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123화 (123/561)

#17. 반역향 (3)

잿빛으로 도색한 초계함 루저우와 달리, 무장 여객선의 하얀 이탈리아제 선체는 희뿌연 월광을 받아 도드라지게 빛나고 있었다.

“베크룩스에 전달. 사령실의 판단 하에 전방의 초계함과 상호 엄호가 가능한 거리까지 전진할 것. 이후의 교전은 자율에 맡긴다. 헬기 편대, 2번기 이하는 이제부터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베크룩스의 지휘를 받으며 기회를 보아 교대로 재급유를 실시할 것.”

내 지시가 무전을 타기 무섭게 베크룩스는 기관 출력을 최대로 끌어올렸다. 혼탁하고 검은 물결을 칼처럼 예리한 선수가 세차게 갈라놓는다. 지금 무장 여객선의 사령실을 통제하는 건 언제나 그러했듯 사실상의 2인자인 수연이다. 이쪽의 콘솔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전송받고 있었으니 상황 판단이야 일찌감치 끝났을 터.

베크룩스는 본격적인 전투함이 아니지만, 떠다니는 벙커 수준의 개조를 받았으므로 이런 비정규전 상황에선 오히려 전투함보다 나은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현대적인 군함의 전투력이란 같은 군함을 상대하는 데 최적화된 것이니까. 체급 면에서도 여객선이 초계함보다 크다.

초계함 루저우는 역추진을 걸어 급격히 속도를 줄였다. 동시에 함수를 좌측으로 살짝 틀어 측면 사격을 위한 사각(射角)을 확보했다. 보유한 무기들을 최대한으로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이를 목격한 베크룩스는 방향을 우로 꺾어 최적의 위치를 확보했다. 베크룩스가 우군이라는 사실은 진즉에 전파가 이루어진 상태. 현재 베크룩스는 광저우시 공안국이 징발한 민간 무장선박으로 등록되어 있다.

제 위치에 도달한 베크룩스가 정선하는 시점에서, 내가 탑승한 기체는 전후로 나눠진 흑해자당의 두 갈래 공세 중 하류 쪽을 틀어막았다. 보트 선단이 좁은 물길을 빠져나오기 전에 최대한의 피해를 입힐 요량이었다.

부아아아앙-!

양쪽을 합쳐 숫자가 거의 4백에 달하는 흑해자당 모터보트 선단의 질주는 바이크 돌격대를 능가하는 거친 불협화음을 빚어냈다. 검게 흐르던 물살이 하얀 물거품으로 뒤덮인다. 적게는 두 명, 많게는 여덟 명까지 탑승한 모터보트 선단은 선두의 속도가 50노트를 넘어섰다. 시속 100km에 근접하는 고속이다. 일단은 양동이라지만 언제라도 주공이 될 수 있는 강력한 위협.

보트에 탑승한 연놈들이 당황한 표정으로 높은 곳의 나를 손가락질한다. 헬기의 출현은 예정에 없는 일이었겠지. 대공미사일로 헬기 다수를 격추하여 군경의 항공세력을 싹 밀어내는 게 원래의 계획이었을 테니.

불안정한 발판에 염동력으로 단단히 발붙이고 선 나는, 손가락질하는 것들을 향해 탄통까지 합쳐 30킬로그램이 넘는 중화기를 들어 겨냥했다.

수류탄보다 강한 유탄을 1초에 네다섯 발씩 퍼붓는 고속유탄기관총이다.

텅텅텅! 텅텅텅텅-!

중기관총과는 전혀 다른 발사음이 울려 퍼진다. 한 손으로는 운반용 핸들을, 다른 손으로는 트리거 그립을 단단히 움켜쥔 채 일방적으로 쏟아내는 막강한 화력. 천둥이 연속으로 내리꽂히는 듯한 굉음과 함께 십수 미터의 물기둥이 줄지어 솟구치자, 모터보트들의 대열에 극심한 혼란이 빚어졌다.

그 사이로 날아간 유탄 한 발이 로켓 상자를 적재한 보트를 직격했다.

콰콰쾅!

강물 위로 충격파가 퍼지며 온 사방의 모든 물결이 노을빛으로 번뜩인다. 사수가 사수인 만큼 명중률은 지극히 높다. 그렇잖아도 회피기동으로 무게중심이 위태롭던 보트 몇 척이 충격파에 휘말려 뒤집어졌다. 달리던 관성만으로 수십 미터를 튀어나가는 요란한 전복이었다. 그 여파로 연쇄충돌이 빚어지며 다시 여러 척의 보트가 물수제비처럼 튕겨 올랐다.

넓지 않은 물길을 대장기 단독으로 가로막으며 기대했던 최선의 결과다.

“재장전!”

순식간에 비어버린 탄통이 아쉽다. 빈 탄통을 빼버리고 염동력으로 새 탄통을 끌어오는 사이, 나 대신 기관총좌를 맡은 경태가 화력공백을 메운다. 쾅쾅 울리는 총성과 유성우 같은 예광탄 세례. 발사섬광과 발광하는 탄도들이 물결에 반사되어 통상시야가 한층 더 현란해졌다. 사수가 사수인 만큼 명중률은 지극히 높다.

철컥, 좌르륵. 새로 결합한 탄통으로부터 기다란 유탄 벨트가 스스로 기어 나와 약실에 맞물렸다. 덮개를 덮고 장전손잡이를 당겼다 놓는 일까지 염동력으로 해치우니 재장전 완료까지 채 두 호흡이 필요하지 않았다.

“该死的老鼠! 打死你们!”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격노한 외침. 헬기의 비행소음마저 뚫고 들어오는 각성 능력자의 성량이었다. 경태가 소리 높여 경고한다.

「형님! RPG(대전차 로켓) 다수!」

“안다!”

수가 많아 즉각적인 대응엔 한계가 있었다. 초당 수백 발씩 가해지는 소화기 사격 사이에서 일곱 발의 로켓이 치솟았다. 난 순간적으로 염동술식의 투사범위를 확장하여 무유도 로켓의 탄도에 간섭했다. 오십 미터 거리에서부터 종횡으로 밀어내는 무형의 압력은 로켓의 오차범위를 극단적으로 키워주었다. 바람을 찢어발기는 날카로운 파공성들이 잇달아 귓가를 지나간다. 바람의 영향을 심하게 받는 로켓이라 의심받을 여지는 없을 것이다.

‘파라 아이디드도 백 발을 넘게 쏴서 두 발을 간신히 맞췄으니.’

파라 아이디드는 과거 미군과 싸워 이긴 소말리아의 군벌이다. 그는 보유하고 있던 로켓의 거의 전부를 하늘로 날려 두 대의 헬기를 격추시켰다. 미군은 그 두 대의 생존자들을 구하고자 어마어마한 희생을 치러야만 했다. 적을 너무 쉽게 봤다가 고난을 자초한 감이 크지만.

「재장전!」

이번엔 경태의 탄통이 비었다. 난 유탄기관총 사격을 재개하는 한편, 눈으로 보지도 않고서 미개봉 중기관총 탄통을 경태에게 밀어주었다. 내가 사실상 세 사람분의 역할을 소화하는 셈이다. 유탄사수, 유탄 부사수, 그리고 중기관총 탄약수. 헬기 자체에 대한 마법적 보호는 전투원의 머릿수로 환산할 수 없다.

보트 돌격대와 같은 속도로 움직이며 유탄과 중기관총을 갈겨대다 보니 어느덧 큰 물길로 빠져나가는 어귀가 코앞이었다. 난 기체를 고속으로 틀어 보트 돌격대와 상류의 초계함이 한눈에 보이는 자리를 잡았다.

이제 초계함이 머무는 상류에서도 교전이 벌어졌다. 어중간한 휴대용 화기와는 격이 다른 포성이 메아리친다. 탄두 직경이 성인의 검지 손가락만 한 포탄을 속사로 쏘아대는 함포였다. 저편에서 튀어나온 보트 돌격대 선두가 1초에 하나 꼴로 처참하게 깨어져나간다.

이쪽에선 보트 돌격대가 기어코 좁은 수로를 빠져나왔다. 만신창이가 되었어도 여전히 만만찮은 전력이다. 또 한 차례 탄통을 비운 난 세 번째 재장전을 하며 초계함과 베크룩스가 있는 방향을 폭 넓게 살피고는, 곧바로 무전으로 경고했다.

“베크룩스에 전달! 남쪽 육상으로부터 대규모 적 접근 중! 비뢰포 포격에 대비할 것!”

새로 끼운 탄통으로부터 벨트로 줄줄이 엮인 유탄이 차르르륵 끌려나오는 순간, 상류의 남쪽 강변으로부터 초계함의 함포에 필적하는 포성들이 중구난방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농민공들의 포병대가 썼던 드럼통 대포, 비뢰포의 재등장이었다. 물소들의 난동을 피해 먼 거리를 헐레벌떡 돌아 등장한 새로운 플레이어들이다. 2번기 이하의 헬기 편대가 즉각 대응에 나섰으나 숫자가 너무 많아 포격시도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긴 불가능했다.

엄폐물 너머에서 곡사로 쏜 포격은 초계함과 그 주변의 수상경찰 보트들에게 집중되었다. 자갈과 쇠붙이가 마구잡이로 뒤섞인 산탄 세례였다. 이깟 걸로 배 자체를 어찌하긴 어렵지만 외부로 노출되어있는 통신장비와 탐색 및 관측 장비들을 망가뜨릴 순 있다.

그 같은 관측 장비엔 사격통제장치(FCS)가 포함된다. 이게 박살난 배는 함포든 기관포든 자동화된 대응 사격이 불가능해진다. 조준부터 발사까지 전 과정을 수동으로 제어해야 하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무수히 많은 산탄들이 초계함 전체를 수십 초에 걸쳐 두들기며 불티를 튀기는가 싶더니, 우릉우릉 울리던 함포의 포성이 거짓말처럼 뚝 끊어졌다. 상류의 흑해자당 보트 돌격대는 아직도 과반수가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어지간히들 손발이 안 맞는군.’

내가 흑해자당의 지도부였다면 비뢰포가 도착한 후에야 비로소 보트 선단을 돌격시켰을 것이다. 흑해자당 지도부가 멍청이 집단일 가능성보다는 계획이 꼬이면서 일선에서 혼선이 빚어진 결과일 가능성이 높겠다.

그 증거로, 적어도 육상에서는 순서에 맞게 제대로 된 무기로 무장한 잡것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자동화된 사격통제가 이루어질 때 나왔으면 횡으로 긋는 기관포 사격 앞에서 감히 머리를 들지 못했을 놈들이다.

이런 와중에 베크룩스는 포격의 피해범위에서 아슬아슬하게 벗어나 있었다. 함교에 버티고 선 수연이 아직 공격명령을 내리지 않고 있었던 데다가, 얼핏 봐서는 평범한 유람선과 같았기에 흑해자당의 표적이 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로써 수연은 무방비하게 모습을 드러낸 강변의 적들에게 기습적인 공격을 가할 수 있었다. 따로 언질을 주지 않았음에도 여기까지 예측하고서 때를 기다린 현명함이었다. 내가 교전을 자율에 맡길 때 기대한 바이기도 하고. 이 정도는 기본으로 해내리라는 기대를.

「쏴!」

무전상에 울리는 단호한 외침. 총안구로 개조된 창문들로부터 사나운 일제포화가 쏟아져 나온다. 중기관총이 설치된 창문만 양현에 각각 열두 개씩이니 이것만으로도 초계함의 근접화력을 능가하는 수준. 여기에 휴대형 로켓과 무반동포 등을 더하면 비교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후폭풍이 존재하는 모든 중화기는 좁은 선내에서도 쏠 수 있도록 별도의 장치가 마련되어 있었다. 숫제 옛 범선시대의 전열함을 보는 듯하다.

웬만한 방어구는 간단히 뚫어버리는 철갑탄 세례에 더해 충격파로 사람 내장을 터트리는 열압력 로켓들이 작렬하자, 남쪽 강변의 흑해자당 세력은 삽시간에 패잔병 집단이 되었다. 기세등등하게 등장하고서부터 채 10초가 지나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다.

보트 사냥에 전념하던 경태가 곁눈질로 강변의 떼죽음을 보고서 감탄했다.

“크-! 역시 누님! 화끈합니다, 화끈해!”

이러면서도 정확한 사격으로 보트들을 격파한다. 쾅쾅쾅쾅! 서너 발씩 끊어 쏠 때마다 반드시 한 척의 보트가 무력화되었다. 엔진이 빠개지거나, 연료통이 터지거나, 조종석이 피투성이로 물들거나. 넓은 수로로 나온 보트들이 요란하게 방향을 꺾어가며 전속력으로 회피기동을 하고 있음에도 그러했다.

쐐애액-!

간헐적으로 날아드는 로켓은 아까보다는 흐트러진 살의였다. 미친 듯이 요동치는 선상에서 쏘느라 정확도가 높지 못하다. 분노를 담아 분무기처럼 뿌려대던 사격의 기세 역시 처음 같지 않았다. 막심한 피해에 사기가 바닥을 치고 있는 것이었다.

‘아예 퇴로를 열어줘?’

이곳 하류의 보트 선단, 방위로 보면 서쪽에 있는 돌격대는 이제 돌격을 한다기보다는 내가 탄 기체를 피해 달아나는 느낌에 가까웠다. 내가 가속하여 전방을 점한다면 공격을 포기하고 흩어질 확률이 높아 보인다.

나는 생각을 곧바로 실천으로 옮겼다. 상황이 여유롭다면 모를까, 자칫하면 초계함이 칼 물고 기어오르는 마약중독자들에게 함락당할 위기였으므로.

“재장전!”

이 짓도 하다 보니 빨라진다. 탄통을 갈고 약실에 급탄 벨트를 물려 노리쇠를 후퇴 전진시키기까지 걸린 시간이 고작 한 호흡. 이거야말로 마법이 빚어낸 또 다른 마법이라 하겠다.

「재장전!」

찰찰거리며 황동 탄피를 뱉어내던 중기관총도 때마침 탄약이 다되었다. 경태의 재장전을 보조하며, 난 한 탄통의 유탄을 한 번의 연사로 다 퍼부어주었다. 줄줄이 치솟는 물기둥에 사선상의 모든 보트들이 경기를 일으키며 회두하는 모습. 방향전환이 너무 급했거나 회두 도중 물기둥에 부딪혀 뒤집어진 보트가 셋이었다. 성공적으로 방향을 튼 보트들 중에서 다시 돌아오는 경우는 없었다.

사선 밖에서 전진하던 보트들 또한 동료들의 후퇴를 목격하고 흐트러진다. 그 위로 경태의 사격이 가해지자 전후로 분단된 돌격대는 마침내 전투의지를 상실했다.

허나 상류 쪽의 상황은 좋지 못했다.

쾅쾅쾅쾅쾅쾅!

수동조준으로 전환된 초계함의 함포가 무지막지한 기세로 포탄을 갈겨댄다. 발사속도는 초당 2회. 난 눈살을 와락 찌푸렸다.

“저 병신들이……!”

겉보기엔 압도적인 광경이지만 알고 보면 패닉에 빠진-혹은 생각이 없는-포수가 무턱대고 연사를 당기고 있는 것일 따름. 포술장은 말리지 않고 뭘 하고 있는 것인지. 정조준을 해도 맞을까 말까 한데 그저 마구잡이로 쏘아대니 한정된 탄약을 대책 없이 낭비하는 꼴이었다.

더 심각한 것은 과열이다.

한 30초나 쏘았을까? 함포사격이 또다시 뚝 끊어진다. 결국 과열로 인해 안전장치가 작동한 것이었다. 내 눈엔 포신에 누적된 열의 광채가 선명했다.

중국의 함포는 러시아제의 복제품이었고, 난 원본인 러시아제의 한계를 안다.

이제부터 저 함포는 반 시간 동안 제구실을 못할 물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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