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용쟁호투(龍争虎闘) (5)
후샨량은 온종일 시험을 참관하고는, 시험장에서 저녁까지 해결한 뒤에야 비로소 돌아갔다.
그에게 나는 노르웨이제 드론을 미주의 수중에 두겠노라 일러두었다. 너희끼리 상의해서 순번을 결론지은 다음 미주의 승인을 받아 찾아가도록 하라고. 내 현지 대리인으로서 미주의 권위를 반복적으로 인지시켜주는 과정의 일환이었다.
‘이쯤 해놨으면 향후 어찌 처신해야 하는지는 잘 알았겠지.’
어차피 세 경독은 공적이 급한 처지가 아니었다. 오히려 확정된 영전을 기다리고 있는 지금 새로운 공적을 가져가봐야 낭비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내가 이제껏 좀 많이 밀어줬어야 말이지. 고로 공적을 더하기에 적합한 시점은 영전 이후 새로운 부서에 자리를 잡은 다음이다. 아랫사람들을 장악하는 데에도 적잖은 도움이 될 터.
일몰 무렵, 베크룩스로 향하는 차 안에서 나는 경태에게 말했다.
“아까 점심에 말이다.”
“예.”
“술을 조금도 입에 대지 않더구나.”
“억…….”
경태는 민망한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걸 보고 계셨습니까?”
“눈에 띄었으니까.”
인형술사의 죽음 이후 사흘간, 우리는 만에 하나 들어올지 모를 역추적의 가능성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자그마한 조짐 하나라도 놓쳐서는 안 된다고. 그러한 비상대기를 해제한 게 오늘 오전의 일이었다. 경계를 하기는 하되 전투태세를 유지할 필요까지는 없겠다는 판단을 내린 것.
영국이 미국과 연대하여 남중국해와 대만해협에 걸쳐 중국과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지금, 저들이 인형술사의 사인을 조사하는 데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조사가 늦어질수록 현장훼손은 심각해진다. 충격파의 폭풍 속에서 살아남은 각성체 수목들이 뿌리를 뻗거나 마법적인 힘을 발휘하여 인간의 조각들을 탐식할 테니까.
사람에게 휴식은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그리고 술 한두 잔 쯤은 전장에 있는 장교와 병사들에게도 용납되는 것이고. 도리어 그렇게 작은 일탈과 이완이 더해질 때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더 나은 결과가 나오곤 한다. 팽팽하게 당기기만 해선 끊어지기 십상인 게 인간의 정신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그렇게 술을 좋아하던 경태의 금주는 적잖이 눈에 띄는 것이었다. 각성 이전에도 말술 중의 말술이었던 놈이 증류주 한두 잔 가지고 둔해지면 얼마나 둔해진다고. 난 이 녀석이 배갈(白干儿) 세 병을 비우고서 15야드 권총사격으로 자기기록을 경신하는 꼴을 본 적도 있었다. 전탄 만점에 시간마저 단축한 것이다. 조직 내 행사에서 있었던 일.
차 안엔 애매한 정적이 감돌았다.
“마음은 이해한다만, 매번 이런 식이면 오래 견디지 못할 거다.”
정적을 깨는 내 말에 경태는 한층 더 민망한 낯이 되었다.
“매번……입니까?”
“그래, 매번.”
이 녀석이 신경 쓰는 건 역시 인형술사를 때려죽인 밤에 벌어진 일들일 터다. 내 지시에 따른 바이긴 하나 가라앉는 배에서 먼저 탈출을 해야 했던 일, 그리고 마지막에 나 혼자 인형술사를 잡으러 나섰던 일.
경태가 느끼는 수치심은 이해 가능한 범위였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내가 가진 최강의 패가 나 자신인 것을. 조직 경호실의 실질적인 역할이 알렉산더 대왕의 근위기병(헤타이로이)과 닮아있다고 한들, 근본적인 능력의 차이가 있는 만큼 이번 같은 일들이 언제고 되풀이될 수밖에 없었다. 난 그러한 사실을 매번이라는 단어 하나에 함축한 것이고.
한숨지은 경태가 허탈한 웃음을 머금었다.
“형님께 이런 부분까지 신경을 쓰게 만들어드리니 더욱 면목이 없네요.”
“신경 쓰지 마라.”
“제가 형님을 곁에서 모신 이후로 그때 같은 경험은 처음이었지 말입니다.”
“너는 그 상황에서 주어진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그거면 충분하지 않으냐.”
이렇게 말하면서, 난 이 상황이 참 웃긴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기소침한 사냥개를 달래주는 견주가 된 기분이군.’
가끔 이런 경우가 있었다.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실패에 대한 면역이 없는 경우가. 경태 녀석은 이런 부분까지 신경 쓰게 해서 면목이 없다 하지만, 젊은 천재를 중직에 기용하는 대가가 이 정도의 번거로움뿐이라면 나쁜 것도 아니었다. 조직을 경영하는 입장에서 정말로 피하고 싶은 것은 인재 관리의 번거로움이 아니라 관리할 인재가 아예 없는 상황이니까.
다시 한 번 벅벅 머리를 긁은 경태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다음번엔 조금이라도 더 보탬이 될 수 있게끔 노력하겠습니다, 형님.”
“그거면 됐다.”
공안 번호판을 달고 가장 빠른 지름길을 달린 차는 다른 운전자들의 자발적인 양보들을 받으며 15분 만에 부두에 도착했다.
부두에 계류된 베크룩스는 아직까지도 수리가 진행 중이었다. 용선계약을 체결한 선주 측은 뒤늦게 이 이탈리아제 여객선의 전투참여 및 손상 사실을 알고 대경실색했으나, 우리의 배후에 요즘 기세등등한 광저우 공안국이 있었으므로 감히 항의를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잘나가는 공산귀족의 심기를 거슬렀다간 피해보상은커녕 배 자체를 강탈당하는 수가 있었던 까닭이다. 실제로 가오슈센으로부터 제안이 있기도 했고.
그러나 겨우 이런 사소한 이득을 노려 사업 파트너에게 빚을 질 생각 따윈 없었다. 제대로 수리해서 제대로 돌려주거나-
‘아니면 아예 인수해버리거나.’
이동식 거점을 굴려보니 기대 이상으로 마음에 들더란 말이지. 장차 세계를 무대로 합법적인 영역에서 고위험 사냥(High-threat hunting) 및 험지 탐사 사업을 전개해 나간다 치면 베크룩스와 같은 이동식 거점이 유용하게 쓰일 듯했다. 전 세계의 3분의 2는 안정적인 전기공급은커녕 깨끗한 식수를 대량으로 조달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환경이기에.
게다가 생활위생은 또 어떠한가. 다양한 해충과 풍토병들은 부하들의 전투력과 사기를 심대하게 저하시키는 원인이 될 수 있었다. 예컨대 많은 지역에 흔한 빈대만 하더라도 그 괴로움은 겪어본 자들만이 알 것이다. 조직의 기반이 잡히기 전, 모든 거래에 내가 발품을 팔아야 했던 시절엔 그게 어찌나 짜증이 났었는지.
고로 먹고 마시고 자는 문제로 발생할 비전투손실을 예방하려면 방역대책을 완비한 이동식 거점이 있어야 한다. 거점화 개조에 적합한 소형 크루즈, 로팩스(RO-PAX) 선(船) 등의 시세가 여전히 바닥을 기는 상황이니, 시세보다 조금 더 높은 값을 쳐준다 하면 팔겠다고 나서는 선사가 넘쳐날 테지. 그런 배들을 사다가 건선거에 올려 본격적인 개수를 하는 방안도 고려해볼 만하다.
베크룩스에 오른 나는 곧장 회의실로 향했다.
전보다 남는 공간이 없어진 회의실엔 보안성이 강화된 화상회의 시스템이 설치되어 있었다. 구성요소 하나하나가 미국의 정보유출 방지기준(TEMPEST spec)을 충족하거나 그에 준하는 수준의 최상급 시스템이다. 며칠 후면 중국을 뜰 마당에 이런 것까지 들여올 필요가 있겠는가 싶지만, 이는 일종의 운용실험을 겸하는 것이었다.
‘좀 좁군…….’
본사에서 장비를 한 번 공수해올 때마다 이동거점에서의 업무능력이 향상되는 건 좋은데, 나란히 앉은 수연 녀석과 팔꿈치가 스칠 만큼 공간이 좁다. 나머지 비서진들의 간격은 더더욱 좁았고. 승조원의 편의성 따위 개나 줘버린 러시아 군용장비 안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었다. 새로운 이동거점을 마련한다면 베크룩스보다는 조금 더 체급이 큰 배를 고르는 게 좋을 것이다.
오늘의 회의에 참가할 임원급 간부들은 내 예상 도착시간을 통보받고는 미리 접속하여 대기 중인 상태였다.
“다들 식사는 했나?”
내 인사에 그렇다는 대답들이 돌아온다. 날 부르는 호칭은 형님과 회장님이 반반씩 섞여있었다. 난 간부들의 면면을 빠르게 훑은 뒤에 마지막으로 수연에게 물었다.
“수연이 너는?”
“먹었습니다.”
“잘했다. 그럼 시작하지.”
첫 번째 현안 보고는 자산운용 담당인 여의도 김씨, 본명 김재환의 것이었다. 죽을상을 하고 있던 김재환이는 푹 내쉬는 한숨으로 제 보고의 서두를 장식했다.
「지금부터 4/4분기 식량투자에 관한 중간보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어지는 내용은 예상 밖의 사고들과 외교적 변수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기대만큼 재미를 보지 못했다는 게 골자였다.
「중국이 한국에 대한 식량수출을 일방적으로 통제하면서 그쪽 시장에서 굴리던 돈이 거의 다 묶여버렸습니다. 하다못해 공식적인 조치면 법적인 구제방안이라도 찾아볼 텐데 그것조차 아닙니다. 수법이 아주 음습하기 짝이 없어요. 수출입 절차는 끝도 없이 늘어지고, 난데없는 위생검열로 트집을 잡아 무기한으로 거래를 정지시키고, 화재로 상품 인도가 불가능해졌다기에 현장을 확인할 사람을 보겠다고 하니까 그건 또 안 된다고 그러고, 꽌시에 호소해도 아주 높은 곳의 결정이라 당장은 어떻게 손쓸 수가 없다고들 하고…….」
이게 보고인지 한탄인지 모르겠지만 상황을 파악하기엔 충분했다. 이미 여러 보고서들을 통해 사태의 추이를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명목상으로는 식량을 무기화하여 한국의 목줄을 잡겠다는 거지만, 실상은 그냥 자기네 먹을 음식이 부족해서 수출을 제한하는 거지.’
지난여름, 천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폭우가 쏟아진 중국은 현재 농작물 수확량 격감으로 인한 식량위기를 경험하는 중이었다. 한국 인구보다 많은 수의 이재민이 발생한 상황에서 그들을 먹일 식량까지 모자라니, 이는 중차대한 안보위기라고 평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경작지를 초토화시키고 곡물창고를 털어대는 각성체 동물들과 그 밖의 여러 생물재해들이 그러한 위기를 심화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외국계 자본의 돈을 떼어먹고 계약에 묶인 물건들까지 강탈하는 것은 대단히 편리한 해결책이었다. 독재정부가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면 합법적인 절차들을 악용하는 것만으로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외교관계 악화? 중국에게 악화될 외교관계가 어디 있단 말인가. 1세계는 이미 중국에 온갖 경제제재를 걸고 있는 마당에. 일단 미국부터가 중국에 대한 식량 무기화 정책을 쓰고 있는 판국이다.
무엇보다, 적당한 국가들 몇 개만 골라서 패면 외교적 부작용도 최소화된다. 예컨대 경제적인 이유로 마냥 미국 편을 들 수만은 없는 한국 같은 국가를. 그렇잖아도 한국은 태평양의 나토 격인 환태평양 조약기구 가입 건으로 중국의 눈치를 많이 봐야 하는 처지였다. 두들겨 맞는 당사국이 정부 차원에서 대응을 자제하면 다른 나라가 나서기도 곤란한 법. 가입 자체는 미국의 압력에 의한 것이었어도 그 책임은 한국이 져야 한다. 중국 입장에선 만만한 게 한국이니까.
툭, 툭, 툭.
김재환의 말이 점점 더 장황함을 더해가며 다른 간부들로 하여금 쟤 저거 또 저런다 하는 표정을 짓도록 만들던 중에, 내게 무언으로 허락을 구한 수연이 마이크를 손끝으로 노크하듯 두드려 주의를 환기했다.
“김 전무님.”
「어?」
“보고는 간략하고 명료하게 부탁드립니다. 형님의 시간을 아껴서 쓰십시오.”
「어, 어……. 알겠네, 강 실장.」
수연이 기복 없이 담담하게 하는 말에, 김재환은 안 그러면 널 죽이겠다는 경고를 들은 사람처럼 반응했다.
약 10분여에 걸친 보고를 끝까지 들은 나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아프리카 쪽으로는 내가 투자를 자제하라고 이르지 않았던가?”
「예에, 뭐……. 정치적으로 불안정해질 게 뻔하니 농장이든 식량이든 가급적 포트폴리오에서 빼라는 가이드라인을 주셨었지요.」
“그런데도 농지를 꽤 많이 수매했군. 왜지?”
「그건 그러니까, 음, 세계적인 추세라 괜찮을 거라고 판단했습니다. 이권이 얽힌 국가들이 좀 많은 게 아니니, 웬만한 정치적 격변으로는 손해를 볼 일이 없겠지 싶었습니다. 망하려고 환장을 하지 않은 이상에야 아프리카 후진국들 따위가 어떻게 강대국들의 압력을 버텨내겠습니까? 뭣하면 한국 정부의 외교력에 호소를 할 수도 있을 테고…….」
“요컨대 내 권고가 과도한 조심성처럼 느껴졌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아니, 책망하는 건 아니다. 투자는 결국 수익률이 말해주는 것이니.”
처음부터 죽상을 지었긴 해도 이 녀석이 농업투자로 기록한 분기 수익률은 17.23%에 달했다. 이는 세계 유수의 투자펀드에 크게 뒤처지지 않는 준수한 성적. 농산물 국제 거래가가 연중 내내 폭등을 거듭한 덕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