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117화 (117/561)

#16.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 (10)

광저우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흑해자당이 두려워 몸을 사리던 친정부 시위대들이 다시 한 번 거리를 점령하고, 상점가와 주택가마다 애국주의적 구호가 적힌 붉은 현수막들이 내걸렸다. 온갖 곳에서 오성홍기가 휘날리는 가운데, 축제 분위기에 사로잡힌 중산층 이상의 시민들은 가오슈센의 이름을 열광적으로 연호했다.

전쟁은 기세가 중요하다. 중국 정부는 체면 때문에라도 절대 전쟁이란 표현에 동의하지 않겠지만, 어쨌든 그들은 흑해자당과의 싸움에서 승기를 잡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고 있었다. 고로 가오슈센과 광저우 공안국은 성급정부 및 중앙정부의 집중적인 지원을 받게 되었다. 요컨대 광저우를 누름돌 삼아 포산-광저우-둥관에 이르는 거대한 광역권을 안정시키겠다는 계획. 이 세 도시의 인구만 합쳐도 2천만을 넘어간다.

더욱이 이 광저우 광역권은 현재 중국 내부 최대의 화약고로 떠오른 홍콩-선전 광역권과 직접적으로 맞닿아있는 배후지대였다. 전번의 행정장관 암살 미수 사건 이후 홍콩 민주화세력은 각성 능력자들을 활용한 무장독립투쟁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이때 광범위한 배후지대를 안정화시키면 홍콩의 분리 독립을 추진하는 세력 역시 기세가 꺾일 수밖에 없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대 흑해자당 전선의 중심인물로 급부상한 가오슈센은 한낱 애첩의 죽음 따위에 비통해할 겨를이 없었다.

“호텔 벽에다 지아(佳)의 피로 이렇게 써놨더구려. 「인민의 적에게 죽음을!」이라고……. 반역도당 연놈들이 애꿎은 지아를 죽여 내게 경고를 한 것이겠지. 흥. 비열한 것들 같으니. 그것들은 감히 나를 건드릴 엄두를 내지 못했을 뿐인 거요.”

지아는 미주의 손에 죽은 비서의 이름이었다. 나는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래도 조심하십시오. 광저우 인민의 지지와 반동세력들의 주의가 모두 부서기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당신이 보중하지 못하면 이 도시의 질서도 없을 겁니다.”

당신이 곧 질서입니다. 이렇게 허영을 부추겨주자, 가오슈센은 진중하게 끄덕였다.

“물론이오. 이럴 때야말로 지도자가 굳건해야지. 무모하게 나섰다가 쓰러져버리면 그만한 어리석음이 또 어디 있겠소?”

그러고는 내게 칭찬을 건넨다.

“동사장의 훈시는 훌륭했소. 간결하면서도 핵심만 딱딱 짚어주시는 말씀들이 아주 좋더군. 간부들의 마음가짐이 달라지는 게 한눈에 보일 지경이었소.”

“별말씀을. 나는 부서기를 대신해 경고를 전했을 따름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훈시란 가오슈센이 내게 부탁한 공안국 간부 대상의 정신교육이었다. 각급 부서 책임자들이 대대적으로 물갈이됨에 따라, 가오슈센이 휘하 간부들의 현실인식과 정신무장을 제고할 필요가 있노라 주장한 것이다.

‘실질적으로는 외부인에게 불편한 역할을 떠넘긴 것에 가깝지만.’

본인은 좋은 보스 노릇을 하고 싶은 모양인데, 그러려면 일단 부하들을 대하는 일상적인 태도부터 고쳐야 할 것이었다.

지난 교육에서 사복 차림으로 연단에 선 나는, 제복 차림으로 줄지어 앉아있는 간부들을 내려다보며 그간의 패인부터 확실하게 주지시켰다.

“그동안 우리가 흑해자당을 상대로 계속해서 패배를 면치 못했던 이유, 혹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소?”

교육생으로 참석한 간부들은 과반수가 나를 모르는 자들이었으나, 그럼에도 바짝 군기가 든 상태로 교육을 들었다. 시작하기에 앞서 가오슈센이 나를 정중히 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이어 가오슈센의 심복인 세 경독들 또한 그러했던 까닭이다. 모르는 자들은 나를 비선실세 내지 중앙에서 비밀리에 파견한 감독관쯤으로 여겼겠지.

내 질문에 가장 먼저 손을 들어 발언권을 얻은 자는 신임 형사경찰지대장이었다.

“병력은 한정되어 있는데 지킬 곳이 너무 많아 전력을 집중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전력을 집중하지 못하는데 저들은 자유롭게 전력을 집중하니, 결국 각개격파를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그걸로 끝이오?”

“우리의 배치는 공공연하고 저들의 은신은 비밀스러우니, 우리는 언제나 방어적인 전략만을 취해야 했습니다. 행동의 주도권이 항상 저들에게만 있는데 어떻게 이길 수가 있겠습니까?”

“맞는 말이오. 그리고?”

“음, 그리고…….”

형사지대장의 머뭇거림이 길어지자, 이번엔 경무독찰지대장이 손을 들었다.

“저는 일부 경관들과 책임자들의 용감정신 부족이야말로 가장 큰 패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그간 순라지대 이외의 나머지 지대들이 보여준 졸전은 역사에 남을 수치라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입니다. 모두가 가오슈센 부서기님의 용감정신을 본받아야 마땅합니다.”

용감정신을 한국어로 옮기면 감투정신쯤 되는 말이다. 즉 용기 있고 과감하게 싸우지를 못했다는 말. 구태의연한 정신론 같지만, 공안은 물론이거니와 광저우에 배치되었던 인민해방군 부대들에 이르기까지 정신무장이 형편없는 수준이었던 것 자체는 사실이다.

그러나.

‘부패한 군경이 강할 수가 있나?’

절대로 아니다. 부패한 군경의 힘은 오직 약자들 앞에서만 발휘된다. 약한 사람들과 약한 나라들.

“그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소?”

내가 물어보니, 독찰지대장은 당당하게 대답했다.

“썩어빠진 정신들을 고쳐놓기 위해서는 강력한 처벌과 독전(督戰)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결국 자기네 독찰지대의 감독권을 강화해야 한다는 소리. 다른 간부들은 자연히 싫은 표정들을 지었다. 새로 임명된 간부들 가운데 이제 가오슈센의 사람 아닌 자가 없겠으나, 감찰처의 핵심인 독찰지대를 맡을 정도라면 가오슈센의 파벌에서 꽤 비중이 있는 인물이란 뜻이었다.

나는 가오슈센의 체면을 보아 일단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어차피 공산당 전체가 쇄신을 하지 않는 한 근본적인 해결은 불가능할 문제였으므로.

“일리는 있다고 해둡시다. 혹시 다른 의견은 없소?”

질문을 거듭할 때마다 새로운 답변이 나왔다. 민심의 향방, 외세의 개입, 마약의 효과, 전술의 차이 등등. 그러나 내가 바라는 대답은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결국은 내가 직접 말했다.

“왜 이걸 지적하는 사람이 없는지 모르겠군. 저들은 돌격대 전원이 초인적인 힘에 눈뜬 이능보유자들인데 반해, 우리는 이능보유자와 일반인이 중구난방으로 뒤섞여있지 않소. 각급 부대들이 독자적으로 이능보유자 집중 운용을 시도하긴 했어도, 결국은 통일성이 결여된 미봉책에 지나지 않았지. 내 말이 틀렸소?”

이 지적을 들은 간부들은 겉으로는 수긍을 하면서도 못내 표정들이 좋질 못했다. 일부러 피하고 있었던 주제인 것이다.

어째서 피하는가.

“우리의 약점은 보신주의와 꽌시요.”

뒷짐을 진 나는 청중 모두가 불편해하는 진실을 입에 담았다. 이거야말로 가오슈센이 굳이 외부인인 나를 연단에 세운 까닭일 것이었다.

“거북스러운 마음은 이해하오. 시대가 바뀌었다고 해서, 당장 이능보유자들의 힘이 절실하다고 해서 이능에 눈뜨지 못한 기존의 경관들을 모조리 잘라낼 순 없지. 한평생 국가를 위해 봉직해왔건만,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인 얼치기들이 감히 내 자리를 엿보다니? 누가 이걸 납득하겠소? 당연히 그대들은 꽌시로 맺어진 아랫사람들의 밥그릇을 지켜주고 싶을 거요.”

이는 비단 중국만이 아니라 온 세상 모든 나라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는 문제였다. 급증하는 능력자들의 범죄에 대응하려면 치안을 맡은 인력 또한 능력자들로 교체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 경우, 자리를 잃은 기존의 경관들은 대체 어디로 가면 좋단 말인가?

국방 분야도 마찬가지. 비록 능력자들의 역량이 다 제각각이어서 당장은 제식화된 집단운용과 표준화된 장비 개발에 어려움이 크지만, 새로운 교리를 도입하고 제도적인 정비를 완수해낸 다음엔 모든 나라들이 어떻게든 능력자들로 편성된 부대를 주력으로 삼으려 할 터였다. 안 그러면 국제적인 생존경쟁에서 도태당하고 말 테니까.

예산이 무한하지 않으므로 자리도 무한하지 않다. 설상가상으로 능력자들의 몸값이 비능력자에 비해 비싸기까지 하니, 치안과 국방 분야의 각성 능력자 수용은 곧 기존 인력들의 대대적인 방출 및 좌천을 의미하게 된다.

기존의 인력들이 자신들의 운명을 잠자코 받아들일 리가 있나.

특히 중국은 그놈의 꽌시 문화로 인해 다른 나라보다 강력한 저항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복잡하면서도 끈끈한 연결망으로 이어져 있기에, 어디서부터 손을 대면 좋을지 난감해지는 것이다. 방출당한 인력들이 사회불안을 가중시킬 것도 걱정일 테고.

한편 간부들의 입장에서도 기존의 부하들을 날려버린다는 건 공들여 관리해온 자신의 세력 기반을 스스로 쳐내는 것과 같다.

이는 단순히 뇌물과 여러 상납 등이 끊어지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그 누구의 덕도 보지 않고서, 그저 자신의 능력과 시대의 흐름만으로 자리를 차지하게 된 새로운 부하들이, 과연 자신들의 비능력자 상관에게 합당한 경의를 표하기는 할까? 그럴 리가. 구시대의 유물로 취급하지나 않으면 다행일 터.

중국인이 물고기라면 꽌시는 물이다. 나는 가뭄을 걱정하는 물고기들에게 말했다.

“두려움을 버리시오.”

청중을 둘러보면, 원시마법능력을 개화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반응이 극명하게 갈렸다. 내가 고른 세 경독은 모두가 능력자였으므로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편이었다.

“위기가 곧 기회요. 흑해자당을 비롯한 반역도당의 공격에 무수한 경관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그렇기에 우리는 큰 저항 없이 새로운 인력을 수혈할 수 있게 되었소. 이 기회에 철저한 체질개선을 해내지 못한다면 우린 결국 끝없는 패배의 수렁으로 빠져들게 될 거요. 그대들은 물론이고 그대들의 소중한 사람들도 목숨을 보전하기 어렵겠지. 아니라고 생각하는 자가 있다면 손을 들어보시오.”

당연히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이번만큼은 사적인 꽌시보다 조국과 그대들의 꽌시를 더 중하게 여기기를 바라오. 인력을 충원하는 과정에서 무가치한 보신주의에 매몰되지 말라는 경고요! 이능보유자들 또한 이 나라의 인민이니, 그들의 애국심을 믿고 의지하도록 하시오! 그들에게 있어서 여러분은 당의 지도력을 대변하는 얼굴들이오. 애국심이 투철한 자라면 감히 하극상을 꿈꾸지 않을 거요.”

여기까지가 내게 주어진 역할이었다. 이후엔 실제적인 병력운용이나 치안유지전략에 관한 토의가 오갔다.

이 교육에 참석한 자들 중엔 후수광(胡素光)도 있었다. 흑해자당의 근거지에 붙잡혀있었던 공안국 당위원회의 부국장. 가오슈센의 자비로 목숨을 부지한 이 인간은, 몸이 다 낫기도 전부터 복귀하여 가오슈센의 공안국 장악을 돕고 있었다.

멀쩡한 손가락도 없는 인간이 참 필사적이기도 하지.

교육이 끝난 후 후수광은 내게 개인적으로 말을 걸어왔다.

“일전엔 정말 감사했습니다. 귀하가 아니었다면 저는 그곳에서 살아나오지 못했을 겁니다.”

“몸은 좀 괜찮으시오? 아직 많이 편찮아 보이시는데.”

“아무리 아파도 이럴 때 집에 누워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독한 약을 먹어서라도 어떻게든 움직여야지요. 움직여서 나라를 위해 분골쇄신해야지요.”

“고생이 많으시군.”

단순히 인사치레를 하러 온 기색은 아니어서, 나는 목적을 물었다.

“달리 내게 용건이 있소?”

“그것이-”

주변을 살핀 후수광은, 가까운 사람이 없음을 확인하곤 목소리를 조금 낮추어 말했다.

“귀하께서 바닷길로 비밀스럽게 빼내실 물건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수상분국(水上分局)의 책임자를 겸하고 있으니 앞으로 많은 도움을 드릴 수 있을 듯합니다. 제 도움을 받으시면 백주대낮에 당당하게 물건을 빼돌리셔도 검문검색을 받으실 일이 없을 겁니다. 이 점을 꼭 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그거 고맙구려. 혹시 내게 원하는 바가 있다면 말씀하시오.”

“딱히 원하는 건 없습니다. 저는 다만, 흑해자당의 무리를 무인지경으로 휩쓸어버릴 능력이 있는 분과 인연을 맺어두고 싶었을 뿐입니다. 살면서 언제 다시 곤경에 처할지 모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요컨대 내게 생명보험을 들어두고 싶다는 뜻이었다. 하기야 온갖 고문을 당하며 죽어가고 있었으니 트라우마가 생겼어도 이상하지 않다.

생명보험 이상의 욕심은 천천히 부려도 무방했다.

“그런 거라면 좋소. 건강이 회복되고 어려운 고비가 지나가거든 리에데 대교 아래의 부두로 한번 찾아오시오. 좋은 호골주를 대접해드리리다.”

“……꼭 찾아뵙겠습니다!”

호랑이술 이야기가 나오자 후수광은 눈빛부터 달라졌다. 누가 중국의 공산귀족 아니랄까 봐, 몸보신에 대한 욕심이 뼛속까지 배어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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