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 (3)
부둣가의 강물이 노을에 물들 때가 되어 공안국에 나가있는 미주로부터 연락이 들어왔다. 후샨량을 위시한 세 경독이 자신에게 성의표시를 하더라는 것이다.
「형님을 사적으로 뵙게 해달라더군요. 가급적 가까운 시일 내에. 당장 내일이라도 좋다고 합니다.」
몸들이 달았군. 오늘 하루 아주 정신없이 바빴을 텐데.
난 경독들이 서두르는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어제 대대적인 소탕전을 치렀어도 광저우 한 곳의 상황만 호전되었을 따름. 중국이라는 배 자체가 가라앉을지 모를 판이니 만약을 위한 구명줄을 만들어두고 싶을 터였다. 상급자인 가오슈센과 같이, 피붙이와 재산을 해외로 보내놓고 싶은 것이다.
헌데 국가 주석은 성명을 통해 그러한 보험 들기를 이적행위로 간주하겠노라 엄포를 놓았다. 조국이 누란지위에 처한 마당에 여차하면 도망칠 궁리를 하는 자는 반역도당과 다를 바 없다는 논리다. 높으신 분들이 이미 다 제 살길들을 마련해두었음을 아는 아랫사람들로서는 더럽고 치사하게 느껴질 수밖에.
고위 관료라고 하기엔 아직 부족함이 큰 경독들의 입장에서, 그동안 실력과 믿음을 증명해온 나는 의탁해도 좋을 법한 유일한 인물일 것이었다.
“앞으로 네가 다뤄야 할 자들이니 적당히 애를 태우다가 보내도록 해라.”
「워낙 태도들이 간절해서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
「예. 오히려 빠르게 형님을 뵙게끔 해주는 편이 제 능력을 보여주는 데 좋을 듯합니다.」
일리가 있다. 나는 잠깐 시계를 보고서 이야기했다.
“그럼 오늘 밤 8시까지 오라고 전해.”
「너무 촉박하지 않겠습니까?」
“그야 제 놈들 사정이지.”
「알겠습니다.」
시간적으로 다소 촉박하긴 해도, 당일 갑작스럽게 약속을 잡는 건 중국에서 흔히 있는 일이었다. 설령 경독들이 먼저 만나기를 청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렇게 빡빡하게 불러들이는 게 결코 결례가 아니라는 뜻.
“가오슈센의 비서 건은 어떻게 되어가는 중이지?”
「금일 자정이 지나기 전에 처리하려고 합니다.」
망설임 없이 나온 대답에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처리하라고 지시한 게 성탄전야의 일이니 이제 겨우 이틀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 암살 경험이 없는 영업직 간부의 행동이라기엔 지나치게 빠른 감이 있었다. 난 생각 끝에 이렇게 물었다.
“독촉할 마음은 없었다만……. 너야말로 너무 서두르는 게 아니냐?”
「제 결심 이외엔 늦어질 이유가 없는 임무였으니까요. 계획의 수립단계에서부터 경호실장의 조언을 구했으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경태가 오케이했다고?”
「네.」
“알았다.”
나는 구체적인 계획을 캐묻지 않았다. 대놓고 네가 못 미덥다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미주도 그런 부분을 염두에 두고서 경태를 언급한 것이었고. 남은 건 죽였다는 보고가 올라오기를 기다려 칭찬 한마디 해주는 일 뿐이다.
미주와의 통화를 끝낸 나는 부하들을 시켜 경독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도록 했다. 그들 셋이 저녁을 이미 먹었든 먹지 않았든 간에, 환대의 의미로 맞이하는 자리엔 반드시 만찬이 있어야만 한다. 이는 관습적으로 정해진 의전(儀典) 같은 것이었다. 그럴듯한 음식이야 밖에다 주문하라고 하면 그만이다.
경독들은 약속시간을 정확하게 준수했다. 나는 세 경독이 저마다 가져온 선물들을 보며 한숨이 나오는 것을 참아야 했다. 내용물이 뭔지 모르는 척 연기하는 것부터가 고역이었다.
“이것들은 뭐요?”
내 물음에 후샨량이 정중히 답한다.
“그간 저희가 동사장님께 많은 도움을 받았으면서도 정식으로 견면례(見面禮)를 드리지 못하여 송구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 송구함과 감사함을 담아 소소한 선물을 준비했으니 부디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고맙게 받으리다. 다들 앉으시오. 조촐하게나마 끼니거리들을 준비해두었소.”
견면례에서 선물을 받은 윗사람은 소정의 돈이나 답례품을 돌려주는 게 이들의 예절. 오늘 내가 줄 답례품은 이들이 바라는 약속이면 충분할 것이다. 나는 경독들이 자리에 않기를 기다려 말했다.
“우선 이 말부터 해야겠군. 세 분 모두 승진을 축하드리오. 이제 다들 1급 경독이 되신다지.”
1급 경독이면 시 공안국 산하 1개 지대를 책임져도 무방한 직급이다. 그동안은 가오슈센이 이들을 통해 순라지대의 실무자들을 휘어잡고 있었으나, 이제부터는 그 역할이 많이 달라질 것이었다.
“다 동사장님께서 공로를 나누어주신 덕분입니다.”
후샨량을 시작으로 장타이롱과 판하이산이 돌림노래를 부르듯 아첨을 말한다.
“저희가 무슨 염치로 축하를 받겠습니까. 이제 와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공전공사의 이상을 간파하신 통찰력은 실로 날카로운 것이었습니다. 주사자국을 찾아보라는 조언이 아니었다면 공전공사를 장악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을 겁니다.”
“반동분자들이 포병대를 끌고 나왔을 때조차 흔들림 없이 정확한 판단과 지시를 내리시는 모습에 탄복했습니다. 참으로 냉철하면서도 영민한 분이시라고. 저희는 동사장님께 목숨을 여러 번 빚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아첨들을 듣다 보니 두드러기가 돋을 것 같다. 이게 공산당원들이 하는 소리라 특히 더 그러하다. 혀뿌리에 아첨이 달라붙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는 자들. 나는 고개를 저어 경독들의 용비어천가를 끊어놓았다.
“그런 말씀들은 되었소. 당신들이 나를 찾아온 것은 앞으로 오랫동안 연대를 이어가기 위함일 것인데, 고작 며칠간의 일들을 그리 거창하게 여길 건 또 뭐요?”
난 의도적으로 한 호흡을 쉬고서 남은 말을 맺었다.
“내겐 아직 줄 수 있는 게 많소. 아주 많지. 그중엔 돈으로도 사지 못할 것들이 포함되어 있고. 당신들이 그걸 다 받아갈 자격이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겠지만.”
돈으로도 사지 못할 것들은 조직이 일반적으로 제공하지 않는 특별한 용역들, 마법적인 힘과 지혜, 그리고 그 부산물들을 포함한다. 물론 눈앞의 셋이 그 전모를 진정으로 깨닫게 될 날은 오지 않을 것이었다.
경독들이 내 말을 곱씹느라 조용해진 사이 테이블 위엔 음식들이 깔렸다.
“드시오. 언제 새로운 사건이 터질지 모르는 시국이라 술은 준비하지 않았소. 다들 오해가 없으시기를 바라오.”
두어 시간 만에 준비했어도 그런대로 봐줄 만한 구성의 만찬. 하나하나가 광저우 타워의 지중해식 뷔페 레스토랑에서 공수해온 것들이다. 레스토랑이 여전히 영업을 지속하고 있는 건 절반쯤은 시정 당국의 지원금 덕분이었다. 광저우 시정 당국은 도시의 랜드마크가 화려한 폐허로 전락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마냥 예산낭비라고 하긴 어렵지. 도심 한복판에 전고 600미터짜리 깨진 유리창이 생겨버리면 시민들의 불안을 걷잡을 수 없을 테니.’
중요한 건 느낌이다. 대중에게 최소한의 질서와 일상이 유지되고 있다는, 혹은 곧 회복될 수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것. 공산당으로선 특히 기득권층의 동요와 이반을 막을 필요가 있었다. 지금 기득권층의 지지마저 잃어버리면 남는 건 나라가 뒤집어지는 일뿐이므로.
커다란 새우 하나를 접시에 놓고 지분거리던 판하이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희가 동사장님께 무엇을 해드리면 되겠습니까?”
“틀렸소.”
“예?”
“내가 바라는 바는 그런 게 아니라는 소리요.”
경독들이 어려운 표정들을 짓기에, 나는 차분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비록 식탁에 술은 없지만 나 역시 당신들과 오래 가고 싶은 마음이 있소.”
중국에 흔한 글자 장난 내지 길흉화복을 따지는 미신의 하나로서, 술을 뜻하는 주(酒)와 오래 됨을 의미하는 구(久)는 발음과 성조가 동일하다. 즉 이런 자리에서 술을 대접하지 않음은 너희들 따위와 오래 엮이기 싫다는 암시로 비쳐지기 쉬웠다. 조금 전 내가 오해 없기를 바란다고 당부한 게 바로 이 부분을 짚었던 것이다.
“드시면서 들으시오.”
물 한 모금 마시고서 말을 잇는다.
“동종업계에 발을 걸친 어느 영락(零落)한 왕실의 후예가 하루는 나에게 이런 말을 하더이다. 사람은 우정이 먼저 있은 다음에야 함께하는 이익이 따르는 것이지, 결코 그 반대가 되어선 안 되는 법이라고. 내가 그녀의 방식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건 아니요만, 당신들과는 그 같은 관계를 맺고자 하오.”
먹으면서 들으라 권했으나, 인생의 중대한 갈림길에 선 자들은 음식에 관심을 보일 여유가 없어 보였다.
“세 사람은 아마 나라는 사람을 겪음으로써 이쪽 업계에 대한 시각이 다분히 새로워졌으리라 믿소. 그렇지 않소?”
서로 시선을 교환하던 셋 중 하나, 장타이롱이 머리를 끄덕인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예. 암흑계에 동사장님 같은 분이 계신다는 사실이 저희에겐 무척이나 뜻밖이었습니다. 견문이 짧았던 시절엔 그, 불법적인 사업……에 종사하는 자들이 다 삼합회 찌끄러기들 같은 줄로 알고 있었으니까요.”
“사실 대부분의 경우엔 그런 수준들이 맞소. 나와 내 회사가 소수의 예외에 속하는 것이고.”
“아, 그렇겠지요. 다만 세상이 넓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을 뿐입니다.”
“좋은 깨달음을 얻으셨군. 여하간 나를 그리 좋게 보았다니 물어보겠소. 나는 당신들이 남은 평생을 믿고 의탁할 만한 인물이오?”
“…….”
당연한 침묵이 돌아온다. 나는 도구적인 여유를 자아냈다.
“그럼 다른 것을 먼저 물어보지. 이 나라의 높으신 분들이 그토록 강박적으로 비밀금고들을 만들어놓은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오?”
고심하던 경독들 가운데 이번엔 후샨량이 표면적인 이유들을 나열했다.
“돈을 숨길 방도가 달리 없기 때문입니다. 땅이 넓으면 눈에 띄고, 건물이 많아도 들키기 쉽고, 국내의 은행들은 당의 금고나 마찬가지라 비밀보장은커녕 언제 압류 당할지 모르고, 쌓아놓은 재산들이 너무 막대하여 해외로 빼내기가 불가능에 가까우니 말입니다.”
중국인들이 해외로 돈을 송금하는 데엔 연간 5만 달러라는 엄격한 제한이 걸려있었다. 이마저도 조만간 4만 달러로 축소될 예정. 수수료도 상당하다. 평범한 시민들이야 이러한 제한에 큰 불편을 못 느끼겠으나, 부정 축재한 자산의 총액이 어지간한 기업의 시가총액을 능가하는 높으신 분들은 사정이 완전히 달랐다.
브로커를 통한 불법적 송금에도 한계가 있다. 큰돈이 움직이면 아무래도 흔적이 남는 까닭. 브로커들도 사람이고, 자기 몸이 신비해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따라서 브로커들이 받아주는 금액은 고객의 지위와 권력에 따라 차별화된다. 성급 정부 상무위원 이상의 진짜배기 실력자가 아닌 한 일 년에 천만 달러를 빼내면 많이 빼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수천수만의 애매하게 높으신 분들은 한때 비트코인 같은 암호화폐에 열광했다. 투기의 수단이 아닌, 당국의 눈을 피해 해외로 돈을 빼돌리는 수단으로써. 중국 정부가 자국 내 암호화폐 거래는 물론 채굴까지 불법으로 규정해놓은 이유다.
그 열기는 지금도 다 식지 않았다. 17년, 중국 내 모든 거래소가 폐쇄된 이후로도 할 사람들은 어떻게든 해내고 있는 것. 공산당이 병신 같은 국부유출 방지정책을 고수하는 한, 암호화폐에 대한 수요엔 언제나 최저치가 있을 것이다.
후샨량에 이어 판하이산이 조금 더 깊은 의견을 내놓는다.
“단순한 욕심도 있겠지만, 불안에서 비롯되는 집착에도 적잖은 지분이 있다고 봅니다.”
“불안이라.”
“예. 당장 손에 쥐고 있는 돈은 어느 때라도 쓸 수 있는 힘입니다. 계파간의 싸움에 한 번이라도 잘못 발을 들이면 직위를 상실하는 건 기본이고 자칫하면 목숨까지 위험해지니, 최후의 최후에 의지할 만한 것은 역시 돈뿐이지 않겠습니까?”
“맞는 말이오.”
“여기저기 뇌물을 줘서 목숨 값을 치른 후에도 여생을 풍족하게 살 돈이 남는다면 금상첨화겠지요. 그러니 비밀금고 속의 돈은 많을수록 좋습니다.”
내가 원하던 대답이 이것이다.
물론 비밀금고의 용도는 그밖에도 있다.
‘정치적으로 은밀한 합의가 필요할 때마다 금고들 사이에서 굉장한 자금들이 오간다지.’
정계의 라이벌과 돈으로 우열을 가려야 할 때 금고 속의 총액은 곧 정치적 영향력 그 자체가 된다. 권력을 두고 벌이는 입찰경쟁엔 상한선이라는 게 있을 수 없었다. 이 같은 비밀금고들의 네트워크는 내가 아는 한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암흑경제 블록이다.
그럴듯한 말들이 다 나온 마당에 혼자 벙어리처럼 있기는 뭐했는지, 장타이롱 경독이 무난한 말을 덧붙인다.
“어쨌든 은행은 믿을 수 없지요. 저 일본에서도 전 국민의 예금계좌를 정지시키고 개인 자산을 일괄 압류한 적이 있다고 들었는데, 우리 중국이라고 그러지 말란 법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훨씬 더 쉬울 겁니다.”
그러고는 탄식 같은 끝맺음이 이러했다.
“요즘은 저도 후회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인출이 막히기 전에 금고를 하나 사다가 계좌에 있는 돈 다 꺼내 박아놨어야 하는 건데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