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161화 (161/561)

#20. 열대의 짐승들 (1)

시일이 흘러 어느덧 중국 땅을 떠날 날이 다가왔다.

“이렇게 갑자기 떠나신다니…….”

품속에서 날 올려다보는 류린페이의 눈망울엔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한 눈물이 그득했다.

이미 한 번 곱씹은 바이지만, 교감신경계에 작용하는 물리적 현상으로서, 일확천금의 기회가 주는 긴장상태와 사랑에 빠졌을 때의 신체적 흥분상태 사이엔 유의미한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쪽이든 동일한 호르몬이 분비된 결과인 까닭. 카지노에서 일생일대의 잭팟을 터트려보았거나 당첨된 복권을 손에 쥐어 뇌리에 벼락이 내리꽂히는 경험을 해본 이는 이러한 사실에 경험적으로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와 같은 유사성은 뇌의 기계적 오작동을 유발하는 원인이 된다. 긴장과 흥분의 감정적 전이가 일어나는 것. 이것이 흔들다리 효과의 실체다.

시가지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초고층의 인피니티 풀에서, 광저우 타워의 꼭대기에 자리한 아슬아슬한 대관람차에서, 해발고도가 높아 숨이 가빠지는 명승지와 VIP 전용 에스코트가 붙는 백화점의 명품코너에서. 매번 긴장 속에 오매불망 내 연락을 기다렸을 린페이의 오작동은, 장소를 바꾸어 만남을 거듭할 때마다 반복적으로 누적되었다.

여기에 쾌락 되새기기를 통한 조건반사 강화가 더해진 결과, 적어도 시술자인 내가 진단하기로는, 거짓에서 시작된 린페이의 감정은 어느덧 완전한 진실로 굳어졌다. 이 동물에게 있어서 나는 곧 긴장이요 두근거림이며 짝을 찾을 수 없을 쾌락과 행복의 근원이다.

사냥은 끝났고 사냥감은 길들여졌다.

나는 손수건을 꺼내어 린페이의 눈가를 부드럽게 찍어주었다.

“울지 마라. 난 우는 여자를 싫어한다.”

싫어한다는 말은 이번에도 효과적이었다.

“1년에 하루를 만나도 괜찮다고 했던 건 거짓말이었나?”

내 물음에 린페이는 칭얼거리듯 답했다.

“각오는 했지만, 그렇지만, 이렇게까지 슬플 줄은 몰랐어요…….”

당연히 몰랐겠지. 그때 생각한 건 얼나이들의 가장 이상적인 생활형태 중 하나였을 테니. 한두 번의 만남을 제외하면 일 년 내내 아무런 간섭 없이 호화로운 자유를 누리는 삶. 당장 북미 지역에 거주하는 얼나이들이 바로 그런 삶들을 살고 있다. 린페이는 여기에 직업적인 성공을 더하여 꿈꾸었을 뿐, 본인이 거꾸로 사냥당하리라곤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다.

난 눈물을 억누르는 린페이의 손에 손수건을 쥐여 주며 담담한 자상함을 연기했다.

“이래서 내가 가정을 꾸리지 않는 것이다. 기다리는 사람에게 미안한 일이니까.”

린페이의 눈이 놀라움을 담아 확대되었다.

“결혼을 안 하셨……어요?”

“그런데?”

“저는 당연히 하셨을 거라고…….”

머릿속에 처음부터 귀족의 첩이 된다는 생각밖에 없었던 자의 착각. 내 옷자락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진다. 이 타락한 욕망의 대륙에서 첩의 대우가 아무리 좋다고 할지라도, 본처 자리가 비어있다면 노리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렇게 내게 집착할 이유를 하나 더 던져주고서, 나는 자연스럽게 대화의 흐름을 틀었다.

“시국이 수상하니 다시 만날 때까지 몸조심하고 있어라. 위험한 곳에는 가지 말고.”

“네.”

“종종 부를 테니 너무 슬퍼하지도 말고.”

“부르신다고요? 어디로요?”

“어디든 내가 있는 곳으로. 너나 나나 시간이 난다면 말이지만.”

“아…….”

“왜, 싫은가?”

“그럴 리가요! 좋아요, 정말 좋아요! 어디로든 불러주세요! 제 시간 같은 건 전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만사를 내려놓고 뵈러 갈게요!”

“매번 비행기를 타기도 피곤한 일일 텐데.”

“괜찮아요! 잠시라도 선생을 뵐 수만 있다면 그깟 비행기가 대수겠어요?”

“알았다. 이거나 받아라.”

“네?”

린페이는 젖은 눈을 깜빡이며 자동차의 스마트키를 받아들었다.

“이건…….”

“타고 온 차 열쇠다. 등록은 이미 완료되었고, 지금쯤이면 번호판도 바뀌어 있을 테니 너는 그냥 몰고 다니기만 하면 돼. 글로브박스(手套箱)를 열어보면 관련 서류와 함께 또 다른 선물이 들어있을 거다.”

“또 다른 선물이요?”

“남자가 여자에게 마음을 허락했으면 여자를 경제적으로 책임져야지.”

눈시울이 붉은 와중에도 입가에 감격의 미소가 번지는 린페이. 아마도 내게서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을 터였다. 그러함을 알기에 그대로 말해준 것이고.

“그만 가봐. 이제 곧 탑승 시간이다.”

이용객이 적기로는 처음 도착했을 무렵과 크게 달라진 바 없는 국제공항에 쓸쓸한 안내방송이 울려 퍼진다. 시계를 보고 머뭇거리던 린페이는, 이내 온 힘을 다해 나를 끌어안으며 기나긴 작별의 입맞춤을 남겼다. 멀리 지나가는 사람들도 한 번씩 눈길을 던질 만큼 본격적인 애정표현이었다. 한참 만에야 입술을 뗀 린페이가 입가에 숨결이 닿는 거리에서 울먹였다.

“기다릴게요. 낮이나 밤이나 선생만을 그리워하면서. 그러니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진 말아주세요.”

“노력해보지.”

“자주 연락해도 괜찮을까요? 바쁘신데 매번 통화를 하긴 어렵겠지만, 문자로라도…….”

“답이 늦어도 상관없다면 얼마든지.”

“상관없어요!”

린페이가 아는 번호는 내 진짜 번호가 아니다.

메신저와 메일 등을 통한 연락은 비서실과 본사의 지원팀에 맡겨놓을 참이었다. 어차피 대부분의 대화는 무의미한 감정적 교류에 그칠 것이고, 기억해둬야 할 사항이 있다면 요약정리로 보고를 받으면 그만인 일이니까. 통화는 음성변조기술에 의지할 수 있을 것이다. 돈을 들여 만들어놓은 것이 있으니. 지원팀에 속한 애들이 새로워할 일감이 아닌가 싶다.

내가 탑승구를 지날 때, 등 뒤에서 린페이가 외치는 소리.

“사랑해요! 사랑해요!”

보딩 브리지에 들어서니 경태가 쓸 데 없는 감탄사를 흘린다.

“이야, 순정이네요, 순정.”

“놀리는 거냐?”

“놀리다뇨? 제가요? 형님을요? 에이, 그 무슨 말씀을……. 이 김경태는 그저 형님께서 이런 쪽으로도 더욱 완벽해지신 데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

“농담이 아니라, 저 여자, 형님께 아주 푹 빠지지 않았습니까? 형님께서 이런 일을 하도 싫어하셔서 못내 우려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크, 괜한 걱정이었습니다. 역시 어떤 일이든 일단 맡기만 하면 철두철미하게 해내시는 형님께 오늘도 존경의 마음이 깊어집-”

“그만.”

“옙.”

불치병이라 해도 좋을 경태의 용비어천가를 끊은 나는, 이제부터 견뎌야 할 여정에 대하여 심리적인 피로감이 드는 것을 느꼈다.

술타나 칸드라 키라나의 근거지인 잠비(Jambi)는 국제선이 닿지 않는 도시였다. 가장 가까운 국제공항은 팔렘밤의 술탄 마흐무드 바다루딘 2세 공항이지만, 광저우와 홍콩에선 이곳 팔렘방으로 가는 직항편조차도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여기서 잠비로 가려면 자카르타와 팔렘방을 경유하여 대기 시간 포함 근 하루를 비행기만 타야 했다. 그리고 공항에서부터 술타나의 사업장까지는 자동차를 타고 다시 네 시간을 달려야 하는 먼 길이다. 도중에 한 번 동선을 짜고 여권을 바꿔 행적을 세탁할 것까지 생각하면 벌써부터 피곤해지는 게 당연했다.

술타나는 먼 길을 오는 ‘친구’를 위해 자신이 남쪽으로 마중을 나올 수도 있다고 알려왔으나, 나는 그 배려를 정중히 사양했다. 술타나의 사업장 근처 잠수정 건조시설이 들어설 터를 직접 봐두고 싶었기 때문. 중요한 사업의 핵심적인 요소를 눈으로 보지도 않고 넘어가는 건 사업가로서도, 도망자로서도, 사냥꾼으로서도 실격이다.

그나마 위안을 주는 것은 아직 풀 것이 남아있는 코드의 존재였다.

사람의 시간활용에 일분일초의 낭비도 없기란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럼에도 약자는 언제나 그러한 낭비가 최소화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일등석에 몸을 묻은 나는 눈을 감고 마법사로서의 명상에 들어갔다.

중간 경유지인 자카르타의 수카르노 하타 공항에서, 나는 한국인 각성능력자 이규휘의 신분으로 강화된 유인입국심사를 받았다. 이 시점에서 세계 대부분의 주요 공항들은 기존의 입국수속에 각성 여부를 확인하는 절차를 포함시킨 상태였던 까닭이다. 항공보안을 위해 여권에도 각성 여부를 표기하도록 국제적인 합의가 이루어졌으며, 입출국 수속을 밟는 곳마다 무장한 능력자들을 배치하여 입출국자들의 마력장 보유 여부를 판별하는 게 보통이었다.

각성 능력자는 무기를 휴대하지 않아도 위험한 존재이니 당연한 조치라 하겠다.

이렇듯 출입국 절차가 강화되었다곤 해도 통과 자체는 까다롭지 않았다. 물론 공안 차원에서 편의를 봐주었던 중국에서만큼 편할 수는 없었지만, 우선 한국 여권의 신뢰도가 높은 편에 속했고, 다음으로 전과기록 및 직업정보와 주거래 계좌 잔액, 금융신용도 등을 조회하는 데 동의함으로써 안전 평가의 많은 부분을 생략할 수 있었던 덕분이다.

황금은 만능의 열쇠다. 내 가명으로 등록된 계좌의 엄청난 잔고와 깨끗한 이력을 확인한 심사관은 대단히 우호적인 표정을 지어보였다.

“친구를 만나러 오셨다고요?”

“예.”

“얼마나 체류하실 예정이십니까?”

“길어도 한 달 이내가 될 것 같습니다.”

예정대로라면 한 달은커녕 일주일도 걸리지 않겠으나,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이상 기간은 넉넉하게 잡는 편이 좋았다.

“한 달이라, 한 달…….”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심사관이 고개를 끄덕인다.

“좋습니다. 모든 외국인 「이써리스트」에겐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하루에 세 번 자신의 위치를 신고할 의무가 주어집니다만, 안전보증금으로 하루에 오십만 루피아씩 총 천오백만 루피아를 맡겨두시면 앞으로 30일간 해당 의무를 면제받으실 수 있습니다. 행정수수료 1%를 제외한 나머지 보증금은 출국하실 때 찾아가실 수 있고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대화가 영어로 이루어졌으므로 심사관은 능력자를 「이써리스트(Aetherist)」라 칭했다. 경우에 따라 「아이테리스트」라고도 발음하는 이 이써리스트는, 능력자를 부르는 명칭으로서 최근 영국이 밀고 있는 것이었다. 원탁의 대마법사들이 마소를 본디 아이테르(Aether)라 일컬으니, 그로부터 자연스럽게 유래한 호칭이라 하겠다.

영어권의 일반 대중은 헌터라는 호칭을 더 즐겨 사용하지만, 고위험 사냥이 각성 능력자의 상징적인 역할이라고는 해도 모든 능력자들이 사냥꾼인 것은 아니다.

하루에 오십만 루피아라면 한국 돈으론 4만 원에 미달하는 소액이다. 나는 창구 안으로 신용카드를 밀어 넣었다.

“이걸로 결제 가능합니까?”

“물론입니다!”

심사관은 매우 기뻐보였다. 필시 실적 평가와 관련이 있으리라. 세계적인 불황 속에서 많은 나라들이 외환보유고 유동성 확보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고, 인도네시아 역시 그러한 나라들 중의 하나였다.

결제가 완료된 후, 심사관이 추가로 안내하는 말.

“보증금을 맡기셨어도 어플리케이션 자체는 설치를 해두셔야 합니다. 지금부터 제 안내에 따라 설치를 진행해주십시오. 먼저 여기에 있는 QR 코드를…….”

이따위 어플리케이션을 설치하는 것은 영 내키지 않는 일이었으나, 지금으로선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리고 부하들과 함께 움직이는 이상 마력장을 숨기는 것도 큰 의미가 없었다. 설치완료를 확인한 심사관이 주의사항을 읊는다.

“이 어플리케이션은 이후 출국 수속을 밟으실 때 인증번호를 발급받음으로써 삭제하실 수 있습니다. 그 전에 비정상적인 삭제시도가 감지될 경우 능력자 관리에 관한 국제합의에 따라 구속 및 추방 사유가 될 수 있으니 유의해주시기 바랍니다. 이해하셨습니까?”

“이해했습니다.”

“또 각성한 능력자로서 모종의 사고나 범죄행위에 연루되실 경우, 책임소재에 따라 공식적인 처벌과 별개로 보증금의 일부 또는 전액이 압류될 수 있습니다. 이해하셨습니까?”

“예, 이해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체류기간이 예상보다 길어질 경우엔 인앱 결제를 통해 안전보증기간을 연장하는 것도 가능하니 이용에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아시겠지요?”

“……알겠습니다.”

“그럼 됐습니다. 수많은 섬들의 나라, 누산타라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부디 이 땅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시기를.”

여권을 돌려받고 심사장을 나와 캐리어를 찾는 홀에 도달하니, 먼저 나온 부하들이 미리 짐을 찾고서 눈에 띄지 않는 경계선을 설정한 채 나를 포함한 나머지 일행들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리고 멀리까지 나를 마중 나온 술타나의 사람도 하나 눈에 띈다. 내가 올 때마다 통역과 현지인 비서 노릇을 도맡는 사내였다.

나를 발견한 사내는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슬라맛 말람. 오랜만에 뵙습니다, 바팍 아노니미타스.”

바팍(Bapak)은 아버지라는 뜻으로 지위가 높은 남성에 대한 존칭으로 쓰이고, 아노니미타스(Anonimitas)는 이름을 밝히지 않는 자를 의미했다. 나름 나와 오래 관계를 맺어온 거래처인 술타나 측은 내가 내세우는 신분이 진짜가 아님을 일찍부터 깨닫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까딱여 인사를 받았다.

“오랜만이오, 크툿 위자야.”

그러곤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 부하들은 어디다 두고 혼자서 나오셨소?”

여기서 말하는 부하들이란 술타나와 거래조건의 사전 조율에 힘쓰던 국제사업부 소속 영업직 부하들을 말한다. 본래대로라면 녀석들도 함께 마중을 나왔어야 마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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