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98화 (98/561)

#15. 고독의 도가니 (9)

해묵은 한(恨)이 들끓는 거리는 성탄절에도 어김없이 가난한 자들의 피가 흐를 징조를 보이고 있었다. 의미가 남다른 날이라고 하여 주린 자들의 배고픔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니까. 가오슈센의 급한 연락을 받은 나는 이른 아침부터 시가지 동쪽의 사냥터로 출동했다.

이번 사냥터는 농민공들이 점거한 공업단지였다. 오늘의 해가 떠오르기 전, 크고 작은 공장 다수를 기습적으로 점거한 시위대의 규모는 언뜻 보아도 만 단위를 거뜬히 넘기는 듯했다. 노동자들은 자기네 손에 익은 공구와 자재들을 이용하여 장벽과 같은 바리케이드를 쌓아올렸다. 심지어 중요한 길목엔 다층 구조의 감시탑까지 설치되고 있다.

내 입장에선 이익을 도모할 구석이 눈곱만큼도 없는 사냥터였으되, 내가 위로 밀어 올리려는 가오슈센은 치안을 관장하는 순라경찰지대의 책임자였다. 자칫하다간 기껏 만들어낸 영웅으로서의 명성에 엄청난 양의 피가 뿌려질 위기인 것이다.

나는 짜증을 담아 한숨을 내쉬었다.

쯧.

공안 관계자를 끄나풀로 삼은 시점에서 언제고 이런 일이 있으리라 예상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제국주의자들의 편에 서서 피지배자들과 싸워야 한다는 건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런던으로 가려는 여정에 불가피하게 밟아야 할 디딤돌이긴 해도.

지금은 언젠가 중국 공산당 그 자체를 표적으로 삼을 날이 오리란 사실을 위안으로 삼아야할 터.

“애들 상태는 어떠냐?”

내 물음에 진지하게 답하는 경태.

“솔직히 내키는 일감은 아니지만, 형님께서 시키면 하는 거죠. 저기 있는 모두가 꼭 억울하기만 한 사람들은 아니라는 걸 경험으로 알기도 하고.”

이렇게 나오는 잔혹한 냉정함은 내가 반복해서 정신무장을 시킨 결과일 것이었다.

‘아니, 차라리 세뇌라고 해야겠지.’

삶이 너무도 고단한데 가진 거라곤 인간관계밖에 없을 때, 사람은 그 인간관계에서 부당한 이득을 보고자하는 충동을 느끼기 쉽다.

약속 알기를 우습게 알고, 돈을 빌리고서 큰소리를 치며, 타인을 등쳐먹을 기회가 생기면 결코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는, 가능한 모든 부정을 저지르면서도 자기 인생이 힘들다는 이유만으로 죄책감마저 느끼지 않는 자들.

내 부하들 중엔 그런 부류에게 당해 죽을 고생을 겪은 녀석들이 많았다. 정기적으로 부하들을 모아 서로의 이야기를 듣도록 하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정신교육이 될 정도로.

한과 증오와 트라우마에 기초한 사상무장만큼 흔들리지 않는 세뇌도 드물다.

인간의 보편적 악성을 강조하는 정신교육의 끝에서, 나는 부하들에게 항상 같은 말을 들려준다.

「조직 밖에 있는 자들을 믿지 마라. 조직 내의 신뢰는 내가 보증한다. 믿음을 저버린 자에겐 나와 너희와 조직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복수가 따를 것이다. 변치 않는 믿음은 오직 피로써만 담보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대륙에서의 인간사냥 경험이 많은 녀석들은, 이 나라의 밑바닥에 내팽개쳐진 자들이 얼마나 흉험하고 이기적으로 변질되었는가를 몸으로 겪어봐서 알 터였다. 공산자본가들이 건설한 배금주의의 천국엔 위에도 아래에도 선한 집단이 없는 것이다. 다른 힘 없이 착하기만 한 사람들은 도태당하거나 잡아먹힌 지 오래.

누군가 투신자살을 하려고 하면, 우르르 몰려든 구경꾼들이 왜 빨리 뛰어내리지 않느냐며 야유를 보낼 만큼 망가져버린 사회다. 말싸움이라도 벌어졌다간 곧장 칼부터 들고 오는 게 바로 공산당이 망쳐놓은 중국 하류층의 평균인 것이다.

이 순간,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도 세뇌에 가까울 암시를 되뇌었다.

언더도그마는 없다.

저기 있는 것은 고독의 도가니다.

나를 이 자리에 호출한 가오슈센은 같은 현장에 출동한 다른 부처들과 기 싸움을 벌이느라 아직 얼굴을 비추지 못하고 있었다. 무슨 일로 그러는지는 모르지만 날 찾아오기까진 시간이 걸릴 테고, 상황이 급격히 악화될 기미는 보이지 않으니, 일단은 조금 여유를 가지고 지켜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저편의 공단에선 각성 능력자 노동자 하나가 공장 지붕을 연단 삼아 피를 토하듯 자신의 한을 쏟아내고 있었다.

「저는 쉬자이젠(狮寨镇) 사람 돤차오라 합니다! 이제부터 저와 제 동료들이 겪은 일들을 여러분께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공장의 방송용 스피커와 연결된 마이크는 연사의 외침을 수만에 달하는 노동자들에게 전하기 충분한 도구였다. 스스로를 돤차오라 밝힌 자는 시작부터 눈시울이 붉어졌다.

「저와 제 동료 27인은! 지난 9개월간 단 한 푼의 급료도 받지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이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시 노동감찰지부를 찾아갔습니다! 그랬더니 처음부터 고위 부처를 찾아오는 경우가 어디 있느냐며 화를 내고! 자기네 업무가 아니라며 구(区) 감찰지부를 찾아가라 했습니다!」

「그래서 구 감찰지부로 찾아갔더니! 이번에도 자기네 업무가 아니라며 민원국으로 가라 하더군요! 그런데 민원국 담당자는! 감찰지부로 가야 할 일을 왜 여기로 가져왔느냐며 짜증을 냈습니다! 갈 데가 없어진 우리는 시 정청 앞에 모여 억울함을 풀어 달라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엔 출동한 공안에게 몰매를 맞고 쫓겨났습니다!」

「공안 경관들은 우리를 반역분자라고 했습니다! 나라가 어려운데 자기 이익만 챙긴다고! 너희 같은 놈들 때문에 나라가 더욱 어려워지는 거라고! 공장주도 형편이 어려워져서 부득이하게 돈을 못 주는 것일 텐데, 다 같이 희생을 감수해야 할 때가 아니겠느냐고!」

「하지만 공장주는 잘 먹고 잘 삽니다! 그 인간은 후아첸바오마(华晨宝马/화천BMW) 차를 타고! 아내와 아들은 이치아우디를 탑니다! 우리 월급을 안 줄 때도 새로운 차를 샀습니다!」

「아프고 억울한 우리는 마지막으로 법원을 찾아갔습니다! 법정에 나온 공장주는! 밀린 돈을 공장에서 나오는 곰 인형으로 지불하겠다고 했습니다! 법관님은 그러라고 하면서 망치를 두드렸습니다! 심지어 가격을 도매가가 아닌 소매가로 계산했습니다! 법관님은 우리가 울부짖는 말은 하나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던 나는 이 대목에서 불쾌감을 잠시 잊고 실소를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예전엔 벽돌로 월급을 준 놈도 있지 않았던가?’

작년인지 재작년인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노동자 한 사람당 1만 장 꼴의 벽돌로 밀린 급여를 지불한 미친 새끼가 하나 있었다. 그때도 인민법원은 공장주의 편을 들어주었다.

돤차오의 외침이 이어진다.

「결국 우리는 가져갈 수도 없을 만큼 많은 곰 인형들을 받았습니다! 공장주는 우리에게 빨리 가져가지 않으면 보관비용을 받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걸 팔아보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반값으로도 잘 팔리지 않았습니다!」

「공장주는 창고 사용료를 내라며 우리를 고소했습니다! 법관님은 우리에게 돈을 지불하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공장주는 돈이 없으면 물건으로 달라고 했습니다! 공장주는 우리를 줬던 곰 인형들을 다시 가져가버렸습니다! 이번엔 값을 도매가로 계산했습니다!」

「공장주는 이제 우리에게 어떤 것도 줄 책임이 없다고 합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받은 게 없는데!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한단 말입니까!」

뒤로 갈수록 피를 토하는 듯한 절규였다. 그러나 내 입장에선 이렇다 할 감흥이 없었다. 비슷한 사례들을 너무도 많이 접하여, 절규하는 마디마디가 기시감으로 점철되어 있었으므로.

농민공들이 서로의 억울함을 공유하며 기세를 올려나가는 동안, 공단을 포위한 병력의 규모는 시시각각 늘어만 갔다. 제복을 보건대 단순히 공안 병력만이 아닌 무장 민병(民兵)들까지 끌어온 모양. 공안 전력을 여기에 집중시키면 도시의 다른 구획들이 무방비해지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중국의 민병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서구식 민병대와 많은 부분에서 상이한 집단이다. 인민해방군 및 공안과 더불어 국방법이 규정하는 3대 무장역량(武裝力量)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예비군과 민방위 사이의 어딘가에 해당할 국가 공인 준군사조직이라 하겠으나, 이마저도 정확한 설명은 되지 못한다. 실제로 여기저기 다양한 국가사업에 동원되는 경우가 많은 까닭. 당장 상반기의 코로나 바이러스 대유행 때도 대대적으로 동원되어 방역작전을 수행했던 게 바로 이 민병들이었다.

따라서 서구식 민병대를 모방하여 사병대를 꾸리려는 공산귀족들은 기존의 민병과 구분되는 명칭을 사용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한 능력자 집단들은 민병 대열 사이사이에서 각기 다른 깃발들을 높이 들어 자신들의 존재를 어필하는 중이었다.

뒤늦게 나를 찾아온 가오슈센은 그러한 깃발들을 보며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이번 사태를 사영(私营) 이능엽사병단 합법화의 계기로 삼아보겠다는 심산들이지. 민간 엽사들이 경찰의 통제에 따라 소요를 진압한 전례를 만들어 합법화의 명분으로 삼겠다는 거요.”

사영(私营)은 국영(国营)과 관영(官營)의 반대말, 즉 사사로이 운영함을 뜻한다. 이능은 원시마법 능력이고, 엽사는 사냥꾼이며, 병단은 문자 그대로의 병단이었다.

“그게 뭔가 문제가 있습니까?”

어차피 정해진 결과를 앞당겼을 뿐, 상급부서와의 사전 교감이 없었을 리 만무하다는 생각으로 던진 질문에, 가오슈센은 주먹을 흔들며 분개했다.

“선수를 빼앗겼다는 게 문제요! 나라고 내 병단 꾸릴 욕심이 없겠소이까? 그동안 사정이 따라주지 않았을 뿐, 형편이 나아지고부터는 사나운 이능생물(异能生物) 좀 잡아보았다 하는 엽사들을 알아보고 있었다오. 경쟁자들이 먼저 싹 쓸어가 놔서 괜찮은 엽사 건지기가 어려워졌지만, 법이 세워지기 전까진 아직 시간이 남아있으니 괜찮다고 믿었지…….”

아아, 알겠다. 시당위원회에서 여전히 따돌림 당하는 중인 이 인간에겐 상급부서와 미리 진행된 교감이 전달되지 않았던 거다.

“첫 무대를 빼앗겨서 화가 나신 거로군요.”

내 말에 가오슈센의 주름이 더 일그러진다.

“후롱방을 칠 때 동사장께서도 말씀하셨듯이 어떤 일에서든 최초는 큰 명성의 단초가 되는 법이오. 저들의 능력으로는 주어진 기회를 살리지 못할 게 뻔하지만, 내 경쟁자들은 내게서 기회를 빼앗은 데 만족할 거요. 왜냐면 그 치졸한 자들은 동사장과 동사장의 부하들이 나 가오슈센의 사병이나 마찬가지라 여기고들 있을 테니까. 필시 위기감을 느꼈을 테지.”

공산귀족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날 바라보며 선동적인 어조로 역설했다.

“그러므로 이는 우리의 사업에 있어서 크나큰 손해라고 할 수 있소이다! 저들의 담합과 수작질에 또다시 손해를 보는 일이 없으려면 저들을 능가할 병비(兵備)를 갖추는 수밖에 없지! 하여 내 동사장께 청하니, 장차 우리가 경영할 엽사병단이 다른 잡다한 병단들을 압도할 실력을 갖추도록 조련해주시오! 엽사를 모으고 훈련시키는 데 드는 비용은 전부 내가 부담하리다!”

하.

이놈이 저 아쉬운 처지를 무슨 의도로 이렇게 늘어놓나 했더니, 결국 내가 말실수 한 번 하기를 바란 것이었다. 여기서 흐름을 타 별 생각 없이 알겠다고 해버리면, 나중에 실수를 깨닫더라도 말을 바꾸게 되어 미안하다는 소리부터 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체면을 목숨처럼 여기는 중국인들에게 잘 먹힐 화법이다. 일단 내뱉은 말을 뒤집는 건 체면이 상하는 일이니까.

어디서 이런 얄팍한 수작질을……. 나는 같잖은 마음을 담아 이렇게 반문했다.

“컨설팅(咨询) 비용은 얼마까지 염두에 두고 오셨습니까?”

“응?”

가오슈센이 짐짓 당황하는 표정을 꾸며낸다.

“그게 무슨 말씀이오? 함께 좋자고 추진하는 일에 따로 값을 쳐서 받으시겠다니? 저들의 영향을 감안하면 동사장의 활동에도 지장이 생길 텐데? 아무리 정예한 인력이 있다 한들 머릿수가 부족하면 중과부적에 처하는 경우가 있지 않겠소?”

“그야 수가 모자라면 아쉬울 상황이 되었습니다만, 당신과 나 둘 중에 누가 더 많은 이익을 보는가가 문제지요. 단적으로 말해 그 병단이 최종적으로 누구의 소유가 되겠습니까? 내가 이 나라를 떠날 때 병단의 절반을 가지고 갈 수 있다면 돈을 안 받아도 좋겠지요.”

“…….”

“‘우리의 병단’이 아니라 ‘당신의 병단’입니다, 부서기. 나는 사업가이고, 당신이 열을 얻으면 나는 하나를 건질 사안이니 대가를 받지 않을 수 없겠군요. 그러니 먼저 제시해보십시오. 당신이 보기에 나와 내 애들의 역량엔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겠습니까? 그 역량을 전수받는 데엔 얼마를 지불해야 합당하겠습니까?”

나는 이렇게 물어봄으로써 컨설팅 비용을 내 체면과 한 묶음으로 만들어버렸다. 가오슈센은 똥 씹은 표정을 감추려 애쓴다.

“내 어찌 동사장의 가치를 셈하겠소. 부디 우리의 건설적 관계를 고려하여 너그러운 제안을 주시기를 바라오.”

한 발 물러서는 공산귀족에게, 나는 즉흥적으로 떠올린 대가를 읊었다.

“돈은 됐고, 내 회사가 별도의 병단을 설립할 수 있게 도와주시면 그걸로 대가를 받은 셈 치겠습니다. 어떻습니까?”

“병단을?”

“예. 허가를 얻는 것부터 시작해서 감독관 인선과 그 이후의 활동영역 보장까지 힘을 써주신다면 고맙겠습니다.”

이게 아주 값싼 요구라 여겼는지, 가오슈센이 반색하며 얼른 끄덕였다.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얼마든지 도와드리리다!”

“좋습니다.”

끄덕인 내가 시선을 돌렸다.

“그럼 이제 우리가 직면한 진짜 문제에 대처할 차례로군요.”

겉보기에 공안 진영과 농민공 노동자들의 진영은 그저 지루한 대치상태를 이어가는 모양새였으나, 나는 그 너머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볼 수 있었다.

농민공들이 점령한 공단 내엔 폭죽을 만드는 공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폭죽에는 흑색화약이 들어간다. 이 화약은 단점이 많아 현대적인 자동화기에 사용하기 어렵지만, 들어가는 재료의 배합비율을 조금만 바꿔줘도 각종 폭발성 중화기의 장약이나 추진제로 써먹을 수 있었다. 당장 알 까심부터가 흑색 화약으로 대전차로켓(RPG-7)을 찍어내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마당이다.

연중 폭죽 수요가 가장 많아지는 대목, 춘절까지 채 두 달도 남지 않은 시점에서, 공장 안엔 막대한 양의 재료들이 비축되어 있었다.

지난날 폭죽 생산라인의 소모성 부품에 불과했던 노동자들은 이제 같은 생산라인에서 압제자들을 죽이기 위한 폭약을 찍어내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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