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 (8)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그래도 의심과 불안이 남아있었지요. 그러나-”
“그러나?”
“당신께서 저희에게 처소를 내어주셨을 때, 저희는 벽에 시계가 걸려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한인들은 저희에게 결코 시간을 알려주는 법이 없었거든요. 당신께선 또한 저희의 기도를 막지 않으셨고, 모포로 양탄자를 대신함을 눈감아주셨으며, 때마다 손과 발을 씻을 자유마저 허락하셨습니다. 창문을 가리지 않으셨으므로 태양의 운행으로 메카의 방향을 짐작할 수도 있었고요.”
내가 위구르인들에게 주었던 이 많은 호의적 단서들.
“저희를 돌보시는 분들은 저희에게 주어지는 모든 음식이 허락된 것(할랄)임을 알려주셨습니다. 심지어 시일이 흐르자 환경은 더욱 개선되었습니다. 선지자 이싸(예수)의 축일엔 새로이 커다란 배가 도착했고, 한 사람 앞에 하나의 방이 주어졌죠……. 깨끗한 물과 따뜻한 잠자리. 그리고 은인께서 희사(喜捨)하셨던 호화로운 만찬에 이르기까지. 저희는 고향에서조차 이토록 안온한 생활을 누려본 적이 없었습니다.”
메리옘은 깊고도 떨리는 한숨을 토했다.
“그렇기 때문에, 동생들은 도리어 그 어느 때보다도 크고 깊은 두려움에 빠져 있습니다. 만약 이게 구원이 아니면 어쩌나. 지금 누리는 이 행복이 진(악령)의 장난처럼 사라져버리고, 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의 나날이 다시 찾아오면 어떡하나……. 매일 같이 악몽에 시달리는 동생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제게 묻습니다. 은인은 알라께서 보내신 구원자가 맞느냐고. 우리에게 드디어 안식처가 생긴 것이냐고. 저는 거기에 대답해주기 위해서라도 은인을 뵈어야 했습니다. 사정을 설명하고, 허락을 구하고, 미리 말을 맞춰두기 위하여.”
“형편이야 이해하오만, 나는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오.”
“실은 저도 믿지 않습니다.”
“……?”
“정확히는, 그분께서 선하신 분임을 믿지 않습니다. 더는 믿을 수가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알라께선 쿠란에서 말하는 그런 자비로운 분이 아니실 것입니다. 저희가 경험한 이 세상의 모습들이 그 증거입니다.”
“뜻밖이구려. 그래도 기도를 열심히 하신다고 들었건만.”
“이제까지 동생들에게 들려준 거짓말들의 무게 탓이죠……. 신께선 너희를 사랑하신다, 신께서는 너희를 버리지 않으신다, 신께선 너희에게 반드시 구원자를 보내주실 거다, 내 말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등등.”
“단지 그뿐이오?”
“……예. 저는 진실로 배교자이며, 제 기도는 닿을 곳이 없는 기도였습니다.”
“그런 속을 나 이외의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은 적이 있소?”
“결코.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습니다.”
그럼 알림 샤히디는 소 뒷걸음질에 개구리 잡은 격으로 진실을 말한 셈이군. 선실의 온도가 따뜻하게 유지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배교를 고백하는 메리옘은 찬바람을 맞는 사람처럼 떨고 있었다. 목소리조차 너무 흔들려 부서질 듯하다.
“요컨대 나보고 거짓 선지자가 되어달라는 건가.”
“거짓이면 어떻겠습니까. 절대자가 선하지 않다면, 절대자의 뜻에 반하는 거짓 선지자가 오히려 선할 수도 있는 것 아닐까요?”
많이 긴장한 와중에도 이런 논리에 이런 당돌함이라니. 여간내기가 아니다. 드물게 유쾌해진 나는 짧은 실소 후에 이렇게 반문했다.
“내가 실제론 어떤 사람일 줄 알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요?”
“저는 은인을 모르지만,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당신께서 이제까지 베풀어주신 은혜만으로도 저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한 가장 큰 선의라는 것. 그리고 그 선의가 없었다면 저희는 지금 살아있지도 못했으리라는 것……. 제겐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다지 충분하지 않은 것 같소만.”
“충분합니다. 은인께서 저희를 어떤 길로 이끄시더라도, 최소한 지금껏 겪어온 삶보다 더 나빠질 수는 없을 테니까요. 나아지지 않는다면 그때야말로 이 험한 세상을 등질 뿐입니다. 저와 제 동생들은 더 이상 잃어버릴 것이 없습니다.”
“어떤 길로 이끌어도 나빠질 게 없다, 라…….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내가 그대와 그대의 동생들을 거두어 어디다 쓰겠소?”
“저는 모르지만 당신께선 알고 계시겠지요. 악한 절대자가 창조한 세상에 순수한 선의 같은 게 있을 리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께서 저희를 거두어 보호하고 계시는 데엔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내가 단순히 다른 어딘가로 팔아치우기 위해 당신들을 데리고 있을 따름이라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어도 못내 우려하던 바였을 것이다. 안색이 파리해진 메리옘은, 그러나 침 한 번 삼키고서 내 말을 부정했다.
“그렇다고 보기엔…… 그렇다고 보기엔, 저희는 지금 너무 큰 호사를 누리고 있습니다. 금방 팔아넘길 사람들에게 괜한 돈을 낭비하는 건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판단력 좋고.
“부디 시험하지 말아 주시길. 당신의 관대함에 기대어, 저는 당신께 감히 거래를 제안하고 싶습니다. 저와 제 동생들의 전부를 바치고서 단지 안식처 하나를 구하는 거래를.”
“받아들인다면 메리옘 그대는 나를 따르는 움마(신앙공동체)의 학자가 되는 거요?”
“……예. 그럼으로써 제게 의지하는 동생들에게는, 또다시 많은 거짓말들을 하게 되겠지요. 이 무서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선의의 거짓말들을.”
“윗사람으로서의 나는 그대들에게 매우 위험하고 더러운 일들을 시킬 수도 있소. 상황에 따라선 사람을 죽이거나 스스로 죽으라고 명령할지도 모르고.”
“그래도 죽기 전까진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잖습니까.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저희는 더 이상 잃어버릴 게 없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요. 거절하시면 제 동생들의 마음은 끝내 부러져버리고 말겠죠. 그러니, 제발…….”
나는 고심했다. 방식에 대한 호오를 빼고 보면 내겐 이로움뿐인 제안이었으므로. 엄밀히 말해 다른 부하들처럼 스스로의 의지로 목숨을 주고 목숨을 받는 계약까진 못되겠으되, 어쨌든 내가 이들의 목숨을 구해주긴 하였으니 이제껏 견지해온 영입의 원칙을 근본적으로 위반하는 건 아니다.
“수연이 넌 어떻게 생각하지?”
수연은 한국어로 던진 내 물음에 담담하게 답했다.
“그저 형님의 판단을 따를 뿐입니다.”
괜한 질문이었다. 일전에 조직에 필요한 인재가 목숨을 빚지도록 만들어주자고 했던 녀석이 누구였던가.
‘팔자에도 없는 재림예수 노릇을 하게 생겼군.’
이슬람교에도 심판의 날과 메시아의 개념이 있다. 세상의 종말이 막을 올리면 먼저 선지자 마흐디(ٱلمهدي)가 돌아올 것이며, 이어 죽음에서 일어난 선지자 이싸(예수)가 마흐디를 도와 거짓되고 악한 것들과의 전쟁을 시작하리라는 것. 그 전쟁의 끝에서 마흐디와 이싸가 알 마씨 앗 다잘(거짓 구세주)을 물리치고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리라는 게, 쿠란 다음으로 신성한 책 하디스(حديث)의 예언이다.
그러므로 마흐디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재림예수와 흡사하다. 기독교계에 자기가 재림예수라 주장하는 목사들이 넘쳐나듯이, 이슬람계엔 자기가 마흐디라고 주장하는 종교지도자들이 넘쳐난다. 당장 미국에서도 마흐디를 자칭하는 터키인 하나가 몇 년째 재판을 받는 중이었다. 사이비 교주답게 무수히 많은 사기와 성폭력을 저지른 혐의로.
나는 끝도 없이 늘어지려는 망설임에 마침표를 찍었다. 생존은 절대적인 명제이며, 사업엔 융통성이 필요하다. 그러니 기왕 받아들일 거라면 확실하게 해야겠지. 히잡을 쓰지 않은 불신자에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숙고할 기회를 주고.
“헬기를 준비시켜라.”
“예.”
가오슈센이 시 치안행정의 전권을 쥐게 되면서 부수적으로 떨어진 것들 중 하나가 헬기 운용의 자유였다. 밀도 높은 항공감시에서 아예 벗어날 순 없을지라도, 그 감시를 무의미하게 만들 순 있게 된 것. 물론 가오슈센만큼은 내 비행에 주목할 것이나, 비행의 목적까지 알아낼 도리는 없을 것이다.
‘대놓고 물어보지도 못할 테니.’
만약 묻는다면 그만한 멍청함이 다시없다. “내가 그대를 감시하고 있었는데 궁금한 것이 있소.” 하는 꼴이니까. 그 공산귀족은 그렇게까지 멍청한 놈이 아니었다. 끽해야 사람을 따로 보내어 헬기의 이착륙지점을 살펴보는 정도에 그치겠지.
메리옘은 자기가 모르는 언어로 오가는 대화에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난 그런 그녀에게 손짓했다.
“일어나시오. 함께 가야 할 곳이 있소.”
“어디로……?”
“일단 가보면 알 거요.”
베크룩스의 최상층 갑판으로 이동하니 헬기는 벌써 이륙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히잡을 쓰지 않은 여인은 회전날개의 바람과 굉음에 겁을 집어먹었다. 나는 반쯤 굳어버린 그녀를 헬기 좌석으로 이끈 뒤 안전벨트를 채우고 헤드셋을 씌워주었다.
“직승기(헬기)는 처음이겠구려.”
신장 위구르 자치구는 가난한 중국 내륙지방 중에서도 특히 더 빈곤한 지방이다. 이런 식의 비행을 해봤을 리가 있나. 내 말에 살짝 질린 채로 답하는 메리옘.
「네……. 얼마 전까진 배를 타본 적도, 아니, 본 적조차도 없었는걸요.」
“겁내지 마시오. 그냥 좀 빠른 탈것일 뿐이니.”
파일럿을 제외한 탑승자는 나와 메리옘, 그리고 무장인원 둘뿐. 무장인원에 수연은 포함되지 않았다. 사실상의 2인자로서 내가 없을 때 사령탑을 대신해야 하는 녀석이니까. 수연 녀석은 사납게 펄럭이는 옷자락을 여미며 무언으로 나를 배웅했다.
난 조종석에 지시했다.
“이륙해.”
「어디로 갈까요?」
“우선은 하이저우구 상공을 저속으로 한 바퀴 돌아.”
「알겠습니다.」
지시를 받은 부하가 조종간을 당기자, 날개회전이 이미 임계점에 가까웠던 헬기는 몇 초 만에 중력을 거스르기 시작했다. 기내 통신망에 짧은 비명이 울린다. 두 눈 꽉 감고 시트를 힘껏 움켜쥔 메리옘의 것이었다.
“눈을 뜨시오, 메리옘.”
「…….」
“눈을 뜨고 창밖을 보시오.”
눈을 가늘게 뜬 메리옘이 어렵사리 고개를 돌려 창밖의 야경을 바라본다. 잠시 후, 메리옘은 두려움을 잊게 되었다. 도심 곳곳에서 올라오는 검은 연기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저게…… 뭐죠? 이 도시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요?」
“이 도시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오. 중국 전체가 내우외환을 겪고 있지. 2차 대전 이래 한인들의 명운이 지금처럼 위태로웠던 시기가 없었을 거요.”
카라마이의 수용소에서 후롱방의 사업장으로. 일부는 후롱방의 사업장에서 다시 마이쯔치의 회원제 하렘으로. 내가 구한 위구르인들은 지금껏 중국의 현재를 제대로 목격할 기회가 없었다. 내가 거둔 후에도 배 안에 거의 갇혀있다시피 했을 뿐이기에.
메리옘이 더듬거리며 묻는다.
「한인들이 위태롭다는 말씀은…… 중국이라는 나라가 무너질 수도 있다는 건가요?」
“당장은 아니지만 가능성은 있다고 해두리다. 무너지진 않더라도 크게 낭패를 볼 가능성이. 운이 따라준다면 당신의 동포들도 자유와 독립을 쟁취할 수 있을 테고.”
「설마 그런 일이-」
“어디까지나 큰 운이 따라줄 때의 이야기요. 신장 자치구가 독립한다고 해서 그 땅이 꼭 위구르인들의 나라가 되라는 법은 없으니까. 나보다는 그대가 더 잘 알 텐데. 그 땅에 들어온 한인들이 얼마나 강하고 악독하게 뭉쳐있는지를.”
「그렇, 지요.」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는 강대한 준군사조직 신장생산건설병단(新疆生産建設兵團·XPCC)이 존재한다. 14개 사단과 185개 독립연대, 최대 3백만 이상의 병력을 동원 가능한 이 병단은 또한 11개의 상장기업과 무수히 많은 농장들을 경영하는 거대한 기업군단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현대화된 둔전병 집단인 것이다.
성(省)급 정부에 준하는 격을 인정받아 신장 땅의 진정한 지배자라 해도 과언이 아닐 이 병단은, 설령 중앙정부가 붕괴하더라도 자신들의 지배력을 유지할 능력이 충분했다. 중앙정부를 대신해 민족말살정책을 주도하는 것도 바로 이들이었다.
애당초 위구르인들은 숫자로도 다수가 못 된다. 오랜 식민사업의 결과 신장 땅에 한인 인구가 대략 절반이고 위구르 인구가 다시 절반쯤인데, 최첨단 감시체계와 경제력과 군사력 모두를 틀어쥔 지배자들을 위구르인들이 무슨 수로 다 몰아내겠는가. 피로 피를 씻는 투쟁 끝에 자치구의 조그마한 귀퉁이라도 떼어 독립할 수 있다면 다행일 것이다.
“내가 이걸 보여주는 이유를 짐작하겠소? 또 다른 가능성을 일깨워주는 이유를?”
「……네.」
“당신은 내게 새로운 제안을 할 수 있소.”
「네.」
“나는 모르오. 당신 동생들의 믿음이 얼마나 깊고 절실한 것인지. 그러니 그들이 과연 진실과 현실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지, 또 그들을 위한 최선이 무엇일지를 판단하는 건 이제껏 그들을 살려온 당신 한 사람의 몫이오. 난 어찌되었든 당신들의 충성을 받을 수만 있으면 족하고.”
굳이 광신도로 만들지 않더라도, 나는 오래지 않아 이들의 심지를 휘어잡을 자신이 있었다. 조직의 건전성을 고려하면 도리어 그쪽이 더 좋다.
그러나 세상엔 사람을 죽이는 절망이라는 게 있다. 그리고 신앙은 광기와 닿기 쉬운 영역이다. 메리옘의 ‘동생들’이 그 지경까지 망가져 있다면, 망가진 상태 그대로 활용하면 그만이었다.
“생각할 여유가 더 필요하다면 말하시오. 내가 시간이 많은 사람은 아니지만, 며칠쯤은 기다려줄 의사가 있소.”
나는 지금 호의를 베푸는 게 아니다. 장차 내가 받을 충성을 강화하는 중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