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112화 (112/561)

#16.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 (5)

입장을 정한 경독들은 한결 가벼워진 분위기 속에서 자유로운 말들을 풀어놓았다. 대개의 화제는 각자의 업무나 근래의 정세와 관련된 불안 및 고충들. 개중엔 당연히 미국의 외교 전략에 대한 성토가 포함되어 있었다.

“들으셨습니까? 이번에 비루먹은 몽골 촌놈(草包)들마저 그놈의 환태평양 조약기구인지 뭐시기인지에 가맹했다더군요. 전번에 한국이 가맹하고서 채 한 달도 안 지났는데 말입니다. 중국은 다른 어떤 국가들보다도 더 평화를 사랑하는 나라인데, 양키 새끼들(美国佬)은 왜 이렇게 분란을 못 일으켜 안달인지 모르겠습니다.”

판하이산이 울분을 토하자, 장타이롱이 그에게 핀잔을 주었다.

“뭘 모르는 척하고 있나, 자넨. 우리의 「이능굴기」가 자기네에게 위협이 되니까 그러는 거지. 오랫동안 붙잡고 있었던 제국주의적 패권을 빼앗길까 봐서.”

후샨량은 몽골의 염치없음을 비난했다.

“진정한 몽골은 중국의 일부가 된 지 오래건만, 뿌리를 외면하는 얼간이들의 나라가 이제껏 우리 중국으로부터 받은 은혜도 잊고서 감히 역사적 모국을 적대하려 드니, 세상천지에 이보다 참람한 일을 다시 찾기도 어려울 겁니다.”

여기까지 들은 나는 고개를 미묘하게 기울였다.

“몽골이 중국으로부터 받은 은혜? 그런 게 있었소?”

“물론입니다.”

후샨량이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이 대답했다.

“아직도 말과 양의 똥을 태워 고기를 삶는 그 야만인들이, 우리 중국과의 무역이 없었으면 무슨 수로 호구지책을 마련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아, 그 은혜.”

대충 끄덕여준 나는 진정한 몽골이 중국의 일부 운운하는 부분에 대해선 물어보지도 않았다.

‘칭기즈칸조차 중국 민족의 영웅이라고 하는 마당에.’

뜻밖에도 여기엔 나름의 근거가 있었다. 바로 중국령 내몽골 자치주의 존재. 내몽골 자치주의 몽골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몽골의 후예라 믿는데, 이는 이들 중 많은 수가 정통 몽골 귀족들의 피를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유서 깊은 혈통을 계승한 자들이 보기에, 독립국으로서의 몽골은 소련이 세워놓은 괴뢰국에 불과했다. 대초원의 정당한 지배자들을 배격한 공산주의 침략자들이 오이라트 천것들로 하여금 감히 위대한 몽골 울루스의 이름을 도둑질하도록 한 것이다. 몽골의 정체성이 민족이 아닌 씨족에 있다고 믿는 자들에겐 용납하기 어려운 폭거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들이 말하는 씨족이란 혈연에 기초한 기득권과 정통성의 계승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비록 황금씨족의 적통은 끊어졌으되 한미한 방계들은 여전히 중국령 내몽골에서 중국인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웃기는 건 표면적으로나마 공산주의 국가를 자칭하는 중국이 이 봉건귀족 후예들의 정체성을 가져다가 정치적 선전과 동북공정에 써먹고 있다는 점. 그러나 원래 모순을 견디면서 추구하는 것이 중국의 공산주의이니, 딱히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하겠다.

“다들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난 경독들의 오류를 짚어주었다.

“몽골은 회원국이 아니라 참관국 자격으로 들어간 거요. 회원국으로서의 의무나 권리가 일절 존재하지 않지. 그들이 진정으로 대중국 포위망의 일부가 되고자 한다면 먼저 러시아의 반발부터 무마해야 할 거요. 대중국 포위망은 언제라도 대러시아 포위망이 될 수 있으니까.”

“참관국이라고요?”

후샨량이 옅은 당혹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중앙방송에서는 분명 회원국이 되었다고-”

“그야 위기감을 부풀리기 위한 과장보도겠지. 인민들의 애국심을 자극해야 할 게 아니오? 몽골이 굶어죽을 작정을 하지 않고서야 어찌 그런 판에 함부로 끼어들겠소?”

“음…….”

납득하는 표정을 짓는 후샨량. 중국의 언론은 중국인들에게도 큰 신뢰도가 없었다. 다만 믿고 싶은 것을 믿는 사람의 습성상, 진위가 중요하지 않은 순간들이 많을 따름.

만약 중국이 작금의 위기를 무사히 극복해낸다면, 이런 식으로 강화된 배타적 공격성은 세계정세에 크나큰 재앙이 될 것이다. 나는 경독들과의 대화를 통해 다시 한 번 확신했다.

‘역시 이 제국주의 정권은 망해야 한다.’

최소한 반병신이 되어야 런던 낙성 이후의 내 나날이 평화로울 수 있을 터. 이용할 대로 이용한 다음엔 내 능력껏 난장을 쳐놓고 손을 떼야겠지.

그때도 여기 있는 세 경독은 괜찮은 도구가 되어줄 것이었다. 그 시점까지 내가 안겨다준 이익과 굳어진 꽌시의 관성에 휩쓸려서, 자신들이 뭘 하고 있는지조차 눈치채지 못한 채로.

한정된 시간 동안, 경독들은 점차 나와의 대화를 즐기는 모습들을 보여주었다. 셋 모두 내게 편히 대할 것을 요청했으나, 나는 가까울수록 더 예의를 지켜야 할 때가 있는 법이라고 사양했다. 이 또한 밖에서 새는 바가지가 될지 모르는 것이기도 했고.

“술이 아쉽군요.”

장타이롱의 말.

“아까 동사장께서 하셨던 말씀처럼 취할 때가 아니긴 합니다만, 그래도 오늘처럼 기념비적인 날에 술잔을 나누지 못한다는 사실이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중국에 흔한 독주는 한 잔도 많다. 취기보다는 냄새가 문제. 이 자리가 끝나는 대로 현장에 복귀할 이들이므로, 술 냄새를 풍기게 되면 곤욕을 치르게 될 가능성이 있었다. 상급자인 가오슈센의 부하들 대하는 매너가 좀 더러워야 말이지.

“술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판하이산이 운을 띄운다.

“동사장께선 혹시 호골주(虎骨酒)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

견면례 선물이랍시고 그 흉한 호랑이 담금주를 가져온 게 이 녀석이었나? 내가 제 선물의 가치를 몰라볼까 봐 초조한 마음에 미리 확인이라도 해보려는 것인가? 난 이런 속을 내색하지 않고서 가볍게 수긍했다.

“그렇소. 거래가 불법으로 지정된 약주 아니오?”

중국에서 어떤 약재가 불법이라 함은 곧 선택받은 자들만이 접할 수 있는 최고급의 약재라는 뜻이다. 한국에서도 몸보신에 미친 중늙은이들이 종종 밀수입을 하다가 적발당하곤 하는 인육캡슐 같은 게 대표적인 예시. 한국 세관이 3천 정 가까운 물량을 압류한 게 불과 재작년의 일이고, 뉴스로도 보도되었다. 죽은 태아를 말리고 갈아서 만드는 보약이 뭐 합법이라 유통되고 있겠는가?

‘대체 그걸 왜 처먹는 것인지…….’

건강과 장수를 바라는 인간의 욕망은 뒤틀린 광기로 변질되기 쉬웠다. 심지어 이 광둥 지역엔 영아로 탕을 끓여먹는 미치광이들까지 있다. 이름부터가 그냥 영아탕이다. 암시장에 무슨 상품이 없겠느냐마는, 그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터넷에서 공공연히 거래되었다는 사실은 놀랍기 짝이 없었다.

“맞습니다. 사람의 기를 북돋워주는 영험한 술이죠.”

판하이산이 반색하며 끄덕였다.

“몇 년 전 호골이나 상아 같은 전통적 약재에 효과가 없다는 공식 발표가 나왔지만, 지금은 아무도 그걸 믿지 않지요. 그건 기라는 개념이 없는 서양의학의 기준이 아닙니까?”

“흠…….”

“그 술을 마시고서 불사암이 나았다는 사람도 있고, 이능이 눈에 띄게 강해진 사람도 많습니다. 불사암만이 아니라 폐암, 간암, 위암 등등에도 효험을 보았다는 환자들이 얼마나 넘쳐나는지 모릅니다.”

“사실이라면 굉장하구려.”

“굉장하지요. 특히 앞발을 통째로 넣은 경우의 약효가 가장 뛰어나다고 합니다. 호랑이의 기는 앞발에 집중되어있기 때문이라더군요.”

“…….”

견면례 선물에 포함된 술병엔 호랑이 앞발이 들어있었다.

그러나 판하이산이 단순히 자기가 가져온 선물의 가치를 어필하기 위해서만 이 이야기를 꺼낸 건 아니었다. 경독은 이제부터가 본론이라는 듯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요즘 러시아령 연해주가 호환(虎患)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는 소식, 들어서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그 나라 말로 「원령」이라 불리는 식인 호랑이가 날뛰고 있다지요?”

“그런데?”

“이건 베이징에서 일하는 제 사촌으로부터 귀띔 받은 정보인데, 중앙당의 높으신 분들이 그 식인 호랑이에게 눈독을 들인 것 같답니다. 공식적으로는 경계강화 지시를 내렸을 뿐이지만, 엽사들에게 비밀리에 굉장한 거액의 포상금을 내건 듯하다고. 게다가 중앙에서 육성 중인 최정예 이능보유자 부대마저 움직인다는 소문을 들었답니다.”

요컨대 자기는 베이징에도 끈이 닿아있다는 암시다.

“……혹시 그 목적이 약용이라고 생각하는 거요?”

“왜 아니겠습니까? 그만한 호랑이의 앞발을 잘라 술을 담그면 실로 어마어마한 영약이 탄생할 텐데요.”

듣고 있던 후샨량과 장타이롱이 각기 제 의견을 보탠다.

“꼭 높으신 분들이 드실 게 아니더라도, 강한 이능보유자 양성에 도움이 된다면 천금을 들일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국가적 재난을 일으킬 만큼 뛰어난 이능생물이라면 실험체로서의 몸값도 높겠지요.”

“지금 이 나라에서 그나마 조용한 동네 중 하나가 둥베이(东北) 아닙니까. 약용이니 연구용이니 따지기 이전에, 호환을 막지 못함으로써 흔들릴 당의 지도력부터 걱정해야 합니다.”

이런 말들을 들으며, 나는 이들이 오기 전까지 집무실에 앉아 첨삭하던 논문을 생각했다. 이제 졸업을 앞두고 있는 산딸기 조카 녀석의 박사논문을.

‘첨삭이라기보다는 내가 대신해주는 것에 가깝지만.’

산딸기, 그러니까 송흥주 부장의 조카 송하율은 이런 식의 도움을 받는 걸 많이 불편해한다고 들었다. 자신이 직접 하지 않은 연구로 이득을 얻는 것이 못마땅하다고. 믿을 만한 부하의 인척다운 고지식함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이들을 보라. 호랑이의 기운이 어쩌고 영약이 저쩌고 떠들어대는 이 어리석은 군상들을. 미리 손을 써두지 않았다면, 세계는 지금 이상으로 압도적인 지적 미혹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이다. 원탁은 아무런 견제도 받지 않고 지식의 권좌를 향해 독주했을 터.

‘설마 가짜 공산당 수뇌부가 미신에 빠져있진 않겠지…….’

일찍이 런던에 가했던 공작은 성공적이었다. 꼬리를 밟히지도 않았고, 정황상 냄새를 맡아야 할 개들이 빠짐없이 냄새를 맡은 듯했으니. 각국의 외교적 행보들을 보건대 다들 필요한 만큼의 정보를 빼돌렸지 싶다. 그리고 미국과도 첩보력을 겨루는 중국이 당시의 런던에서 다른 나라에 뒤쳐졌을 리가 없었다.

허나 염려스러운 것은 인간의 어리석음과 일당독재 특유의 경직성이다. 옛 소련이 마르크스주의적 과학이랍시고 트로핌 리센코의 용불용설을 밀었다가 엄청난 피해를 보았던 것처럼, 중국의 대가리들도 위대한 중화의 과학원리라며 기(气)가 어쩌고 경락(经络)이 저쩌고 하는 이론에 집착할 개연성이 존재했다.

사람이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도 이상한 믿음에 빠질 수 있다면, 그것은 국가 또한 마찬가지인 것이다.

때마침 경독들이 유사한 맥락의 개소리들을 주고받는다.

“동인당(同仁堂)의 3/4분기 해외 매출이 지난 분기에 비해 90배 넘게 폭증했다더군. 이 난리가 난 와중에도 주가가 미친 듯이 치솟는 중이라던데?”

“그럴 수밖에. 양놈(番鬼)들이 아무리 우릴 폄하하려 들어도 중의학(中医学)의 우수성까지 깎아내릴 순 없는 거 아닌가. 기와 경락에 대한 지혜를 처음으로 만들고 수천 년간 계승, 발전시켜온 게 우리 중화의 의학인 것을.”

“인수정기익생환(印綬正气益生丸)은 유럽에서만 3년치 생산량을 주문했다는 기사를 봤네. 거기선 무슨 스피릿 에너지 어쩌고 하는 이름으로 팔린다던데……. 양놈들은 누구보다 중국을 사랑하면서 왜 본심을 숨기려 드는지 원. 서로 평화롭게 지내면 좀 좋은가 말이야.”

난 속으로 조소했다. 서구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기(氣)에 대한 믿음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5G 네트워크를 타고 번진다는 수준의 미신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기가 흐르는 혈도나 경락의 개념은 고대 인도의 요가철학에서 처음 비롯된 것이다. 절대로 중국이 최초가 아니었다. 영혼에 새기는 회로와 흡사한 개념이어서 원탁의 제국주의자들이 한때 공들여 탐구한 소재이기도 하고.

런던의 마법사들은 요가수트라에 수록된 회로 운용들이 실제로도 유의미한 술식으로 기능함을 확인했지만, 황금기의 지혜에 비하면 무가치한 수준이었으므로 곧 흥미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마소가 그나마 덜 고갈되었던 시기의 무용한 지혜일 뿐이라고.

경독들의 대화에 적당히 어울려주며 시간을 흘려보낸 끝에, 경독들은 각자 만족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 환담을 나누고 싶지만 저희는 이만 가봐야 하겠습니다. 본부가 지척이라곤 해도 더 미적거릴 수가 없는 시간이 되어버렸군요.”

이들이 도착한 뒤로 거의 한 시간가량이 흘렀다. 만찬 치고는 너무 짧았지만 비상시국의 식사로는 사치스러울 만큼 길었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갑시다. 배웅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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