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146화 (146/561)

#19. 다만 신께서 구하실 것이다 (1)

회의는 꽤 늦은 시각까지 계속되었다. 예정된 종료시각을 20분이나 넘겨서야 겨우 자리에서 일어선 나는, 그러나 편한 옷으로 갈아입기 전에 면담 하나를 더 소화해야만 했다. 식당칸 선실로 들어선 난 부하들의 감시 하에 앉아있는 각성 능력자에게 말을 건넸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오.”

위구르인 수니파 그룹의 중심인물 가운데 하나, 알림 샤히디는 내 목소리를 듣고서야 선실 위쪽에 붙은 TV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진한 눈썹 아래로 형형한 안광이 번뜩인다.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샤히디는 건조한 계절 탓에 거칠어진 입술을 떼어 물었다.

“당신인가? 나와 형제들을 한인(漢人/중국인)들의 손에서 빼낸 자들의 우두머리가?”

“그렇소.”

“이제야 만나게 되는군. 당신의 부하들에게 당신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한 뒤로 한참이 지났는데.”

날 빤히 바라보던 샤히디가 떨리는 손을 숨기며, 다른 한편으로는 똑바로 뜬 눈에 의식적으로 벼려낸 독기를 더하며 툭 내뱉는다.

“기대하고 있었다면 미안하지만,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 당신은 분명 우리의 편이 아닐 테니.”

건방진 녀석 같으니. 난 이 애송이의 맞은편에 착석하며 물었다.

“그런 기대는 하지도 않았소. 다만 궁금하기는 하군. 초면에 어찌 그리 확신하는 거요? 내가 당신의 편이 아닐 거라고 말이오.”

“당연한 것 아닌가? 첫째로 무슬림이 아닌 자는 진정으로 무슬림의 편일 수 없고, 둘째로 신앙의 형제들조차 우리 같은 사람들의 편을 제대로 들어준 적이 없기 때문이지. 그들은 모두 한인들의 힘에 겁먹고 한인들의 돈을 좇기 바쁜 변절자들일 뿐이니까. 결국 이 세상에 우리 위굴라르(위구르인)의 편이란 우리들 자신 이외엔 존재하지 않아.”

“내가 무슬림이 아닌 줄은 어찌 알고?”

“그럼 묻겠다. 당신은 알라를 믿는가?”

“아니.”

내 답에 샤히디는 턱을 들어올렸다. “봐라, 내가 맞지 않았느냐.”라고 따지기라도 하듯이. 보면 볼수록 더 건방진 놈이라 마음에 든다. 나는 도구적인 미소를 머금고서 덧붙였다.

“그러나 내가 불신자라 한들 그대와 그대가 속한 민족의 편을 들 수는 있겠지. 그것이 내가 그대들을 필요로 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거짓말하지 마라.”

“진심이오.”

“나는 바보가 아니다. 우리는 의지할 데 없이 버려진 자들이지. 우리를 돕는 데서 이득을 볼 자가 없기 때문에. 한인들이 저렇게 힘을 과시하고 있는 지금은 더 그러할 것이고.”

이렇게 말하며, 샤히디는 자신이 보던 TV 화면을 가리켰다. 화면은 공산당의 자랑인 팔일철기대의 행진과 활약을 번갈아 보여주는 중이었다. 나는 이번에야말로 도구적이지 않은 웃음을 머금었다. 딱 봐도 지나치게 선동적이어서 보기 거북할 정도의 영상이건만, 이러한 영상 이외에 다른 걸 본 적이 없는, 그리하여 현대 영상매체의 영향력에 내성이랄 게 없는 위구르인에겐 제법 잘 먹히는 것이 우스워서였다.

“왜 웃는 거지?”

“신경 쓰지 마시오. 별거 아니니.”

“…….”

“본론으로 돌아갑시다. 샤히디 그대의 불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요만, 내가 그대들을 돕고자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오. 왜냐면 나는 제국주의자들의 죽음을 바라는 자이며, 제국주의자들과 맞서는 싸움에서 위구르인들과 손을 잡고 싶은 자이니까.”

내가 말하는 제국주의자와 위구르인이 이해하는 제국주의자는 서로 다른 대상을 가리키겠으나, 눈앞의 무슬림은 그 차이를 간파할 도리가 없었다. 희미한 혼란과 방어적인 적개심이 샤히디의 낯짝을 스쳐갔다.

“너무 거창해서 헛되기까지 한 이야기로군. 당신이 우리를 거둬들인 이유가 그것인가?”

“그렇다면?”

“말이 되지 않는다. 우리에게 무슨 힘이 있다고? 우린 그저 한인들의 노예에 지나지 않았는데? 가진 거라곤 신께서 내려주신 몸뚱이밖에 없는 우리가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당장은 별다른 힘이 없겠지. 그러나 앞으로는 다를 거요. 내가 달라지도록 만들 테니.”

“어떻게?”

“많은 돈과 무기를 후원함으로써.”

나는 손짓으로 부하들이 준비된 물건을 가져오도록 했다. 곧 샤히디와 나 사이의 테이블에 상자 하나가 놓였다. 나는 못내 관심을 감추지 못하는 샤히디에게 여유를 담아 손짓했다.

“이 이야기가 이렇게 빨리 나올 줄은 몰랐지만…… 기왕 나왔으니 뜸을 들일 이유는 없겠지. 열어보시오. 그대를 위해 준비한 거요.”

나와 상자를 번갈아 쳐다보던 샤히디는 극히 조심스러운 손길로 상자를 열어보았다. 상자 안의 내용물은 신분을 증명하는 서류와 우즈베키스탄 여권이었다. 샤히디는 서류와 여권을 차례로 들어 살펴보았으나, 문자부터가 낯선 데다 이제껏 살아오며 여권이라는 걸 본 적이 없었을 처지라 곤혹스러운 표정만 지을 따름이었다.

“이게 뭐지?”

“그대가 오즈벡(우즈벡) 땅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할 수 있도록 만들어줄 것들이오. 신분을 증명하는 문서와 여권이지. 그대의 형제자매들을 위한 몫도 준비되어 있소.”

“여권? 이게 여권이라는 건가?”

“다행이오. 그래도 여권이 뭔지는 아시는 모양이라.”

농담조로 던진 말에 귀가 붉어져 인상을 구긴 채로 나를 쏘아본 샤히디는, 곧 눈길을 내리고는 「오즈베키스똔 레스푸블리카시(O’ZBEKISTON RESPUBLIKASI)」라는 국명 아래 금박으로 입혀진 국장(國章)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국장 속 삼색 리본으로 엮인 밀과 면화 줄기 사이로 날개를 펼친 새는 페르시아 신화에 등장하는 「후마」라는 이름의 불사조였다. 그리고 불사조의 머리 위로는 이슬람을 상징하는 「초승달과 별」의 문양이박혀있었다.

샤히디의 표정이 복잡해진다.

“내 고향엔 서쪽 사람들의 땅으로 떠나기를 꿈꾸는 사람들이 많았지.”

우즈베크인과 위구르인은 같은 조상을 두고 동서로 갈라진 민족이다. 사용하는 문자가 다를 뿐 언어도 거의 동일하여, 따로 배우지 않아도 서로의 말을 알아듣는 데 큰 지장이 없었다. 그러니 위구르인들이 탄압을 피하여 서쪽 사람들의 땅으로 가고 싶어 할 수밖에.

국장 속의 불사조가 평화와 번영, 그리고 자유를 위한 노력을 상징한다는 건 공교로운 우연의 일치라 하겠다.

여권을 펼친 샤히디는 첫 장에서 자신의 사진을 발견하곤 눈을 찌푸렸다.

“당신들은 내 사진을 언제 찍은 것인가?”

“그게 궁금하오? 내가 그대들을 항상 지켜보고 있었음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하는 짓이 한인들과 같군.”

“같다고? 정말이라면 놀랍구려. 당신들에게 ‘허락된 것들(할랄)’을 베풀고 또 자유까지 주겠노라 제안했던 한인들이 있었다니.”

“…….”

짧은 침묵이 흐른 뒤에, 적개심으로 긴장과 두려움을 감추는 시선이 재차 나를 향한다.

“당신은 우리에게 돈과 무기를 후원하겠다고 했지.”

“그렇소.”

“그 말은 즉, 우리더러 오즈벡과 아프간에 있는 투르키스탄의 전사들에게 가담하란 뜻인가?”

“그게 투르키스탄 이슬람 당을 말하는 거라면, 맞소.”

“당신은 바보인가? 그 위대한 독립투사들은 아무나 동료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리처럼 한인들의 노예 생활이나 하고 있었던 비루하고 하찮은 자들이 어떻게 그토록 명예로운 자들의 대열에 낀단 말인가? 한인에게 빌붙은 첩자라고 의심이나 받지 않으면 다행일 거다. 어떻게 접촉에 성공한다 한들 한 번 쓰고 버리는 도구 취급을 받겠지. 우리에겐 그것조차 가치 있는 죽음이긴 하겠지만…….”

자조를 넘어 자학적으로 하는 말을 보면, 극단적인 신앙에 경도된 무슬림답지 않게 주제파악은 하고 있는 품새였다. 난 무릎 위로 깍지를 끼며 답했다.

“걱정할 필요 없소. 다 방법이 있으니.”

“무슨 방법?”

“당신이 그들을 찾아가는 게 아니라, 그들 스스로 당신을 찾아오도록 만들 방법.”

“……갈수록 알 수 없는 소리들을 하는군.”

“들어보면 납득이 갈 거요. 뭔가 드시면서 듣겠소?”

“원수들의 편일지도 모르는 자가 주는 음식은 먹지 않는다.”

“그동안 줄곧 내가 주는 음식으로 끼니를 때워놓고는 이제 와서?”

“당신이 감히 투르키스탄의 전사들을 입에 담았으니까. 그동안 우리는 당신이 한인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다시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한인이 아닌 척 나를 꾀어서 부역자로 삼아 위굴라르 최후의 투사들에게 침투시키려는 게 아닌가 하고. 우린 한인 압제자들의 그런 교활함을 너무나 많이 겪어왔다.”

“아주 조심스러우시구려. 현명한 마음가짐이오.”

이렇게 말한 나는 부하들을 시켜 한 잔의 사과주스를 가져오도록 했다. 일체의 첨가물이 들어가지 않은 신선한 사과주스는 위구르인들을 수용한 용핑호의 카페테리아에서 샤히디가 중독자 수준으로 즐겨 마셨던 음료였다. 감시용 폐쇄회로 기록엔 카페테리아가 처음으로 개방될 당시 주스를 맛보고서 얼빠진 표정을 지었던 샤히디의 모습이 남아있다.

‘초콜릿이라는 걸 생전 처음 먹어보는 카카오 농장 흑인 노동자를 보는 것 같았지.’

신장 위구르 지역은 기후 특성상 당도가 높은 과일이 나오기로 이름 높은 땅이지만, 그 소출을 위구르인들이 누리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모든 농장은 준군사조직 신장생산건설병단이나 부유한 한인들, 그리고 동포를 팔아 호사를 누리는 부역자들의 소유이고, 대부분의 생산물은 위구르 자치구 바깥으로 팔려나갔으므로.

침을 삼킨 샤히디가 음울하게 말했다.

“먹지 않겠다고 했을 텐데.”

“일단 내 계획부터 들어보시오. 나는 그대와 그대의 벗들을 투사로 훈련시킬 거요.”

“훈련?”

“그렇소, 훈련. 사람을 죽이는 법, 다양한 무기들을 다루는 법, 적대적인 환경에서 살아남는 법과 강대한 적에 맞서 효과적으로 싸워나가는 법을 하나하나 가르쳐 주겠다는 말이지. 그러기 위하여 그대들은 새로운 신분으로 바다를 건너 인고의 시간을 견뎌야만 할 거요.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오즈벡 땅으로 향할 자격을 얻는 것이고.”

“당신 생각엔 그런다고 위대한 독립투사들이 우리를 받아들일 것 같은가? 훈련을 받으면 더 수상쩍을 것 같은데?”

“그때 필요한 것이 바로 명성이지.”

“명성? 어떤 명성?”

“한인들을 떼로 몰살시키고 한인 공산당의 낯짝에 똥을 뿌려주었다는 명성 외에 달리 무슨 명성이 있겠소?”

“…….”

“그대들이 투사의 자격을 갖출 즈음, 나는 그대들을 위한 무대를 준비해둘 거요. 한인들의 목숨을 아주 많이 거둘 수 있는 무대와 함께, 실패하고 싶어도 실패하기가 어려울 계획을 말이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와서 원수들의 두개골을 납탄으로 깨부수고 잘 드는 칼로 그 가죽을 벗기는 기쁨을 느끼고 나면-”

나는 시적인 공백을 두고서 말했다.

“그대는 더 이상 내 의도의 순수함을 의심하지 못하게 되겠지.”

다시 마른침을 삼키는 샤히디의 손이 주스가 든 잔을 매만진다. 스스로는 의식하지 못하는 듯한 행동. 시선은 여전히 나에게 고정되어있었다.

남은 손으로 이마를 짚고 고민하던 무슬림이 입술을 잘근거리다가 묻는다.

“역시 이해가 가지 않아. 왜지? 당신은 왜 우리를 선택한 것이지? 우리가 대체 뭐라고?”

“뭐긴 뭐겠소. 한인들에 대한 원한이 뼛속까지 사무친 자들이지.”

“겨우 그 정도만으로 우리를 골랐다고?”

“안 될 이유는 또 뭐요?”

“……모르겠군, 모르겠어.”

끝끝내 의심을 떨치지 못하고 설레설레 머리를 흔드는 꼴이 재미있다.

짧지 않은 시간 노예 취급을 받아 자존감이 바닥을 기고 있는 모양이지만, 실은 카라마이의 수용소 출신이라는 것만으로도 평범한 이력은 아니었다. 수용소로 잡혀 들어갔다는 것 자체가 중국 당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불순분자 내지 위험분자임을 의미하는 까닭이다. 그러니 식민지배에 저항할 만한 위구르인들을 가려 뽑는다면 수용소 출신에겐 응당 가산점을 부여해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 내가 하는 일을 일제 치하의 조선에 비유하자면, 서대문 형무소 수감자 출신으로 강제노역에 끌려갔던 불령선인을 꺼내놓고 돈과 무기를 대어줄 테니 동료들과 함께 독립군 단체에 들어가 보라 꾀는 것과 흡사하다.

하물며 그 후보자가 이슬람 극단주의자라면 망설일 필요조차 없어진다. 어지간히 머리가 없는 새끼가 아니고서야 그냥 합격점을 주면 그만인 것. 내 최우선 목표는 나 한 사람의 생존과 이익이지 위구르 민족의 가장 이상적인 독립투쟁 따위가 아니니까.

언젠가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이 동 투르키스탄의 독립을 쟁취하여 위구르인들의 미래가 김씨 왕조 치하의 북한보다 어두워진다 할지라도, 중국인들이 모든 것을 차지한 채 민족 자체를 말살하려 드는 지금 이상으로 나빠질 순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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