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104화 (104/561)

#15. 고독의 도가니 (15)

다시 하루 하고도 한나절이 흘렀다.

공업단지에 대한 시 공안국의 봉쇄는 형식적인 것으로 전락했다. 도심 곳곳에서 흑해자당의 활동이 급증하여 중대 단위로 지원을 보내야만 했기 때문이다. 흩어진 민병대의 재소집 비율은 현시점에서 2할을 간신히 넘어갔다. 그나마도 전력으로 쓸 수 있는 상태가 못 되었고.

급증한 흑해자당의 활동들은 교란 및 시선 분산이 가장 중한 목적이겠으나, 좋은 전략가는 한 수를 두어 여러 수의 이익을 거두는 법. 광저우 시에서는 하루 사이에 아홉 개의 은행이 습격을 당했고, 그 아홉 곳 중 하나는 이러한 사태에 대비해 개별 은행의 준비금을 큰 비율로 몰아놓았던 중국공상은행(中国工商银行)의 광저우 지점이었다. 상주하던 무장경찰 2개 소대는 몇 구의 시체만을 남겨놓고 증발해버렸으며, 커다란 금고는 지폐 한 장 금붙이 하나 남김없이 깔끔하게 비워졌다.

물론 그렇게 털린 금액이 대단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공산귀족들의 비밀스러운 개인금고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수준.

그러나 시민들이 받은 충격은 별개였다. 보도통제가 무슨 소용인가. 모든 게 뻔히 보이는 마당에. 거리에 가득한 위협을 감수하면서까지 집에서 뛰쳐나온 시민들은 자기가 거래하는 은행을 찾아가 전액 출금을 부르짖었다. 당국이 지급을 유예시키기 전까지 인출된 금액만으로도 흑해자당이 털어간 금액의 여섯 배를 넘어간다. 객관적인 피해 분석을 곁들여 진정을 촉구하는 관영방송 앵커의 목소리는 그저 공허한 메아리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이다. 이것이 바로 흑해자당이 노렸을 효과다. 흑해자당의 지도부는 상류층의 불안과 분노를 꾀하고 있었다.

“결국 부시장이 책임을 지고 공안국장 자리에서 물러나기로 했소.”

가오슈센이 음울하게 이야기했다.

“어제 그렇게 피를 보고도 자리를 보전했던 인간이 오늘은 목이 날아갔단 말요. 남은 서기직도 오래 붙들고 있진 못할 테지.”

어제 오후부터 가라앉기 시작한 가오슈센의 낯짝은 지금에 이르러선 더 가라앉을 구석도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공식적으로 공안국장 대행이 되었다 함은 현재의 도시 치안에 대한 최종적이고도 궁극적인 책임을 져야 할 처지가 되었다는 뜻이다. 부시장을 욕받이로 써먹으면서 실권만 휘두르면 되었던 어제에 비하면 여건이 오히려 나빠진 셈.

‘지금 벌어지는 건 사실상의 인민재판이니까.’

베이징의 높으신 분들은 당 핵심지지층의 이반을 경계하고 있었다. 따라서 가오슈센의 현 상황은 기호지세와 같다. 이제까지 쌓은 득점은 큰 의미가 없고, 하루 벌어 하루를 연명해야 하는 처지. 단, 이 시기를 어떻게든 견뎌내기만 한다면 더없는 찬사와 지지를 받으며 까마득한 높이로 올라설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니 동사장. 지금부터 하실 일은 반드시 성공해야만 하오. 우리 사업의 흥망과 굴기가 이 대사(大事) 한 번에 달려있소이다.”

이제껏 가오슈센이 주절주절 늘어놓은 말들은 이것을 위한 서설에 불과했다. 난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대꾸했다.

“염려 놓으십시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니. 양동(陽動)이나 제대로 수행해주시면 됩니다.”

“그거야말로 염려 놓으시오. 이쪽은 준비를 다 마쳐놓은 지 오래라오. 공전공사 쪽도 마찬가지요. 동사장의 연락 한 번이면 전기 공급이 바로 차단될 거요. 공장만이 아니라, 이 일대 전체의 전기 공급이.”

공산귀족이 말하는 대사란 내가 제안했던 예의 그 야간 폭파공작을 의미한다. 농민공들이 장악한 공단에 침투하여 정밀하게 계량된 폭발과 혼란을 일으키는 일. 가오슈센이 공안국장 대행을 맡자마자 포병대를 보유한 3만 이상의 반역도당을 기계(奇計)로써 무너뜨린다면, 이로부터 비롯될 이미지의 상승은 이루 말하기 어려울 만큼 클 것이었다.

그게 꼭 좋은 일만은 아니다. 기대치가 높아지는 까닭. 사람들은 영웅에게 언제나 영웅적인 위업만을 기대하며, 그것을 또 당연하게 생각한다. 언젠가 점점 더 역치가 높아지는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순간이 오면, 영웅은 단 한 번의 실패만으로도 퇴물 내지 역적과 같은 취급을 받을 수 있었다.

허나 광저우 광역권의 질서를 어떻게든 수습 가능한 선까지 회복하자면 강력한 한 방이 절실한 것도 사실.

“이것을 가져가십시오.”

가오슈센 휘하 세 경독 중 하나, 판하이산이 내게 투박한 생김새의 안경 하나를 내밀었다. 안경다리에서 뻗어 나오는 가느다란 선 하나가 스마트폰보다 작은 사이즈의 단말기에 연결되어 있었다.

“위험분자를 안면인식으로 식별케 해주는 증강현실 장비입니다. 특별히 지원을 받았죠. 주동자 색출은 저희가 할 일이긴 합니다만, 3만 명이 흩어지는 혼란 속에서 한 명도 놓치지 않고 전부 붙잡는 건 병력 부족 때문에라도 불가능할 테니…….”

감시기술 개발에 한화로 10조가 넘는 돈을 매년 처박아댄 결과가 바로 이런 물건들이었다. 난 받아든 안경을 살피며 물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소. 어떻게 쓰는 거요?”

“그냥 전원만 넣으면 됩니다. 저조도(低照度) 성능이 우수하여 지금 같은 밤중에도 별도의 조명이 필요 없고, 미리 다운로드(下载)를 받아둔 자료를 기반으로 오프라인(脱机) 환경에서도 식별이 진행되지요. 안면인식 테두리가 적색으로 표시되는 놈들이 바로 고가치 표적들입니다. 지금 한번 써보십시오.”

지난 하루 공안 측이 놀고만 있었던 게 아니다. 이쪽 방면에 남은 공안 병력은 온갖 종류의 정찰자산을 동원하여 농민공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그들 사이의 상하관계를 파악하는데 주력했다.

나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됐소. 가서 써도 늦지 않겠지.”

“아, 예…….”

판하이산은 늦은 시간에도 색 짙은 보안경을 벗지 않으려는 날 조금 어색하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실리콘 마스크 착용이 곤란하니 별수 있나. 난 적당히 화제를 바꾸었다.

“이런 잡동사니 말고, 좀 더 확실한 지원은 아직이오? 장갑차라든가, 광둥성 무경총대의 병력 지원이라든가…….”

가오슈센이 시 공안국을 장악했으므로, 이제부터는 지원을 받으면 받을수록 이익이 된다. 그들 중에 나와 내 부하들을 능가하는 전력이 있을 것도 아니고. 인도와의 국경분쟁 격화, 베이징 및 홍콩 등지의 불안으로 인해 군대는 더더욱 올 여력이 없다.

여기에 대해선 가오슈센이 답했다.

“정확히 뭔지는 몰라도 중앙정부에서 준비 중인 비장의 한 수가 있다고 들었소이다. 축차투입과 축차소모를 피하기 위해 아끼고는 있지만, 일단 투입하기만 하면 어떤 적도들도 감히 대적하지 못할 무적의 전력이 양성되고 있노라고. 그러니 일선 간부들은 조금만 더 시간을 벌어보라고.”

무적의 전력 같은 소리 하네.

“그걸 얼마나 믿습니까?”

내 물음에, 공산귀족은 어두운 와중에도 조금 무안한 표정을 짓는다.

“대외비랍시고 정보를 감추고는 있소만, 중앙에서 훈련시킨 최정예 이능보유자 집단 같은 게 아닐까 싶소. 전국적으로 모집한 이능보유자들을 집중 운용한다면 무적까진 아니어도 큰 도움은 되겠지. 한 번에 한 곳씩, 차근차근 확실하게 정리하는 거요.”

내 기대치도 딱 그 정도다. 중앙정부가 일선에 바라는 건 각성한 능력자들을 군인으로 바꾸는 데 필요한 시간일 것이었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자들을 모아놓았다 한들, 능력의 편차가 큰 집단을 규격화된 군사력으로 바꾸는 건 절대로 쉽지 않을 일이었다. 그 어려움은 만들고자 하는 부대의 규모에 비례하여 기하급수적으로 가중된다.

‘전술과 전략 양면에서 기본이 되는 교리부터 새롭게 만들어야 할 판이니.’

“15억 중화인민이 단결하면 온 세계가 무릎을 꿇으리라.”는 게 요즘 중국 중앙정부가 내세우는 「이능굴기」의 핵심 표어지만, 시간이 주어지지 않으면 그저 몽상에 불과한 것이었다.

최종 장비점검을 마친 나는, 복면을 눈 바로 아래까지 끌어올린 무장경찰의 모습으로 공산귀족에게 고개를 까딱여 보였다.

“시작합시다.”

“건투를 비오.”

농민공의 복색을 할 수 있다면 좋겠으나, 그랬다간 피아식별에 문제가 생긴다. 자칫 공안들로부터 오인사격을 받을 수 있었으므로, 침투시엔 허름한 외투를 둘렀다가 나중에 가서 벗는 방책을 마련했다.

천막 밖으로 나가니 환한 지상의 전경이 눈에 들어온다. 오늘의 월광은 만월 대비 76%. 그러나 건기(乾期)에 어울리지 않는 얇은 구름이 달빛 아래에 깔려, 인공적인 불빛만 없다면 제법 어두워야 정상일 밤이었다.

내부안전보위지대(内部安全保卫支队)로부터 뜯어낸 공단의 시설 정보엔 배수로나 지하 공동구(共同溝)처럼 침투에 적합한 경로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이는 내 눈에 뻔히 보이는 것들이었으나, 이제부터의 침투 동선에 알리바이를 부여해주기는 할 것이었다. 이런 부분까지 내가 알아낸다는 건 조금 이상한 일이니까.

나와 내 애들은 전기배선과 가스관 다발이 쭉 이어지는 터널을 따라 공단 내부로 침투했다. 외부의 전파가 닿지 못하는 공간이었지만, 예정된 위치에 도달하니 시설 정비시 이용하는 인터폰 박스가 있었다. 경태가 수화기를 들었다.

“당소 헤이랑(黑狼). 도차(道岔/포인트) A 도달. 정각에 침투를 개시하겠음.”

「정각, 확인했습니다. 무사귀환을 바랍니다.」

돌아오는 음성은 공전공사에 나가있는 경독 장타이롱의 것이었다. 한 개 공안소대를 동반하여 공전공사를 들이친 그는, 공전공사의 전 직원을 한데 몰아놓고 총을 겨눈 채로 핸드폰부터 압수했노라 보고했다. 나는 그에게 팔뚝에 주삿바늘 자국이 있는 자들을 찾아보라 조언했으며, 내 조언을 들은 그는 다섯 명의 중간 관리자들을 내란음모 혐의로 체포할 수 있었다. 마약과 뇌물의 유혹에 넘어간 자들이다.

조금 더 나아간 우리는 마침내 폭죽 공장 아래에 도달했다.

우우웅-

낡은 기계들의 구동음이 지저까지 낮게 울려 퍼진다. 두꺼운 흙과 콘크리트 너머 생산라인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농민공들은 늦은 시간에도 정신없이 작업을 소화하는 중이었다. 원자재 창고에 가득한 재료를 전부 완성품으로 바꾸려면 앞으로 이삼 일은 더 24시간 공장을 돌려야 할 것이었다.

전기가 나갈 정각까지는 3분 17초 남았다. 나는 쓰고 있던 보안경을 증강현실 고글로 교체했다. 두께가 상당하여 착용감이 나쁘지만 그런대로 참아줄 만한 수준. 단말기에 전원을 넣자 20초가량의 부팅이 이루어진다. 이 상태에서 부하들을 둘러보니 각각의 얼굴에 하얀 테두리가 떠올랐다. 식별에 소요되는 시간은 0.1초 미만이었다.

‘일이 끝나는 대로 부숴버려야겠군.’

부하들 역시 얼굴을 절반 이상 가리고 있기는 마찬가지지만, 메모리에 무슨 단서가 저장될지 모르는 노릇이다.

잠시 후, 땅 밑까지 웅웅대던 울림들이 삽시간에 자리를 감추었다.

정각이 된 것이다.

“기다려.”

부하들을 대기시킨 난 어둠 속에서 혼란에 빠진 농민공들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핸드폰 액정의 불빛들이 사방을 어지러이 비춰댄다. 통신사 기지국으로 들어가는 전기도 모조리 끊어버린 까닭에, 노동자들은 모든 의사소통을 무전과 육성에 의지해야 했다. 외부로의 연락은 자연스레 차단된 상황.

“지금이다.”

출구 주변에 인적이 사라진 순간, 난 염동술식으로 출구를 열고는 한 번의 도약으로 지하를 벗어났다. 경태 이하로도 한 번을 넘는 도약이 필요하진 않았다.

최우선 타격 목표는 각 공장의 비상발전기들이다. 저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생산라인은 둘째치고 조명부터 복구하려 들 테니까. 빛의 부재는 3만이 넘는 어중이떠중이들을 통제하는 데 치명적인 요소였다.

난 소란스러운 암중을 무인지경으로 가로지르며 분기점마다 애들을 나누어 보냈다. 다수의 발전기를 최대한 빠르게 제압하기 위함. 그리하여 내가 마지막 발전기에 도달했을 땐, 제각기 작은 손전등을 하나씩 입에 문 잡놈 둘이 막 스위치를 올리려는 참이었다.

“어아?(뭐야?)”

발소리를 듣고 먼저 돌아본 한 놈의 멍청한 반응. 증강현실 고글엔 하얀 테두리가 뜬다. 난 곧바로 장타(掌打)를 밀어 쳐 손전등을 목구멍 안으로 처박아주었다. 뒤로 넘어지는 머리가 발전기에 부딪혀 쿵- 하고 붉은 핏자국을 남긴다.

쪼그리고 있던 다른 한 놈은 경태의 올려 차기에 아래턱을 얻어맞았다. 손전등을 문 앞니가 빠지직 부서지는 소리. 부릅뜬 눈이 이쪽을 포착한다. 곧바로 달려든 경태는 경악한 노동자의 머리를 앞뒤로 잡고 손이 흐릿해지는 속도로 돌려버렸다.

우드드드득-!

내가 직접 육성한 초인의 근력은 평범한 인간에겐 과도한 폭력이었다. 제 자리에서 네 바퀴나 돌아버린 머리는, 몸으로부터 떨어져 나오고도 여력이 남아 쓰러진 팽이처럼 바닥을 굴러다녔다. 머리통 아래 붙은 목은 살점과 핏줄이 너덜거리는 꽈배기 꼴이 되어있었다.

“좀 지저분하구나.”

내 말에 경태가 멋쩍어했다.

“이게, 힘의 최대치가 계속해서 달라지다 보니까……. 아차 하면 힘 조절이 거칠어지네요.”

“그러냐.”

발전의 부작용이라면 어쩔 수 없지.

뒤통수가 깨져 정신을 잃은 놈은 기도가 이물(異物)과 핏물로 막힌 채 산소부족으로 죽어갔다. 난 발길질 한 번으로 죽음을 앞당겨주었다. 응급처치를 해주지 않는다면 어차피 오래 가지 못할 목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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