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다만 신께서 구하실 것이다 (11)
가오슈센은 경청자의 무언으로 다음 말을 요구했다. 난 한 바퀴 돌린 술잔을 홀짝이고서, 우선은 공감대 형성을 위한 도입부에 해당하는 말들을 풀어놓았다.
“주지하고 계시겠지만, 이젠 합법적인 무력을 보유하지 않고선 농사조차도 짓지 못할 시대가 도래하고 말았습니다. 흩어진 개인들의 품앗이로는 광활한 자연과의 대결에서 승리를 장담하기 어렵지요.”
농사는 원래부터가 자연과 인간의 끊임없는 대결이었다. 한국처럼 국토가 작고 야생동물의 종적 분포가 한정된 나라라면 총기소유에 관한 법제를 조금 고치는 것만으로도 무장한 개인들이 각성체 유해조수들에게 얼마간 대응할 수 있겠으나, 중국은 그게 가능할 환경이 아니다.
“거기에 흑해자당을 지도하는 마오공의 무리는, 이제 그들의 비뚤어진 마오쩌둥주의에 의거하여 농촌해방을 가장한 농촌침탈을 혁명의 최우선으로 여길 공산이 큽니다.”
좌중의 구성을 고려하여 비뚤어졌다고 말하긴 했으나, 실은 그것이야말로 마오쩌둥의 가르침 그 자체다. 마오쩌둥식 혁명은 본디 농촌에 해방구를 건설하는 데에서부터 시작하는 것.
“마지막으로 계투(械鬪) 문제가 있겠습니다. 서로 다른 마을 주민들이 생존권을 놓고 벌이는 그 몰지각하고 야만스러운 칼부림들. 이제까진 그게 공장의 배후지와 농민공들의 거주지에서 벌어졌지만, 앞으로는 과거와 같은 마을과 마을 사이의 총력전으로 회귀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맞소.”
가오슈센은 내 예측에 선선히 동의했다.
계투는 중국 대륙의 유구한 전통이다. 중앙정부의 행정력이 대륙 구석구석까지 미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공권력의 사각지대에선 마을과 마을 간의 전쟁이 벌어지기 예사였다. 가뭄이 들면 저수지의 사용권을 놓고 싸우고, 지진이나 홍수 등의 재난이 일어나면 식량 확보를 위한 침략전쟁을 벌이는 식. 그래서 역사 좀 있다 하는 중국의 집성촌들은 하나같이 요새와 같은 구조를 취하고 있다.
오늘날의 계투는 주로 공장의 일자리를 두고 벌어지는 패싸움으로 변질되었다. 도시로 상경한 농민공들이 한정된 일자리를 지키거나 빼앗기 위해 출신지로 편을 갈라 칼부림을 벌이는 것이다.
중국 공안은 이러한 집단살육을 못 본 척 넘어가는 게 보통이었다. 언제나 남아도는 노동력인 농민공들의 죽음은 공권력이 신경 쓸 바가 아니었던 까닭. 가난한 자들이 흘리는 피가 그들이 사는 시궁창을 벗어나지 않는 한, 사회의 양지에서는 보기 좋은 질서가 유지된다.
“그러므로-”
주의를 환기하며 여상하게 이어가는 말.
“향상된 기동력과 집중된 전투력을 보유한 무력집단의 보호는, 앞으로의 농업에 있어서 종자와 비료만큼이나 필수불가결한 요소라 하겠습니다. 스스로를 지켜낼 힘도, 자본도 없는 농민들 입장에선 힘과 자본을 다 가진 집단에게 땅을 팔고 보호를 받으며 일하는 편이 더 나으리라는 말이지요.”
“백번 옳은 말씀이오만, 당사자들의 생각이 거기까지 닿을지 의문이오. 미개한 농민들에겐 뿌리 깊은 소자산계급(쁘띠-부르주아) 근성이 있는지라.”
“생각이 안 닿으면 닿게끔 이끌어주는 게 사회지도층의 역할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끝까지 고집스럽게 따르지 않는다……. 그런 자들은 결국 불운한 사고들을 피하지 못할 테지요. 그것은 모두에게 슬프고 유감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저항하는 자들에겐 슬프고 유감스러운 사고들을 만들어주면 그만 아니겠느냐는 암시에, 가오슈센을 위시한 이 분야의 전문가들이 공범자들의 웃음을 머금는다.
찾아보면 방법은 많다. 각성체 유해조수들을 죽이는 대신 특정 방향으로 몰아서 쫓아내기만 해도, 보호범위 바깥의 농지들이 초토화를 피하지 못할 테니까. 아니면 무죄방면과 대가를 약속하고 민간 엽사들을 투입해 인간사냥을 벌이는 수도 있다. 농민들이 억울함을 호소할 공안과 사법부가 모두 가오슈센의 손아귀에 있기에 가능한 수단이다.
‘내버려둬도 어차피 필연적으로 벌어질 일들이지.’
내가 늘어놓은 말들을 교활한 공산귀족들이 생각해보지 않았을 리가 없다. 다만 보다 큰 이익을 낼 다른 방편이 없을까를 고민하는 중일 따름이겠지. 한정된 자원을 어디에 투자해야 경쟁자들보다 앞서나갈 수 있을는지를.
양반은 못 되는 가오슈센이 바로 그 부분을 짚고 들어온다.
“그게 농민들에게는 좋은 이야기가 되겠소마는, 우리가 노력을 경주할 사업으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을지는 잘 확신이 서질 않는구려.”
그러고는 진중한 어조로 말한다.
“우리는 국가번영과 국체수호의 막중한 책임을 짊어지고 있는 중요한 사람들이오. 따라서 우리에겐 항상 국가를 위한 최선의 헌신이 무언지를 궁리해야 할 책무가 있는 것이오. 이윤과 입신은 그 선택에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이지.”
“내가 이 사업에 어느 정도의 확신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싶은 겁니까?”
“그렇소. 정확히는 얼마까지 투자를 할 마음이 있는가를 알고 싶소. 그 금액의 크기가 곧 그대가 지닌 확신의 크기일 테니 말이오.”
“함께 경영을 하자, 이 말입니까?”
“왜 아니겠소? 그대는 나와 의로 맺어진 형제잖소. 좋은 건 함께 나누어야 마땅하지.”
말은 이렇게 번드르르 하지만, 결국엔 내 자산을 제 손이 닿는 범위 내에 최대한 많이 붙잡아놓고 싶은 거다. 중국 땅에서 합법적인 영역에 묶여있는 자금은 언제라도 압류 가능한 인질이 되어줄 테니까. 즉 이 자리를 마련한 목적성과 합치하면서 사적 이익도 추구할 수 있는 일거양득의 한 수다.
난 눈길을 옆으로 돌렸다.
“린페이.”
“예?”
“네가 가장 좋아하는 숫자가 뭐지?”
“제가…… 좋아하는 숫자요?”
“그래.”
갑작스러운 질문을 받은 소동물이 곁눈질로 주변의 분위기를 살핀다. 나는 긴장한 동물의 등골을 손끝으로 쓸어 올리고 내리기를 반복하며 답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모두의 주목을 받으며 짧은 시간 열심히 머리를 굴린 린페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66이요.”
말해놓고도 실수를 한 것은 아닌지 조마조마해하는 꼴이 우습다. 66은 만사가 순조롭다는 말(流流)과 발음이 같아 길하게 여겨지는 수. 제 딴엔 순발력 있게 큰 수를 떠올려 내놓은 답일 터였다.
“그렇구나. 잘 말해주었다.”
고개를 끄덕인 난 시선을 정면으로 되돌리며 말했다.
“부서기와 새로운 사업을 함께할 수 있다니 영광입니다. 나는 이 사업에 66억 위안을 투자하도록 하죠. 이 정도면 확신이 서십니까?”
좌중에 쥐 죽은 듯한 정적이 내려앉는다. 내게 기댄 린페이의 심장이 터질 듯이 빠르게 뛰었다. 멍하니 벌어진 입술 사이로 떨리는 숨결이 새어나온다. 지금껏 모호하던 내 재력을 분명하게 확인한 순간인 것이다. 흥분되지 않을 수 없겠지. 나를 가까이에서 응시하는 두 눈엔 순도 높은 열기, 뜨거운 갈망과 애타는 목마름이 깃들었다. 이 먹잇감을 결코 놓치지 않겠노라 다짐하는 육식동물의 시선. 황금이 주는 두근거림은 흔들다리의 그것을 능가한다. 그리고 세상에 중국인들만큼 황금을 사랑하는 자들도 드물었다.
66억이면 현재 환율로 한화 9천억에 조금 못 미치는 거액.
그러나 말이 9천억이지, 내게는 사실 큰 의미가 없는 허수와도 같은 돈이었다.
‘톤 단위로 쌓여있는 위안화를 다 반출하기도 곤란한 마당에, 그깟 66억이 무슨 대수라고…….’
내가 털어댄 귀족들의 금고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던 자산이 바로 빳빳한 위안화 뭉치들이었다. 양이 많아도 지나치게 많아 해외로 반출을 한다 한들 세탁의 어려움이 크고, 위안화의 수요처가 달러만큼 다채롭지도 않으니, 중국 내에서 쓸 기회가 있다면 써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66억 위안을 일시에 지급할 필요까진 없으므로, 조직 소유의 정킷과 카지노, 그 외 가오슈센의 수중으로 떨어진 여러 사업장들을 통해 세탁한 자금을 꾸준히 공급하면 충분할 터였다.
“으허, 으허허허허!”
가오슈센이 손으로 나를 가리킨다.
“저게 사내지! 저게 사내야! 다들 보라고! 저게 나 가오슈센이 형제로 삼은 사내다!”
또 한 차례 쏟아지는 동의와 찬사의 물결. 그러나 이번엔 열렬함의 정도가 다르다. 그야 배금주의의 망자들이 돈 이야기를 들었으니 보다 진심으로 반응할 수밖에.
“이거야 원.”
진한 흥분이 여운을 남기고 물러간 뒤에, 상기된 가오슈센이 짐짓 곤란한 기색으로 하는 말.
“동사장께서 그만큼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면 나도 그에 걸맞는 성의를 보여주어야 마땅하겠는데, 나를 필요로 하는 나랏일이 다양하니 무작정 하나의 사업에만 전력투구하기는 어렵고……. 이 일을 어찌해야 좋을꼬…….”
요컨대 내 투자액이 너무 커서 또 문제라는 말이다. 함께 수립할 농업회사의 지분을 대등하게 나눠가지고는 싶지만, 성공할 확률이 백 퍼센트는 아닌 사업 하나에 거액을 투자하기는 싫어서 생기는 문제. 여기서 최대한 지출을 아껴 다른 데다 넣었으면 싶은 것이다. 다양한 나랏일 운운한 건 계란을 나누어 담고 싶다는 뜻이니까.
돈도 많은 새끼가.
장담하는데, 66억 위안은 가오슈센의 금고 속 위안화 총량의 5푼에도 미치지 못할 거다. 원래 가지고 있던 돈에 내가 얻은 것과 동일한 금액이 다시 더해졌을 터이므로. 그렇게 처치가 곤란할 만큼의 현금을 쥐고 있으면서도 그 돈을 금고 밖에서 굴리는 데엔 인색하니, 부패관료로서는 대성할 자질을 지니고 있을지언정 투자가나 사업가 노릇을 하기는 어려울 인간이었다.
뭐, 쓰지도 못할 돈에 대한 강박적인 집착은 비단 가오슈센만이 아니라 이 나라 모든 공산귀족들의 공통된 부덕이긴 하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허수와도 같은 돈을 내밀어도 깊은 감명을 받는 것이고.
‘양보를 하기는 해야겠지.’
어차피 가오슈센의 덕을 보지 않고선 첫 삽도 뜨지 못할 사업. 공권력의 비호는 사업규모가 커질수록 값어치가 높아지기 마련이거니와, 차지하는 지분의 비율이 높아질수록 예산지원을 끌어오려는 가오슈센의 노력도 커질 터라 투자가로서는 넉넉하게 양보를 할 만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너무 시원하게 양보를 해버려도 곤란했다. 내가 볼모로 잡힌 돈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고 마는 데다, 가오슈센의 버르장머리가 나빠질 게 뻔한 까닭이다. 시원하게 구는 것도 한두 번이지, 매번 그런 식이면 호구 취급을 당하기 십상.
고심하는 척 공연히 술잔을 돌리던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침묵을 끝냈다.
“굳이 여기서 세부적인 사항들까지 다 획정할 필요는 없겠지요. 술도 있고 미녀도 있는 자리에서 따분한 이야기가 지나치게 길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허허허, 그럽시다. 그럽시다. 이거 내가 지나치게 몰두해버린 모양이로구만. 설마하니 그대와 같은 사내 중의 사내가 한 번 한 약속을 번복할 리는 없겠지!”
웃는 낯으로 은근히 강조하는 말이 적잖게 아니꼽다.
조건의 세부적인 조율은 역시 미주에게 맡기는 편이 좋겠지. 내 앞에서 털어놓았던 구역질나는 연심이 벌써 식어버리지는 않았을 테니. 조일 때까지 조인 끝에 슬쩍 풀어서 양보를 해주라 하면, 공산귀족은 그걸 자신에 대한 호의로 받아들일 것이었다. 무언가에 마음 사로잡힌 인간이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듣고 믿고 싶은 것을 믿는 동물이니까.
내가 거액의 투자금을 선뜻 내놓는 꼴을 본 나머지 귀족과 자본가들은 앞 다퉈 서로 다른 사업 아이템들을 입에 담고 나섰다. 이들에 대한 투자도 가오슈센에게 힘을 실어주는 일이었기에, 나는 괜찮다 싶은 아이템마다 천만 위안 단위의 투자를 약속해주었다.
이 같은 약속이 거듭됨에 따라 린페이의 몸가짐은 교태를 더해갔다. 단 한 순간도 내게서 시선이 떨어지질 않는다. 허리를 받쳐 안은 채 귓바퀴를 어루만지며 몇 번의 진득한 입맞춤을 나누고 나니, 이만하면 보여주기는 충분하지 않은가 싶다.
이만큼 가망을 보여주었으니 공산귀족이 이 여자에게 애국적인 임무를 부여함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요, 나는 그 덫에 빠져드는 시늉을 하면 그만이겠지.
맞은편의 가오슈센이 흐뭇하게 묻는다.
“아까부터 지켜봤소만, 그 아이가 제법 마음에 드시는가 보오?”
난 고개를 끄덕였다.
“교양도 있고, 미모도 있고, 목소리도 듣기 좋고. 구석구석 예쁘지 않은 부분이 없군요. 오늘 하루의 인연으로 끝내기 아까운 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하! 동사장의 마음이 그러하다면 아예 가져버리는 것이 어떻소?”
“얼나이(二奶/첩)로 삼으란 말씀이신지?”
“왜 아니겠소?”
“흠……. 아시겠지만 난 끊임없이 여러 나라를 돌아다녀야 하는 처지라, 누군가를 나만 바라보도록 묶어두는 건 내키지 않는군요. 기다리는 사람이 외로움을 탈 것 아닙니까. 마음에 드는 아이에겐 차마 하지 못할 짓이지요.”
“오호, 의외로 낭만적인-”
“저는 괜찮아요!”
가오슈센의 말을 자르며 소리를 높여 끼어드는 린페이. 어지간히 마음이 급했는지 내뱉는 톤이 비명에 가까웠다. 눈을 돌려 바라보자, 제 실수에 당황해 목덜미까지 붉어진 린페이가 상석의 공산귀족에게 허둥지둥 사과하고는, 몸을 움츠린 채 툭툭 끊어지는 경황없는 말들을 늘어놓는다.
“저는, 정말로 괜찮아요. 1년에 단 하루만 뵐 수 있다고 해도, 그래도 선생만 괜찮으시다면, 저는 선생을 섬기고 싶어요. 비록 오늘 처음 뵈었어도…… 선생처럼 훌륭하신 분은 죽을 때까지, 평생 다시 만나지 못할 거라는, 그런 확신이 들어요. 아주 강하게요.”
일생일대의 사냥감을 놓칠까 봐 조바심을 내는 티가 역력했다. 역시 고독으로서는 한참이나 설익은 인간이다.
“좋게 봐주니 고맙구나.”
“진심이에요! 전 언젠가 선생 같은 분의 여자가 되는 게 평생의 소망이었어요!”
“뭐, 알았다.”
“그럼…….”
간절한 기대를 품고 바라보는 페이린에게, 나는 유보적인 답을 돌려주었다.
“내가 이 도시를 뜰 때까지 아직 며칠의 시일이 남아있으니, 그동안 몇 번 더 만나보면서 마음을 정하도록 하자. 우선은 오늘밤부터. 어떠냐?”
“네! 부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린페이.
이렇게 노력을 기울인 결과, 연회가 끝나기까지 가오슈센의 입에선 대놓고 귀화를 권하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내게 미인계가 먹히지 않는 것 같았으면, 그리고 가오슈센의 수중에 볼모로 잡힌 금액이 적었으면 사정이 달랐겠지. 술과 여자로 내 대가리를 녹이려 애쓰며, 원하는 답이 나올 때까지 끈덕지게 권하고 또 권했을 게 뻔하다. 그러고도 내가 끝내 제안을 거부하면 불만을 품든 경계심을 품든 했을 것이고.
이래서 로마에선 로마법을 따라야 하는 거다. 배금주의자들의 법과 관습이 아무리 더럽고 천박할지라도, 나는 생존이 최우선인 사냥꾼이자 이윤을 남기면 그만인 사업가이지 부덕을 바로잡는 혁명가 따위가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