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100화 (100/561)

#15. 고독의 도가니 (11)

침착하게 내놓은 대량살상 계획은 듣는 이에게 계산된 두려움을 선물했다. 이렇게 차곡차곡 쌓아가는 이미지는 협상가의 자산. 공산귀족의 눈동자는 날 정면으로 보지 못하고 한참이나 허공을 헤매었다. 조금 뒤 이마가 반들거리게 된 그는 겨우 떠올린 구실로 내 제안에 반대했다.

“그건 안 될 일이오. 공장이 다 날아가 버리면 공장주들은 어쩌란 말이오?”

“그들이 당신의 편입니까?”

“……지금은 아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다 내게 성의를 표하던 자들이었소.”

“어려울 때 등을 돌린 친구들에게 그렇게 배려를 해줄 가치가 있겠습니까? 인덕이 넘치는 거야 좋은 일입니다만, 부서기님 당신의 아쉬움부터 돌보는 게 우선일 듯합니다.”

“그렇게……. 커흠.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소이다. 날 외면한 거야 괘씸한 노릇이지만, 그 연놈들에게도 꽌시라는 게 있단 말요.”

여기까지 말한 가오슈센은 자기 말에 자기가 설득 당하듯이 자신감을 얻었다.

“한두 다리만 건너면 나하고도 다 연결되는 인연들이지. 그 인연들을 봐서라도 공장들을 가급적 보전해주는 쪽이 맞소. 그리고 그래야 내가 마침내 정당한 대우를 받게 되었을 때 합당한 성의와 사죄들이 뒤따르지 않겠소? 동사장에게도 간접적인 이익이 될 테고.”

이 인간은 지금 자기가 무슨 소릴 하는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그놈의 성의를 주고받는 관행 때문에 이 사달이 난 것에 대해선 생각도 안 하는 모양이군.’

그 성의표시야말로 공장주들이 농민공들의 임금을 배짱 좋게 떼어먹을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100의 임금을 체불했어도 10의 뇌물만 먹이면 해결되니, 이윤을 추구하는 사업자 치고 어느 누가 욕심을 느끼지 않겠는가 말이다.

눈이 하나뿐인 자들의 세상에선 눈 두 개 달린 자가 비정상이다. 설령 양심을 지키고픈 자가 있다 한들, 인건비를 ‘절약’하지 못하면 가격경쟁력에서 뒤처져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망하기 싫은 자는 결국 대세를 따르게 되어있는 것이었다.

이 뒤로도 저가 원인제공자인 줄을 모르는 공산귀족은 끈질기게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논거라도 바꿔가며 애를 쓰면 그나마 들어줄 만하겠는데, 악어의 눈물에 불과한 거리낌만 가지고 계속하여 비슷한 소릴 반복해대니, 듣는 입장에선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었다.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처음부터 의도한 바였으나, 난 모르는 척 양보하듯 대안을 제시했다.

“폭발 규모를 조절하도록 하지요.”

“적게 죽이시겠다는 말씀이오?”

“다릅니다. 공포감을 이용하겠다는 것이죠. 화약 공장에서 화광이 치솟고 폭음이 울리기 시작하면, 거기 뭐가 쌓여있는지 아는 자들은 공황에 빠져 곧바로 달아나려 들 겁니다. 늦은 밤의 어둠 속에서 공황은 삽시간에 확산되겠지요. 사람이라는 동물은 남들이 달리기 시작하면 나도 일단 달리고 봐야 하는 동물이니 말입니다.”

“오…….”

“전기도 그때 끊어야 합니다. 그 결정권을 당신이 행사할 수 있다는 전제하의 이야기입니다만, 뭐, 당신의 경쟁자들은 이제 곧 박살이 날 테니까요. 이후의 주도권을 가져오기는 어렵지 않겠지요. 경쟁자들 입장에선 당신이라고 별수 있겠느냐 싶을 것이고.”

여기까지 들은 가오슈센이 안도하는 표정을 짓는 게 우습다. 신색이 한결 편안해진 그가 어느 때보다도 깊게 고개를 끄덕거린다.

“좋소. 훨씬 낫군. 공장의 피해도, 사상자의 숫자도 훨씬 더 줄어들겠어. 이만한 사태에 사람이 아예 안 죽을 수는 없겠지. 다만 일이 더 어려워진 게 아닌가 걱정스러울 따름이오. 폭발 규모를 조율한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듯한데.”

“당연히 어렵습니다. 작업시간이 길어지고, 그만큼 적에게 노출될 가능성도 높아질 테니……. 부서기께서 워낙 난처해하시기에 내가 그 어려움을 감수하려는 것일 따름입니다.”

“그렇구려. 내 동사장의 호의를 잊지 않으리다. 진심으로 드리는 약속이오.”

이로써 나와 공산귀족의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래도 혼란 통에 압사당하는 연놈들이 트럭 단위로 나올 테지만, 시체도 제대로 찾지 못하도록 모조리 폭사시키는 것에 비하면 실로 온건한 대안이 아니겠는가.

상황은 예상대로 흘러갔다.

가오슈센이 거짓으로 꾸며낸 항의와 분노, 그리고 휘하 병력의 전진배치 등에 속아 넘어간 다른 귀족들은, 민병을 움직여 순라경찰지대의 전면을 틀어막고는 사적으로 고용한 이능엽사병단들을 대신 돌출시켰다.

진압장비를 착용한 엽사들은 엉성한 대열을 이루어 공업단지를 향해 다가갔다. 개개인의 마력장이 반경 십 미터 이상은 되는 원시마법 능력자들이었다. 마력장의 크기에 비해 실속이 없는 자들이 적지 않았으나, 전반적으로는 과연 신경 써서 모았구나 싶은 정도였다.

이에 맞서 농민공들 또한 자기들 중의 이능보유자들을 앞세웠다. 그러나 양과 질 양면에서 턱없이 부족한 전력이었으며, 능력자들은 서로의 마력장을 감지함으로써 피아의 우열을 가늠하는 일이 가능했다. 공산귀족의 사병들은 자연히 맞붙기도 전부터 기세가 충천했다.

일촉즉발의 분위기 속에, 양측 대열 사이에 낀 감시탑의 꼭대기에서, 비장한 표정의 농민공들이 피처럼 붉은 글씨로 쓴 현수막을 펼쳐들었다.

「人民的政府不能压制人民! (인민의 정부는 인민을 억압할 수 없다!)」

「压制人民政府不是人民的政府! (인민을 억압하는 정부는 인민의 정부가 아니다!)」

물론 여기에 주목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철저한 단속 탓에 공안과 친정부 언론사의 것 외에는 카메라 하나 보이지 않는 현장이었다. 농민공들도 현장을 열심히 찍고는 있으나, 진압당하고 나면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 일대의 모든 상용통신은 실시간으로 검열당하는 중이었다.

귀족들의 엽사병단은 공단까지의 남은 간격을 성큼성큼 줄여갔다. 자신감이 넘치는 이러한 접근은 진압부대보다는 용역깡패를 연상케 하는 것이었다. 체계적인 훈련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숫자를 제외하면 개개인의 기량을 믿을 뿐인 전투원들의 집단.

힘의 격차가 압도적이면 큰 싸움이 벌어지기도 어렵다. 멀리 떨어진 다른 천막에서 손 놓고 구경 중인 공산귀족들은 저들끼리 여유로운 대화를 나누며 때때로 웃음을 보이기까지 했다. 이번에야말로 주동인물들을 구속하여 배후를 캐낼 수 있으리라 여기고들 있을 것이었다. 이는 작금의 정국에 전환점이 될지도 모를 큰 공적이다.

반대로 가오슈센은 주먹에 땀을 쥔 채, 곧 격돌이 벌어질 현장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혹시라도 엽사병단들의 사병대가 진압에 성공해버릴까 걱정스러운 눈치.

양측의 거리가 10미터까지 줄어들었을 때, 농민공들 사이에서 잡음 가득한 선율과 노랫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중국의 국가(國歌)인 의용군 행진곡이었다.

「일어나라, 노예가 되기를 거부하는 자들아!」

노래를 들은 가오슈센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허.”

형식적인 투항 및 해산 권고가 이루어진 직후, 거친 함성을 지르는 친정부 용역깡패들의 대열이 주리고 헐벗은 농민공들을 향해 쇄도했다. 무수한 진압봉과 죽창들이 부딪히며 따다다닥 울리는 소리들을 빚어낸다. 그 사이에 섞이는 고통스러운 합창은 죄다 비루먹은 노동자들의 절규들이었다. 이마가 빠개지고 쇄골이 부서지며 어깨가 내려앉는 데서 우러나오는 깊고 깊은 고통의 화음들.

농민공 능력자들의 부실한 전열은 순식간에 사방에서 무너져 내렸다. 짓밟히기를 면한 일부가 안쪽으로 궤주(潰走)하는 사이, 초인들로 구성된 이능엽사들은 더 나아가기보다는 사로잡은 농민공들을 두들겨 패며 연행하는 쪽을 택했다. 능력자 제압이 우선이라 판단한 것이다.

“충! 당! 애! 국! 충! 당! 애! 국!”

당에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라. 서전에서 승리를 거둔 엽사들이 기세가 올라 각 병단의 깃발을 흔들며 외치는 구호. 이들은 급할 게 전혀 없다는 듯, 공단 외곽에 대한 점유를 굳히는 한편 보기 거슬리는 감시탑들을 인력으로 철거하려 들었다. 쿠웅! 쿵! 탑의 골조를 번갈아 차거나 몸으로 들이받는 꼴이, 누구 차례에 무너뜨리나 내기라도 하는 품새다. 탑이 흔들릴 때마다 위에 있는 농민공들이 각자 기둥을 붙잡고서 울며 소리를 질러댔다.

“제발 살려주세요!”

기우는 탑 아래엔 성난 육식동물들이 들끓고 있으니, 떨어지는 자를 기다리는 운명은 뻔하다. 사람보다 먼저 떨어진 현수막은 갈가리 찢겨진 채 서늘한 북풍에 실려 날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가장 높은 탑이 크게 기울기 시작했다.

“넘어진다!”

탑에 대고 힘자랑을 하던 초인들이 분분히 흩어져 비우는 자리에, 기어코 콰르르 쓰러져버리는 감시탑. 초인 엽사들은 다시금 우르르 몰려들어 땅에 떨어진 먹잇감에게 몰매를 먹여주었다. 사로잡힌 농민공들은 앞서 잡힌 동료들처럼 피투성이가 되어 짐짝처럼 연행 당했다.

「중화민족이 가장 위험한 순간에 처했네. 억압당하는 한 사람마다 마지막 함성이 터져 나오리라!」

반복재생으로 틀어놓은 의용군 행진곡의 가사가 공허하기 짝이 없다. 공산당의 해석으로는 노랫말의 ‘노예가 되기를 거부하는 자들’이 농민과 노동자들을 뜻하기에, 지금 내가 보는 이 광경은 꽤나 희극적인 것이기도 했다. 내가 보는 이 광경이야말로 가짜 공산주의자들의 정체성 그 자체인 것이다.

“이러다가 그냥 끝나버리는 거 아니오?”

가오슈센이 온몸으로 불안을 발산하며 묻는 말. 공단의 전력 사용량을 확인하라고 보낸 경독 장타이롱이 답을 가지고 돌아오기 전이었으므로, 현 시점에서 노동자들이 폭탄을 준비했음을 확신할 객관적인 증거는 없는 셈이었다.

농민공들이 뭘 준비했는지 모르는 상태였다면 나도 이 인간처럼 손에 땀을 쥐고 전투를 지켜보았을 텐데. 난 부질없는 잡념을 떨치며 대꾸했다.

“조금 더 두고 보십시오. 후방의 폭도들이 아직까지도 무너지지 않았잖습니까. 훈련도 받지 않은 자들의 정연함은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다는 방증입니다.”

“젠장…….”

초조해진 공산귀족이 혼잣말처럼 제 부하의 게으름을 욕한다. 그러나 이는 게으름보다는 공산귀족이 지닌 영향력과 파벌의 문제일 터였다.

잠시 후 가오슈센의 표정은 다른 의미로 일그러지게 되었다.

“저, 저 반역도당 새끼들이?”

2차 공격을 가해 진압을 마무리 지으려는 이능엽사들에 대항하여, 농민공들이 캔버스 천으로 덮어 그들의 대열 사이에 숨겨두었던 무기는 드럼통을 눕혀 받침대를 달아놓은 형상이었다. 한쪽이 뚫린 드럼통 안엔 추진제 역할을 할 흑색화약과 더불어 금속 볼트와 너트, 볼베어링 따위를 채운 주머니가 장전된 상태였다.

이른바 비뢰포(飞雷炮)라 불리는 급조 화포다.

이 비뢰포는 공산당과 인민해방군의 항일투쟁을 상징하는 역사적인 물건이었다. 국민당과의 내전, 그리고 중국이 항미원조전쟁이라 부르는 한국전쟁에서도 유용하게 쓰였고. 즉 이 무기를 당에게 겨누는 행위는, 당의 역사에 자긍심을 지닌 당원에겐 모욕이나 마찬가지.

‘흑해자당의 바이크 돌격대는 항일대도를 쓰질 않나……. 이 도시에 온 이래 여러모로 재밌는 경험들을 하게 되는군.’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제껏 배경에 흐르던 의용군 행진곡이 뚝 끊어졌다. 격렬하게 동요하는 엽사병단의 초인들을 향하여, 분노에 찬 어느 농민공- 혹은 농민공은 아니지만 농민공의 편에 서기로 한 누군가의 준열한 선언이 공단의 모든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진다.

「꼼짝 말고 들으라, 너희 가짜 공산당(假共产党)의 주구들아!」

「마오 주석께서 세우신 우리 공화국은 농민과 노동자들의 지지로부터 건국의 당위성을 얻었다! 그러나 지금의 이 나라엔 더 이상 그러한 당위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악한 수정주의자들이 점령한 당은 최초의 순수성을 잃어버린 지 오래이며, 총칼로 무장한 자본가 집단으로 화하여 인민들을 약취하기에 여념이 없다!」

「오늘! 여기서! 너희가 행동으로써 그러한 사실을 다시 한 번 증명하였다! 너희는 당연한 권리를 지키려는 노동자들을 짓밟았고, 부당한 폭력으로 무고한 피가 흐르게 하였으며, 억울한 이들에게 슬픔을 넘어서는 가혹한 고통을 선사하였다!」

「이에 우리 단결한 노동자들의 강철대오는! 인민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사형을 언도한다! 이로써 공화국의 정의가 바로서기를! 오늘의 의거가 나라를 바로잡는 사필귀정의 주춧돌이 되기를! 농민과 노동자의 연대 만세! 만민의 국부 되신 마오 주석 만세! 중화인민공화국 만만세!」

움직이지 말라는 경고는 사형이란 단어가 나온 순간부터 무의미해졌다. 앞 다퉈 도망치기 시작하는 이능엽사들. 그러나 엽사들의 신체능력이 아무리 초인적이어도, 말 몇 마디 끝맺는 사이 급조 포병의 살상범위를 벗어날 순 없었다. 차라리 정면으로 달려드는 편이 살아남기에 더 유리했을 터.

「발사!」

마침내 백 문이 넘는 비뢰포가 불을 뿜었다. 콰콰콰쾅! 콰쾅! 콰콰쾅! 사격통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중구난방으로 이어지다 끊어지기를 거듭하는 포성들. 하지만 위력만큼은 확실했다. 직사로 쏘아진 자잘한 금속부품의 산탄세례가 음속을 밑도는 탄속으로 광범위한 영역을 휩쓸었다. 하나하나의 산탄은 운동에너지가 낮아 각성 능력자들의 두터운 방어구를 뚫기에 부족하였으되, 그 양이 워낙 압도적이다 보니 에너지의 총량은 초인들을 때려죽이고도 남는 수준이었다. 방어구의 빈틈으로 파고드는 쇠붙이도 많았다. 사람을 맞추지 못한 금속들은 콘크리트 바닥을 두다다다닥 긁어 무수한 불꽃이 튀도록 만들었다.

불과 연기와 죽음이 흘러넘치는 장관이다.

가오슈센이 두 손으로 이마를 부여잡으며 신음했다.

“맙소사…….”

나는 흥미롭게 결과를 관찰했다. 제3세계에선 현재까지도 종종 쓰이는 무기라 기본적인 지식은 있었지만, 실제로 눈앞에서 보기는 처음이었으므로.

‘칠공(七孔)에서 피를 흘리며 죽는다더니, 마냥 과장은 아니었군그래.’

칠공이란 눈, 코, 입, 귀에 뚫린 일곱 개의 구멍을 말한다. 이는 비뢰포의 원조인 중국 측의 기록이었다. 비뢰포 산탄사격에 맞은 적들은 몸에 상처가 없는 경우가 적지 않았으되, 그런 경우에도 몸의 일곱 구멍에서 피를 흘리며(七孔流血) 죽었다고. 즉 두들겨 맞은 충격에 몸 내부가 진탕이 되어, 원래 있던 구멍으로 핏물이 새어나오며 죽게 되는 것이다.

포격에 쓰러진 많은 엽사들이 비슷한 꼴로 피눈물을 흘리며 죽어가는 중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들을 구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흑색화약의 짙은 포연은 잘 쳐진 연막과도 같아, 그 너머의 풍경을 완전히 가려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뢰포의 재장전이 끝났는지 안 끝났는지조차 알기 어려울 지경으로.

지금 쓰러진 것은 인구가 천만이 넘는 광역권에서 실적과 명성으로 선발했을 이능보유자들이다.

이로써 이 지역의 사업 환경은 큰 폭으로 개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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