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고독의 도가니 (8)
일몰 이후, 나는 부하들 스스로 번(番)을 정하여 술을 마실 수 있도록 조치했다. 성탄전야를 맞아 기분을 내게 해준다고는 해도 기본적으로 전지(戰地)에서 누리는 휴식인 것이다.
이에 가장 기뻐한 사람은 당연히 경태였고, 가장 무덤덤한 사람은 수연이었으며, 나머지 부하들의 반응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경태 쪽에 보다 가까웠다. 나는 그런 부하들을 이해했다. 험하고 거친 일을 하는 자들이 술을 멀리하기란 어려운 노릇. 굳이 말하자면 정신적인 마취제에 가깝겠다. 과하게 의존하여 몸과 정신을 축내지만 않으면 되었다.
나 역시 어울리지 않을 순 없었으므로 내 앞에 폭이 좁은 와인 잔 하나를 두었다. 잔 안에 담긴 건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을 무알콜 레드 와인이었다. 간간이 잔을 홀짝이던 나는 같은 테이블에 앉은 박미주 부장에게 말을 걸었다.
“너는 다른 걸 마시지 그러냐. 이건 어딘가 풍미가 부족한 느낌이 든다만.”
내 말에 미주가 조금 당황한다.
“괜찮습니다. 전에 취했을 때 형님께 실수를 한 듯해서…….”
“실수는 무슨. 못할 소리를 한 것도 아니고, 그저 맺힌 속을 꺼내놓았을 뿐인데.”
일전 마오타이에 취했던 미주는 죽은 갑수에 대한 마음을 털어놓았었다. 갑수는 둘 사이의 나이차와 자기에게 딸린 자식들 등의 이유를 들어 번번이 고백을 거절했지만, 그때마다 식은땀을 흘리는 그 순한 사내를 아무래도 포기할 수가 없었노라고.
고로 그의 죽음은 여러 해를 끌어온 연정의 날벼락 같은 끝이었다.
내가 거둔 부하들은 기본적으로 인생의 밑바닥을 한 번씩 찍고 올라온 녀석들이다 보니, 종종 의외의 구석에서 취약한 면모를 보여줄 때가 있었다. 이럴 때 관리를 번거롭게 여김은 우두머리로서의 직무태만이다.
나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오히려 나는 좋게 생각한다. 네가 그런 내밀한 사연들을 나에게 털어놓았다는 건, 그만큼 보스로서의 나를 믿고 의지한다는 뜻이니까.”
임무를 내어준 날 원망하지 않는 게 어디인가. 물론 그것은 불합리한 원망이겠으나, 사람의 마음은 기본적으로 합리와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랬으면 나는 유능한 부하를 둘이나 잃어버리는 꼴에 처했을 터였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한 미주가 목마른 사람처럼 와인을 마셨다. 차라리 이렇게 민망해하기라도 하는 편이 나았다. 나머지 부하들과는 속한 부서가 다른 데다, 고정 연락책이라 평소에 마주칠 일도 드물고, 갑수의 죽음에서 비롯된 상실감을 떨쳐내지 못하여 홀로 멀거니 앉아만 있었던 녀석이었기에.
나는 미주가 비운 잔을 다시 채워주었다.
“누가 보면 포도주스라도 마시는 줄 알겠구나.”
“……무알콜이면 주스라고 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 말 경태가 들으면 화낼 거다.”
내 담담한 한마디에 미주는 짧고 작은 웃음을 머금었다.
주스와 무알콜 와인 사이엔 발효의 차이가 있다. 후자는 발효를 다 시켜놓고서 별도의 공정으로 알코올만 제거했을 따름. 알코올이 머금는 향이 크기에 일반 와인만큼의 풍미를 지닐 순 없으나, 그래도 평범한 주스 따위와 비교하기 미안할 기호품이었다.
나는 화제를 테이블 위의 사과 바구니로 바꾸었다.
“그래, 이걸 가오슈센의 비서가 주더라고? 가오슈센 본인이 아니라?”
“예. 부서기가 아닌 본인이 선물하는 거라고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형님께 말씀을 잘 전해달라는 부탁과 함께요.”
중국에선 성탄전야에 사과를 선물하는 풍속이 있다. 성탄전야를 일컫는 평안한 밤(平安夜)의 첫 발음과 사과(苹果)의 첫 발음이 같다며 길한 선물로 여기는 까닭이다. 이 나라에서 흔히 보이는 말장난 같은 미신이었다.
금테가 둘러진 바구니 속엔 짧은 글과 전화번호가 적힌 카드 하나가 함께 들어있었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사모하고 있었다느니 어쩌니 하는 가식적인 글은 눈여겨볼 가치조차 없는 것이었다. 나는 카드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물었다.
“글씨 하나는 잘 쓰는군. 여기 온 첫날 내가 됐다고 치웠던 여자가 맞나?”
“맞습니다.”
바로 끄덕이는 미주. 난 반쯤 의식적인 넌더리를 내며 눈살을 찌푸렸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 하지만, 이 동네의 풍습은 나하곤 영 맞질 않아.”
“가오슈센 나름대로는 최대의 호의를 표한 것입니다. 형님께서 치르신 첫 번째 교전으로부터 그만큼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방증이겠지요.”
“누가 그걸 모를까. 허나 호의도 호의 나름이지. 좀 다른 예시이긴 해도, 고양이가 호의로써 쥐를 물어왔다고 그걸 정말 씹어 먹는 사람은 없지 않으냐. 미치광이가 아닌 이상에야.”
미주가 다시 한 번 작게 웃는다.
“어쨌든.”
난 카드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서 테이블에 딱딱 두드리며 말했다.
“이걸 굳이 내 앞까지 가져왔다는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일 텐데……. 그게 뭐지?”
“제가 관찰한 바, 그 비서가 잠재적 불안요소이기 때문입니다.”
“불안요소?”
“예.”
“어떤?”
“지속적으로 도청을 해본 결과, 만일의 경우에 갈아탈 말을 찾고 싶은 모양입니다. 가오슈센이 실각하더라도 자신의 생활수준과 안전을 보장해주고, 유사시엔 국외로의 탈출까지 도와줄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요. 그 첫 번째 후보가 바로 형님이신 겁니다. 그녀 입장에선 가오슈센에게 벌써 허락을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대이니 위험부담이 적지요.”
“내가 싫다 하면 다음으로 누굴 찾아갈지 모른다는 거로군. 어쩌면 그게 가오슈센의 경쟁자 가운데 하나가 될 수도 있겠고.”
“그렇습니다.”
“그럼 죽여야지.”
결론을 너무 빠르게 내렸는지 미주가 입을 다물었다.
“도청했다는 거, 지금 하나 들어볼 수 있나?”
내 요구에 끄덕인 미주가 제 핸드폰의 암호화된 폴더를 열었다. 그로부터 재생되는 녹음 파일엔 나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새까만 내용이 담겨있었다.
이 나라의 공산귀족들과 당에 부역하는 대부호들은 자신의 첩들이 모두 순종적이고 수동적인 트로피인 줄로 알지만, 착각이다.
야심과 재능을 겸비한 첩들은 권력 지닌 자들을 자기네가 타고 다니는 말 정도로 여겼다. 공산당의 간부들이란 의외로 쉬이 죽어나가는 파리 목숨들. 그 위험한 권력싸움을 직접 치르지 않으면서 권력의 열매만을 빼먹을 길이 있으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이란 말인가. 말이 늙거나 다치거나 죽을 때마다 재깍재깍 갈아타 주기만 하면, 타고난 아름다움이 쇠하기 전에 적잖은 부를 거머쥐고 은퇴할 수 있다.
말하자면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
그래서 이들은 자신이 접대 내지 상납용 도구로 쓰이는 것에도 거부감이 없었다. 그럴 때마다 새로운 연줄 겸 예비마가 생기는 셈이기 때문에. 다만 같은 말에 올라탄 경쟁자들로부터 고삐를 빼앗아 지켜내는 일이 중요하다 하겠다. 거짓된 공산주의자들의 대륙은 그늘진 구석구석이 죄다 고독이 만들어지는 도가니인 것이었다.
머뭇거리던 미주가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나중을 감안하여 검토는 해보시는 편이 좋지 않을까 합니다.”
“나중이라면, 계획대로 가오슈센이 더 높아졌을 때를 대비해서?”
“네. 안전장치는 많을수록 좋은 것이니, 가까이에서 동태를 살피기엔 침대를 같이 쓰는 여자만큼 적합한 인물이 드물지 않나 하고…….”
“흠.”
“추가로 그녀 자신의 꽌시에도 가치가 있습니다. 침대 위에서의 송사로 여기저기 자리를 만들어준 친인척과 지인의 수만 마흔이 넘더군요. 만에 하나 가오슈센이 숙청당하더라도 크게 상하진 않을 인맥들……입니다. 현지협력자 집단으로서 소소한 쓸모가 있겠지요.”
미주가 자꾸만 말을 흐리며 내 눈치를 보는 것은, 내가 느끼는 거부감을 아는 까닭이다. 온갖 정보의 색채를 띠고 꿈틀대는 살과 내장의 덩어리. 거기에 대고 X질을 해대는 일은 내게 때로 자괴감마저 선사하는 것이었다.
어려운 제언을 꺼낸 부하의 체면을 보아 다시 한 번 곰곰이 재고해보았으나, 역시 영 아니다 싶다.
타고난 아름다움을 무기삼아 타인의 심리를 밀고 당기며 이익을 쌓아온 사업가들은, 자신의 무기가 상대에게 먹히는가 먹히지 아니하는가를 민감하게 알아차리기 마련. 나는 그것이 자존심의 문제이기 이전에 생존본능의 발현임을 안다. 반평생 절대적으로 의지해왔던 무기가 무력화되는 순간, 무장이 해제된 자의 반응이란 꼬리가 잘린 전갈, 독니가 빠진 독사와 같을 수밖에 없다. 경각심 때문에라도 우호적인 거래가 어려워지는 상대인 것.
난 이런 쪽으로는 연기에 능한 인간이 못 되었다. 평범한 상대라면 속여 넘길 자신이 있으나, 몸 하나로 꽌시의 소왕국을 건설했을 정도의 능력자라면 내 연기가 간파당할 가능성을 무시하기 어렵다.
“역시 죽이는 편이 낫겠다. 안전장치는 따로 염두에 둔 후보가 있으니.”
“그렇습니까…….”
“네가 죽여라.”
다시 한 번 침묵하는 미주.
“네가 내게 더 무거운 빚을 지겠다 했으니 나도 너를 더 중하게 써야겠다. 그러니 네 손으로 죽여라. 계획을 세워서 뒤탈이 없도록 치워버려.”
인맥관리와 접대가 업무의 전부인 영업직이라곤 하나, 미주는 조직의 간부로서 교육을 받은 인재였다. 그리고 내 조직의 간부 보수교육엔 비정기적 살인 실습이 포함된다. 죽여야 할 연놈 하나를 놓고 총을 든 간부 여럿이 동시에 방아쇠를 당기는 것이다. 이는 살인에 대한 본능적인 저항감을 낮추기 위한 훈련이었다.
제물은 대개 한풀이의 대상이었다. 죽어 마땅한 이유가 있는 연놈들인 것. 그렇기에 사람을 죽여본 적 없는 간부들일지라도 스스로가 겪었던 수모와 설움을 상기하며 심리적 저항을 쉽게 극복하는 편이었다. 내 부하들이 공유하는 동질감과 연대의식이 이를 통해 한층 더 강렬해짐은 물론이다.
그렇게 교육의 회차가 쌓이고 나면 이제 도구를 총에서 둔기로, 둔기에서 칼로 바꾸어준다. 이것이 고위직 승진을 위한 자격요건의 하나이기도 하여, 중간관리직 이상의 간부들은 대부분 날붙이로 사람을 찔러 본 경험을 보유하고 있다.
‘죽은 갑수는 예외였지만.’
갑수 녀석은 체계가 잡히기 전에 부장을 단 경우라 총도 몇 번 써본 적이 없었다. 그나마 총을 쓸 적에도 매번 힘들어하며 울먹거리던 기억이 난다. 즉 녀석을 만년 부장으로 썩게 만들었던 능력 부족은 살인능력의 부족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그에 비해 미주는 훨씬 나중에 들어온 기수로서 받을 교육 다 받고 갖출 자격 다 갖춘 경우였다. 사수의 부족함을 부사수가 채우게끔 계산한 수연 녀석의 인사(人事) 처리다.
“…….”
생각에 잠긴 미주의 심장이 평소보다 빠르게 뛰고 있다. 훈련과 실전은 다른 법이니까. 미주는 눈을 잠시 감았다 뜨고서 명료하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기대하고 있으마. 지원이 필요하거든 경태나 수연이에게 부탁하고.”
“예.”
시간을 보니 슬슬 일곱 시가 다되어간다. 일몰이 여섯 시 이전이었기에 이 자리도 그만큼 일찍 시작한 것이다. 나는 와인을 홀짝이며 핸드폰으로 원격 감시 화면을 불러왔다. 위구르족 무슬림들을 수용한 용핑호의 내부 폐쇄회로와 연결되는 화면이었다.
알라의 신도들은 무장한 감시자들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하루의 마지막 기도를 준비하는 중이었다. 나는 그들 가운데 하나를 유심히 관찰했다.
구출한 위구르인들을 이 베크룩스호의 화물갑판에 임시로 수용했을 때, 그들 모두는 자신들을 수용한 공간에 시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그리고 그들 중 용기를 낸 한 사람이 정해진 시각 창문에 드는 빛으로 방향을 어림잡아 메카를 향한 기도(살라트)를 시작했을 때엔, 감시자들이 아무런 폭력도 행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당황했다.
지금 내가 지켜보는 자가 바로 그 첫 기도를 올렸던 자다.
「أعوذ بالله من الشيطان الرجيم
(저는 주 알라의 품에서 저주 받은 사탄으로부터 피난처를 구하나이다.)」
의례적인 첫마디 후에 본격적인 기도에 들어가는 사내.
「بسم الله الرحمن الرحيم
(가장 은혜로우시고 가장 자비로우신 주 알라의 이름으로)」
「الْحَمْدُ لِلَّهِ رَبِّ الْعَالَمِينَ
(만물의 주이신 하나님께 모든 찬미를 바칩니다…….)」
개경장(알 파티하)을 읊는 이 사내와 더불어 내 이목을 끄는 몇몇 인물들이 있었다. 위구르인들의 마음을 어찌 사유화하면 좋을지에 대한 영감을 주는 인물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