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고독의 도가니 (16)
발전기를 고장 내는 건 손쉬운 일이었다.
다음 목표는 저장된 폭탄들이다.
최초의 습격 및 폭탄 반출 이후, 흑해자당과 농민공들의 생산품 이송 전술은 더욱 대담한 형태로 바뀌었다. 형식적인 봉쇄만을 간신히 유지 중인 공안에게 대놓고 차량의 자유로운 출입을 요구한 것이다. 핑계는 공단을 점거한 10만 노동자들을 위해 식량과 기타 필수품 등을 들여오겠다는 것. 식량의 조달처는 양곡비축을 관할하는 부처(储备粮管理集团有限公司)의 저장시설이다. 상류층 민심과 상부의 시선 때문에라도 물러날 수 없는 공안의 처지를 협상에 이용한 교활함이었다. 10만 운운하는 소리는 이럴 때 흔한 머릿수 부풀리기였고.
그리하여 수도 없이 드나들게 된 차량들의 태반은 속을 잡동사니로 채워놓았다. 실제로 폭탄이나 식량을 운송하는 차량은 열 중 하나둘 가량이 고작. 나머지는 괜히 나가서 도시 구석구석을 들쑤시며 시선을 끌다가 그대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잡동사니로라도 무게를 늘려 바퀴가 짓눌리게 만들었으므로, 나처럼 투시력이 있는 게 아닌 한 외양만으로 허실을 가려낼 순 없었다.
이러한 차량들의 운행은 공안을 유인하여 함정으로 끌어들이는 수단이기도 했다. 어떻게든 차량을 추적해보고자 애쓰던 경관들은 흑해자당의 유격전에 휘말려 죽거나 실종처리 되었다. 이러한 전력 누수를 길게 감당할 처지가 못 되었던 공안국은 공단에서 나오는 차량에 대한 감시를 포기해버리기에 이르렀다.
물론 내 쪽은 형편이 달랐다. 첫 반출 때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아 몸소 쫓아가는 수밖에 없었지만, 두 번째부터는 본사에서 공수해온 발신기를 부착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도로에 있는 맨홀 아래에서 맨홀 덮개의 구멍으로 발사기를 겨누고 있다가, 차가 지나갈 때마다 방아쇠를 당겨주면 그만이었다. 흡착지뢰처럼 들러붙은 자그마한 발신기는 추적조가 수백 미터 간격을 유지하며 차량을 뒤쫓을 수 있게끔 해주었다. 발신기 부착을 담당한 녀석들이 악취 가득한 하수구에서 온종일 고생해준 덕분.
여하간 그런 이유로, 완제품 폭탄들은 차량 적재가 편한 대형 창고에 몰려있었다. 농민공 지도부가 나름 나누어 저장해두긴 했지만, 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간격을 두었을 뿐 본격적인 침투 타격에 대비한 것이 아니었다.
이는 도취와 자만으로부터 비롯되었을 실수다. 공안의 전력을 성공적으로 박살냈다는 데서 오는 도취. 그리고 자신들의 의도가 노출되지 않았으리라는 자만.
우리는 지저분한 외투에 의지하여 희미한 불빛들 사이를 통과했다. 농민공들이 가진 낡은 핸드폰들은 배터리 잔량이 충분치 않아, 그것들만 가지고는 어둠을 몰아낼 수 없었다. 3만이 넘는 인원수에 비해 충전기를 꽂을 콘센트가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공단 바깥에선 가오슈센이 제 목소리로 성심껏 주의를 끌어주고 있었다.
「지금 투항하면 모든 죄를 불문에 부치겠다! 주동자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거나 체포를 돕는 자에겐 포상금도 지급한다! 액수는 최대 1만 위안! 이제라도 충당애국의 바른 길로 돌아와 나라에 공헌하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라! 그대들에겐 아직 기회가 있다!」
이에 각성 능력자인 농민공 하나가 돌을 집어던지며 초인적인 성량으로 응수한다.
“개소리 집어치워(别放屁了)! 우리는 그깟 푼돈에 동료를 팔아넘기지 않아! 다시는 너희 총 든 강도들의 노예가 되지 않겠다!”
시끄러운 소리와 요란한 경광등은 농민공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들 사이로 공안 병력의 움직임이 포착되자, 농민공들 또한 분분히 집단 대응을 준비하고 나섰다. 농민공 지도부는 공안측이 어둠을 틈타 공단 진입을 시도할지도 모른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공안 측 전력이 아무리 형편없이 줄어들었어도, 인공의 불빛이 소거된 어둠은 훈련을 받은 집단과 그렇지 못한 집단 간의 차이를 극대화할 수 있었다. 운이 좋다면 수백을 가지고 수만을 흩어버리는 싸움마저 가능하다는 소리.
「사위가 어둠에 잠긴 지금이야말로 투항의 적기다! 어쩌다 반역자들에게 휩쓸렸을 뿐인 선량한 공민들이여! 자랑스러운 국가의 깃발 아래로 돌아와 사회질서 회복에 기여하라!」
“닥치라고, 이 자라새끼야!”
공안의 수작에 대비하랴,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이탈자를 사전에 차단하랴. 농민공들이 정신없는 틈을 타, 난 부하들을 이끌고 창고에 잠입하는 데 성공했다.
당연하게도 창고 안에는 따로 경비를 서는 자들이 있었다. 쏴죽일 각이 안 잡히면서도 피해가기는 어려운 절묘한 길목이다. 청각을 조율하지 않았음에도, 붉은 완장을 찬 농민공 능력자 넷이 주고받는 신경 곤두선 대화가 귀에 들어온다.
“우리도 나가봐야 하는 거 아닌가?”
“대장이 절대로 자리를 비우지 말라고 했잖아.”
“무전으로 물어보기라도 해.”
“야. 바로 10분 전에 확인했는데 뭘 또 물어봐.”
“10분 전이랑 지금이 같냐, 인마? 우리처럼 뛰어난 신통역사(神通力士)들이 이런 데 처박혀있기만 한다는 게 말이 안 된다니까. 바깥에 깔린 눈깔이 3만 쌍인데 누가 여기까지 숨어들어 오겠느냐구. 아무리 어두워도 그렇지.”
“너 지금 대장을 무시하는 거냐? 니가 대장보다 머리가 좋아?”
“아, 씨발 거. 빡대가리 새끼가 존나게 대장 타령 해대네. 왜, 그 대장한테 니 후장이라도 함 대줬냐?”
“아니 이게 진짜 뒈질라고…….”
“좀 닥쳐봐. 대장이랑 그 패거리라고 해봐야 대학물 좀 먹은 게 전부인 애송이 새끼들이잖아. 우리처럼 특별한 힘이 있기를 해, 아님 억울한 일을 겪어봤기를 해? 그러니 따지고 보면 우리가 위로 올라가야 맞는 거지. 걔네가 우리 머리꼭대기에 앉아서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난 이 난만쯔(南蛮子) 새끼 말에 찬성. 대가리에 먹물 들어간 인간 치고 사기꾼 아닌 놈을 못 봤다. 공산당 새끼들도 다 배워먹은 연놈들 아냐? 흑해자당한테 받는 돈 대부분을 지들끼리 갈라먹고 우리한텐 찌꺼기나 던져줄걸?”
“뭐 인마? 난만쯔? 뒤질래 이 씹구녕(傻屄)아?”
“이 새끼는 편들어줘도 지랄이네, 병신이.”
“싸우지 마, 똑같은 씹구녕들아.”
수준 떨어지는 놈들이 꼴값들을 떨고 있다. 원시마법 각성자들이 빠지기 쉬운 우월감에 더해, 교육 받은 인텔리에 대한 계급적 불신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대화.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으며 파편화된 계급은 압제자들에 맞서 단결하기도 쉽지 않은 것이다. 고로 흑해자당이 제공하는 자금은 이들의 단결에 아주 큰 영향을 주고 있을 터였다.
권총을 뽑은 나는, 부하들 앞에서 남는 손의 검지를 세워 입에 대어보였다.
“대기해라. 여기선 내가 처리하마.”
상대가 나름 각성한 능력자들이므로 은밀한 접근엔 마력장이 문제가 된다. 내 부하들은 자연각성 능력자들에 비해 능력의 수발(受發)이 자유로운 편이었으나, 그렇다고 나처럼 마력장을 제로에 가깝게 억제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도 더욱 진한 그늘을 따라 발소리를 죽이며 다가간 나는, 사각(射角)을 확보하자마자 곧바로 네 발의 속사를 가했다. 퍽퍽퍽퍽! 사람이 연달아 죽어나가는 단조로운 소리들. 소음기가 줄여놓은 총성보단 사람 넷이 쓰러지는 소리가 더 요란했다. 가까운 테이블이 덩달아 넘어지며 그 위에 있던 마작패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지금의 경태쯤이라면 모를까, 근골이 강화된 능력자라 한들 맨머리로 납탄을 튕겨낼 순 없었다. 그게 아무리 저위력 권총탄이라 해도.
나는 뒤로 신호를 보냈다.
“클리어.”
바깥의 농민공들과 달리, 그리고 어제 작살난 농민공 능력자들과도 달리, 창고 내부에 배치된 자들은 그럴듯한 장비들로 무장한 상태였다. 이젠 슬슬 지겹다는 생각이 들 정도가 된 철물점 레벨의 전신 갑주가 기본이며, 냉병기는 물론이고 석궁처럼 화약을 쓰지 않는 투사병기들까지 눈에 띈다.
방금 죽은 놈들은 불 꺼지기 전까지 마작이나 치던 놈들답게 방어구 착용이 불량했다. 철제 헬멧을 쓰고 있었더라면 죽이기가 조금 번거로울 뻔했다.
나는 묵직한 석궁을 들어 살펴보았다. 마감은 조악할지언정 크기가 크고 장력이 강하여 어지간한 방탄복은 쉽사리 관통하게 생겨먹었다. 공단 내 공작기계들을 활용하면 투박한 총기를 제작하는 일도 가능했을 것이나, 훈련받지 않은 인원에게, 그것도 화약고 안에서 화약병기를 쥐여주는 건 위험하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이때 쓰러진 네 구의 시체 중 하나의 무전기에서 지직 대는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어이, 무슨 일이야? 뭔가 쓰러지는 소리가 났는데? 샤오보, 너네 쪽이냐?」
「우리 아닌데. 뤄정네 쪽 아냐?」
창고 내부를 순찰하던 놈들이 서로의 상태를 확인하고 있었다. 석궁을 내려놓은 난 신체강화술식으로 성대를 제어하여 ‘리 동사장’의 것이 아닌 목소리를 몇 번 내보았다.
“비슷한가?”
경태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내 귀엔 죽은 놈 중 하나와 비슷하게 느껴지지만, 자기 목소리를 자기 자신이 정확히 들을 순 없는 것이었다. 간단히 속이기는 안 되는 거로군. 빠르게 단념한 나는 잠깐의 생각 끝에 그냥 폭탄을 이용하기로 했다. 정확히는 폭탄 속의 화약을.
「어이, 하오융. 대답해라. 왜 너네만 말이 없어? 뱌오? 쉬빈? 어우펑?」
무전기로 흘러나오는 음성에 슬슬 긴장감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저들이 내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도록 제한적인 마력장을 전개한 난, 우선 발화술식을 회로에 돌려 머리 위로 화광이 솟구치게 만들었다. 불쏘시개 없이 허공에서 타오르는 불길이다.
「야! 저거 뭐야? 불! 불! 불이냐? 어?」
「하오융 패거리 방향이잖어! 이 염병할 새끼들이 뭔 개짓거리를 하고 있는 거여! 얼른 불을 끄지 않구서!」
무전망이 혼비백산한 목소리들로 가득 찬다. 바로 뛰어오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달아나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모습들. 난 염동술식으로 지향성 폭탄 하나를 뜯어 캔 속의 화약을 긁어냈다. 쏟아지는 화약이 염동력을 타고 중력을 거스른다.
“귀를 막아.”
부하들에게 미리 경고한 나는, 공중에 띄워 소분(小分)한 수십 개의 작은 화약 덩어리들을 연속으로 폭파시켰다.
펑! 퍼퍼퍼펑!
작은 덩어리들이라곤 해도 화약의 양만 따지면 수류탄에 필적한다. 파편이 없어 살상력도 없을 뿐. 당연히 잇따르는 폭음 또한 무더기로 터지는 수류탄과 맞먹었다. 폭발에 맞춰 발화술식을 간헐적으로 강화하자, 오도 가도 못하던 놈들이 비로소 한쪽을 선택한다.
“불이야! 폭탄 창고에 불이 났다!”
“살려줘!”
무전이 아니다. 커다란 창고 저편으로부터 아스라이 들려오는 겁먹은 비명들. 이어 육중하면서도 다급한 발소리들이 높은 지붕 아래 메아리친다. 놈들은 넘치는 힘으로 벽을 뚫고 달아났다. 나는 발화술식을 거두며 부하들에게 턱짓했다.
“서둘러라. 곧 떼거리로 몰려올지도 모르니.”
생각할 머리가 있는 빨갱이들은, 어둠이 공단을 집어삼킨 와중에 완제품 창고가 폭발하면 3만을 무너뜨릴 공황이 터지리라는 사실을 알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 아래엔 창가에 화광이 비추는 와중에도 목숨 걸고 달려올 결사대가 있을지 모른다. 죽음을 도외시하는 건 이념무장이 투철한 사상범들의 특징이었다.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온다.”
비상 대기조쯤 될 일군의 각성 능력자 무리가 화약 공장 방향으로부터 미친 듯이 달려오는 중이었다. 앞서 죽인 놈들과 달리 방어구는 제대로 갖춰 입었으나, 모두가 무기 대신 소화기만 달랑 들고 있었다. 단순 화재라고 여긴 모양. 각각의 얼굴엔 비장함이 가득하다.
“얼마나 더 걸리지?”
「앞으로 2분이면 됩니다. 작업을 중지하고 대응할까요?」
“아니. 속행해. 그 정도 시간은 내가 벌어주마. 폭음이 들려도 놀라지 말 것.”
큼지막한 석궁과 화살을 챙겨 적들의 예상 진입로 앞으로 달려간 난, 사방에 널린 폭탄들을 줄줄이 뜯어 화약을 쏟아냈다.
흑색화약은 연기가 많이 난다. 아까보다 잘게 쪼갠 화약들을 끊임없이 태우자, 내가 있는 창고 구획은 곧 질산칼륨의 지린내가 섞인 짙은 연기로 가득 찼다.
쾅! 으지직!
여지없이 벽을 뚫고 들어온 놈들은 연기 자욱한 실내의 풍경에 당황했다. 이리저리 헤드랜턴을 비추어도 채 5미터 앞을 보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불은 어디냐?! 어디서 뭐가 타고 있는 거야, 대체!”
뭐가 타고 있는가. 정말로 폭탄 더미에 불이 붙었으면 창고는 벌써 날아갔어야 정상이다. 즉 이들이 창고에 진입한 건 비장함과 별개로 매우 냉정한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나는 놈들이 흩어지기 전에 석궁을 조준했다. 목표는 사람이 아닌 소화기였다.
투웅-!
활줄이 퉁겨지는 둔중한 울림에 기민하게 반응하는 적들. 그러나 짧게 자른 철근을 날카롭게 갈아 촉으로 삼은 화살은 소화기 하나를 반쯤 찢다시피 관통하고 지나갔다. 소화분말이 폭발적인 기세로 새어나오자 적의 당혹감이 절정을 찍는다.
“쿨럭, 쿨럭! 이런 씨발! 이게 뭐야아아!”
신속하게 재장전을 마친 나는 또 하나의 소화기를 터트리곤, 석궁을 내려놓은 후 여분의 화살을 단창처럼 움켜쥐었다. 이 순간 적들의 시야는 사실상 제로. 조용히 달려 소화분말의 구름 속으로 돌입한 난, 허우적대는 무리의 눈구멍들을 예리한 쇠붙이로 무자비하게 쑤셔주었다. 날선 철근이 눈알을 깨고 뇌를 찌를 때마다 비명 없는 죽음이 하나씩 늘어난다.
찌를 때의 저항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나름 몸에 마력이 밴 원시마법 능력자들이 이토록 부드럽게 죽는가 싶을 만큼.
이런 식으로 열다섯을 죽이는 데 걸린 시간은 체감상 십여 초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