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149화 (149/561)

#19. 다만 신께서 구하실 것이다 (4)

정돈되지 않은 꿈은 언제나 혼돈으로부터 시작한다.

꿈속에서 꿈을 깨닫는 순간은 매양 분명하지가 않았다. 잠자리에 든 사람이 의식 끊어지는 순간을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듯이, 그냥 어느 샌가, 아무런 인과도 없이, 현실이 아닌 풍경의 중심에 서있는 날 발견하고 마는 것이다.

이럴 때마다 나는 만족감과 아쉬움을 동시에 느낀다. 잠자는 시간을 가치 있게 활용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만족감, 그리고 꿈꾸는 일 없이 깊은 잠을 잤으면 싶은 아쉬움을.

‘이것도 배부른 소리지만.’

서있으면 앉고 싶고 앉아있으면 눕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이었다. 나도 예외는 아니고. 허나 반시간마다 알람을 맞춰놓고 잘 필요가 없어진 것만 해도 어디란 말인가.

인형술사를 살해한 날 밤엔 오랜만에 악몽을 꾸었더랬다. 죽이고 또 죽여도 끝없이 부활하는 원탁의 마스터에게 끝끝내 패배하여 내 쪽이 살해당하고 마는 그런 꿈이었다. 인형술사를 둔기로 뭉개버리던 순간의 비현실성이 내 무의식엔 해소되지 않은 두려움으로 남아있었던 모양. 그리하여 나는 원탁의 추적을 경계하며 숨고 또 숨기만 하던 시절의 무력감이 내 안에 트라우마로 남아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런던을 불태우기 전까진 언제 다시 도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신적인 상처다.

「여전히 두려운가?」

아, 이 지긋지긋한 목소리.

「두려움은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욕망에 쫓기도록 만드는 채찍질이다. 죽고 싶지 않아. 아프고 싶지 않아. 춥고 싶지 않고 늙고 싶지 않고 굶주리고 싶지 않아.」

「소외당하고 싶지 않아. 뒤떨어지고 싶지 않아. 남보다 약하고 싶지 않아.」

「빼앗기고 싶지 않아. 지배당하고 싶지 않아. 사냥당하고 싶지 않아.」

「그러니 내가 빼앗고 싶다. 내가 지배하고 싶다. 남에게 사냥당하기보다는 내가 사냥하는 쪽이고 싶다. 다른 이들을 소외시키는 권력과 다른 이들보다 앞서나가는 지혜와 다른 모두를 압도 가능한 무력을 가진 자이고 싶다. 그 어떤 고통도 없이 누구보다 안락한 곳에서 누구보다 배부른 삶을 살고 싶다.」

「그렇게 영원한 생을 누리고 싶다.」

「너는 부서지기 전의 나와 부서지고 남은 나를 경멸하나 너와 나의 출발점은 다르지 않다. 이에 내가 너를 빌려 이르나니 약함은 곧 악함의 씨앗이며 타고나기를 약한 생명은 타고나기를 악한 생명과 같다. 그러므로 악은 자연의 법칙이며 지배와 착취는 필연적인 인간의 본성이라. 인정하라. 너는 약한 만큼 악한 자인즉, 네가 가는 길은 내가 걸었던 길에 수렴하리니.」

「너는 나를 받아들이라. 나를 마저 잡아먹고 나를 마저 소화하라. 그리하여 나를 너의 새로운 힘으로 더하라.」

「그럼으로써 너는 적자(適者) 중의 적자, 피라미드의 정점, 왕들의 황제를 꿈꿀 수 있으리.」

오늘도 여지없이 꿈의 구석을 차지한 스승새끼의 유해는 궂은 날 마당에 묶여 비를 맞는 잡종 개새끼처럼 듣기 싫은 개소리를 찡찡거렸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려 해도 집중이 풀어질 참이면 여지없이 귓가에 박혀드는 요사스러운 난설(難說). 난 넌더리를 내며 난잡한 풍경의 정리에 들어갔다. 이는 작업을 시작하기 전 책상을 정리하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기억 속 장면과 사물들이 무질서한 흐름으로 혼재하는 꿈의 초기상태는 나로 하여금 항상 살바도르 달리의 전시회장에 온 듯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아니, 여기엔 정갈함이 없으니 전시회장보다는 관람객의 편의를 고려하지 않은 테마파크에 더 가까울 것이다.

하늘에 빛나는 태양은 자세히 보면 빛을 발하는 비트루비우스적 인간- 즉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인체 비례도였다. 다만 이 빛에 잠긴 기하학적 그림은 원본과는 다르게 눈과 심장, 그리고 뇌의 존재를 강조했으며, 원주 바깥으로는 신을 가리키는 72개의 라틴 문자가 적혀있었다. 런던의 원탁이 중시하는 「태양」의 상징이다.

그 상징이 가리키는 실체는 「대홍수를 목격한 인간」이었다. 유물 중의 유물이라 불리는 황금기의 눈, 황금기의 심장, 황금기의 정수 모두가 그 오래된 인간의 유해로부터 분리된 것이다.

하늘에 뜬 전열함, 땅에 떨어진 달과 별, 허공에 못 박힌 고대생물의 화석, 불과 연기를 뿜는 상태에서 시간이 멎은 대포, 유체처럼 흐르는 런던 브리지 등 초현실적인 요소들을 모두 배제하여 안정감 느껴지는 환경을 조성한 나는, 꿈의 저편에 처박혀있던 낡은 괘종시계를 끌어와 가까운 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가만히 의식을 집중하니 멈춰있던 추가 절로 흔들리며 째깍째깍 초침이 돌기 시작한다.

꿈속의 시계는 내가 지닌 시간감각만큼 정확했다. 실제 시간과 일치한다는 보장까지는 없으되 주관적인 시간의 배분과 활용에는 유용할 것이었다.

「난 항상 여기에 있노라.」

「여기서 너를 기다리고 있노라.」

그래, 언제까지나 거기서 그러고만 있어라. 집중을 흐트러트리는 속삭임을 다시금 무시하며, 나는 자기 전까지 머리에서 굴리던 마법적인 고민을 시각적으로 구체화했다.

마력이 흐르는 영의 회로, 그리고 그 회로를 통해 구현하는 마법 술식은 모두 일정한 규칙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회로와 술식에 대한 대마법사의 기억능력은 수백 개의 대국을 복기해내는 국수(國手)와도 같았다. 깨어 있을 적의 과제를 꿈속에서 무리 없이 이어갈 수 있는 이유다.

이리하여 허공에 불려온 「코드」의 뭉치는 균사의 왕국에서 얻었던 실타래의 일부였다. 처음에 비해선 그런대로 해석과 해체가 진행되었으나, 완전한 풀이와 추출에 이르자면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은 그런 상태.

이어 나는 인형술사의 검을 꿈속으로 불러왔다. 뼈를 갈아 날을 세운 제례용 검은 내가 현실에서 이해한 만큼의 허상으로 재현되었다.

검의 손잡이엔 원 안에 세 개의 점이 박힌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카푸트 모르툼(Caput Mortum)」, 이른바 ‘죽은 자의 머리’라 하는 신비학의 기호다. 즉 문양 속 원은 사람의 얼굴을, 세 개의 점은 사람의 눈과 입을 각각 간략화한 것이었다. 필시 출토된 칼에 손잡이를 달 적에 인형술사 개인의 기호(嗜好)로서 새긴 문양일 터였다.

‘스승새끼의 기억에 이 물건이 없는 걸 보면, 필시 발굴 단계에서부터 웨스트버튼의 가문이 독점한 유물이겠지. 비밀스럽게, 다른 대마법사들이 그 존재를 알지 못하게끔.’

이 칼 본연의 기능은 영혼을 뽑아 저장하는 것이지만, 그러려면 먼저 영혼이 지닌 마법적인 힘을 억압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나는 이 부수적인 기능이야말로 내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칼의 능력으로 영혼을 억누르고, 이어 균사의 왕국이 보여주었던 「중화」의 술식을 활용한다면, 이미 능력이 궤도에 오른 각성자라 할지라도 지닌바 회로의 구조에 간섭하여 변형시킬 수 있으리라고.

말하자면 제례용 칼을 수술용 칼로 써먹는 셈이다.

오늘의 자각몽은 이 문제를 풀이하기에도 턱없이 짧을 것이다. 칠판에 수식을 적어두고 몇날며칠을 고민하는 수학자와 같이, 한 손에 칼을 든 나는 허공에 얽힌 코드의 실타래를 노려보며 긴 계산과 숙고에 잠겼다. 눈앞에 복잡한 매듭이 있고 손에는 예리한 칼이 있으나 알렉산더 대왕처럼 단칼에 매듭을 잘라낼 순 없는 것이었다.

이럴 때 황금기의 정수가 있다면 아주 큰 도움이 될 텐데.

내가 잠에서 깨어 대충 세안이나 하고서 선실을 나섰을 때, 객실이 즐비한 복도엔 아래에서부터 올라온 은근한 열기가 감돌고 있었다.

이 열기의 근원은 차량을 싣는 갑판이었다. 베크룩스는 의외로 넓은 공간이 많지 않은 배였으므로, 매일 아침 식전 단련이 습관화된 부하들은 임시방편으로나마 차량 갑판에 매트리스를 깔고 임시 단련장으로 이용하곤 했다. 뭍의 시설을 빌리자는 의견도 나왔지만 보안상의 이유로 각하되었다. 신체강화 이외의 원시마법 능력을 드러내기엔 아직도 다소 시기가 일렀다.

바퀴가 결속된 차량들 사이엔 방수포로 덮어놓은 화물이 있었다. 이틀 전 야음을 틈타 도굴한 다링산 삼림공원의 유물들 중 일부다. 인형술사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발견했던, 그 무너진 동굴 속의 옛 보물들. 여기 없는 나머지는 마카오 카지노의 금고 속에서 밀반출의 때를 기다리고 있다.

날 발견한 경태 이하의 부하들은 동작을 멈추고 머리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형님!”

“하던 일 계속해. 내 쪽은 신경 쓰지 말고.”

마법이 돌아오기 이전의 격투기술이 더 이상 원래의 모습만으로는 통하지 않을 시대가 되었기에, 부하들은 경태를 중심으로 기술의 개량과 창안을 위해 힘쓰는 중이었다. 그러므로 부하들의 격투 연습은 나로서도 배울 점이 많은 볼거리였다.

‘머리를 모으면 어떻게든 종사(宗師) 하나를 대신할 법한 경험이 있는 녀석들이니…….’

몸을 쓰는 능력이 아무리 천재적인 인간이라도, 어울릴 사람 하나 없이 격투기술을 개선하는 데엔 명백한 한계가 존재한다. 그리고 천재와 어울려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발전을 도모할 자들은 그 자신들도 범상한 인재가 아니어야 했다. 일반인, 또는 일반인에게 약이나 파는 수준의 잡스러운 무도가들만을 상대한다면, 천재는 다만 양민학살에 특화된 기술을 만들어낼 수 있을 따름이니까. 그 기술엔 당연히 깊이가 없을 터였다.

그런 맥락에서, 경태와 경태 이외의 부하들은 충분한 자격을 보유하고 있었다.

터엉-!

바닥에 매트를 깔았음에도, 부하들이 발을 구르거나 상대역을 바닥에 내던질 때마다 쇠로 된 갑판이 크게 울리는 소리를 낸다. 모두가 체중은 그대로인데 힘과 속도는 현격하게 향상되었으므로 종래의 군용무술과는 기본적인 풋워크(Footwork)부터가 달랐다.

난 부하들의 기술들이 시시각각 정교함을 더해가는 과정을 보며 안계가 넓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모르고 당한다면 십중팔구는 죽겠군.’

격투기나 무기술이 거의 무조건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기술이었던 시절, 비전이니 오의니 하는 것들은 대개 이런 기술들의 모음집이었다. 모르는 상태에선 허를 찔릴 수밖에 없는, 그래서 일격필살이라 일컬었던 기술들. 한번 노출되고 나면 방어기와 반격기가 만들어져 더는 치명적이지 않게 되어버리기에, 비인부전이니 기명제자니 따져가며 유파 밖으로의 유출을 금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파르륵!

짧지만 강렬하고 연속적인 섬광이 단련실을 집어삼킨다. 빛의 정체는 경태가 터트린 「발화」. 한순간 시각이 마비된 상대역이 곧바로 바닥에 메쳐진다. 내가 직접 각성시킨 능력자라고 해도 섬광탄 수준의 빛에 노출되면 잠깐은 시각장애인 신세를 면치 못했다. 일련의 동작과 연계된 섬광 및 작열감은 그 자체로 하나의 무도라 할 만했다.

이 시점에서 발화 능력을 경태 혼자만 쓰는 건 아니었다. 인형술사 웨스트버튼을 격살한 날을 기점으로 새로운 능력에 눈 뜬 부하들이 늘어난 덕분. 바깥은 한국의 늦가을 날씨인데 선내는 거의 초여름의 온도를 찍고 있는 이유였다.

참 묘하단 말이지.

저 이외에도 불을 쓰는 부하들이 갑자기 많아진 걸 내가 이상하게 여기자, 경태는 어깨를 으쓱이며 이런 추측을 내놓았었다

“다소 심리적인 영향이 있는 게 아닐까요? 그날 일을 두고 심란해한 사람이 저 하나만은 아니었지 말입니다.”

이 소리를 들은 난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고 대강 끄덕여주었다. 마법이라는 게 그렇게 정신력만으로 강해지는 건 아니지만…….

‘다들 언제 새로운 능력에 눈 떠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으니, 정신적인 요소가 약간의 촉진제 역할을 해주었을 가능성은 있겠지.’

정말로 의외였던 것은 수연 녀석이 얻은 「전기(電氣)」다. 지금으로선 아주 작은 지향성 방전을 일으키는 정도가 고작이라 다른 녀석들의 발화에 비해 낫다 못하다 말할 것도 없는 능력이지만, 내가 회로를 설계하며 의도한 순서와는 다른 결과여서 의외인 것이다.

능력의 상이함 탓에 경태를 중심으로 한 그룹에 어울리기가 조금 곤란하게 된 수연은, 제 능력을 실전적으로 연습할 상대도 여의치 않아 묘하게 불만족스러운 기색이었다. 격투에 능력을 쓰면 기본이 감전이니 조심스러울 수밖에. 표정이 없고 생체징후마저 기복이 희미할지언정 경험에 힘입어 읽어내는 감정이다.

잠시 시선이 얽히기에, 나는 까딱이는 턱짓을 더해 말했다.

“이쪽으로 와라. 나라도 괜찮다면 어울려주마.”

대마법사인 난 누구를 상대로도 적당한 훈련 파트너가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이다. 최선까지는 못될지언정 차선까지는 가능한. 격투가로서의 내 소양은 딱 그 정도였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수연은 뜸을 들인 끝에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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