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 (1)
주변에 펼쳐진 풍경을 보며, 나는 불편한 심정을 느꼈다.
과거에 없었던 방식으로 사나운 꿈자리다.
몽중(夢中)의 내가 발 딛고 선 장소는 3만의 농민공들이 점거했던 공업단지였다. 주변은 온통 압사당한 시체들 투성이. 바닥은 검붉은 핏빛으로 찐득거린다. 현실의 계절이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꿈속의 계절은 여름이었다. 간헐적으로 더운 바람이 밀려온다. 인간의 조각들이 썩어가는 악취는 습하고 뜨거운 공기를 벗하여 불쾌지수를 사정없이 끌어올렸다. 쨍하니 뜬 태양 아래 구름 한 점 없는 하늘로부터 잿빛 눈발이 흩날렸다. 이 더위에 무슨 놈의 눈이 내리나 싶어 살펴보면, 눈발의 정체는 푸슬푸슬하게 뭉친 인간의 뼛가루였다.
밟혀 죽은 시체 한 구가 느닷없이 입을 열었다.
“살려주십시오.”
변색된 눈동자는 초점 없이 허공에 고정되어있다. 허옇게 뜬 피부엔 생기가 없었고, 몸의 절반쯤은 어디론가 사라진 모습. 이 정물(靜物) 같은 상태에서 오로지 갈라진 입술만이 움직여 메마른 목소리를 자아낸다.
“저는 그저 망을 봐줬을 뿐입니다. 하루에 10콰이 받았습니다.”
나는 이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시체가 딤섬 가게 주인의 얼굴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생전의 말을 되풀이하는 음성은 한없이 기계적이어서 고장 난 녹음기처럼 느껴졌다.
“제게는 다음 달이면 만으로 열두 살이 되는 아들이 있습니다. 육친이라곤 저 하나뿐이라 제가 죽은 다음엔 돌봐줄 사람이 없을 겁니다. 부디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부디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부디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부디목숨만은목숨만은목숨만은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
콰직. 난 시체의 광대뼈 아래를 짓밟아 으깨었다. 짜증이 치밀어서. 그래, 이 감정의 정체는 단순한 짜증이다. 다른 감정은 없다. 반쪽만 남은 머리가 이번엔 눈을 굴려 나를 바라보기에, 나는 한숨을 삼키며 한 번 더 발을 들어 세차게 내리찍었다. 더러워진 구둣발 아래에서 스멀스멀 부패한 액체가 퍼진다. 유해의 팔뚝에 꽂혀있던 수십 개의 주사기들이 충격을 받아 흔들거렸다.
시체 더미에 낀 또 다른 시체가 말한다.
“나를 집어삼켜라.”
이번 시체는 스승새끼의 낯짝을 하고 있었다.
“착취는 인간의 본성이며 모든 인간은 선천적인 제국주의자들이다. 그러므로 너에게는 도구로서의 내가 필요할 것이다. 나를 받아들여 너의 연장으로 삼으라. 타고난 본성의 기름부음을 받으라. 그리하면 너는 비로소 완전한 인간으로 거듭날 지어니. 「대홍수를 목격한 인간(Homo diluvii testis)」의 자리가 먼 곳에 있지 않도다.”
두통이 몰려온다. 난 관자놀이를 누르며 염동력 폭발을 일으켰다. 바닥을 덮은 피딱지들이 산산이 뜯어져 비산하고, 인간의 조각들은 충격파의 형상으로 팽개쳐졌다.
시체 더미가 날아간 자리엔 새까만 구멍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 음영 없는 어둠 가운데에 들어앉은 것은 크고 하얀 짐승의 골격. 지긋지긋한 스승새끼의 유해.
「사치스럽기 짝이 없는 욕망이다.」
스승새끼는 이 한마디를 마지막으로 침묵했다. 더는 내게 말을 붙이는 시체가 없었기에 꿈속엔 정적이 돌아왔다.
이건 내가 좋아하는 정적이 아니다.
나는 꿈에 대한 지배력을 발휘하려 애썼다. 자각몽을 의지의 지배하에 놓는 건 그간 많이 익숙해진 일. 풍경을 갈아 치우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였다.
“…….”
왜 안 되지?
내가 구현하려 시도한 심상은 고요하게 눈 내리는 산간의 별장이었다. 언젠가 도달하고픈 이상향의 단면. 그러나 이는 절반만 성공하여 꿈속의 공간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반절은 겨울이고 반절은 여름. 찬바람이 부는 자리는 함박눈 덮인 백색이고, 더운 바람이 부는 자리는 수만 명 분의 피가 말라붙은 적갈색이다.
이 순간에도 시산혈해의 공업단지는 내 의지에 저항하는 중이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기껏 불러온 산간의 풍경을 밀어내기까지 한다. 마치 무슨 복원력이라도 있는 것처럼.
여긴 내가 꾸는 꿈속이다. 나 이외의 다른 지배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로부터 도출되는 결론은 자명했다.
……설마 그럴 리가 있나. 나는 그 결론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잠에서 깨어나니 어둑한 선실이었다. 책상에 고정된 전자시계는 지금이 이른 오후임을 알려주었으나, 하나 있는 창문에 암막 블라인드를 쳐두었으니 햇빛이 들어올 수가 없는 것이었다. 어차피 내겐 빛의 유무가 무의미하기도 하고.
수면의 질이 형편없긴 했지만, 그래도 사냥을 마치고 돌아와 여섯 시간은 잔 것 같다. 예전처럼 30분 단위로 알람을 맞출 필요가 없어진 게 어디란 말인가. 내 삶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 나아질 것이다. 생존투쟁의 여로에서 쓰러지지만 않는다면.
모든 꿈이 그렇듯이, 더러웠던 꿈자리의 여운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넉넉히 남은 졸음만큼은 쉬이 떨쳐내기 어려웠다. 난 다시 눕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떨쳐내고서 선실에 붙은 샤워실로 들어갔다.
옷을 대충 벗어던지고 뜨거운 물을 틀어놓는다. 배가 적정인원보다 적은 승객을 태우고 있었으므로, 온수의 온도는 항상 일정한 선에서 유지되었다. 난 쏟아지는 뜨거움을 머리부터 맞으며 생각했다.
‘기름부음 같은 소리 하네.’
「빛과 진리의 원탁」을 구성하는 늙은 망령들, 특히 지도부인 「원탁내각」의 장관과 대의원들은 자신들을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이라 일컫길 좋아했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는 곧 메시아이니, 자신들이야말로 인류를 구원의 길로 이끌 구세주들이라 믿는 것이었다. 이들에겐 황금기의 신성한 지혜가 곧 영혼에 부어지는 기름이었다.
그런 썩어빠진 정신머리로 서로에게 경(Sir)이란 칭호를 붙여 부르던 그들은, 본디 작위를 계승할 권리가 없는 차남 이하의 귀족 자제들이었다. 즉 그들의 선민의식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들에 대한 비뚤어진 보상심리로부터 비롯된 바.
내가 아무리 더러운 인간이어도 스스로를 그렇게 깊은 시궁창까지 내던지기는 싫다. 높고 밝은 곳에 사는 사람들에겐 나나 제국주의자들이나 다 거기서 거기인 악마새끼들로 보일 테지만, 내가 나를 평가하는 데 있어 타인의 시선만큼 무의미한 것도 없었다.
샤워를 대충 끝낸 다음엔 옷을 차려입고 무기를 휴대한 채 집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도 숙지해야 할 정보 및 결재가 필요한 전자문서들이 쌓여있을 터. 새벽 사냥의 성과도 다시금 점검해야 한다. 집무실에 들어서니, 자기 책상에 앉아있던 수연이 하던 일을 멈추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벌써 일어나셨습니까?”
“음.”
“너무 일찍 나오셨습니다.”
“충분히 잤다.”
“충분하지 않습니다. 더 주무셔야 합니다.”
“…….”
내가 빤히 바라보자, 수연 녀석은 제 수첩을 펼쳤다. 몇 권째일지 모를 업무용 수첩엔 최근 한 달간 나의 수면시간이 날짜별로 기록되어 있었다. 수연이 시선을 수첩의 특정 페이지에 두고서 이야기한다.
“주제넘은 태도를 보여 죄송합니다. 그러나 형님의 건강관리는 제가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부분입니다. 지난 1주간 형님의 일평균 수면시간은 4시간 22분이며, 기간을 1개월로 늘려도 5시간 47분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마저도 형님께서 잠에 들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반영되지 않은 것이니, 실제 수면시간은-”
“무슨 말인지 안다. 생각해줘서 고맙고. 다음엔 좀 더 길게 자도록 노력해보마.”
“……네.”
수첩을 접는 수연의 무표정에 희미하게나마 불만족스러운 느낌이 스쳤다. 순간적인 변화여서 착각인가 싶기도 했다. 오래 보았어도 생체신호로 진실과 거짓을 분간하는 게 고작인 녀석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드물긴 하지만. 황금기의 눈이 아무리 많은 것을 보여주어도 받아들이는 내 능력에 한계가 있는 탓이다.
자리에 앉는 내게 수연이 묻는다.
“식사는 하고 오셨습니까?”
“시간을 아껴야지. 주방에 연락해라. 간단하게 먹을 것을 올려 보내라고. 커피와 샌드위치 정도가 좋겠다.”
“예.”
“너는?”
“먹었습니다.”
“그래.”
부하가 끼니를 거르며 일을 하면 곤란하지. 선 채로 주방에 연락을 넣은 수연은 자리에 앉는 대신 내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비웠다.
난 노트북에 전원을 넣었다. 일반적인 노트북이 아니라 미군의 내구성 기준(MIL-STD)을 충족시키는 러기드 노트북이다. 3층 높이에서 떨어뜨려도 멀쩡하고, 화면을 접어놓은 상태라면 바닷물에 담가놔도 고장이 나지 않는 물건. 최악의 경우에도 저장장치만큼은 침수로부터 보호된다. 그러면서도 저장장치 탈착이 손쉬운 게 장점이었다.
지문인식과 암호 입력으로 부팅을 완료한 나는 본사 비서실에서 매일 정리해 올리는 사회·경제·문화 영역의 동향 보고서부터 열람했다. 내가 알아야 한다고 판단한 정보들을 요약 정리한 문서들. 그 갈피에서 나는 한동안 떠올릴 일이 없었던 이름을 발견했다.
「푸에르토 바야르타 시장직 보궐선거 결과 보고 - 무소속으로 출마한 페드로 산토스 산체스, 일명 페루쵸가 64.1%의 득표율로 압승을 거두었음. 현지 언론은 지지자들의 모임인 「후앙의 군대(Falange de Juan)」가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평가하며, 장차 이들이 제9의 정당으로 거듭날 가능성을 점침. 산토스 산체스는 이듬해 9월 30일까지 임기를 수행할 예정.」
후앙의 군대라. 나는 내 위장신분이 남긴 흔적을 달갑잖게 곱씹었다. 팔랑헤(Falange)라는 단어는 정치결사 내지 동호회라는 뜻으로도 해석 가능하였으나, 보고서에 첨부된 링크들을 몇 개 살펴보니 비서실에서 굳이 군대라고 번역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기존 정당의 1회용 얼굴마담 노릇이나 할 줄 알았더니…….’
이러한 보궐선거는, 선거에 걸린 잔여임기가 얼마인가를 떠나 각 정당들이 최선을 다해 임하는 게 보통이었다. 보궐선거에서 거둔 성적을 통해 시기적으로 가까운 다른 선거들의 결과를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페루쵸가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압승을 거둔 건 정치적 이변이라 평해도 좋을 일이었다. 나는 인터넷 뉴스에 실린 페루쵸의 사진을 응시했다. 마지막으로 본 이후 그리 긴 시간이 흐른 것도 아니건만, 더 이상 배불뚝이라고 부를 수 없을 만큼 살이 빠진 모습. 움푹 들어간 두 눈은 사진 상으로도 형형함이 드러났다. 왼쪽 손목엔 내가 후앙이었을 적 선물한 오메가 씨마스터(Seamaster) 시계를 차고 있다.
9개월, 9개월이라…….
딸을 잃은 아버지의 각성이 과연 언제까지 유효할는지는 의문이지만, 페루쵸에게 주어진 아홉 달의 임기는 짧기에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었다. 큰 실책만 벌이지 않는다면 지지자들의 열정이 사그라들기 전에 시장직 수행 경력을 토대로 더 높은 자리를 노려볼 수 있을 테니까. 무턱대고 일을 벌려놓은 다음, 책임을 후임자에게 떠넘기기에도 좋다.
기사 말미엔 페루쵸가 시장으로서 해군병원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지나가듯 실려 있었다.
짧은 상념에 잠겨있으려니, 수연이 샌드위치와 커피를 올린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무슨 일로 자리를 비우나 했더니 고작 음식이나 받아오려는 거였나.
“아랫녀석들을 시키라니까.”
“그냥 받아오기만 했을 뿐입니다.”
묘한 데서 고집을 부리는군. 층층이 쌓인 샌드위치는 일반인 기준으로 2인분을 조금 넘는 양. 먼저 커피를 한 모금 삼킨 나는, 혀끝에 감도는 익숙한 맛에 수연을 바라보았다. 제 자리에 착석한 수연이 조용히 묻는다.
“뭔가 지시사항이 있으십니까?”
“……아니다.”
이 커피는 분명 수연 녀석이 내린 것이었다. 쓰는 원두는 항상 정해져 있지만, 나는 수연이 내리는 것과 경태가 내리는 것,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사람이 내리는 것 사이의 미세한 차이를 구분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