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127화 (127/561)

#17. 반역향 (7)

식당칸의 공기는 따뜻했다. 두 팩의 에너지 젤로 열량을 보충한 나는 경태가 내린 커피를 마시며 수마의 유혹을 견뎌냈다. 당류(糖類)가 주성분인 에너지 젤은 흡수가 빨라 전투상황에 운동능력을 유지할 수단으로 적합했으나, 흡수가 빠른 만큼 혈당도 빠르게 치솟아 먹은 직후 피로가 심해진다는 단점이 있었다. 찬바람을 맞다가 따뜻한 곳으로 들어온 터라 눈꺼풀이 더욱 무거워졌다. 눈을 깜박일 때마다 뜨거운 열기가 느껴진다. 에너지 젤에 든 과량의 카페인도 당장은 도움이 되지 못했다.

부하들이 번갈아 엎드려 짧게 눈을 붙이는 와중에 경태는 제 능력으로 실처럼 가늘게 뽑아낸 불을 이리저리 움직여보는 중이었다. 백열전구의 필라멘트처럼 작열하는 선이 다양하고 복잡하게 형태를 바꿔간다. 마력을 태우는 불의 압축·성형·운동제어를 고르게 연습하는 방법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촛불 사이즈의 불꽃을 일으키는 게 고작이었던 경태는, 이제 압축된 화염을 사출하여 금고를 절단하는 짓도 가능한 수준으로 성장해있었다. 자연적인 각성자는 꿈도 꾸지 못할 속도의 성장이다.

‘그래도 능력자를 상대로 쓰긴 까다롭겠지.’

모든 술식은 타인의 마력장을 침범하는 순간부터 상대의 장악력에 영향을 받는다. 술식에 대한 제어능력이 어지간히 우월하지 않고선 다른 능력자에게 마법 술식만으로 직접적인 상해를 입히기가 어려운 것이다.

지금의 경태가 불을 전투에 활용하려면, 불의 열보다는 빛에 주목하는 편이 나았다. 경태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고.

빛을 무기로 쓰는 테크닉은 근거리 교전에서 큰 위력을 발휘한다. 과거 빌 로저스라는 FBI 요원이 이 같은 발상을 처음으로 구체화한 이후, 많은 후계자들이 다양한 기교를 심도 있게 발전시켜왔다. 전술 조명을 생산하는 모 업체는 아예 전문적인 교관단을 육성하여 교육훈련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을 정도다.

그러니 수백에서 수천 루멘(Lumen) 밝기의 빛을 자유자재로 터트릴 수 있는 힘이 현대적인 총격전과 근접전에서 얼마나 유용하게 쓰이겠는가.

쓸 기회가 주어진다면 말이지만.

전투상황 이외의 쓸모를 궁리해본다면 야지에서의 생존성 강화 및 휴대하는 보급품의 중량 감소 등이 있겠다. 이게 언뜻 보기엔 사소한 것 같아도, 자연적인 미궁이 조성된 환경에서 장기간 활동한다고 치면 문자 그대로 생존을 좌우할 만한 힘이었다. 연료 없이 불을 일으키고 연기 없이 식량을 조리하며 더러운 물밖에 없는 오지에서 깨끗한 증류수를 무한정 조달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힘. 물속에서도 타오르고 땅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불의 활용은 쓰는 사람의 상상력을 시험하는 문제였다.

상념에 잠겨있던 나를 일깨운 건 무전기에서 흘러나온 수연의 음성이었다.

「형님.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함교로 올라와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렇지. 조용히 넘어갈 리가 없지. 난 따뜻한 중력과도 같은 노곤함을 떨쳐내며 몸을 일으켰다. 마력의 열선을 지운 경태가 손뼉을 치며 잠든 부하들을 깨운다.

“전원 기상!”

전투준비를 갖추는 부하들을 두고 함교에 오른 나는, 수연이 뭔가를 말하기도 전에 이상을 깨달을 수 있었다. 첫째로 공안 데이터 링크와 연결된 노트북 화면이 파랗게 맛이 가있었고, 둘째로 저 앞쪽에 떠있는 초계함 루저우가 주동력을 상실한 채 느릿느릿 표류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비상조명을 제외한 모든 불이 나가버린 초계함의 승조원들은 함교에서 기관실에 이르기까지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여기서 떠오르는 건 단 하나.

“사이버 공격인가?”

내 추측에 수연이 동의한다.

“그런 것 같습니다.”

군함에 대한 사이버 공격은 관계자들 사이에선 오래 전부터 뜨거운 화두였다. 이게 실제로 가능한 일인가를 알아보기 위해 미 해군대학원이 개최한 해킹 대회에선 구축함 드론 제어 시스템의 관리자 권한을 탈취한 팀이 상금을 받아가기도 했고.

‘하지만 그건 일단 네트워크 접속을 가능하게 해주었을 때의 이야기지.’

공안이나 군의 보안 네트워크는 기본적으로 인트라넷(폐쇄형 네트워크)이다. 외부에서 침입을 시도할 경로 자체가 존재하질 않는 것. 과거 영국의 군함 다수가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례가 있었으나, 이는 보안장벽 내부의 이메일 서버에서 바이러스가 퍼진 탓이지 외부로부터의 공격에 당한 건 아니었다.

그러니 이 사태의 진원지는 네트워크 내부에 존재할 터.

“흑해자당 놈들이 공안이나 해군의 배를 점령하면 포상금을 받는다고 떠들던 게 이런 연유였군. 혹시 심문으로 얻은 정보가 있나?”

앞서 전투에서 사로잡은 포로들의 심문은 원래부터 배에 있던 부하들에게 맡겨놓은 임무였다. 수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선박 확보에 성공하면 무전으로 알리기로 했다는 게 알아낸 바의 전부입니다. 해당 무전채널은 어떤 연락에도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베크룩스가 초계함과 같은 꼴이 되지 않아서 다행이다. 데이터 링크에 접속된 노트북은 원래부터 함교에 있던 것이 아니었으므로, 베크룩스의 항법장비들과 연결점이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밖으로 빼돌리려던 데이터가 아까울 따름. 못마땅하게 혀를 찬 나는 무전기를 쥐고 초계함 루저우와의 교신을 시도했다. 위성을 경유하는 통신망이 마비되었다 한들, 비상전력이 공급되는 한 일반적인 무전은 여전히 가능할 테니까.

“592함. 당소 광저우 공안국 소속 베크룩스. 들리면 응답하라.”

닻을 내리는 초계함의 함교에서 함장이 허둥지둥 무전기를 잡는 모습이 보인다.

「당소 592함. 말하라, 베크룩스.」

“현재 귀함의 상황을 알고 싶다. 계통(系统/시스템) 복구가 가능한 상태인가?”

「이미 하는 중이지만 시간이 걸린다.」

“얼마나?”

「적어도 30분 이상.」

30분이면 승기를 잡았던 전장이 개판으로 변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영향을 받은 게 군함들만은 아닐 터이므로, 이젠 흑해자당만이 아니라 군경까지 손발이 따로 놀게 되어버린 것. 여기서 일군의 적성 능력자들이 군경의 후방을 찌르고 들어오기라도 하면 그때야말로 완벽한 혼돈이 도래할 것이다.

‘원탁이 노리는 바는 양패구상인가?’

중국의 군경과 흑해자당, 어느 쪽도 승리를 거두지 못한 채 손해만 보고서 끝나버리는 싸움. 승리에 취해 기고만장해진 사냥개가 목줄을 끊으려 드는 꼴을 보기 싫다면 고를 법한 수였다.

이게 순수한 흑해자당의 실력일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하다. 전투함의 주요 전자장비 모두를 한 방에 마비시키는 사이버 공격 무기는 아무나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망락(网络/네트워크)이 어디서 뚫렸는지는 알고 있나?”

큰 기대 없이 던진 질문이었는데,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확실하진 않지만…… 십중팔구 587함으로 추정된다.」

“근거는?”

「한 10분쯤 전인가? 이제껏 조용하던 방면에서 갑작스럽게 공격을 받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왔고, 얼마 안 가 연락은 두절되었는데 수거연로(数据链路/데이터 링크)는 살아있었으니까. 본함의 전투정보계통이 마비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갱신된 정보는 587함과 가까운 589함에서 정찰을 실시하겠다는 것이었지.」

“587함의 위치는?”

「음, 그것이, 우리보다 상류이기는 한데, 어떻게 설명하기가-」

루저우의 함장이 당황한 듯 말을 더듬는다. 전투정보 시스템이 죽어버리는 바람에 아군 함선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기도 곤란해진 탓이었다. 아군의 배치를 하나하나 기억하는 것도 무리고.

그러나 막연히 상류라고만 하면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만으로는 사태의 근원을 찾아내기 어려웠다. 수십 개의 물길이 어지러이 얽히고설킨 이곳에선 상류라고 부를 만한 물줄기가 하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수연이 나섰다.

“제가 압니다.”

그러더니 제 부하에게 손가락을 까닥거린다. “지도.” 지시를 받은 부하가 얼른 방수(防水)지도 한 장을 찾아 가져오자, 수연은 유성 펜을 들어 제 머릿속에 남아있는 배치현황을 지도상에 빠르게 옮겨놓았다. 모양새만 보면 대국을 복기하는 국수(國手)와도 같은 느낌. 그 결과로 완성된 지도엔 루저우 함장과의 교신에서 함번이 거론된 두 척의 초계함을 포함하여 열한 척의 배와 열다섯 개의 공안중대, 일곱 개의 무경중대, 그 외의 육군세력과 거기에 맞서는 흑해자당의 세력 등이 표시되어 있었다.

수연은 내게 지도를 건네며 첨언했다.

“약 5분 전의 상황도입니다. 모든 정보를 기입하지도 않았고 좌표를 뽑을 만큼 정확한 것도 아니지만, 대략적인 상황과 위치를 파악하기엔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훌륭하구나.”

지도를 갈무리한 나는 루저우의 함장에게 알렸다.

“587함의 위치는 확인했다. 당소에서도 587함으로 지원을 보내도록 하겠다.”

「잠깐! 이곳은 어쩌겠다는 건가?」

“직승기 편대의 일부만 파견하는 것이니 걱정할 필요 없다. 귀함은 제어계통 복구에 전념할 것. 이상. 교신 끝.”

일방적으로 교신 종료를 통보한 나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수연에게 말했다.

“다녀오마. 뒤를 부탁한다.”

“……부디 조심하십시오.”

겉보기로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으나, 난 수연이 적잖이 긴장한 상태임을 알 수 있었다. 목소리도 미묘하게 톤이 낮다. 원탁과의 충돌 가능성이 있으니 당연한 일. 왠지 모르게 그냥 돌아서기가 저어되어, 나는 굳이 불필요한 한마디를 더했다.

“걱정 마라. 흔적이 남을 사냥에 과욕을 부리진 않을 테니. 너도 내 구상을 알지 않으냐.”

“예. 압니다.”

짧게 대답한 수연은 경태와 시선을 주고받았다. 경태 녀석은 조용히 한 번 웃고는 엄지를 세워 제 가슴께를 쿡 찍어보였다. 이에 나직이 한숨을 쉰 수연이 나를 향해 머리를 숙인다. 무사히 다녀오시라는 뜻이었다.

최상층 갑판의 헬기 이착륙장에 오르자 대장기는 이미 시동을 걸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동체에 교전을 치른 흔적들이 남아있으나 그 가운데 문제를 일으킬 만한 것은 없었다. 탑승하여 헤드셋을 착용하자 조종석에 앉은 부하가 묻는다.

「이번에도 직접 조종하시겠습니까?」

“음.”

난 고개를 까딱이고서 염동력으로 조종간을 넘겨받았다.

끌고 가는 기체는 대장기 포함 총 여섯이었다. 5번기와 6번기가 대장기와 하나의 조를 이루고, 7번기에서 9번기까지는 예비대로서 원거리에서 따라오며 대기한다. 3번기는 내가 강물 속으로 밀어버렸으니, 베크룩스 엄호를 맡는 건 2번기와 4번기 둘뿐이었다. 헬기의 기동성을 고려하면 예비대가 베크룩스를 지원하는 것도 가능하다.

최대속도를 내는 대장기 아래로 달빛을 반사하는 물길이 급격히 가늘어진다. 초계함이 지나가기 위험할 만큼 좁은 곳엔 북쪽 강변을 따라 군경의 진지가 구축되어 있었다. 멀리서 봐도 지친 기색 역력한 군경 병력들이 멍하니 헬기를 올려다본다.

이렇게 15킬로미터쯤을 나아가자 강의 너비가 갑작스럽게 넓어졌다. 하나의 굵은 강이 여러 개의 지류로 쪼개지는 지점. 여기에 떠서 분기점을 차단하는 초계함은 함수에 589라는 번호와 함께 칭위안(清远)이란 함명이 적혀있었다. 연락이 두절된 587함에 정찰을 보내겠다고 했다던 그 배다. 루저우가 겪었던 교전의 상세를 전파 받았는지, 닻을 내린 군함의 갑판에선 무장한 수병들이 여기저기 엄폐물이 될 만한 것들을 쌓아놓기 바쁘다.

사실 전자계통이 전부 먹통이 되어버린 상황에선 이것 외에 전투를 대비할 방법도 없었다. 그나마 비상전력으로 함포의 수동 조작이 가능하다는 점은 위안이었다.

나는 무전기의 주파수를 맞춰 이 초계함과의 교신을 시도했다.

간단한 피아식별 절차를 거쳐 정찰로 얻은 정보가 있는가를 물으니, 초계함 칭위안의 함장은 우려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답했다.

「함재정(舰载艇) 두 척을 띄워 그쪽으로 보냈지만, 겉보기엔 아무 이상도 보이질 않으니 등선(登船)을 시도해보겠다는 연락이 조금 전이었다. 이제 내부 탐색을 시작할 참일 테니 귀소 측이 빠르게 합류해준다면 고맙겠군.」

“알았다, 589. 협조에 감사한다.”

「귀소 측 역시. 무운을 빌겠다.」

함재정은 평소 선내에 수납해두는 작은 연락선을 뜻한다. 대충 열 명 안팎의 무장인원을 보낸 셈. 보트의 속도와 이동거리를 감안하면 이들은 이들 나름대로 일각의 낭비 없이 행동에 돌입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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