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 (9)
잠시 침묵하던 메리옘이 고민해보지도 않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참으로 관대하신 말씀이오나, 괜찮습니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소?”
「방금 보여주신 배려로 더욱 확신했습니다. 이렇게 힘 있고 관대하신 분께서 우리를 필요로 하신다는 건 얼마나 큰 기회인가, 라고. 이제껏 살아오면서 이만한 기회가 주어진 적 없었고, 아마 남은 평생에 걸쳐서도 마찬가지겠지요. 그러니-」
깊은 숨을 쉬고서 힘주어 말하는 메리옘.
「그러니 저는 지금 이 기회를 붙잡아야겠습니다. 확실하게, 번복의 여지없이.」
“내가 그대들을 어디에 쓸지는 끝까지 확인하지 않는 거요?”
「네.」
“어째서?”
「제가 당신께 바치려는 믿음이 그토록 계산적이어선 안 되기 때문입니다. 당신께선 저희의 충성을 바란다고 하셨고, 그 충성을 갈음할 것이 바로 믿음인데, 그 믿음의 가치를 스스로 깎아내리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이 어디 있을까요?」
“묻지 않는 믿음이 가장 값진 것이다?”
「그렇습니다.」
대답한 메리옘은, 조금 작아진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리고…… 동생들 앞에서 만에 하나라도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면, 우선 저 자신부터 다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그와 같은 믿음이 저에게도 필요하다 하겠습니다. 건방진 말씀이었다면 죄송합니다.」
“아니오. 흥정을 하지 않겠다는데 싫어할 사람은 없지.”
보면 볼수록 괜찮은 인재다. 기본적인 교육조차 제대로 받기 어려웠을 환경에서 어떻게 이런 영리한 머리가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삶의 이력이 이력이라 불가피하게 위축된 면모들이 보이지만, 잘만 다듬으면 크게 빛날 원석이다.
‘영웅의 피를 좋은 쪽으로 물려받았다고 봐야 하나.’
20인의 기수라고 했었지. 기병 스물로 시작하여 나라 하나를 세웠다면 보통 영웅이 아니다. 심지어 고대나 중세가 아닌 현대의 인물임에야. 나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입을 열었다.
“한 가지만 일러두리다.”
「무엇인지요?」
“내 아래에 싸우지 않는 자를 위한 자리는 없소. 그 부분만큼은 각오해두시구려.”
이 말에 메리옘은 담담히 고개를 숙였다.
「귀하신 분. 저희를 당신의 투사가 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시길.」
좌우로 쏟아지는 풍성한 머리카락. 이렇게 머리를 조아리는 인사는 이슬람 문화권에서 사람을 대하는 예절이 아니었다. 무슬림들은 오직 알라와 선지자와 그 적법한 대리인들에 대해서만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는 까닭. 굳이 투사라는 단어를 쓴 걸 보면, 앞서 내가 수연을 두고 투사라 표현했던 것이 인상 깊었던 모양이다.
나는 조종석의 부하에게 행선지 변경을 지시했다.
“기수를 돌려라. 마카오 앞바다로 간다.”
「마카오 공항의 통제권역에서 동쪽으로 빠지면 되겠습니까?」
“음.”
헬기가 방향을 바꾸자 메리옘이 묻는다.
「지금은 어디로 향하는 것인지요?」
“어디든. 사람이 없는 곳으로.”
「……?」
“그대는 그대 자신조차 속일 믿음이 필요하다 했지. 내가 그걸 돕겠소. 당신은 오늘 다시 태어나게 될 거요.”
메리옘은 못내 의아한 표정이었으나, 나는 굳이 긴 설명을 더하지 않았다.
타인의 영혼에 회로를 뚫어주려면 일정 반경 이상으로 마력장을 전개할 수 있어야 한다. 주장강과 바다가 만나는 어귀엔 많은 무인도들이 분포하고 있으니, 수 킬로미터 이내에 사람이 없는 장소를 찾기 쉬울 것이었다.
내가 말이 없자 메리옘의 관심은 아래에 흐르는 지상으로 옮겨갔다. 이마를 창문에 기댄 채 홀린 듯이 지상의 혼돈을 내려다보는 메리옘. 작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따뜻한 날숨이 새어, 그 호흡의 주기마다 차가운 유리창엔 뿌연 입김이 번지다 줄어들기를 거듭한다. 눈과는 다르게 하얀 겨울의 색채였다.
굳이 혼돈이 아니더라도,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거대한 도시들의 야경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볼거리다. 벽지에서 태어나 평생 하늘을 날아본 적이 없는 무슬리마에겐 더더욱 그럴 테고.
웅웅. 중산시(中山市) 상공을 지날 즈음 핸드폰이 진동했다. 메시지와 함께 전송된 이미지 하나. 열어보면, 이미지는 몸과 안면에 여러 발의 총탄을 맞은 시체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메시지는 짤막한 「처리했습니다.」 한마디뿐. 발신자는 미주였다. 난 이미지를 삭제하고서 핸드폰을 갈무리했다.
다시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니 지상은 바다로 바뀌었다. 거대하고도 평탄한 암흑 위에 드문드문 인공의 불빛들이 떠있다. 그중에서 가장 휘황한 광채는 멸치와 새우 따위를 잡는 어선들의 것이었다. 긴 세월 무분별한 조업으로 초토화당한 근해 어장의 수확이 좋을 리 없지만,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게 마법이 깃드는 시대엔 그래서 더 안전한 해역이 되어버린 것이다.
메리옘이 묻는다.
「혹시 이게 바다인가요?」
“그렇소.”
「굉장하네요……. 마치 두 개의 하늘 사이를 날고 있는 기분이 들어요.」
시적이군. 나로서는 통상시야에 국한된 감흥에 공감할 수가 없었다.
나는 어느 황량한 섬의 백사장에 헬기를 착륙시키도록 지시했다. 개발을 위해 부두를 짓고 숲을 밀어 모종의 시설을 올릴 터를 닦아놓은 곳이었으되, 중장비엔 오래된 먼지의 더께가 앉았고 철골과 컨테이너마다 녹이 슬어 사실상의 무인도나 마찬가지였다.
랜딩기어가 땅에 닿았다. 의자를 타고 가벼운 충격이 올라온다. 느려지는 회전익 아래에서 부연 흙먼지가 파문처럼 일어났다. 나는 조종석에 엔진을 끄고 대기하라고 전달했다. 터보샤프트 엔진의 소음이 사라지자 곧바로 파도소리가 가까워진다. 문을 열고 내린 나는 이어 메리옘이 내리는 걸 도와주었다.
“아…….”
바닷바람을 맞은 메리옘은 밤의 해원에 시선을 빼앗겼다.
“별천지네요.”
남남서 먼 곳에서 회전식 등대의 불빛이 빛난다. 쭉 뻗는 광선이 돌 때마다 검게 흔들리는 해수면 위로 기다란 반사광이 질주했다. 앞으로 나흘 후면 음력 보름이라, 서쪽 하늘엔 밝고 살찐 달이 달무리를 두른 채 떠있었다. 이 와중에 어디선가 들려오는 한줄기 긴 경적 소리. 황무지 같은 내륙에서 자란 사람에겐 문자 그대로의 별천지일 것이다.
사람 하나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에 어울리는 시공간이라 하겠다.
“조금 걸읍시다.”
메리옘을 동반하여 해변을 거닐던 나는 모래가 고운 자리에서 발을 멈췄다.
“이쯤이 좋겠군.”
난 몸을 돌려 두 발짝 뒤에서 따라오던 메리옘을 마주보았다. 비록 남국(南國)이라곤 하나 겨울의 바닷바람이 제법 차가웠으므로, 히잡을 쓰지 않은 여자는 두 손으로 어깨를 감싼 모습이었다.
“무릎을 꿇으시오.”
내 말에 당황할 법도 하건만, 메리옘은 찰나의 망설임조차 없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묻지 않는 믿음이 가장 값지다 한 사람답다고나 할까. 머리회전이 빠른 건 마음에 들지만, 내가 바란 건 최상급의 예절 따위가 아니었다.
“머리는 들어도 좋소.”
회로를 뚫는 과정에서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거나 넘어지면 곤란하니까 무릎을 꿇으라 한 것이다. 또 머리를 들어야 정수리에 손을 얹기가 편할 터이고.
난 배교자의 머리를 움켜쥐고서 이야기했다.
“지금부터 내가 그대의 영혼에 새로운 힘을 불어넣을 거요.”
이번에야말로 메리옘의 표정에 작은 당혹감이 떠오른다.
“새로운 힘이라 하심은…….”
“그대가 스스로를 속이는 일과 뛰어난 투사로 거듭나는 일 모두를 도와줄 힘이지. 거짓 선지자가 추종자에게 내리는 거짓된 축복이라고 생각해도 좋소.”
“귀하신 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받아보면 알 거요. 단지 이제부터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놀라지 말라는 당부를 해두고 싶었을 뿐. 마음의 준비를 해두시오.”
“……잘은 모르겠으나, 저는 준비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귀하신 분께 맡기오니, 무엇이든 원하시는 대로 베풀어주시길.”
“그럼 시작하리다.”
경고를 끝낸 난 영혼의 회로가 자아내는 역장을 급격하게 팽창시켰다. 내 장악력에 휘말린 막대한 양의 마소가 나를 중심으로 삼아 거대한 소용돌이를 그려낸다. 누군가 같은 광경을 보았다면, 사람에게로 쏟아지는 총천연색 빛의 급류라 하였겠지. 밀도 높은 영의 회로가 들어오는 급류를 마력으로 정제한다. 난 이렇게 만들어진 마력을 가차 없이 메리옘의 정수리로 꽂아 넣었다.
흐읍-!
난생 처음 느끼는 감각에 경악한 메리옘이 숨을 집어삼키는 소리. 내 지배를 받는 마력이 배교자의 영혼에 정교한 회로를 새겨간다. 순환하는 경로와 뻗어나가는 경로. 흐름에 일체의 저항과 낭비가 없도록 뚫어두는 길. 비록 나나 런던의 마스터들에 비하면 한없이 거칠고 원시적이지만, 그럼에도 잠재력 면에서 어지간한 원탁의 졸개들을 능가할 법한 그런 회로다. 이는 내 스승새끼인 크로우허스트 경이 영혼에 작용하는 마법의 대가였던 덕분이었다.
난 내 정신의 영역에서 자유자재로 형태를 뒤바꾸던 스승새끼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실로 압도적인 마법적 기량이었다.
‘슬슬 힘들어지는데.’
회로가 뚫리자, 메리옘의 영혼은 자체적인 역장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는 곧 마소와 마력에 대한 내 장악력을 밀어내는 새로운 장악력의 출현이었다. 난 압도적인 출력 차이로 메리옘의 역장을 찍어 누르며, 새기는 회로의 완성도를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는 데 전념했다. 한번 손을 떼어버리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기회였다.
그러나 결국엔 더 이상 버티지 못할 순간이 왔다. 회로의 완성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메리옘의 마력장 또한 강해졌기에. 이러다 이미 새긴 회로도 망치겠다 싶어진 시점에서 나는 미련 없이 손을 거둬들였다.
메리옘은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부들부들 떨며 일어서지 못했다.
“아……아아……?”
나를 올려다보는 얼굴에 온갖 감정들이 혼란스럽게 뒤섞인다. 의문, 경악, 공포, 경외, 감동 등이 마구잡이로 교차한 뒤에, 마지막으로 남는 것은 뜨거운 열기가 어린 숭배였다.
“귀하신…… 분……. 당신께서는, 대체……?”
숨쉬기가 괴로운 사람처럼 명치 어림을 움켜쥐며 묻는 말. 영의 회로가 열린다는 것은 제6의 감각, 마소와 마력을 느끼는 감각이 열린다는 뜻이다. 고로 각성한 능력자가 된 메리옘은 지금 이 순간 마력장을 한계까지 전개한 대마법사의 존재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원탁의 마스터들은 이러한 순간에 스스로를 선택받은 자라 일컬어 추종자들의 종교적인 충성을 일궈냈을 것이다. 나는 담담하게 선수를 쳤다.
“난 신도 아니고 선지자도 아니며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는 더더욱 아니다. 그저 특별한 힘과 재주를 가진 한 사람의 인간일 뿐이지.”
이렇게 말하며 마력장을 거두었음에도, 내게 못 박힌 시선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눈가에 남아있던 피멍이 빠르게 사라져간다.
“그만 일어나라.”
이제 거래를 되돌릴 여지가 없어진 셈이라, 나는 자연스럽게 하대를 했다. 메리옘은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눈길에 지져질 것 같군.’
앞서 내 부하들 일부도 내게 이런 시선들을 보냈었다. 전후사정을 알 만큼 아는 녀석들이었음에도. 하기야 자연적인 각성조차 마약 카르텔 두목을 광신도로 바꿔놓았는데, 인위적인 각성은 오죽하겠는가. 새겨진 회로가 정교한 만큼 다른 각성자의 존재감에도 민감하다.
“조만간 네 동생들도 같은 경험을 하고 같은 힘을 얻게 될 거다. 그럼 네가 걱정하는 것처럼 겁에 질려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겠지.”
“…….”
“이제 그만 정신을 차리도록.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끄덕인 메리옘은 나를 뒤따라 헬기에 탑승했으나, 여전히 반쯤 넋이 나가있었으므로 벨트는 이번에도 내가 채워주었다. 배교자의 혼미는 복귀하는 비행 내내 이어졌다. 눈도 거의 깜박이지 않고서 쳐다보는 통에 거북함이 느껴질 지경으로.
마침내 헬기가 착륙한 뒤, 베크룩스의 갑판을 밟은 메리옘은 월광을 등진 채로 머리를 숙이며 청했다.
“귀하신 분. 제게 부디 당신의 이름을 허락해주십시오.”
난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본명을 밝힐 수가 없는 자다.”
심지어 최측근인 수연과 경태조차 내 고아원 시절의 이름만큼은 알지 못한다. 스승새끼는 자기가 거둔 고아들의 기록을 의도적으로 말소시켰으니, 내 진짜 신분을 담은 서류는 세상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니 청자에게 종교적으로 들릴 여지가 있음을 알면서도 이렇게 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메리옘이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묻는다.
“그럼 저희는 귀하신 분을 어떻게 불러드려야 할지요?”
“어떤 호칭이든 네가 원하는 대로. 너무 과하거나 모욕적이지만 않으면 된다. 중요한 건 호칭에 담는 마음이니까.”
“그렇다면…… 「아스마 울 후스나」의 예를 본받아야겠군요.”
“그렇게 거창한 의미로 한 말은 아니었다만…….”
아스마 울 후스나는 알라를 칭하는 아흔아홉 가지의 다른 이름들을 뜻한다. 가장 자비로운 자, 지배하는 자, 평화를 주는 자, 누구보다 위대한 자, 권능을 허여하는 자 등등. 이슬람 문화권의 알림이니 라시드니 하는 이름과 성들이 다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메리옘은 천천히, 그러나 분명한 동작으로, 차갑게 식은 갑판 위에 엎드렸다.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코와 이마를 땅에 대는 이슬람의 기도자세였다.
“사람에게 권능을 허여하는 분이시여. 바라건대 저희를 당신의 뜻대로 인도하여 주십시오.”
새로 거둔 부하의 자발적인 관계설정은 나로 하여금 짧은 한숨을 내쉬도록 만들었다.
“내 부하가 된 것을 환영한다, 메리옘 바투르. 앞으로 네 피에 어울리는 활약을 기대하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