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반역향 (10)
내가 재집결지점으로 정한 강변공원은 즐비하게 늘어선 호화 별장들의 앞마당과 같은 녹지였다. 잘 가꿔진 화단과 나무들 너머, 지중해식 붉은 기와를 올린 별장단지는 등화관제(燈火管制)라도 하는 양 일체의 불빛 없이 팽팽한 어둠 속에 잠겨있었다. 값비싼 별장의 주인들은 이미 헐벗은 자들의 혁명을 피해 달아난 지 오래인 것이다.
근방의 다른 구획들 또한 을씨년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고층 아파트 단지와 넉넉한 테니스 코트, 각종 관공서, 깨끗한 단독주택, 종합병원 및 대형 쇼핑몰 등으로 가득한 하중도(河中島) 전체가 버려지다시피 비어있었다.
그럼에도 살아있는 사람이 아주 없진 않았는데, 거의 대부분은 이 구역을 방어하던 교통경찰대대의 생존자들이었다. 교각 셋과 사주(沙洲) 하나만 봉쇄하면 그만인 지형조건상 교통경찰만으로도 충분히 방어가 가능하리라는 계산이 있었겠지만, 치명상을 입어도 쓰러지지 않는 시체인형들의 물결은 군대로 막기도 벅찬 수준이었을 터.
살아남은 경관들은 이쪽 상공을 맴도는 헬기들의 존재에 이끌려 삼삼오오 강변으로 몰려들었다. 경태를 포함하여 먼저 탈출시킨 녀석들의 부상을 마저 돌봐주고 있던 나는, 생존 경관들의 접근을 일찌감치 깨닫고서 귀찮은 심정으로 마력장의 반경을 축소했다. 조심스레 거리를 좁혀오는 경관들의 과반수가 원시마법 능력자들이었기 때문이다.
‘평범한 자들은 도망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는 뜻이겠지.’
초계함의 함교에서 대함미사일 세례를 견뎌낼 때의 내겐 존재감을 감추고 뭐고 할 겨를이 없었다. 고로 능력자 경관들은 이미 내 존재를 간접적으로 감지했을 것이나, 그 존재감과 나라는 사람을 일치시키는 건 또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정지! 움직이면 쏜다!”
귀띔을 받고 경계에 임하던 내 부하들의 위협에, 최초로 강변에 도달한 3인의 도망자들이 천천히 양손을 들어올렸다. 그중 하나가 두려움 반 안도감 반인 얼굴로 말했다.
“쏘지 마세요! 아군입니다!”
세 사람의 제복은 흙과 검댕과 핏자국 등으로 얼룩져 있었다. 개중에 무기를 지닌 자는 한 사람뿐. 문자 그대로 몸뚱이만 간신히 빼낸 자들이었다. 경태가 눈으로 방침을 청하기에, 나는 일단 통과시키라는 신호를 보냈다. 부하들이 총구를 슬쩍 내리고 까딱 고갯짓을 하자, 세 경관은 이제 살았다는 표정으로 자세를 낮추고 다가왔다. 개중엔 부상자가 하나 끼어있어, 다른 두 사람으로부터 부축을 받고 있었다.
셋 중 최선임자인 2급 경사가 무경(武警) 전투복 차림인 나와 내 애들을 둘러보며 묻는다.
“실례지만 책임자가 어느 분이십니까?”
“나다.”
내가 대답하니 경사가 공손한 태도로 다시 물었다.
“혹시 어디서 오신 분들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이 근처에 이능보유자로만 편성된 부대가 있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거든요. 그것도 이렇게 강한 힘이 느껴지는 분들로만…….”
우리가 입은 복장엔 소속을 알 수 있는 마크나 명찰 같은 게 일절 존재하지 않았다.
“우린 광저우 공안국 소속 기동소조다.”
“광저우 공안국? 아아!”
세 경관의 표정이 확 밝아진다. 그동안 우리가 쌓아온 명성의 영향이었다. 부상자는 깊어지는 안도감에 다리가 풀려 주저앉기까지 한다. 얼굴을 붉히며 다시 일어나려 애쓰지만 탈진한 몸이 좀처럼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모양새.
2급 경사가 지레짐작으로 기뻐했다.
“이쪽이 위급하다는 소식이 전해지긴 한 거로군요! 다행입니다! 저흰 보고가 제대로 올라가기는 했는지 의심하고 있었는데…….”
내가 이것들을 아직 살려두는 이유가 나왔다. 난 무심한 어조로 질문했다.
“보고라면 무엇에 대한 보고를 말하는 거지?”
“어, 우선은 총을 맞아도 잘 죽지 않는 적의 등장이랑, 이쪽에서 퍼졌던 엄청나게 거대한 이능파장(异能波长)이랑…….”
중국에선 마력장을 이능파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확실하게 관측된 바는 없으되 능력자들의 진술을 토대로 마력장이 파장의 형태를 띤 무언가가 아닐까 짐작하는 것이었다.
“당신께선 그 파장을 느끼지 못하셨습니까? 파장면(波长面)의 지름이 족히 몇 킬로미터는 되겠다 싶을 만큼 어마어마한 존재감이었는데요. 저 먼 바다를 배회한다는 거대 이능생물들 가운데 하나가 강줄기를 타고 내륙까지 올라왔나 싶을 지경이었습니다.”
“잘 모르겠군. 아무튼 그런 보고가 어느 선까지 올라간 거지? 정보가 제대로 전달되었는지 의심한 이유가 있을 것 아닌가.”
시치미를 떼면서 묻자 경사의 낯빛이 어두워진다.
“중대본부가 붕괴하기 전 대대본부에 상황보고를 전하고 지원을 요청했습니다만,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대대본부와의 연락이 두절된 것으로 압니다. 다른 중대가 먼저 뚫리고 말았던 거죠. 후방이 무너졌다는 게 알려지면서 저희 중대도 공황에 빠져버렸고 말입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사방에서 적이 밀려들고 있더군요.”
“그렇단 말이지…….”
시체인형들에 대한 보고야 무슨 내용으로 어떻게 올라갔든 내 알 바가 아니다. 그러나 교통경찰 능력자들이 감지한 내 존재감은 이야기가 달랐다.
‘이 인간처럼 각성한 대형 해양생물의 출몰쯤으로 생각해주면 좋겠는데.’
고래의 피부는 삼투압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또한 사람처럼 허파로 호흡하는 생물이므로 민물에서도 무리 없이 활동이 가능하다. 이론적으론 커다란 강을 거슬러 내륙으로 올라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이론적으로만 가능한 이야기일 뿐,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진 않는다. 고래가 미쳤다고 여기까지 오겠는가? 좁고 더럽고 위험한 데다 먹을 것마저 부족한 환경인데. 기껏해야 몸집 작은 돌고래 무리 정도가 간혹 한 번씩 드나들 따름이었다.
고로 만약 보고가 제대로 올라갔다면, 정보를 입수한 중국 당국은 응당 초월적인 힘을 보유한 존재의 개입 내지 그에 준하는 이상 현상의 발생을 의심할 터였다. 강력한 재생능력을 지닌 흑해자당 공격대가 느닷없이 출현했고, 때맞춰 경찰 측 능력자들이 거대한 이능파장의 확산을 감지한 거니까.
물론 이러한 정황만으로 내가 중국 정부의 용의선상에 올라갈 확률은 희박했다. 초월적인 힘을 지닌 존재이든 그에 준하는 이상 현상의 발생이든, 그 배후엔 흑해자당을 지원하는 세력이 있으리라 추측할 터이므로.
그러나 만에 하나라도 중국이 입수한 정보가 영국으로 새어나간다면, 빛과 진리의 원탁은 이곳에 그들이 쫓는 사냥감 중 하나가 있었음을 짐작하게 될 것이었다.
동료를 살해하고서 황금기의 눈을 가지고 달아난 자, 한때 원탁내각의 일좌에 자리했던 대마법사 크로우허스트 경.
혹은 칠각기사단의 교주인 마녀 그레이스가.
‘도시 어딘가에 사람 피로 역칠망성이라도 그려놔야 하나?’
사냥감으로서의 강박증이 도진 나는, 꼬리를 밟힐 경우에 대비해 악마숭배자들의 흔적을 남겨둘 생각부터 했다. 추적의 무게추를 그레이스 쪽으로 밀어내고자.
그러나 고쳐 생각해보면 그건 너무 얄팍한 수작질이었다. 제국주의자들의 원탁은 피와 내장으로 거행한 의식의 흔적 몇 개에 속아 넘어갈 만큼 어리숙하지 않다. 오히려 안 하느니만 못한 짓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허접스러운 방계 교단이라면 몰라도, 그레이스 직할 교단이 어설프게 흔적을 남기고 다닌다는 건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니까. 결국은 여기서도 대마법사의 존재감을 노출한 게 문제였다.
어쩌면 이 모든 걱정이 기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원탁 입장에서도 시체인형의 정보가 새어나가기를 바라진 않았을 테니, 어떤 식으로든 이쪽 방면에 배치된 중국 군경들의 보고를 차단할 방도를 마련해두지 않았을까? 일선 부대들과 그 윗선 사이의 연락망을 끊어버리는 거지.
내 숙고가 길어지자 세 경관이 조금씩 불안한 기색을 드러냈다. 난 침묵을 끝내고 다른 질문을 던졌다.
“달리 내가 알아야 할 사항은 없나?”
경사가 눈을 굴린다.
“어, 딱히 없는 것 같습니다.”
“정말로 없나? 작은 정보 하나라도 중요한 시점이다. 너희가 목격한 흑적(黑賊)들의 보다 상세한 특성, 그들이 처음 나타난 방향, 주요 이동경로, 교전 중 있었던 특이사항 등등. 고민해보면 내게 알려야 할 정보가 분명히 더 있을 거다. 말해.”
시체인형들이 최초로 쏟아져 나온 지점을 알아낼 수만 있다면, 해당지점에 대한 탐색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제작 후 일정기간 보관과 유통이 가능한 시체인형의 특성상 그 제작자가 여태껏 자리를 지키고 있을 확률은 낮지만…… 그 낮은 확률을 뚫고 대마법사 웨스트버튼을 사정권에 포착하는 게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잖은가. 런던 밖에서 원탁의 일좌를 암살할 기회는 귀중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질문을 받은 경사와 나머지 둘은 정제되지 않은 정보들을 더듬더듬 늘어놓았다. 개중엔 더러 유의미한 진술들이 끼어 있었으나, 전체적인 그림을 완성하기엔 모자란 조각들이었다.
나는 서두르지 않았다. 새롭게 접근하는 생존자 무리들이 보이는 참이었으므로.
“각 중대와 대대 주파수는 기억하고 있겠지?”
내 물음에 경사가 끄덕인다.
“물론입니다.”
“좋아.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들이 많았다. 이제부터 귀관들은 우리 경계선 안쪽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각 중대 및 대대 채널로 생존자들을 불러 모으도록. 그들의 증언을 청취하고 병력을 재편성한 뒤에 움직일 거니까.”
“감사합니다! 아, 아니. 알겠습니다!”
뒤로 빠지라는 말에 안도감이 튀어나왔던 경사가 허둥거리며 말을 고친다. 그러더니 머뭇거리며 흐르는 강물을 가리켰다.
“혹시 여기 있던 587함이 어떻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육로는 우리가 막고 물길은 해군이 막기로 했었는데…….”
“587함은 조금 전 침몰했다.”
“예?! 아니, 어쩌다가?”
“자세한 건 나도 모른다. 스스로 미사일을 쏴서 자침하는 과정을 목격했을 뿐이라. 탈출한 승조원은 없는 것 같군.”
“아……. 그 미사일…….”
의심을 사지 않을 만큼의 적당한 대답에 경사를 위시한 경관 셋이 숙연한 표정을 짓는다. 자침이라는 표현으로부터 떠올릴 수 있는 전말이라는 게 뻔했던 까닭이다. 갑판을 빼앗기고 선내로의 침투마저 허용한 상황에서 함장과 승조원들이 비장한 결단을 내린 게 아닐까 상상하고 있겠지. 총정치부 산하 선전부(宣传部)에서도 굉장히 좋아할 소재였다.
셋을 뒤로 보낸 나는 계속해서 도착하는 패잔병들을 취조했다. 시체인형들이 도망자들을 쫓아오는 경우도 있었으나 교전의 강도가 높지는 않았다. 주력은 이미 하중도를 쓸고 지나갔고,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소수만이 군경에 대한 살의를 품은 채로 적막한 거리를 배회하는 상황이었으니까.
꾸준히 이어지는 교전의 소음은 배회하는 망자들과 망설이던 생존자들 모두의 유입을 가속시켰다. 그렇게 모인 생존자들 사이에 교통경찰 대대본부 소속 3급 경독이 섞여있었던 것은 내게 찾아온 자그마한 행운이었다.
“학교라고?”
“예.”
한국으로 치면 경위쯤 되는 경독이 뼈 부러진 가슴을 부여잡고 힘겹게 호흡하며 대답했다.
“총을 맞아도 죽지 않는 적의 출현을…… 가장 먼저 경고한 것이…… 거기 있던 특종부대(특수부대)였습니다……. 적어도 제가 알기로는, 그렇, 습니다…….”
“특종부대라면 혹시 베이징 총대에서 파견한 병력인가?”
“아닙……니다. 광둥전구에서 나온, 윽, 「화남지검(华南之剑)」의 1개 중대입니다.”
화남지검이라면 이름 정도는 들어본 집단이다. 「동방신검」이니 「곤륜리인(昆仑利刃)」이니 하는 중국의 특수부대들은, 세계 정상급까진 아닐지언정 어지간한 국가의 특수전 전력쯤은 가볍게 깔아볼 만큼의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수색에 특화된 「동해비룡(东海飞龙)」 같은 경우는 전 부대원이 다목적 드론을 휴대하기로 유명하다.
나는 수연에게 받은 지도를 펼쳐 참모에게 보여주었다.
“여기서 위치를 짚어줄 수 있겠나?”
수연이 기입한 정보는 여기서도 도움이 되었다. 다른 부대들의 배치를 토대로 기억을 되살리기가 좋은 것이다.
‘하나하나 참 섬세한 녀석이란 말이지.’
전술지도에 정보를 표기할 땐 보통 알코올성이나 수성인 펜을 주로 쓴다. 쓰고 지우기가 편하기 때문. 그러나 수연은 굳이 유성을 꺼내어 썼다. 그때는 그냥 별생각이 없었는데, 이제 와서 보니 내가 물에 빠질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던 모양이다. 아니었다면 지도상의 정보들은 다 번져서 알아보지 못할 지경이 되었을 것이다.
지도 위에서 시선을 미끄러뜨리던 참모가 한 곳을 짚어보였다.
“여깁니다. 관화학교(冠华学校)……. 화남지검대는 이곳을, 이곳을 요새화한 채 버티고 있었……습니다.”
위치를 확인한 나는 특수부대를 둔 이유를 납득했다. 견고한 방어거점은 공격자의 우회를 차단한다. 무시하고 지나가면 거점 주둔 병력이 언제라도 뒤를 위협할 수 있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공격자에겐 양자택일이 강요된다. 요새를 함락하고 지나가거나, 아니면 요새 주변에 많은 병력을 남겨두고서 우회하거나.
특수부대는 이 같은 거점을 맡기기에 적합한 전력이었다.
“협조에 감사한다.”
이제 이 하중도에서 더 이상 모여들 생존자들은 없다. 나는 고개를 돌려 강변공원의 둔치에 모여 있는 교통경찰들을 바라보았다. 자기네가 우리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믿는 경관들은, 사실 나와 내 애들에게 포위를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난 경태에게 지시했다.
“해라.”
쉬고 있던 경관들에게 일제사격이 퍼부어졌다. 헬기의 도어 건(Door gun) 소사(掃射)까지 더해진 집단처형은 몇 초 만에 각성능력자 서른아홉과 일반 경관 일곱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따닥따닥 이빨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 유일하게 살아있는 하나, 내 앞에 있는 교통경찰 참모가 내는 소리였다.
“왜, 왜……?”
풀썩 주저앉은 참모가 올려다보며 묻기에, 나는 대답 대신 권총을 뽑아 이마에 쏴주었다. 쾅!
대구경 권총탄이 머리를 앞뒤로 관통했다. 머리통이 뒤로 꺾여, 공허한 두 눈은 하늘을 바라본다. 반 박자 뒤에 둔탁한 소리를 내며 쓰러지는 몸뚱이. 총탄이 머리끈을 끊었는지, 묶여있던 머리채가 풀려 흐르는 핏물을 따라 흐트러졌다.
나와 내 애들은 처형당한 자들의 시체를 모조리 강물에 내던졌다.
던질 때 신발을 벗기는 걸 잊지 않았음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