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다만 신께서 구하실 것이다 (12)
다음 날, 나는 호텔의 객실에서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시야에 들어오는 건 천장 너머 위층 객실의 마스터 베드룸이었다.
‘아직 자고 있군.’
새털구름이 뜬 하늘에서 아직 쪽빛이 다 빠지지 않은 시간, 인테리어를 제외하면 아래층과 구조가 완벽하게 동일한 위층 객실의 침대에서, 커다란 침대에 홀로 누운 린페이는 세상모르도록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누군가와 동침을 할 때, 나를 가장 곤욕스럽게 만드는 요소는 타인과 한 침대에서 잠을 잔다는 것 그 자체다. 이는 곧 사냥감으로서의 내가 가장 무방비해지는 시간을 남에게 노출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대마법사이고 아무리 강력한 조직의 수장일지라도, 눈 감고 꿈을 꾸는 동안에는 언제 목을 물어 뜯길지 모를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 극복하는 내 전략은 상대의 체력을 극한으로 소모시키는 것이다. 상대가 몇 번을 까무러쳐도 계속해서 깨워가며 행위를 이어가면, 나중엔 거의 탈진하다시피 하여 아무리 흔들어도 깨어나기 힘들어하는 순간이 온다. 그러면 이제 나는 다른 방으로 가서 문을 잠그든, 아니면 아예 새로운 객실로 이동을 하든 해서 짧은 잠이나마 잘 수 있는 것이지.
마스터 베드룸으로부터 나와 입구에 면한 거실로 들어서자, 새벽의 마지막 당직을 맡은 경호실 소속 부하 둘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복장은 눈속임을 위한 무장경찰 복장이었다.
“기침하셨습니까.”
“음.”
“김경태 실장을 깨울까요?”
“아니, 내버려 둬. 커피나 한 잔 부탁한다. 냉수도 좀 가져오고.”
“예.”
국제금융센터의 96층에 위치한 스위트는 동반한 부하들이 다 들어와도 괜찮을 만큼 넓은 면적을 가지고 있었다. 다이닝 룸 너머에 위치한 또 다른 침실엔 경태를 포함한 여섯이 무장을 휴대하고 이불도 덮지 않은 채로 칼잠을 자는 중이었다. 가벼운 염동력을 투사하여 이불을 덮어준 나는, 창가에 놓인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확인했다.
27분 전 비서실에 속한 부하로부터 전송된 파일은 린페이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었다. 따로 지시하지 않아도 당연하게 이루어지는 뒷조사다.
가족관계, 학력과 경력, 취미와 성향, 좋아하는 음식, 보유자산 현황, 외부에서 파악 가능한 인간관계 및 그 외의 행적 등을 훑어본 나는 부하가 가져온 냉수를 들이키며 생각했다.
‘일단 일반인이기는 하군.’
대개의 정보는 공안국 데이터베이스에서 뽑은 것이라 고의적 위변조의 가능성이 있었지만, 입신을 꿈꾸는 연예계의 새싹에겐 그간의 활동에 따른 많은 증거들이 남아있었다. 내가 사냥감을 잘못 고른 게 아니라는 의미.
전문적으로 훈련을 받은 인원이 아니라면 만에 하나라도 내 쪽이 속을까 봐 걱정할 필요는 없겠다. 과민반응 같지만, 미인계로 사람 속여 등쳐먹는 분야에선 CIA조차 중국 국가안전부를 당해내지 못하니, 신중을 기하여 나쁠 것은 없었다. 난 휴대폰을 내려놓고 내선전화로 컨시어지에 몇 가지 주문을 전달했다. 시간이 시간인 만큼 팁은 두둑이 주겠노라고.
이 뒤에 시선을 바깥으로 돌리니, 파노라마처럼 부채꼴로 펼쳐진 전면 유리창 너머엔 미세먼지 가득한 도심의 아침이 있었다. 통상시야로는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솟은 광저우 타워조차도 보기 어려울 지경. 이번 겨울의 해안도시는 무역 분쟁에 따른 난방연료 공급 차질과 꾸준히 불어오는 북동풍의 영향으로 대기상태가 제법 괜찮게 유지되어 왔는데, 오늘은 간만에 대륙 규모의 암세포다운 면모를 보여준다.
커피를 몇 모금 마시고 있으려니 부스스한 경태가 거실로 나왔다. 피곤한지 흰자위에 핏발이 약간 서있다.
“벌써 일어나셨습니까, 형님?”
“너야말로 더 잘 것이지 왜 벌써 나오는 거냐.”
“어쩐지 일어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얼른 나와 봤더니 이렇게 형님이 딱 깨어계시지 않겠습니까? 날이 갈수록 정확함을 더해가는 이 육감이 스스로도 두려워질 지경입니다.”
“그래…….”
“어젯밤엔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생은 무슨.”
“어디 보자……. 그 린페이인가 페이린인가 하는 여자는 아직 자는군요.”
경태가 보는 중앙 테이블 위의 감시 장비는 위층 침실의 카메라와 연결되어 있었다. 이른 새벽, 내가 린페이를 기절시켜놓고 위층을 나올 적에 부하들이 들어가 설치한 카메라다. 설치한 이유는 하나. 혹시라도 린페이가 나보다 먼저 일어나면 그에 맞춰 나를 깨워주기 위하여.
린페이는 약 세 시간이 더 흐르고서야 힘겹게 잠에서 일어났다. 멍하니 눈을 깜박이다가 내 부재를 깨닫고는 크게 놀라 좌우로 휙휙 고개를 돌린다. 그 다급함은 내가 침실을 나오기 전 머리맡의 탁자에 남겨둔 쪽지를 발견하고서야 겨우 해소되었다. 곧 돌아올 테니 놀라지 말고 기다리고 있으라는 내용의 쪽지였다. 내용을 확인한 린페이의 입가엔 안도와 기쁨의 미소가 번졌다. 내가 돌아올 때를 대비해 얼른 거울을 보는 모습이 보인다.
“슬슬 올라가봐야겠군.”
원격으로 문서 몇 개를 결재한 뒤 줄곧 「중화」의 코드 풀이에 몰두하고 있던 나는, 이번에도 끝내지 못한 풀이에 아쉬움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메리옘의 동생들을 다시 봐주기까지 남은 시간이 얼마 없는데 말이지.
“카메라는 내가 들어가는 대로 꺼라. 보여주기 민망한 꼴이 있을지 모르니까.”
“옙.”
경태의 대답을 뒤로 하고 외투를 걸친 난 컨시어지가 올려 보낸 물건들을 챙겨 위층으로 올라갔다.
“아…….”
침실로 들어서자, 인기척을 듣고 이불을 쇄골까지 끌어올린 린페이가 탄성을 흘린다. 그저 눈을 마주쳤을 뿐인데 행복감으로 녹아내리는 얼굴. 살갗 너머를 들여다보건대 연기로 꾸며내는 반응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꽃다발을 안겨주며 말했다.
“네가 깨어나는 순간에 물에 젖은 꽃의 향기를 맡을 수 있게 해주면 좋겠구나 생각했다. 조금 늦어버리고 말았다만.”
“아니에요!”
고개를 흔들고서 조금 잠긴, 그러나 벅찬 음색으로 말하는 린페이.
“전혀, 하나도 늦지 않았어요! 이건 정말이지…… 너무나도…… 세상에…….”
차마 말을 끝맺지 못하며, 린페이는 꽃잎에 맺힌 물방울로 손끝을 적셔본다. 층을 하나 올라오면서 공기 중의 수분을 장악하여 마력으로 응결시킨 깨끗한 이슬이었다. 꽃다발에 코를 대고 향을 깊게 들이마신 린페이가 눈가를 훔치며 웃는다.
“지금까지 받아본 모든 꽃다발 중에서 최고예요.”
그러고는 장미의 숫자를 하나 둘 셋 넷 헤아려보고서 다시금 표정이 밝아진다. 꽃다발의 중심에 있는 장미는 모두 아홉 송이. 남녀간엔 우리 사이 오래 가기를 바란다는 의미다.
난 담담하게 다른 선물을 건네었다.
“이것도 받아라.”
“네?”
“귀걸이다. 가짜를 하고 다니길래.”
예? 하고 잠시 눈을 깜박이던 린페이는 곧 말뜻을 이해하여 목덜미까지 붉어졌다. 그러곤 탁자에 빼놓은 제 귀걸이를 곁눈질하며 말을 더듬는다.
“저기, 그, 티가 많이 나던가요……?”
“아니. 단지 내가 전문가일 뿐.”
“…….”
달칵. 침묵 속에서 케이스를 개방한 린페이는, 내용물을 확인하고는 직전까지의 부끄러움을 잊고 눈을 크게 떴다. 그야 큐빅 넣은 가짜나 쓰다가 다이아몬드 여럿 박힌 진품을 달게 되었으니 오죽이나 벅찰까. 본디 모 공산귀족의 금고에서 나온 것을 꽌시용 비품으로 빼두었다가, 컨시어지를 시켜 베크룩스에서 받아오게 한 물건이다.
“제가, 이걸 정말 받아도 될는지-”
“난 네가 마음에 든다.”
“…….”
“해봐. 지금. 어울리는지 보고 싶다.”
“네…….”
침을 삼키며 끄덕인 린페이는 떨리는 손으로 귀걸이를 집어 제 귓불로 가져갔다. 그러나 떨림이 심하다 보니 핀이 좀처럼 맞는 자리로 들어가지 못한다. 실수가 거듭되자 린페이가 난처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게 왜 이러지? 죄송해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내가 도와주마.”
“앗…….”
상체를 가까이한 나는 귀걸이를 빼앗아 사냥감의 양쪽 귀에 차례로 끼워주었다. 이때 손놀림을 느리게 함은 귀하게 다뤄지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다. 이러는 내내 목 부근을 간지럽히는 건 쌔액 쌕 하는 더운 숨결이었다.
“됐다.”
손과 몸을 되돌린 나는 홀린 듯이 나를 응시하는 사냥감을 천천히 뜯어본 다음 한마디 했다.
“어울린다. 물건이 주인을 찾았구나.”
이에 대한 사냥감의 반응이란 반사적인 입맞춤이었다. 생각을 하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인 느낌. 비강에 텁텁한 구취가 감돈다. 지난밤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시달린 끝에 실신하듯 잠들었으니, 그런 사람의 입 냄새가 좋을 턱이 있을까. 그래도 나는 갈망 가득한 요구에 성실하게 응해주었다.
‘효과 확실하군.’
선물의 효과를 말하는 게 아니다. 이 사냥감의 심리장벽은 지난밤에 이미 무너져 내렸으며, 지금의 나는 그 결과를 확인하고 있을 따름이니.
입맞춤은 탁상시계의 분침이 눈금 두엇을 더 움직이도록 이어졌다. 마침내 입술을 뗀 나는 이마에 한 번 더 입을 맞춰주고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씻고 나와라. 식사는 해야지.”
“네.”
고분고분하게 대답한 린페이는, 내가 침실을 나서자 이불에 얼굴을 묻고 소리 없이 웃으며 아우성쳤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오직 기쁨만이 가득한 몸부림. 두 개의 문을 지나 거실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은 나는, 내가 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발장구를 치거나 뒹굴뒹굴 구르거나 엎드려 웅크린 채 조용한 환희의 비명을 지르다가 심한 근육통에 신음하거나 하는 등의 꼴들을 흥미롭게 감상했다.
린페이가 샤워실로 들어간 뒤에는 현관에서 마스터 베드룸까지 이어지는 경로를 눈으로 훑었다. 아무렇게나 던져진 스타킹과 속옷 등, 눈이 닿는 곳마다 남아있는 정사의 흔적들이 어젯밤의 기억을 복기하게 만든다.
신경신호의 흐름, 뇌와 체내의 화학적 상태 변화, 복측피개영역 및 내측전전두엽과 중격측좌핵의 쾌락중추 신경망 활성화도 따위를 눈으로 직접 봐가면서 행위에 임할 수 있다는 건 대단히 도움이 되는 힘이다. 상대의 반응이 연기인지 아닌지, 어디를 어떻게 해야 더욱 좋아하는지, 쉬어야 할 때는 언제이고 밀어붙여야 할 때는 언제인지가 더없이 명료하게 보이는 셈이니까. 연속적인 오르가즘은 상대의 체력을 소진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지난밤의 목표는 린페이의 뇌리에 다른 이에게선 찾기 어려울 쾌락을 새기는 것이었다. 결과를 평하자면, 기대를 넘어선 초과달성이었다고 해야 할 터.
마법의 시대가 돌아왔기에 더욱 용이해진 일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대개의 경우, 사랑이라는 감정은 뇌의 조건반사적이고 화학적인 중독 상태에 지나지 않는다. 흔히들 동경하는 진정한 사랑 어쩌고는 극히 희소한 예외일 뿐. 이 물질적인 대륙에선 당연히 그 정도가 더하다.
그런 의미에서 린페이는 사랑에 빠졌다고 해도 좋을 상태였다. 과연 날 온전히 사람으로 보고 있는가는 의문이어도, 어쨌든 방금 나를 마주한 순간 뇌와 신경계가 전형적인 중독증상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효과를 놓고 볼 때, 개인적인 호오만 아니라면 나 자신을 이용한 미인계를 자주 써봄직도 한데……. 심장이 펄떡거리는 인체해부인형과 알몸으로 침대를 뒹구는 일은 거듭 생각해봐도 역시 거부감이 드는 노동이다.
상념을 끊은 나는 아까 하다 말았던 코드 해석을 재개했다. 린페이가 무가치한 재단장을 마치고 불편한 걸음으로 나온 것은 거의 한 시간이 더 흐른 뒤의 일이었다.
“죄송해요. 오래 기다리셨죠……?”
“아니.”
다른 일만 없다면 이대로 온종일 해석에만 매달려도 좋다는 게 내 솔직한 심정이다.
아침보다는 점심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식사는 70평이 넘는 스위트의 넓은 식당에서 이루어졌다. 근육통이 보통 심한 게 아닐 터인데도, 창가의 2인용 원탁에 마주앉은 가운 차림의 린페이는 식사시간 내내 발장난을 치며 유혹을 시도했다.
하기야, 마약 중독자가 몸 아프다고 마약을 안 하는 건 아니지. 이러다 죽겠다는 두려움 속에서조차 결국은 주사바늘을 찌르게 되는 게 마약의 중독성이니까.
결국 나는 식후에 가까운 벽에 기대어 한 번, 그리고 함께 샤워를 하며 다시 한 번 예정에 없던 정사를 치름으로써 린페이의 중독을 심화시켜주었다. 불가피하게 체크아웃을 연장해야 했음은 물론이다.
헤어질 때가 되자, 린페이는 나를 꼭 끌어안은 채 놓아주려고 들지를 않았다.
“저, 이렇게 행복한 기분이 드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에요.”
“그러냐.”
“네. 그런데 그만큼 불안한 기분도 들어요. 이 행복이 오늘 하루로 끝나는 건 아닐까 해서.”
“말했을 텐데. 네가 마음에 들었다고.”
“또 불러주실 건가요?”
“그렇다.”
“약속하시는 거죠?”
“약속하마.”
“입맞춰 주세요.”
아까보다 후각적으로 편해진 키스를 나눈 뒤에, 제가 사냥꾼인 줄 아는 중독된 사냥감은 내 가슴에 대고 이마를 비볐다.
“헤어지고 싶지 않아요……. 저기, 지금 제가 선생을 따라가면 폐가 될까요?”
“되겠지. 나는 일에 방해가 되는 여자를 싫어한다.”
싫어한다, 는 말이 나오기 무섭게 날 붙잡고 있던 손과 팔이 흠칫 놀라듯이 떨어진다. 이후 내가 객실을 나서기 직전까지도, 린페이는 그 자리에 겁먹은 동물처럼 못박혀있었다. 난 문 손잡이를 잡은 채로 몸을 돌려 린페이를 응시했다.
“린페이.”
“네?”
“조만간 다시 보자.”
“……예! 꼭이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런데 혹시 제 연락처는-”
철컥. 린페이의 마지막 외침은 닫히는 문에 끊어졌다.
불안을 떨치기 힘든 기다림은 그 뒤에 올 기쁨을 극대화해줄 장치다.
나는 오후 세 시가 다 되어서야 겨우 베크룩스로 복귀했다. 계획보다 더 많은 시간을 허비한 탓에 부족한 수면을 보충하긴 어려울 성싶었다. 마력에 의한 생체강화나 「생명」의 운용도 뇌에 축적되는 피로를 근본적으로 해소해주지는 못했다.
뇌는 너무 복잡한 기관이다.
나를 맞이한 수연은 잠시 멈칫 하더니, 내 가까이로 코를 가져다대고 냄새를 맡았다.
“냄새가 나나?”
“예. 지우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러지.”
다시 치장한 린페이에게 마지막까지 붙들려있던 탓에 향수 냄새가 밴 모양이다. 오면서는 몰랐지만, 후각은 같은 자극에 쉽게 둔감해지니까.
수렵용 탈취제(Human Scent Remover) 스프레이는 사냥꾼과 사냥감 공동의 상비품들 가운데 하나다. 수연 녀석은 제 아랫사람에게 손짓하여 스프레이를 가져오도록 했다.
“이리 줘라. 내가 할 테니.”
“아뇨. 제가 해드리겠습니다.”
그렇다면야. 나는 잠시 팔을 벌리고 서서 가만히 탈취제 분무를 받았다.
“됐습니다.”
“고맙다.”
“별말씀을.”
수연은 까딱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