 노력을 들여 제작한 악성 코드를 분석하는 건 쉽지 않은 과제였다.

그러니 벌써부터 내게 보고할 뭔가를 건졌다는 것만으로도 칭찬을 받아 마땅할 노릇. 나는 회로에 마력을 돌려 염동술식을 활성화했다. 공기의 진동을 죽이는 약한 염동력의 장막이 수연과 나를 둥글게 감싼다.

“흡음결계를 쳤으니 편하게 말해. 무언가 얻은 게 있나?”

“예. 윈도우 OS의 제로 데이 취약점 하나를 발견했답니다.”

제로 데이(Zero Day) 취약점이라 함은 제조사조차도 그 존재를 모르는 시스템상의 보안 허점을 말한다. 오직 공격자만이 그 존재를 알고 있기에 방어자에겐 대비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 그래서 제로 데이라 부르는 그런 허점.

이건 하나만 쥐고 있어도 든든한 무기다. 해당 시스템을 이용하는 곳이라면 어디를 공격하든 무조건적으로 뚫어주고, 흔적만 잘 지워주면 무제한적인 재사용마저 가능하다.

세상의 모든 해커조직들과 첩보기관들이 하나라도 더 손에 넣고 싶어 하는, 정보화 시대의 만능열쇠 그 자체라 하겠다.

“훌륭하군. 아주 훌륭해.”

끄덕인 내가 물었다.

“앞으로도 뭔가가 더 나올 것 같다던가?”

“그렇습니다.”

“쓸 만한 걸 건질 때마다 성과급을 지급하겠다고 전하도록. 이번 것에 대해서는…… 팀 전체에 1인당 1억씩 집행해주고.”

“예.”

“최초 발견자는 나중에 따로 표창하기로 하지. 분석이 다 끝났을 때, 같은 발견자들을 모아서. 내가 직접.”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조만간 제로 데이 취약점을 추가로 캐내는 데 성공한다면, 하나쯤은 춘절 이후 가오슈센의 진급선물로 주는 편이 좋을 것이다. 단순히 나와 손잡은 공산귀족의 출세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로 하여금 내가 자유롭게 본업에 종사하는 편이 자신에게도 이익이라는 판단을 더욱 굳히게 하기 위하여.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