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109화 (109/561)

#16.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 (2)

나는 식사를 하며 차근차근 보고서의 페이지를 넘겨갔다. 한국에서는 임시국회를 열어 고위험 사냥 장려를 위한 9천억 원 규모의 추가경정 예산안을 통과시켰고, 오대양의 해적과 오지(奧地)에 자리 잡은 군벌들은 날이 갈수록 악랄함을 더하고 있었으며, 해적 피해와 해난사고 증가가 불러온 운송비용 및 해상보험료 상승은 전 세계의 물가 그래프를 우상향으로 꾸준히 밀어 올리는 중이었다.

노르웨이와 더불어 원인미상의 해난사고를 가장 많이 당한 국가 중 하나인 일본은 국가적으로 비상이 걸렸다. 그들의 피해는 특히 어민들에게 집중되었다. 이제까지 침몰하거나 실종된 어선만 4백여 척에 이르러, 연근해역에서의 조업조차 완전히 중단되어버린 상태. 그밖에 아이슬란드, 노르웨이 등이 일본과 비슷한 상황에 처해있었다.

그리고 러시아 연방정부는 호랑이 한 마리에게 5억 루블의 현상금을 걸었다.

……호랑이?

5억 루블이면 현 시점의 환율로 한화 75억 가량에 이르는 금액이다. 러시아는 중국발 폐렴으로 경제가 박살난 이래 아직까지도 경제적 그로기 상태에 빠져있는 나라. 그런 나라가 겨우 호랑이 하나에 이만큼의 돈을 내걸었다는 건 분명 비정상적인 일이었다.

보고서에 첨부된 링크들을 살핀 나는 비로소 현상금의 액수를 납득할 수 있었다.

「싸볘츠카야 가반(Советская Гавань)의 참극 - 「쁘리즈라크(При́зрак)」가 극동의 작은 항구도시를 덮치다.」

불과 네 시간 전에 올라온 러시아 쪽 기사의 헤드라인. 쁘리즈라크는 망령, 악령, 원령(怨靈) 등을 뜻하는 단어였다. 이번 달 초 시호테-알린 산맥 북서부의 아르쎼녜보(Арсеньево)라는 마을을 생지옥으로 만듦으로써 악명을 쌓기 시작한 이 각성체 호랑이는, 23일간 간헐적인 핏빛 행보들을 이어온 끝에 오늘 새벽, 인구 3만이 넘는 항구도시를 초토화시켜놓은 것이다.

‘확인된 사망자만 9백 8십이라…….’

죽은 사람만 이 정도면 국가적 재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이 난폭한 육식동물의 동기를 생각해보았다.

근 1천이나 되는 인간을 먹으려고 죽였을 린 없다. 당연하지만 흥미 본위의 사냥도 아니었을 것이다. 고양잇과의 동물들이 다른 동물들을 재미로 죽이는 일이 있다곤 하나, 인간은 재미로 죽이기엔 너무나 위험한 사냥감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남는 이유라곤 원한밖에 없다. 멸종위기 동물의 모피는 밀렵꾼과 수집가들이 가장 목말라하는 상품 중 하나. 개호주(범의 새끼)만 하더라도 시베리아 호랑이 품종이라면 억 단위가 기본이며, 중국인들이 약재로 쓰는 호골(虎骨) 역시 시베리아 호랑이의 것을 최고로 친다.

특히 호랑이의 살과 뼈를 통째로 독주에 담가 만드는 호랑이 술은 요즘의 중국인들이 천금을 주고서라도 마시고 싶어 하는 영약(靈藥)이었다. 호랑이의 살과 뼈에 기(氣)를 다스리는 효험이 있다고 믿는 까닭.

요컨대 중국대륙의 원시마법 각성자들이 몸보신용으로 처먹고 싶어 한다는 뜻이다. 능력 강화와 불사암 예방에 도움이 될 거라면서.

이쯤 되고 보면 저 북미의 유타에서 마주쳤던 멧돼지와 같이, 호랑이가 인간에게 원한을 품었다 한들 이상할 게 없다. 그런즉 쁘리즈라크를 옮길 단어로는 원령이 가장 적합할 것이다. 원한이 골수까지 사무친 영혼. 보나마나 차이나 머니에 홀린 러시아의 사냥꾼들이 사람 잡는 괴물을 만들어낸 것일 테지.

이 원령에 대한 보고서의 말미엔 이런 예측이 붙어있었다.

「아직까지는 하바로프스키 주(州)에서만 맴돌고 있으나, 숲과 산맥의 연속성을 감안하면 근시일 내에 남쪽의 프리모르스키 주는 물론이고 중국 지린성 동남부 내지 북한 접경지대까지 내려올 가능성이 존재함. 장기적으로는 한반도 전체가 위험범위에 포함됨.」

과연, 굳이 내게 소식을 전할 만한 이유다. 어쩌면 호랑이 한 마리에게 여러 나라가 현상금을 거는 꼴을 보게 될 듯했다.

보고서를 업무영역까지 넘기니 잠수정 건조공정의 이론적 구축에 관한 소식이 있었다. 진척이 없는 건 아니지만 내 기대보다는 느린 속도다.

멕시코 마약상들의 필두 「시날로아 카르텔」이 설계한 잠수정은 선체에 일체의 금속을 사용하지 않았다. 자기장 탐지를 피하기 위하여 유리섬유 복합소재(GFRP)와 탄소섬유 복합소재(CFRP)를 이용한 것.

여기까지는 좋지만, 카르텔의 설계엔 개선해야 할 점이 많았다. 승무원 편의성은 내다버린 수준이고, 수중항해시 잠망경 외의 외부관측수단이 없었으며, 적재량에 욕심을 너무 많이 부려놔서 선체 전후의 균형을 잡아주는 능력에 문제가 있었다.

‘화물이 코카인 일색일 땐 괜찮았겠지.’

균일한 화물은 곧 균일한 무게중심을 의미한다. 즉 카르텔 놈들은 자기네 용도에 맞게 극한의 최적화를 해놓은 것이다. 허나 내가 실어 나를 것은 다양한 종류의 무기와 탄약들. 무게도 비중도 제각각인 화물을 적재하려면 설계상의 변경이 불가피하다.

엔진도 갈아야 한다. 카르텔 놈들이 고른 상용 엔진은 기계적 신뢰성이 우수했으나 출력이 불만족스러웠다. 여기서도 문제는 그놈의 적재량 욕심. 엔진룸 크기를 줄이느라 출력까지 덩달아 줄어든 경우다. 같은 이유로 수중항해 속도와 지속시간을 결정하는 배터리의 총량도 적어졌다.

얼마간의 적재량을 희생하여 엔진을 갈고 배터리 용량을 확충한다면, 수중에서도 최대 20노트까지 가속하는 우수한 물건이 나올 것이다. 그러나 설계변경 과정에서 적잖은 추가예산과 시행착오가 필요할 것이다, 라는 게 현황을 전하는 보고서의 결론이었다.

보고서엔 추가예산 집행을 위한 품의서(稟議書)가 딸려있었다. 품의서에 전자서명을 기입하며, 나는 수연을 불렀다.

“수연아.”

“예.”

“잠수정 건 말이다만, 추가예산 내역에 인력 확보 항목이 없구나. 돈이 얼마가 들든 사람을 더 써서 속도를 높이면 좋겠다만.”

지금 우리가 고용한 기술자들은 올 상반기 한국의 조선업계가 희망퇴직으로 잘라낸 인력이었다. 중국의 조선사들이 이때다 하고 고급인력 쇼핑에 나섰을 때 우리도 한 발 걸쳐놓았던 것. 위장사업체를 마카오에 차렸기에, 지금 국내에서 잠수정 설계를 검토 중인 우리 측 기술자들은 자신들이 중국 회사에 고용된 줄로 알고 있다.

사실, 한국의 선박 기술자들을 데려갈 이유와 능력이 있는 나라가 중국 말고는 딱히 없기도 했다. 만약 위장사업체를 다른 나라에 세웠다면 기술자들이 곧바로 미심쩍은 시선부터 보냈을 터였다.

수연이 답한다.

“기술자들이 중국회사를 기피하고 있어 인력 확보가 어렵습니다. 중국의 상황이 불안정하다 보니, 조건이 아무리 좋아도 이행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느껴지는 모양입니다.”

“이름이 알려진 대형업체도 아닌데 얼마나 버티겠느냐, 이건가? 당장 한두 달 앞이 불투명하지 않느냐고?”

“네. 그리고 무작정 돈으로 해결하기도 어렵습니다. 너무 많은 돈을 준다 하면 우리가 시키는 일에 의구심을 품을 확률이 높아지니까요. 지금은 기존 작업자들을 다독이며 보안을 유지하는 편이 최선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렇잖아도 중국의 기업들은 토사구팽으로 악명이 높다. 기술자들의 신중함엔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뭐, 알겠다. 네 의견이 그렇다면야.”

가볍게 한숨을 쉰 나는 다른 것을 물었다.

“공정 구축은 그렇다 치고, 부지 확보는 순조로운가? 보고서엔 그런 이야기도 없는데.”

“국제사업부 강상섭 부장이 인도네시아에서 술타나(سلطانة/술탄의 여성형) 칸드라 키라나를 상대로 협상을 진행하는 중입니다. 그쪽 특유의 협상방식으로 인해 형님께 아직 보고를 올리진 않았습니다만,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흠…….”

술타나 칸드라 키라나 파크루딘(Candra Kirana Fakhruddin)은 수마트라 섬 남동부에 있었던 잠비 술탄국 왕실의 말예다. 고귀한 혈통으로서의 공식적인 권리는 제국주의 시대의 혼란 속에서 말소당하고 말았으되, 지방 유력자 수준의 영향력만큼은 어떻게든 지켜내는 데 성공한 토후(土侯)들 가운데 하나. 그녀의 비호를 받는다면 베탕 하리(Betang Hari) 강 유역에 안전한 거점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너무 느긋한 상대라서 문제지만.’

그녀는 서양인들의 방식을 혐오하는 사람이다. 그녀가 나에게 이야기한 바, 시간에 맞춰 일을 딱딱 처리하는 문화는 서양인들의 악습이었다.

언젠가 나를 나무라듯 했던 말이 이러하다.

「여(余)가 그대에게 진실로 이르노니, 침략자들과 그 후손들은 다른 무엇보다 이익을 중하게 여기니라. 우리의 오랜 미덕으로는 먼저 우정을 쌓은 다음에야 비로소 함께 도모하는 이익이 따르는 것인데, 그들은 그렇지가 않아 우정이 없는 사이에 이익을 보려 하고, 대등해야 할 사이에서도 하인을 부리듯 시간을 정하여 계약의 이행을 강제하려 하며, 이익을 본 다음에는 곧바로 돌아서버리고 만다. 오직 이익만을 중심축 삼아 돌아가는 관계인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비즈니스라 이르지만 여는 그것을 모욕이라 부르리. 그들의 문명은 물질에 눈이 멀어 타인과의 조화가 이익의 다음인 줄 아는 자들의 문명이라. 그런 문명이 보편화된 세계는 실로 천박한 세계라 아니할 수 없도다.」

「그러면 우정으로 도모하는 이익은 어떠한가?」

「친구 사이에는 약속이 없다. 친구에게 바라는 바가 있다면 부탁을 할 뿐이요, 부탁에 시일을 명시하여 재촉함은 친구의 형편을 아랑곳 않고 내 형편만 앞세우는 무례함인즉, 부탁을 들어주고 들어주지 않고는 사세의 흐름과 우정의 깊이에 따라 달라질 일이고, 시일의 빠르고 늦음은 우정의 우선순위에 의해 유동적으로 정해질 바라.」

「여에게는 많은 사귐이 있고 그들 가운데 그대보다 긴밀한 자들도 있으므로, 그들 중 누군가가 여에게 우정을 청한다면 그의 일을 그대와의 일보다 우선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여에게 손해가 된다 해도 그러하다. 사람의 가치가 이익으로 정해져서는 안 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여를 대함에 있어 언제나 이 같은 이치를 기억할지라. 침략자들의 방식을 따르는 자는 결코 여의 우정을 얻지 못할 것이다.」

칸드라 키라나의 이러한 웅변은 인도네시아 전역의 보편적인 정서이기도 해서, 사정에 어두운 외국인들은 종종 뇌물을 먹여도 느려터진 일처리에 당황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히려 술타나를 자칭하는 이 암흑계의 거물은 인도네시아 사람 치고 사업상의 일처리가 빠른 축에 든다. 그러니 수연도 조만간 소식이 있으리라는 예측을 내놓은 것이고.

그저 그 빠른 속도가 내 성미엔 차지 않을 뿐.

‘결국 직접 얼굴을 봐야 한다는 점도 번거롭고.’

수연이 언급한 그쪽 특유의-정확하게는 칸드라 키라나가 고집하는-협상방식에 따르자면, 조직간의 협상은 양측의 지도자가 직접 만나 서로의 제안에 동의함으로써만 끝을 맺을 수 있다. 아랫사람들이 세부적인 사항들을 미리 다 정해놓은 후 계약서에 도장을 찍듯 최종적인 동의만 주고받는 것이다. 그래야만 진정성이 있노라고.

그 전까지의 모든 과정은 아랫사람들의 몫이다. 그 아랫사람들의 행동양식 역시 술타나를 꼭 닮아있는 까닭에, 이들과 무슨 사업을 한다 치면 도무지 구체적인 완료 날짜를 특정할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문화장벽이 다른 외부세력의 침투를 까다롭게 하여 보안성을 담보하기도 하므로, 비밀스러운 계획을 추진하는 입장에선 일장일단이 있다 하겠다. 건조시설을 올릴 땅을 인도네시아로 낙점한 이유 중 하나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