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119화 (119/561)

#16.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 (12)

“이 험난한 시국에 한눈을 판다고, 그것도 유능한 부하에게 눈독을 들인다고 나쁘게 보진 말아주시오.”

가오슈센이 재빠른 변명을 덧붙인다.

“동사장께서도 사내라면 이해하실 거요. 목숨이 위험할 때 번식욕이 충만해지는 건 모든 생명의 공통적인 본능이잖소? 아내라고 하나 있는 건 자식교육 핑계로 해외로 가더니 자식이 성인이 되었는데도 도통 돌아올 생각을 않았고, 이제는 더더욱 얼굴을 보기가 어렵게 되었소이다. 이럴 때 같은 싸움을 하고 같은 적에게 맞서는 사람에게 마음이 기우는 건 실로 불가항력이 아니겠소?”

“알겠다고 했습니다.”

“그럼 허락해주시는 게요?”

“허락이고 뭐고, 부서기께서 능력껏 녀석의 마음을 얻어 보시겠다면 그건 내가 간섭할 일이 아닙니다. 단, 위력에 의한 강요를 한다는 이야기가 들릴 경우엔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내 부하들의 사기에 문제가 생길 테니까.”

“그런 걱정일랑 하지를 마시오. 내가 이미 박 여사를 존중한다 말하지 않았소? 두고 보시구려. 사내의 가치란 무릇 돈과 권력에 있는 것이니, 나는 한 사람의 사내로서 정정당당하게 그녀의 마음을 얻을 거요. 그럼으로써 나와 동사장의 사이엔 튼튼한 가교 하나가 더해지겠지.”

불륜을 하겠다는 새끼가 정정당당이라는 표현을 쓰니 어이가 없긴 하지만, 여기는 양심이 말라죽은 자들이 지배하는 대륙이니 그러려니 해야지. 얼나이 한둘쯤은 정처(正妻)들조차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나라가 아닌가. 어쩐지 제 비서의 죽음을 담담하게 넘긴다 싶더니, 가오슈센 이 인간의 마음이 벌써 다른 꽃밭에 가있었던 것이다.

‘단단히 일러둬야겠군. 쓸데없이 과잉충성하지 말라고.’

미주 녀석이 내게 보탬이 되겠답시고 제 몸을 함부로 굴리는 건 결코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다.

미인계 자체는 싫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즐겨 사용하는 편. 정보를 빼내기에 이보다 안전하고 경제적인 방법이 얼마나 된다고.

그러나 일은 사람을 가려가며 시켜야 한다. 그런 쪽으로 몸 쓰기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부하들과 그렇지 않은 부하들이 있으니, 그 둘을 서로 구분하지 못한다면 내겐 조직의 정점에 군림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요컨대 나는 불과 얼마 전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부하를 미인계에 쓸 만큼 미쳐있는 인간이 아니었다. 설령 본인이 괜찮다고 한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속에서 닳아 없어지는 심지라는 게 있는 법. 세상에 자기 자신을 다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나. 정녕 다른 방법이 없는 상황이라면 모를까, 부하들을 그런 식으로 소모해선 안 된다.

그래야 결정적인 순간 불가피한 상황에서 내리는 비정한 명령들을 아랫것들이 납득하기도 쉬울 터였다. 부하들은 생각하겠지.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형님께서 이런 결정을 내리셨을 리가 없다. 정말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조직 전체의 충성심에 녹이 슬지 않도록 관리한다는 게 이렇게나 피곤한 일이었다.

“물어보실 것은 그게 전부입니까?”

눈 뜬 채로 단꿈을 꾸던 공산귀족이 내 말을 듣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 아니오. 한 가지 더 있소. 신규 모집한 이능보유자들의 전력화 말이오. 그들을 어떻게 바로 써먹을 방법이 없겠소이까? 당장 결전이 임박한 상황이니 비효율적인 소모를 감수하더라도 머릿수를 채워야 하지 않나 해서…….”

“포기하십시오. 지금의 그들은 덩치만 큰 양떼일 뿐이니. 늑대 한 마리만 튀어나와도 우르르 흩어져버리고 말 오합지졸들입니다.”

“정녕 안 되겠소?”

“말이 신규모집이지, 실제론 승리 소식을 듣고 모인 패잔병 무리 아닙니까? 적에게 압도당해 뿔뿔이 흩어졌던 기억이 여전히 선명할 겁니다.”

대부분의 패전이 그러하듯이, 농민공들의 포병대와 흑해자당 돌격대에게 연타를 맞은 공산귀족의 사병들은 이승을 하직한 숫자 이상으로 쥐새끼처럼 흩어진 숫자가 많았다. 그랬던 연놈들이 이제 가오슈센의 명성에 홀려 애국주의의 물결을 타고 돌아오고들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학살을 당했던 기억이 하루 이틀 만에 희미해지기를 바라는 건 과욕이다. 독전대를 후방에 두고 고기방패로 내세운다면 모를까, 아직은 지옥도를 기억하는 자들을 써먹을 방법이 없다.

가오슈센이 미련을 담아 우물거린다.

“그래도 병단에 속하기 전엔 엽사로서 명성을 날리던 자들이오. 듣자니 우리를 탈출한 곰을 목 졸라 죽인 사내도 있고, 이능생물이 된 물소의 난동을 도끼 한 자루로 끝장낸 여자도 있다더군. 각기 소속이 다르긴 했다지만 어쨌든 병단에 들어 손발을 맞춘 경험들이 있을 테니, 잘만 쓰면 괜찮을 것 같은데 말이오.”

“집단운용이 중요한 싸움터에서 통일성도 없는 훈련을 받은 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전면에 내세우진 못할지라도 측면엄호 정도는 맡겨볼만 하지 않소?”

“그러면 스탈린그라드에서 루마니아에게 측면을 맡겼던 독일 꼴이 나겠지요.”

공산귀족이 말을 못 알아듣는 기색이라, 나는 보다 명료한 표현을 사용했다.

“측면이 뚫려 개박살이 날 거다 이겁니다.”

“…….”

“그러니 그들은 쓸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나중을 감안하면 지금 무턱대고 소모해서도 안 됩니다. 당장은 후방지원이나 맡기는 게 최선이라고 봅니다.”

“나중? 무슨 소리요, 그게?”

“우리가 마침내 도시지역에서 흑해자당을 축출하는 데 성공한다고 칩시다. 그런다고 그들이 뿌리까지 사라지겠습니까? 아뇨. 만사가 그토록 형편 좋게 흘러갈 리가 없지요. 내 예언하는데, 그들은 분명 수백 공리(킬로미터)의 숲과 산지를 근거지 삼아 유격전을 벌이기 시작할 겁니다. 저 동남아와 중남미가 지금 무슨 꼴들을 겪고 있는지는 익히 들어 아실 텐데요?”

가오슈센은 내 말을 반박하지 못했다. 일반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험한 산지는 각성한 능력자들에겐 평범한 동네 뒷산과도 같다. 사람이 접근하기 어렵고 차량은 더더욱 접근하지 못하는 곳에 근거지를 두면, 설령 군대를 동원하더라도 토벌하기가 쉽지 않다. 설상가상으로 그러한 험지엔 원시마법을 얻은 동식물들이 즐비할 것이었다. 이것이 전 세계가 초인들의 해적질에 이어 초인들의 산적질에 골머리를 앓게 된 이유다. 아예 양쪽 모두를 겸하거나, 여러 무장집단들이 거대 연합체를 구성하는 사례마저 나오는 마당.

이른바 비적(匪賊)과 무법자들의 전성시대다.

이런 종류의 무법자들은 비슷한 힘을 지닌 원시마법 능력자 집단으로 퇴치하는 편이 가장 경제적이다. 그러니 지금 있는 능력자들을 머릿수 채우기로 낭비해버릴 경우, 나중엔 지속적인 출혈을 감당하지 못하게 될 것이었다.

“엽사들도 위험하긴 마찬가지입니다. 미처 준비되지도 않은 그들을 전장으로 밀어 넣는다면, 그리하여 그들 중 일부가 또다시 흩어져버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내가 그런 처지가 된다면 보다 안전하면서도 수익성이 좋은 다른 직업을 알아보려 할 겁니다. 그 직업이 합법인가 불법인가는 크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겠지요.”

현상금 사냥꾼이 되느냐, 아니면 무법자들의 대열에 합류하느냐. 중국인들의 보편적인 배금주의를 고려하면 전자와 후자를 가르는 기준은 오직 하나, 수익성뿐일 것이다. 이능 엽사들에게 애국주의의 열병이 남아있는 지금 그들을 잘 관리해줘야만 한다.

“다시 강조하는데, 이번 고비만 넘긴다고 다가 아닙니다, 부서기. 이능보유자들을 보전하고 전력화하지 못한다면 당신의 기반이 되어야 할 이 지역 전체가 장기적으로 소말리(索马里/소말리아) 꼴이 날 겁니다. 당신이 이룬 모든 업적들도 빛이 바래지고 말 테고요.”

그건 이 인간과 세 경독을 이용해야할 나로서도 달갑잖은 일이다.

‘반대로 지역 기반을 최대한 지켜내는 데 성공한다면 그렇지 못한 지역 출신의 귀족들과 차별화되는 요소가 생기는 것이지. 홍콩의 배후지라는 점에서 중앙당의 지원도 더해지겠고.’

물론 엽사들의 세력이 너무 강해져도 문제지만, 그 문제는 이미 농민공들의 포병대가 해결해준 상태. 이곳에 독자적이면서 독보적인 병단을 운용할 나는 그 병단을 통해 아주 많은 이익을 뽑아낼 수 있을 것이다.

가오슈센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온다.

“결국 이대로 어려운 싸움을 치르는 수밖에 없다는 말씀이시구려.”

나는 풀죽은 귀족을 격려했다.

“이번에 힘든 만큼 앞으로가 편해질 겁니다. 엽사 선별은 맡겨주십시오. 두고두고 힘이 될 자들을 휘하에 넣어드리겠습니다.”

“내 어찌 동사장의 안목을 의심하겠소. 이 땅에 동사장과 동사장의 부하들만 한 능력자들이 없을 터인데.”

스스로 힘을 드러내지 않는 한, 각성한 능력자는 오직 같은 능력자만이 알아볼 수 있다. 따라서 자기 사병대를 꾸리고자 하는 가오슈센은 여기서도 내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가오슈센의 병단에 지원하는 엽사들 중에서 쭉정이를 적당히 걸러주기만 하면, 이 일대의 치안은 공식적으로나 비공식적으로나 가오슈센이 완전히 장악하게 될 것이다.

“보다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봅시다.”

내가 화제를 바꾸었다.

“동서로 갈라진 적의 공세는 당연히 동쪽에서 더 강할 겁니다. 그쪽의 영역이 더 넓으니까. 지금이야 충격을 회복하느라 잠잠하지만, 전열을 재정비하는 즉시 밀고 들어오기 시작하겠지요. 그러니 이제부터 나와 내 애들은 둥관시 일대에서 활동하고자 합니다.”

“그 말씀은……?”

“이동식 거점의 장점을 살리겠다는 뜻이죠. 모처럼 비행의 자유를 얻었으니, 주요 구역들을 내 눈으로 직접 감제(瞰制)하며 내 애들을 적재적소에 꽂아 넣으려 합니다. 결정적인 시간, 결정적인 장소에 말입니다. 겸사겸사 둥관 일대의 군경 전력도 활용하고요. 당신이 지휘권을 나눠준다면 말입니다.”

“어…….”

이제껏 부두에 정박해있었던 베크룩스를 주장강의 동쪽 지류로 돌리겠다는 소리에, 가오슈센은 못내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당장 눈앞에서 내가 없어지면 다음 싸움을 어떻게 감당하나 싶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었다. 두려운 마음도 있겠으나, 그 이상으로 내가 그간 워낙 편하게 만들어주었으니까.

공산귀족이 애써 반대를 입에 담는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는 하겠소마는, 그래도 전력을 한데 집중하는 편이 낫지 않겠소? 동사장께선 나와 함께 중심을 잡아주시는 편이 좋을 듯한데.”

“아뇨.”

난 단호하게 부정했다.

“우리는 지금 군대와 군대의 싸움을 치르는 게 아닙니다. 집단전이라곤 하나 대로와 대로, 골목과 골목을 오가며 치르는 소규모 집단전의 연속이죠. 이제부터 밀고 들어올 적들을 상대하려면 기동성이 중요합니다.”

“…….”

“날 믿으십시오, 부서기. 장담컨대 상황을 보는 눈이 나보다 좋은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부하들의 운용을 대부분 직승기(헬기)에 의지할 테니, 여차하면 이쪽으로도 빠르게 지원을 나올 수 있습니다.”

가오슈센은 망설임 끝에 동의했다.

“후. 뜻대로 하시구려.”

내 계획은 이렇다. 헬기 착륙장이 있는 고층빌딩 몇 개소를 골라 요새화된 간이 거점들을 구축해놓고, 물길을 따라 베크룩스를 움직이며 흑해자당의 공세에 대응하는 것.

가오슈센의 말마따나 지금은 결전이 임박한 형국이다. 광저우의 주도권이 공안에게 넘어옴으로써, 흑해자당의 세력은 동서로 쪼개어지게 되었다. 이 끊어진 연결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놈들이 주도권을 되찾기도 요원해진다.

그러니 흑해자당으로선 아직 힘이 남아있을 때 승부를 보아야 한다. 공안이 이대로 굳히기에 성공하기 전에, 전력을 더 보강하기 전에 좌우에서 들이쳐 판을 다시 뒤집어야 하는 것이다.

‘즉 원탁의 첨병들이 슬슬 대가리를 들이밀 때가 되었단 말이지.’

이제껏 내가 몸소 전장에 나섰던 이유 중 하나가 언제 어디서 마주칠지 모를 런던 제국주의자들의 세력이었다. 지금 홍콩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을 제국주의자들에게, 광저우 일대가 안정화 단계에 접어드는 건 결코 바람직한 일이 못되었다.

만약 홍콩의 음지에 원탁내각의 마각이 뻗쳐있다면, 그들은 반드시 이쪽으로 힘을 나누어 주장강 일대 5천만 인구의 혼돈을 연장하려 들 것이었다.

나는 그들의 소망을 안다. 빛과 진리의 원탁은 아주 오랫동안 제국을 꿈꿔왔다. 선택 받은 초인들이 이끄는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영광을. 이것이 비록 스승새끼의 기억에 의지한 앎이라 스승새끼가 원탁을 등진 이후로 반세기 가까운 공백이 끼어있긴 하나, 원탁의 창립 시점부터 시작되어 2백 년 이상 변치 않았던 야망이 고작 반세기 사이에 바뀌었으리라곤 생각하기 어려웠다.

아무렴. 국가로부터는 버림받다시피 하고, 시대의 흐름으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된 채 과거의 영광을 반추하며 화석이 되어가던 광신자들의 믿음이 그토록 쉽게 달라질 리가 없지.

아직 전면전을 벌일 때는 아니다. 아니, 런던 공략 이전에 전면전이 벌어지는 것 자체가 내게는 해롭기 짝이 없는 일. 그러나 원탁의 첨병들도 대놓고 나서지는 못할 입장이라, 흑해자당의 기세를 꺾어놓으면 놈들은 한동안 관망세로 돌아설 터. 어쨌든 놈들의 양보 불가능한 선은 홍콩에 그어질 테니, 그 틈에 나는 귀족들의 금고 몇 개를 더 털어 이 일대에서의 사냥을 마무리 지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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