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고독의 도가니 (14)
당연한 말이지만, 반쯤 부서진 핸드폰 또한 이 ‘사고현장’에 남아있어야 한다.
데이터 분석을 위한 증거?
여기는 중국이다. 주고받은 문자야 통신사 서버에 다 저장되어 있을 테고, 이를 공안의 이름으로 열람하는 덴 아무런 제한이 없을 터. 단말기의 번호는 아까 PDF 파일을 전송하면서 확보했다. 암호를 해석한 결과와 단말기의 과거 위치이력을 대조하면 말단 심부름꾼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정보는 거의 다 얻어내는 셈. 아울러 공안의 시스템을 빌려 이 일대에서 송수신된 모든 데이터를 대상으로 분석을 실시해보면 한 뿌리의 감자덩이들처럼 줄줄이 걸려 나오는 것들이 있을 터였다. 마침 시 공안청의 실권이 일시적으로나마 가오슈센에게 집중된 참이다.
그러므로 내가 거둔 것은 수상할 정도로 깨끗하고 많은 지폐들뿐이었다. 지폐마다 인쇄된 마오쩌둥의 넙대대한 낯짝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나는, 지전(紙錢)을 태우듯이 불을 붙여 건조한 바람결에 뿌려버렸다. 저승 가는 노잣돈이 부족하진 않을 것이다.
이어 동일한 발화술식으로 아스팔트를 구워 스키드 마크 비슷한 자국을 남기니 그럴듯한 뺑소니 현장이 완성되었다. 과거 교통사고로 위장하여 부하들의 억울함을 풀어준 경험이 많아, 스키드 패턴을 떠올리기는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할까…….’
거점 자체의 방어는 지금 끌고 온 전력만으로 충분히 무너뜨릴 수 있을 수준이다.
그러나 근거지 하나 확인했다고 벌써부터 들이쳐 버리면 기회비용의 낭비가 심하다. 일단 한 거점이 공격받고 나면 남은 놈들은 즉각 암호책부터 교체하려 들 확률이 높았다. 따라서 기왕 얻은 암호책의 수명도 연장할 겸, 흑해자당이 몇 번 더 화약을 빼돌리도록 유도한 다음 복수의 거점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이후의 방침을 결정하는 편이 나았다.
따라서 나는 여남은 명의 감시를 남겨두고 복귀하기로 했다.
올 때는 괜한 길을 굽이굽이 돌아왔던 거리가, 복귀할 땐 직선으로 달리니 금방이었다. 순라지대 현장지휘소에 도착한 나는 경독들이 일을 제법 잘해주었음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의자에 앉아있던 가오슈센은 아까보다 훨씬 밝아진 표정으로 나를 반겼다.
“기다리고 있었소! 어떻게, 몸소 다녀오신 성과가 좀 있으셨소이까?”
“물론입니다.”
“오! 그 악랄한 돌격대의 거점을 알아냈단 말이오?”
이 인간은 내가 쫓은 트럭들의 존재를 모른다. 나는 과잉친절을 베푸는 대신 애매한 긍정을 돌려주었다.
“비슷합니다. 이곳 상황은 어떻습니까?”
내 물음에 가오슈센이 손을 내젓는다.
“말도 마시오. 가뜩이나 가용 병력이 줄었는데 도시 여기저기서 동시다발적으로 소요가 일어나는 바람에 아주 정신이 없소이다. 잠깐의 지휘공백도 용납되지 않는 상황이라 지휘중심을 공안국 본청으로 옮기지도 못하고 있지 않겠소?”
말은 이렇게 하지만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한다.
“주도권 장악은 성공적이었던 모양이군요.”
“이를 말이겠소? 눈엣가시였던 다른 국위(局委) 부서기 및 상임위원들이 죄 죽거나 다치거나 책임을 물어 면직처분을 당했다오. 명목상으론 부시장이 여전히 공안국장을 달고 있긴 하지만, 정치부와 감찰처가 내 손에 떨어졌으니 더 말할 것도 없지! 여기서 공적 몇 개만 더 올리면 지금의 우세를 완전히 굳힐 수 있을 거요!”
“그거 잘 됐군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부서기.”
“무얼. 이 정도는 내게 아무것도 아니지!”
난 귀족의 기세등등한 품새를 나쁘게 보지 않았다. 아무리 상황이 좋았다고 하나, 최선의 결과를 뽑아낸 건 역시 이 인간의 정치질 덕분이라 봐야 하니.
시 공안국의 정치부(政治部)는 순라경찰지대와 더불어 부서기급이 수장인 유이한 부서다. 인민해방군에 비유하면 정치장교들을 통솔하는 자리. 순라지대의 책임자가 경찰실무의 정점이라면 정치부의 책임자는 감찰실무의 정점이었다. 양자가 균형을 이루어 서로를 견제하도록 만들어놓은 구조인 것이다.
즉 가오슈센이 순라지대와 정치부의 우두머리를 겸하게 된 건 대단히 이례적인, 비상조치에 가까운 인사(人事)였다. 단순히 직함만 얻었으면 모르겠으되, 정치부의 칼 감찰처까지 거머쥐었노라 했으니 가오슈센 앞에선 시 공안국장도 허수아비나 다름없게 되었다.
물론 부시장의 힘이 공안국에만 있는 건 아니므로 지금의 가오슈센이라도 어느 정도 양보를 하긴 해야 할 것이다.
이로써 나와 내 애들의 위장신분은 한층 더 안정적인 것이 되었다. 그간 쭉 편의경찰(사복경찰) 노릇을 해오긴 했지만, 실제 편의경찰로 활동할 권한은 순라지대와는 별개인 편의정사지대(便衣侦查支队)에게만 있었으니까.
가오슈센이 상체를 기울이며 묻는다.
“아무튼, 적의 근거지가 어디쯤인 것 같소? 알아낸 거와 비슷하다 하셨으니 최소한 의심스러운 장소는 찾으셨을 게 아니오?”
“아직 단정하기는 이릅니다. 확보한 단서를 토대로 더 조사를 해보면 확실해지겠지요. 그래서 말인데, 시민 개개인의 통신 내역을 검열하는 부서가 과기통신처입니까, 아니면 망락경찰지대(사이버 경찰)입니까?”
“경우에 따라 다르긴 하오만, 대체로 과기통신처 쪽에서 담당하는 걸로 아오.”
“그럼 가급적 금일 내로 그쪽 부처 실무진에 대한 통제력을 확실히 다져주십시오. 그들에게 맡겨야 할 일감이 있습니다.”
“조회 내역이 다른 데로 새면 곤란한 일감이겠구려?”
“그렇습니다. 빠를수록 좋습니다.”
“알겠소. 다시 한 번 내 능력을 보여드리도록 하지.”
이때 가오슈센의 전화기에서 착신을 알리는 벨소리가 울려 퍼졌다. 잠시 실례, 하고 양해를 구한 공산귀족은 조금 떨어진 자리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 부하들이 실무로 바쁠 때 본인은 다른 귀족들과의 통화로 바쁜 것이었다. 각자가 제 역할에 충실한 현장이라 하겠다.
이 틈에 상황판을 보며 아까는 없었던 정보들을 흡수하고 있는데, 경독 중 하나인 후샨량이 다가와 정중한 태도로 말을 붙인다.
“동사장님.”
“말씀하시오.”
“실례지만 이 일대의 마약 유통에 관해 아시는 바가 있으십니까?”
“……내 회사는 마약을 취급하지 않는데. 그 질문은 왜 하는 거요?”
후샨량은 내 안색을 한 번 살피고서 말을 이어갔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흑해자당이 쓰는 마약의 출처가 여태까지도 오리무중이어서, 혹시나 하고 여쭤봤습니다.”
“삼합회에서 나온 물건은 아니오?”
“예. 후롱방 사건 이후 공안국 산하 전 지대가 눈에 불을 밝히고 삼합회를 때려잡았지만…… 대량의 마약을 체계적으로 공급했다는 증거는 찾지 못한 것으로 압니다. 적어도 저희가 알기로는 그렇습니다.”
저희가 알기로 그렇다, 라 함은 다른 부서들이 정보를 찾아놓고도 공유해주지 않았을 공산이 크다는 뜻이었다. 농민공 포병대의 포화가 부서별 실적 경쟁에 종지부를 찍은 게 고작 두어 시간 전이니, 서로 다른 부서들이 제각각 축적한 자료들을 취합하는 데만 최소 한나절은 필요할 것이었다. 마지막까지 부질없는 저항을 하는 중간 간부들이 있다면 이삼 일은 더 걸릴 터.
나는 무심하게 물었다.
“무슨 약을 썼는지는 아시고?”
“혈액분석 결과도 아직 통보받기 전입니다.”
“십중팔구 빙두일 거요.”
눈으로 보아 아는 입장에서 추측처럼 꾸며 하는 말. 경독이 의문을 표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그게 가장 적합하니까.”
빙두란 메스암페타민을 말한다. 지아지벵빙안(甲基苯丙胺)이라는 정식 명칭이 따로 있으나, 대부분 얼음조각처럼 생긴 염산염 혼합 결정 형태로 유통되기 때문에 「얼음 독(冰毒/빙두)」이라는 별명이 보다 흔하게 사용되었다.
후샨량이 조금 곤란해 했다.
“저는 펜타니(芬太尼/펜타닐)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습니다. 어쩌다 수 공근(公斤/킬로그램)의 물량을 구했다고 치면 한동안은 추가로 조달할 필요도 없고, 운반하기도 쉽고, 은닉하기는 더더욱 쉬우니까요. 보급의 용이성에서 빙두를 압도적으로 능가합니다. 심지어 주요 생산지와의 거리마저 가깝습니다.”
“맞는 말이오.”
펜타닐. 엘 후에고가 그렇게 욕을 퍼부었던 「차이나 화이트」. 단 1그램만 있어도 1천 명의 병단을 광전사로 바꿔놓을 수 있는 마약성 진통제다. 이 펜타닐의 약효는 약을 만지던 손을 무심결에 핥기만 해도 자칫 죽음에 이를 수 있을 만큼 강력했다.
전투약물로 쓰기엔 그 강력함이 문제가 된다.
어떻게 말해야 자연스러울까 숙고한 나는 속으로 정리한 근거를 풀어놓았다.
“그러나 생각해보시오. 반역분자들의 절대다수는 교육 수준이 떨어지는 흑해자와 농민공들이지. 투약 통제를 담당할 중간간부들 또한 예외는 아닐 테고. 그런 집단이 매번 1호극(毫克/밀리그램) 안팎의 투여량을 정확히 준수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거요?”
“아.”
“그들의 입장에서 펜타닐은 지나치게 강력한 약물이오. 투약 통제의 까다로움을 감안하면 보급의 용이성이 적잖이 상쇄되지. 게다가 정량 투여를 준수한들, 투약자를 망가뜨리는 속도가 너무나 빠르오. 폭발적인 전투력을 발휘하게 해주면 뭐한단 말이오? 그 전투력을 유지 가능한 기간이 길게 잡아봐야 한 달에 불과한데.”
이 한 달이라는 기간은 요즘 빈발하는 교전들의 밀도와 각성 능력자들의 신진대사를 감안하여 추산한 것. 한 달 이후엔 누적되는 비전투손실과 기강 저하 때문에라도 조직이 무너지게 되어있다. 개개인의 전투력이라면 모를까 집단적인 전투력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뜻.
막말로, 머리가 맛이 가버린 놈들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
“거기까지는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난 후샨량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나라면 역시 빙두를 쓰겠소. 무식한 연놈들이 좀 과용해도 무방하고, 조직의 기율과 전투력을 1년 이상 유지할 수 있으며, 개개인의 전투능력을 끌어올리는 정도도 펜타닐을 능가하는 면이 있으니까. 경독도 알다시피 사고 가속은 오직 빙두에만 있는 효과지.”
메스암페타민을 복용한 자는 세상이 느리게 흘러가는 느낌을 받는다. 이는 단순한 착각이 아니어서, 복용자의 사고 능력은 평상시의 두 배에 가깝게 향상된다. 뿐만 아니라 공격성을 강화하고 극도의 집중력과 의욕까지 부여하므로, 부작용만 없다면 인류가 만들어낸 최고의 각성제라 하겠다.
이것이야말로 흑해자당이 공안과 정규군을 기세로 압도할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었다.
“덧붙여, 굶주린 인민들을 유혹하기에도 펜타닐보다는 빙두가 더 낫소. 빙두는 배고픔을 잊게 만들어주니까.”
딤섬 가게 주인의 팔뚝에서 보았던 주삿바늘 자국들의 정체도 이것이었다. 내가 그를 살려두었던들 아버지로서의 그는 2년 이내에 껍데기만 남게 되었을 터.
이렇듯 마약은 소모품들의 배신을 방지하는 훌륭한 목줄이었다.
이번엔 후샨량이 끄덕인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항구 쪽을 다시 조사해봐야겠군요.”
“그러기를 권하오. 항구감(港口监/PSC)에서 북한 선적 화물선의 임검(臨檢)을 맡았던 자들을 털어보면 뭔가 수확이 있지 않을까 싶소.”
내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북한이야말로 동북아 최대의 메스암페타민 생산국이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전량 수입해 쓰던 것이 시간이 흐르며 자체생산으로 전환된 경우.
예전 같으면 북한이 감히 중국에 마약을 팔 엄두를 내지 못했겠으나,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제3국이 브로커를 통해 의뢰를 넣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중국 공산당 놈들이 삼합회를 매개로 내게 무기를 주문했던 것처럼.
어차피 북한은 나라 자체가 막장 중의 막장이라, 중국 당국에 적발당하더라도 개인의 일탈로 몰아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그 개인에게 고사포를 갈기겠지.
대화가 일단락되었다고 생각했는데, 후샨량은 제 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미적거렸다. 나는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다른 용무가 있소?”
“음……. 동사장님만 괜찮으시다면, 조만간 저와 동료들이 동사장님께서 계시는 베크룩스 호로 찾아뵙고 싶습니다. 허락해주시겠습니까?”
이건 나와 지금보다 깊은 꽌시를 맺고 싶다는 뜻이다. 이제 보니 마약에 관한 자문을 구한 것도 반쯤은 말을 붙이기 위한 구실이었던 모양. 경독들과의 관계 강화는 가오슈센에게 조용히 채워둘 목줄로서 요긴할 수단이었으되, 나는 바로 승낙하는 대신 파견을 나가있는 부하의 체면을 세워주기로 했다.
“무슨 용무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박미주 부장과 한번 이야기해보시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향후 이쪽 방면의 인맥을 관리할 사람은 내가 아닌 미주다. 후샨량은 중국인답게 내 암시를 금방 알아들은 듯했다.
그가 비로소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려는 순간, 멀찍이 등을 돌린 채 여기저기 통화를 하던 가오슈센이 버럭 소리를 지른다.
“뭐라고?! 더러운 미 제국주의자 새끼들이 기어코!”
직후 그는 주변을 살피더니, 별일 아니라는 듯 여유롭게 웃어보이고는 아예 천막 밖으로 나가서 통화를 이어갔다. 나는 청각을 조율하여 그 내용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서 지금 돈이 하나도 없단 말이냐?”
「그렇다니까. 계좌가 전부 동결되었다는걸.」
“이 녀석아, 그래도 집에 숨겨놓은 현금이 있을 거 아니야.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백만 메이위안(美元/달러) 정도는 항상 현찰로 쥐고 있으라 했잖아.”
「그깟 백만 달러 가지고 얼마나 버틸 수 있겠어?」
“아껴서 쓰면 1년 정도는-”
「아, 진짜! 1년은 무슨 1년이야? 어디 가지도 못하고 뭐 사지도 못하고 그냥 먹고 자기만 하면서 1년을 살라고? 그게 말이 돼? 오늘만 해도 내가 친구들 사이에서 얼마나 창피를 당했는지 아빠가 알아? 크리스마스라고 쇼핑을 하는데 카드가 갑자기 먹통이 되니까, 와, 얼굴이 화끈거려서 아주 미치겠더라고. 이 카드 저 카드 내밀어서 다 안 되었을 때 친구들이 날 어떤 시선으로 쳐다봤는지 아빠가 직접 봤어야-」
“저기, 얘야……. 정말정말 미안하지만, 아빠가 지금 무척 바쁘거든? 이따가 다시 통화하면 안 될까?”
「바쁘다고? 아빠는 자식보다 일이 더 중요해? 어쩜 그렇게 사람이 언에듀케이티드 해? 그리고 지금이 몇 시인 줄 알아? 창문 밖이 깜깜해진 지 오래인데 아빠가 지금까지 일을 한다고? 도대체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나도 생각해서 이 시간에 전화한 거라고!」
“거기가 밤이면 여기는 낮이지 않으냐…….”
들어보니 북미 어딘가로 보내놓은 자식과 아버지의 대화였다. 내용으로 미루어 청나라 채권 상환을 위한 1차 현금화 조치가 실제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모양. 미국 대통령이 예고했던 시간은 24일 자정이었으나, 그 늦은 시간에 실제적인 조치들을 취할 수 있었을 리가 있나. 당장 오늘도 성탄절이라 중국 정부로선 설마 하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나는 자식에게 쩔쩔 매는 공산귀족의 꼴이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이 세상 대부분의 악은 평범한 자들의 실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