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153화 (153/561)

#19. 다만 신께서 구하실 것이다 (8)

가오슈센이 나를 초대한 장소는 바이윈(白云) 산기슭의 호화 사교클럽 핀윈줘(品雲座)였다. 지난달 시당 서기의 비밀금고를 털 적에, 버려진 개들이 무리지어 우짖던 산간에서 그리 멀지 않게 스쳐지나갔던 바로 그 장소. 부하들과 마찬가지로 추가 진급이 확정된 상태인 가오슈센의 권력은, 공산귀족들의 전용 클럽을 말 한마디로 비울 수 있을 만큼 강해진 상태였다.

내가 탑승한 헬기는 클럽 앞 인공호수 남쪽의 초지에 착륙했다. 초지의 면적은 헬기 여러 대가 줄줄이 착륙하고도 남을 만큼 넓었다. 먼저 착륙한 호위기의 부하들이 주변에 듬성듬성한 경계선을 치는 모습이 보인다. 원래부터 경비를 맡고 있던 공안 경관 및 사영 병단의 엽사들은 내 부하들의 움직임에 일절 간섭하지 않았다.

문을 열고 내리자, 빳빳한 제복을 입고 부동자세로 대기하던 1급 경사(一级警司)가 바람을 뚫고 다가와 내게 각 잡힌 경례를 올렸다.

“귀빈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본관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나는 부하들을 동반하여 넓은 길을 걸었다. 테니스 코트 두 개와 커다란 야외 수영장을 지나, 클럽 본관에 도착하니 옆쪽의 풀밭 위로 덩그러니 놓인 야외 테이블 하나가 눈에 띈다. 테이블 위엔 어울리지 않게도 웬 레스토랑의 상호가 붙은 작은 가격표가 세워져 있었다.

돼지 족발요리(猪手) 98위안, 진한 어묵탕(浓汤煮鱼腐) 78위안, 토마토 달걀 볶음(西红柿炒蛋) 48위안…….

가격표 아래엔 이러한 단서조항이 붙어있다.

「위 메뉴는 본관 객실을 이용하시는 고객님만이 주문 가능합니다. 객실 이용료 및 예약에 관해선 본관인 핀야탕(品雅堂)의 안내 데스크(咨询台)에 문의하여주십시오. 감사합니다.」

난 속으로 실소를 삼켰다.

‘더하고 뺄 것도 없는 공산당식 전시행정이로군.’

언젠가 이 핀윈줘와 같은 호화 사교클럽들이 부패의 온상으로 지목되었을 때, 베이징 중앙정부는 전국의 호화 클럽들을 폐쇄하고 일반 민중들도 이용 가능한 시설로 전환하라는 명령을 내린 바 있다.

그 결과가 저 쓸쓸한 테이블과 말 같지도 않은 가격표일 것이었다. 요리 가격이 헐값이면 뭐하나. 객실 이용료가 한화로 백만 원 단위인데. 평범한 시민들은 기나긴 진입로 저편, 닫혀있는 철문 앞에서 가격이나 물어보고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설령 돈이 있다 한들 평범한 사람들의 예약을 받아주기나 할는지 의문이고.

클럽을 지키는 이능보유자 엽사들은 모두 대학도시에서 선발된 풋내기들이었다. 가오슈센은 갓 뽑혀서 아직 기본적인 훈련조차 받지 못한 자들을 데려다가 제복을 입히곤 장식품처럼 세워놓은 것이다. 다른 귀족들에게 어지간히 과시를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날 안내하던 경사는 본관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려 부동자세를 취했다. 자신은 이 이상 안으로 들어갈 자격이 없다는 듯이.

본관 앞엔 백색의 셔츠와 쪽빛 투 버튼 재킷, 같은 색의 H라인 스커트로 복장을 통일한 여자들이 일렬횡대로 서있었다. 신체적 굴곡과 이목구비가 뚜렷하여 객관적으로 미인이라 부를 법한 여자들은, 두 손을 배 위에 겹쳐두고 허리를 숙이는 한국식 인사로 나를 맞이했다.

공산귀족 나름대로 공을 들였다는 건 알겠으나, 벌써부터 피로가 느껴진다. 내 값진 시간을 왜 낭비해야 하는지. 권력자와 엮이는 사업이라는 게 매양 이런 식이긴 하지만.

뭐, 어떤 의미로는 안심이기도 하다. 이런 데 정력을 할애하는 등신이 만에 하나라도 미주의 마음을 얻을 리가 있나. 비합리적인 배신을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기다리던 여자들 중 하나가 미소를 머금고 나긋한 태도로 말한다.

“저희 핀윈줘 일동은 귀하신 분의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자, 안으로 드시지요. 원하시는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을 것입니다.”

유창한 표준중국어로 이렇게 말하는 금발벽안의 여인은 금빛 명찰에 아오커사나(奥克萨娜/옥사나의 중국어 표기)라는 이름을 새기고 있었다. 필시 클럽의 관리자가 가난한 동유럽 어딘가에서 돈다발로 후려치다시피 채용했을 장난감 인형이다.

부하들 일부를 밖에 대기시키고서 본관으로 들어서자, 데스크가 있는 곳에서부터 달콤한 향수와 분 냄새가 감돌았다. 성욕을 불러일으키는 농밀한 향기들. 눈길이 닿는 곳마다 그러한 향기를 머금은 여자들이 서서 친절한 미소를 머금는다. 그러나 내장 속 내용물까지 들여다보는 눈을 가진 장애인에겐 그저 향만 그럴싸한 똥자루들에 불과했다.

가오슈센은 연회실의 상석에 앉아있었다. 나를 발견한 그는 내게 자리를 권하고는, 테이블을 중심으로 둘러앉아있던 모두를 과장된 어조로 일으켜 세웠다.

“처음 보는 사람이 많겠지? 모두 인사드리게. 이 가오슈센의 의로 맺어진 형제이자 대토벌의 숨겨진 영웅인 리 동사장일세. 자세한 이야기는 하기 어렵지만, 대토벌 당시 나를 물심양면으로 아주 크게 도와준 은인이지.”

연회실을 채운 면면은 대부분 내가 미주를 통해 갱신되는 정보들로 기본적인 인적사항 정도는 숙지하고 있는 자들이었다. 즉 가오슈센의 계파에 들어있는 인간들이다. 외국인 사업가들 앞에선 하나하나가 소왕국의 왕처럼 행세할 중하급 귀족 및 공산자본가들이 각자 이름과 직급을 대며 내게 정중한 인사를 건넨다.

그 같은 인사들에 이어 가오슈센이 흥겹게 말한다.

“초대에 응해줘서 고맙소, 동사장! 내 동사장과 그렇게 많은 생사고락을 함께했음에도 지금껏 제대로 대접할 기회가 없지 않았겠소? 그래서 함께 거둔 승리를 축하할 겸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하였으니 부디 마음껏 즐겨주시길 바라오!”

이 인간, 벌써부터 이상할 만큼 들떠있다. 얼굴도 술에 취한 듯이 붉다. 장소가 장소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원래부터 놀기를 좋아하는데 그동안 놀 기회가 없었기 때문일까.

자리에 앉은 사내새끼들은 내가 들어오기도 전부터 혈류가 왕성해진 상태였다. 배 나온 수컷들이 슬금슬금 발기할 채비를 하는 꼬라지가 결코 보기 좋은 구경거리는 아니었으므로, 나는 관자놀이로 기어오르려는 손을 다스리며 대꾸했다.

“즐길 때 즐기더라도 일부터 먼저 마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서기? 우리가 합의해야 할 사항들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만.”

“하하하! 동사장도 참. 주변이 온통 몸에 좋고 눈 밝아지는 아름다움들로 가득한데, 이럴 때조차 일 이야기를 먼저 꺼내시는 게요? 전에도 말했듯이 참 존경스러운 냉정함이요마는, 예쁘게 단장하고서 귀한 객 기다리던 애들은 섭섭하다고 하겠소이다.”

이러면서도 가오슈센은 제 가까이 있던 여인들 중 하나에게 턱짓을 해보였다. 테이블 아래의 가방으로부터 서류를 꺼내는 품새를 보건대 미주 손에 죽은 지아(佳)인지 뭔지를 대신해 가오슈센이 새로 들인 비서인 듯했다. 시선을 내게 고정시키고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다가오는 걸음걸이가 전문교육을 받은 모델을 연상케 한다. 방향이야 어쨌든, 스스로를 치열하게 갈고 닦은 한 마리의 고독(蠱毒)인 것이다.

“여기 있습니다, 선생님.”

비서가 교태로운 손길로 건네주는 서류철을 받아 살펴보니, 이미 미주가 검토한 흔적들이 남아있었다. 완전히 동일한 두 개의 계약서 뭉치, 그 페이지마다 반씩 나누어 찍혀있는 붉은 도장들. 지분 분배에 관한 항목들을 속독으로 훑은 나는 수십 개의 서명을 기입함으로써 각각의 계약서 뭉치를 완성했다.

뭉치 하나를 돌려받은 비서는 눈웃음을 치고서 또각또각 제 주인에게로 돌아갔다. 가오슈센은 계약서에 들어간 내 서명을 유심히 들여 보다가 물었다.

“동사장. 내 박 여사에겐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였소만, 난 이 자산들이 명목상으로나마 미국 회사로 넘어간다는 사실이 못내 신경 쓰이오. 이거 나중에라도 문제가 될 여지는 없겠소?”

내가 쓴 서명은 유령회사의 대표이사 신분을 이용한 것이었다. 회사의 주소지는 미국 델라웨어 주의 최대도시인 윌밍턴으로 적혀있다. 나는 느긋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일 없으니 안심하시길.”

“어찌 그리 확신하시오? 나도 이유나 좀 압시다.”

“이유라…….”

세계적으로 사업을 벌이는 이 치고 델라웨어의 명성을 모르는 이는 드문데, 가오슈센을 포함한 공산귀족들은 의외로 대륙 바깥의 사정에 어두웠다. 난 잠시 속으로 생각을 정리하고서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미국엔 나 같은 사업자들이 즐겨 거점을 차리기로 유명한 동네가 몇 군데 있지요. 대표적인 게 델라웨어, 네바다, 뉴멕시코, 그리고 와이오밍의 네 개 주입니다. 부서기께선 이 네 개 주의 공통점이 뭔지 아십니까?”

“글쎄, 잘 모르겠구려.”

“유한책임회사를 등록할 때 설립자 개개인의 신상정보를 일절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해당 회사의 명의로 은행계좌를 개설할 때도 마찬가지지요.”

“그럼 완벽한 익명계좌란 말이오?”

가오슈센을 위시한 공산귀족 및 공산자본가들이 귀를 기울인다. 이들도 익명계좌를 이용하고는 있을 터이나, 공산당이 지배하는 대륙의 금융전산망에서 완전한 익명성이란 성립 자체가 불가능한 개념이었다. 그러므로 잘라낼 꼬리를 계좌의 숫자만큼 준비해두고도 일상적인 불안에 시달리는 게 이들의 숙명이었다.

난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습니다. 업계 관계자들은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도서관 회원카드보다도 정보가 적고 부정확한 계좌라고.”

“오호, 그런 건 저 바하마나 파나마 같은 데서나 가능한 일인 줄로 알았는데…….”

탄성을 흘린 가오슈센이 추가로 묻는다.

“그래도 관계당국이 작정하고 추적하면 꼬리를 밟히지 않겠소? 거 왜, 요즘 우리에 대한 미 제국주의자들의 지랄이 도를 넘어서고 있잖소? 중국에서 넘어온 자금이 좀 수상하다 싶으면 분명히 추적을 해볼 것 같은데 말이오. 그쪽에서 먼저 난리를 치면 우리 중앙정부 역시 냄새를 맡게 될 것이고, 우리는 여우사냥(獵狐)을 당할 걱정에 잠을 설쳐야 할 테지.”

여우사냥이란 국내외에서 부패관료를 잡아내는 중국정부의 활동을 말한다. 난 다시금 머리를 저었다.

“역시 오지 않을 미래입니다. 적어도 내가 실수를 범하지 않는 동안에는.”

“어째서?”

“델라웨어는 사람보다 회사가 더 많은 땅이니까요. 그 수는 물경 백만을 넘어가지요. 그리고 그 계약서에 적힌 유령회사의 주소지, 윌밍턴 노스 오렌지 1209번가는 같은 주소로 법인을 등록한 회사만 30만 개에 달하는 곳입니다.”

“건물 한 동을 30만 개의 회사가 공유한다고? 내가 지금 맞게 들은 거요?”

“예. 그중엔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회사와 금융기관들도 많습니다. 애플, 구글, GM, 월마트, 도이치방크 등. 그 건물 하나에서만 매해 수십억 미원(달러)의 탈세가 이루어지지요. 경제적으로는 전 세계에서 손꼽히게 어두운 심연들 가운데 하나라 하겠습니다.”

“허어…….”

“하여간, 그 많은 회사들의 자금이동을 일일이 다 추적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을뿐더러, 조세피난처 노릇으로 재미를 보는 주정부에게도 손해가 막심할 일입니다. 연방정부가 대대적인 조사를 하려 들면 주정부 차원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제동을 걸겠지요.”

“과연, 과연.”

“마지막으로, 막대한 자금을 뿌려가며 미국 대선을 좌우하는 정치활동위원회(슈퍼 팩)들 다수가 같은 주소지를 쓰고 있으니, 전직 대통령들을 포함하여 내로라하는 정치가들과 기업가들을 줄줄이 청문회에 세울 작정이 아닌 이상 누가 미쳤다고 그 벌집을 건드리겠습니까? 그러니 정해진 세금만 내면 이보다 안전한 그늘이 없지요.”

비록 내가 거기에 유령회사를 세우긴 했어도 세금 하나는 확실하게 낸다. 유령회사를 거치는 자금이 워싱턴의 정가나 적성국가, 테러단체 등으로 대놓고 흘러들어가지 않는 한, 연방 국세청과 CIA, 그리고 FBI는 내 작은 장난감에 아무런 관심이 없을 것이다.

나는 숨을 돌리고서 말을 일단락지었다.

“날 믿으십시오, 부서기. 나는 알고 보면 대단히 편집증적인 인간입니다. 특히 내 일신의 안전에 대해서는 말이죠.”

내 설명엔 약간이나마 생략된 부분이 있었다. 회사 자체는 익명으로 설립하더라도 연례 보고서엔 반드시 설립자들의 실명과 주소를 기입하도록 법이 개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고서를 제출하지 않을 경우의 처벌이 최대 백 달러의 벌금에 불과하기에, 많은 회사들은 그냥 벌금을 내고 보고서 제출을 생략해버린다. 이러면 주 법무장관의 수사 대상에 올라가지만, 그러한 수사 대상이 누적으로 수십만 개가 넘고 주정부의 수사의지도 제로에 수렴하므로 사실상 있으나마나한 면피용 규정이었다.

‘보고서를 낸다 한들 일일이 확인하지도 않지.’

무엇보다, 미국은 중국의 여우사냥을 가장 강력하게 차단하는 국가다. 고작 열 개 남짓한 정킷 기업들의 지배구조 변화는 중국 정보당국이 미국의 신경을 건드리면서까지 움직일 만한 건수가 되지 못했다. 그 정킷들이 높으신 분들의 유흥과 자금세탁 수단이기에 더더욱 그러하고.

가오슈센이 허허 웃는다.

“내가 언제는 동사장을 믿지 않았겠소? 단지 무지로 인한 불안이 있었을 뿐이라오.”

그러고는 계약서 뭉치를 비서에게 넘겨주며 짝짝 손뼉을 친다.

“자, 나머지 이야기는 먹고 마시고 즐기면서 나누도록 하십시다.”

손뼉을 치는 게 신호였는지, 기다리던 여자들이 연회장 전면의 무대로 올라서서 자세를 잡는다. 다양한 복색과 다양한 인종. 환한 조명 아래 주르륵 선 대열이 마치 판매를 기다리는 상품들의 쇼케이스와 같다. 주최자는 제 딴엔 친절을 베푼답시고 순서를 양보했다.

“동사장 그대는 이 자리의 하나뿐인 주빈(主賓)이오. 몇 명이라도 좋으니 시중을 들어줄 아이들을 고르시구려. 오늘이 처음인 아이들도 많다고 들었소.”

그러고는 여자들에게 크게 소리친다.

“오늘 동사장의 눈에 드는 아이는 이 가오슈센이 확실하게 밀어준다! 니들이 뭘 꿈꾸든 간에 후원자 하나 있으면 인생이 달라지는 거 알지? 처신 잘하라고!”

이러자 무대로부터 돌아오는 기대 어린 화답들. 하나하나의 음색은 맑고 깨끗한데, 그 맑음 너머의 인간은 사과박스 속 지폐다발들의 색채처럼 건조하고 칙칙하기 그지없다.

오늘은 전처럼 싸움이 급하다는 핑계를 대기도 곤란하니, 이쯤 되면 무의미한 시간낭비에 조금이라도 의미를 더할 방도를 찾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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