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111화 (111/561)

#16.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 (4)

2차 대전이 끝난 이듬해, 일본 정부는 국민 전체의 예금인출을 중지시킨다. 이어진 조치는 계좌 압류. 각 계좌에 들어있는 금액의 크고 작음에 따라 최저 20%에서 최대 90%의 예금을 강제로 거둬들인 것이다.

표면적인 명분은 인플레이션 해소였으나, 해당 조치 이후 인플레이션은 오히려 심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왜냐면 그렇게 압류한 돈으로 국채를 갚아버렸기 때문이다. 그 시절에도 일본 국채의 대부분은 국민들이 보유하고 있었으므로, 일본 정부는 국민들 돈을 강탈하여 국민에게 진 빚을 해소한 셈이었다. 권력과 가까운 자들이 자신들의 예금을 먼저 몰래 인출해 놓았음은 물론이다.

과거 그러한 일을 겪었던 까닭에, 나이 든 일본인들은 오늘날까지도 개인금고에 집착한다. 후쿠시마를 작살낸 도호쿠 대지진 당시 해변에 떠밀려왔던 무수히 많은 금고들이 그 증거. 사정 모르는 외국인들이야 그저 신기하고 이상하게 여길 뿐이었지만, 당사자들 입장에선 경험에서 우러난 생존의 지혜였던 것이다.

‘그 금고들을 또 정부가 가져갔다는 게 웃기는 대목이지.’

해변과 폐허의 금고들을 일괄적으로 회수한 일본 정부는 자기 금고를 찾으러 온 사람들에게 “당신이 금고의 주인임을 증명하라.”고 요구했다. 금고의 비밀번호를 아는 것만으로는 증거가 되지 않으며, 금고 안에 신분을 증명할 만한 무언가가 들어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금고의 내용물이 현금과 귀금속뿐이었던 자들은 자신의 재산을 되찾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3개월의 법정 보관기한이 경과한 후, 모든 금고는 정부의 자산으로 귀속되었다. 최소로 잡아도 수백억, 최대로 잡으면 수조 원에 달하는 눈먼 돈의 탄생이었다.

나는 정부의 그 같은 행태를 받아들이는 일본인들의 시민의식이 진정으로 놀랍다고 생각한다. 일본 정치인들의 사업 환경은 어찌 저리 좋을 수가 있는가 하고.

여하간, 경독 장타이롱은 이 일을 들어서 알고 있노라 이야기했다. 뿌리가 동일한 불안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방증. 다른 두 경독의 표정도 한층 더 무거워졌다.

회유의 단초가 여기에 있었다.

“잘 말씀해주셨소.”

나는 손끝으로 테이블을 두드려 세 청중의 주의를 환기했다.

“핵심은 불안이오. 시국이 수상하고 처지가 위태로울수록 비밀스러운 자산이 큰 위안을 주는 법. 근래엔 당신들도 그러한 자산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들 있을 거요. 위안화보다는 미화가, 미화보다는 황금이 낫지.”

청중들의 집중도가 높아진다. 난 그러나, 하며 말을 이었다.

“진정한 위기가 찾아왔을 땐 황금보다 값진 것이 바로 평화로운 피난처요. 들불이 번지는 자리의 무진장한 재산보다는 안전한 곳에 둔 지폐 한 장이 더 가치가 있고, 그 한 장의 지폐보다 귀한 것이 사람의 목숨이지. 나 하나는 죽을 각오로 불에 맞서 싸우더라도, 부모, 배우자, 사랑하는 피붙이들만큼은 안전한 곳에 보내두고 싶은 것이 가장의 마음 아니오?”

가족이 없는 나에겐 피상적인 이해만이 가능한 심리. 허나 그 피상적인 이해만으로도 타인을 움직이는 지렛대로 삼기에 충분했다.

“그런 점에서 당신네 높으신 분들은 현명하지가 못하오. 자기들은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피붙이와 비자금을 빼돌릴 대로 빼돌려놓고서, 아랫사람들에겐 모든 걸 걸고 배수진을 치라고 요구하니 도대체가 되기는 뭐가 된단 말이오. 고래(古來)로 이름 알려진 전략가들이 입을 모아 지적하는 바, 사기가 떨어진 자들의 배수진은 집단자살이나 다름없소.”

여기까지 말했을 때, 후샨량이 주먹을 쥐고 입술을 적시며 물었다.

“동사장님의 제안은, 그러니까, 저희 가족들을 안전한 곳으로 보내주시겠다는 겁니까?”

“나는 밀수꾼이오.”

“예?”

“비록 내 회사가 사람을 사고팔지는 않지만, 그래도 사람을 실어 나를 수는 있지. 위태로운 곳으로부터 평화로운 곳으로. 어느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

“가장으로서 가족에게 일상을 선물하시오. 새로운 집과 새로운 신분. 추적을 당할 염려가 없는 자금과 입출금계좌. 감시로부터 자유로운 생활과 도청으로부터 자유로운 연락수단에 이르기까지.”

나는 펼친 손으로 나 자신을 짚어보였다.

“이 모든 것들을 나에게 구하시오. 나는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오.”

경독들은 이 제안이 독이 든 사과임을 알 것이었다. 위조된 신분과 그 신분에 기초하여 개설된 계좌는 그 자체로 하나의 약점이 되고 마니까. 사실상 가족을 인질로 맡겨두는 셈이다. 날 배신하지 않는 한 위험할 일은 없을 테지만.

‘적어도 중국이 안정화되기까진 유효한 수단이지.’

그리고 그 정도면 충분하다. 런던의 원탁이 무너지기 전에 중국이 먼저 평화로워질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므로. 아니라면 그땐 그때 나름의 대응방안을 모색하면 그만이다. 세상에 백 퍼센트 안전하기만 한 자산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경독들은 식어가는 음식들을 앞에 두고서 어두운 낯빛으로 고민했다. 나는 홀로 음식을 조금 집어먹으며 경독들에게 시간을 준 뒤, 물 한 모금을 삼키고서 이야기했다.

“이 나라에서 홍위병들이 맹위를 떨치던 시기가 고작 반세기 전 아니오? 그리고 흑해자당과 농민공들의 배후엔 그 시대로의 회귀를 꿈꾸는 미치광이 마오공들이 웅거하고 있지. 젊었을 적 인민재판의 광기를 몸소 경험했던 높으신 분들께서 가족들을 미리 피난시켜 두려 애쓰는 데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거요.”

만에 하나라도 피붙이들이 돌에 맞아 죽는 꼴은 보기 싫다는 거지.

“……옳은 말씀이십니다.”

가장 먼저 넘어온 건 장타이롱이었다.

“저는 당과 조국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할 것이지만, 가족들이 잘못된다면 견뎌낼 자신이 없습니다. 끝끝내 질서가 완전히 무너지고, 제 가족들이 반역도당의 손에 붙잡힌다면…… 그땐 차라리 죽는 편이 더 나은 꼴을 당하게 될 테지요. 공안 간부의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제대로 먹혔군. 나는 자그마한 성취감을 느꼈다. 인민재판의 공포가 타국 사람들에겐 그저 농담거리에 불과할지라도, 중국인들에겐 피부에 와 닿는 현실적인 위협인 것이다.

장타이롱은 결심을 굳힌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따지고 보면 동사장님께선 이미 다른 누구보다도 이 나라에 도움을 준 분이십니다. 신분을 감추셔야 할 입장만 아니셨어도 벌써 인민영웅이나 「중국인민의 오랜 친구(中国人民的老朋友)」쯤은 되는 명예를 누리고 계셨겠지요. 헌데 제가 무엇을 망설이겠습니까? 동사장님께서 겉보기와 달리 서갑수 선생보다 나이가 많으시다 들었으니, 오늘부터 저는 동사장님을 간부로 모시겠습니다.”

“고맙소.”

간부(干爸)는 간시옹디(干兄弟)를 넘어서는 꽌시의 극한이다. 친아버지는 아니지만 친아버지와 같은 격으로 두고 따르겠다는 뜻. 여기서 나이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아무래도 더 어린 사람을 간부로 모시긴 어렵겠으나, 간시옹디와 간부를 가르는 진정한 차이는 상호간의 서열에 있는 것이었으니까.

중국인들의 관념상 이 관계에서 배신을 한다는 건 사람새끼가 할 짓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동료들이 듣는 자리에서 이런 소릴 내뱉은 것이다.

‘단둘뿐인 자리였으면 나중에 안면몰수하고 모르는 척할 수나 있지.’

이거야말로 또 다른 형태의 배수진이다. 걸린 것은 사람새끼로서의 체면. 그간 아무리 내게 감복했을지라도 현재로선 간부 운운하는 게 진심일 리가 없겠으나, 이는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였다.

난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결심한 자에겐 그만한 보답이 있어야겠지. 일단은…… 그래, 백만 미원(美元/달러)부터 시작합시다.”

“예?”

“그대의 가족들이 새 출발과 함께 가지게 될 돈 말이오. 안전가옥과는 별개로 비밀계좌에 넣어드리도록 하지. 어떻소? 이 정도면 계자(继子/의붓아들)에게 주는 첫 선물 치고 괜찮은 것 같은데.”

“감사드립니다, 간부님!”

“이 정도로 뭘 감사까지야. 가족들의 생활에 부족함이 없게끔, 앞으로도 형편을 보아 소소한 생활비를 보태드리리다. 수신과 제가에 지장이 없어야 비로소 나랏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지 않겠소?”

이제 마음 놓고 애국자가 되시구려. 이렇게 말을 맺으며, 나는 내 말이 참 악마의 속삭임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고는 이러한 생각으로부터 기묘한 기시감을 받았다.

나는 백만 미원이 시작에 불과함을 분명히 했다. 여기에 형편을 보아 생활비를 보태주겠다는 약속은 이제부터 네가 하는 것에 따라 추가로 돈을 줄 터이니 알아서 잘 모시라는 뜻이었고.

장타이롱은 짐짓 감격한 표정을 꾸며냈다.

“간부님을 따르는 길이 곧 나라에 보탬이 되는 길이니 무슨 미련이 있겠습니까. 그저 이 계자를 잘 이끌어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이끌어준다는 말은 틀렸소. 서로가 서로를 돕는 것이지. 그리고 내 호칭은 전처럼 동사장으로 두는 편이 낫겠소. 밖에서 실수가 있을지도 모르는 노릇이잖소?”

“아,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는 화살을 남은 두 경독에게로 돌렸다.

“그래서, 다른 두 분은 어찌하시려오?”

사실상 대답이 벌써 정해져있는 질문이다. 경독 셋이 작당하여 남몰래 나를 찾은 시점에서 셋 모두 가오슈센에겐 떳떳하지 못할 입장들이 된 것이니까. 그러므로 이 셋에게 개별행동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모두가 가담하거나, 모두가 가담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의 선택만이 있을 따름이다. 이미 떳떳하지 못한 처지라 전자를 선택하긴 어렵다.

다만 남은 두 경독이 망설이는 건 선수를 친 장타이롱이 선을 넘은 탓일 것이다. 그 선은 두 경독이 각자 속으로 그어두었을 꽌시의 선이다. 은밀한 꽌시를 트고 이득을 볼 요량으로 오긴 했어도, 나를 의부(義父)로 삼겠노라 언약하는 건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제 와서 고민하면 어쩔 거냐.’

속으로 냉소하며 기다리기를 잠시.

“저도 동사장님을 간부로서 섬기겠습니다.”

뜸들이던 후샨량의 항복 선언에 이어-

“옛말에 「하늘 아래 부모처럼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고,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진정한 형제를 얻는 일(天下無不是的父母, 世上最難得者兄弟)」이라 했는데, 저는 오늘 둘 모두를 얻게 되었군요. 참으로 기쁜 일입니다.”

판하이산이 마음에도 없는 기쁨을 과장스럽게 표현한다. 이로써 세 사람은 완전히 한 배를 타게 되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증광현문에 나오는 경구로군.”

“오, 그걸 읽어보셨습니까?”

“물론이오.”

증광현문(增廣賢文)은 중국인들의 탈무드다. 읽기가 어려운 책도 아니고, 몇 번 대충 훑어보기만 해도 협상장에서 쓸 언어가 풍부해지니, 말로써 이익을 다툴 일이 잦은 사업가로선 유익한 독서였다고 하겠다.

“두 사람 몫의 계좌엔 1차로 8십만 미원씩을 넣어드리리다. 장타이롱 경독과 마찬가지로 안전가옥과는 별개인 돈이니, 가족들이 타지에서 자리를 잡기엔 부족함이 없을 거요.”

내 말에, 빠른 결단으로 20만 달러를 더 약속받은 셈이 된 장타이롱의 입꼬리가 꿈틀거린다. 반대로 후샨량과 판하이산은 미묘하게 아쉬워하는 눈치.

‘어차피 이렇게 될 거였다면…… 같은 생각들을 하고 있겠지.’

부질없는 아쉬움이지만, 이대로 내버려두면 고마움을 잡아먹을 것이다. 난 화제를 계산적으로 바꾸었다.

“가족을 어디로 보낼지 다들 염두에 둔 곳이 있소?”

과연, 경독들의 표정들이 일변한다.

“어디어디가 가능합니까?”

후샨량의 질문.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그러니 며칠쯤 시간을 두고 고민해보시오. 어디가 가족들에게 가장 안전하면서도 만족스러운 터전이 될는지를.”

쉬운 고민거리가 아닐 것이다. 정치적으로 안정적이면서 장차 분쟁에 휩쓸릴 가능성이 희박하고, 각성한 동식물로 대변되는 자연적 위협의 강도가 낮으며, 중국인에 대한 적개심 또한 낮은 곳을 물색해야 할 테니까.

여기에 몰두하다 보면 후회를 느낄 겨를이 없을 거다. 오히려 구체적인 상상의 나래를 펼칠수록 포기하기가 더 아까워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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