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고독의 도가니 (6)
함락된 후롱방 본채 및 경매장과 투견장 인근의 가옥들은 방파 행동대원들의 숙소 겸 두 발로 걷는 상품들을 보관하기 위한 창고로써 활용되고 있었다. 이 창고들까지 다 따고 다닌 내가 확보한 상품들 가운데 다수를 인수하겠다고 나서자, 현장지휘소의 가오슈센은 미심쩍어하는 기색으로 이렇게 물어왔다.
“설마하니 자선사업을 하실 요량은 아니실 테고……. 어디다 팔아넘기시려는 거요?”
난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미리 만들어둔 구실을 읊었다.
“돈 때문이 아닙니다.”
“하면?”
“저 웨이우얼(위구르) 피랍자들을 회유하여 정보원으로 활용해볼까 합니다. 흑해자당의 무기 공급 루트와 관련하여 이슬람교도들의 동태를 면밀히 살펴야 한다고 했던 걸 벌써 잊진 않으셨겠지요. 비록 교파의 차이는 있겠지만, 어쨌든 저들도 안라(安拉/알라Allah의 음차)를 믿는 자들이니 잘만 다루면 좋은 첩자 집단이 되어줄 겁니다.”
“…….”
가오슈센이 잠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이 귀족이 했을 생각은 뻔하다. 데려가는 상품들의 값어치를 셈하여 내 몫의 이익에서 차감하라 요구할 심산이었겠지.
허나 내가 공동의 목적을 명분으로 삼았으니 여기에 무슨 요구를 더하겠는가. 본론을 꺼내기도 전에 무안해진 공산귀족이 괜한 의문을 덧붙인다.
“합당한 말씀이요마는, 숫자가 너무 많지 않소?”
“첩자의 수는 많을수록 좋습니다. 이슬람을 믿는 소수부족의 수가 한둘이 아니고 그 부족 중의 누가 흑해자당의 협력자인지도 모르는 마당에, 한 줌의 첩자를 뿌려서 무슨 성과를 거두겠다는 겁니까?”
“음…….”
“공식적인 조사를 통해 들어오는 정보들은 경쟁자들도 다 열람할 수 있습니다. 아니, 상황에 따라서는 경쟁자들에게 주어지는 정보가 당신에겐 주어지지 않을 가능성도 있지요. 우리에겐 독자적인 정보수집 수단이 필요합니다.”
“알겠소, 알겠소. 내가 실언을 하였소. 미안하오. 다만 웨이우얼 놈들은 죄다 겉과 속이 다른 불온분자들이니 취급에 유의해주시길 바라오.”
가오슈센의 사과는 차라리 투덜거림에 가까웠다. 불온분자 어쩌고 하는 말은 그저 덧없는 자존심 챙기기에 지나지 않았고. 더욱 깊어진, 혼자서 느끼는 공산귀족의 무안함은 부하들에 대한 부당한 히스테리로 표출되었다.
“샨량! 타이롱! 아직도 성과가 없나!”
후샨량(胡显良). 그리고 장타이롱(张泰荣). 공산귀족 휘하의 공안 경독(警督)들은 상급자를 대신하여 수색작업을 지휘하는 중이었다. 수색 목적은 이 가난한 거리에서 흑해자당의 흔적을 찾아내는 것.
당초 예상했던 대로 이 빈곤한 농민공들의 거주지엔 흑해자당의 끄나풀들이 숨어있었다. 비록 터줏대감 노릇을 하는 광둥 삼합회의 방파가 있어 본격적으로 세력을 펼치진 못한 모양이지만, 그래도 다수의 가담자와 협력자들이 몇 개소의 은신처를 마련해두기는 했다.
내게는 당연히 그 은신처들의 위치가 보인다. 그러나 어떻게 알고 있는가를 설명할 방도가 없었으므로 공산귀족 아래의 공안들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나와 몇 번 얼굴을 본 사이인 후샨량이 지친 안색으로 나서서 공산귀족의 짜증을 감당했다.
“죄송합니다. 어느 구석에 폭탄이 설치되어있을지 모르는 상황이라 이 이상으로 속도를 내기가 어렵습니다.”
“속도! 그 속도가 중요하단 말이야! 무조건 오늘 내로 추가 증거물이 나와야 해! 최초 보고와 발표는 최대한 극적이어야만 한다고!”
“명심하겠습니다.”
이는 지금 처음 보는 광경이 아니다. 내가 현장지휘소에 도착한 뒤로 고작 반시간 남짓 흘렀을 뿐인데, 그 사이 공산귀족은 네 번이나 비슷한 패턴으로 부하들을 질타했다. 정말이지, 정치질과 줄타기 말고는 능력이랄 게 없어 뵈는 위인이었다.
‘정치질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능력이긴 하다만…….’
서로 잡아먹는 포식자들의 도가니인 공산당에서 고위직을 차지했다는 것만으로 가오슈센은 가치 있는 인간이란 평가를 받을 자격이 있었다. 하다못해 그게 타고난 핏줄과 배경에 힘입은 바라도 상관없다. 타고난 권력이 타고난 재능과 다를 건 또 뭐란 말인가? 어느 쪽이든 가지지 못한 자들에겐 세상의 불공평함을 깨닫게 만들어주는 요소일 뿐이다.
슬슬 무거운 졸음이 몰려온다.
“후 경독. 잠시 괜찮겠소?”
나는 후샨량에게 가벼운 도움을 주기로 했다.
“아까 돌입할 당시를 곱씹어보건대 이 부근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있었던 것도 같소. 한번 중점적으로 살펴보시오.”
후샨량은 내가 상황판 지도에서 짚어준 지점을 유심히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침입자들을 기습하기에 좋은 길목이긴 하군요. 충고에 감사드립니다.”
여긴 그런 길목들이 너무 많아서 문제인 환경이지만, 후샨량은 내 말을 허투로 듣지 않았다.
가오슈센 휘하의 공안 간부들은 나를 거의 상급자처럼 대우하고 있었다. 성과를 내는 것도 나요, 목숨을 살려주는 동시에 출세의 기회를 열어주는 것도 나였으니까. 기회를 보아 꾸준히 은혜를 베풀어두면 두 주인을 섬기는 자들이 나올 법했다. 직제상의 주인과 실질적인 주인.
내가 짚어준 은신처는 이미 깔끔하게 비어있었다. 먼저 처음 내 유인책에 홀려서 공짜 밥을 먹겠다고 자리를 비운 자들이 있을 것이고, 다음으로 아지트를 지키고 있던 자들도 거주지를 직선으로 뭉개버리는 트럭들의 돌진을 보고서 도주를 결심했을 터였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네 아지트를 얌전히 방기한 건 아니었다. 가지고 떠나지 못할 폭탄 전부에 인계철선을 걸어놓고서야 떠나간 것.
여기에 공산귀족의 채찍질이 더해지니 인명피해는 당연한 귀결이었다.
콰콰콰쾅!
내가 지목해준 지점으로 진입하던 수색반이 기어코 인계철선을 건드리면서, 서로 짝을 이루도록 배치된 두 쌍의 폭발성형 관통탄이 폭발했다. 네 개의 발사체가 벽을 뚫고서 살상지대를 만들어낸다. 발사체를 뒤따라 뿌려지는 콘크리트 조각들은 소구경 납탄에 필적하는 에너지를 품고 있었다.
“드디어!”
가오슈센이 주먹을 불끈 쥐며 흥분한다. 이 공산귀족 입장에서 폭탄을 꼭 멀쩡한 상태로 회수할 필요는 없는 것이었다. ‘진짜 흑해자당’의 흔적을 찾아냈다는 게 중요한 거니까. 이로써 자기보신이 최우선인 공산당 간부는 삼합회에 거짓 혐의를 덮어씌우는 데서 기인하는 불안을 깔끔하게 덜어낼 수 있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빚어지는 몇몇 말단들의 소소한 죽음 따윈 귀족이 알 바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쪽에서도 몇 명쯤 피를 봐야 비장함이 부각되지 않겠는가. 피해가 너무 커서 세력을 잃을 지경만 아니면 되는 것이다.
“부서기님.”
가만히 부르자, 가오슈센은 기쁨의 여운이 남은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난 살아있는 상품들 중에서 내가 챙겨가지 않을 것들을 엄지로 가리켰다.
“아까 잠깐 말이 나왔던 자선사업 말씀입니다만, 정말로 한번 해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음, 수립형상(树立形象/이미지 메이킹) 차원에서 말요?”
“그렇습니다. 한 두세 달쯤 적당히 먹이고 재우다가 관심이 식거든 내다 버리시죠. 깡촌에 데려다놓으면 돈은 얼마 들지 않을 겁니다. 내보낼 때도 부담이 없을 것이고.”
가진 게 몸뿐인 자들, 그리고 부모에게 돌려보내더라도 머지않아 다시 팔릴 자식들에겐 이 차가운 위선조차 고맙기 짝이 없을 일이다. 이 사납고 혼란스러운 대륙에서 두세 달의 짧은 시간이나마 배고프지 않게 지낼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큰 선물인가. 이 안도감은 쓰레기통에서 끼니를 뒤져본 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공산귀족은 내 제안을 대충 받아넘겼다.
“그건 고려해보기로 하고, 따로 의견을 듣고 싶은 문제가 있소이다.”
“뭡니까?”
“오늘 동사장께서 선보이신 수법을 내 경쟁자들이 너도나도 모방하기 시작할 텐데, 그러면 기왕 얻은 선취점이 무색해지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오. 내 경쟁자들은 머릿수도 많고 가진 돈도 많소. 따라잡히는 건 금방이지 않겠는가 하는 우려가 드오만.”
내가 쓴 수법의 가치는 발상의 전환에 있다. 주어진 예산 내에서 해결을 봐야 한다는 고정관념만 깨뜨리면, 나머지는 그저 상상력의 문제일 뿐.
“그냥 그러라고 내버려두십시오.”
“괜찮겠소?”
난 점점 뜨거워지는 눈을 감고 관자놀이를 누르며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가면 갈수록 쓰기 어려워질 방법이니.”
“어째서?”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사방에 널린 게 이런 셋방들이라지만, 오늘처럼 무턱대고 밀어버리기를 반복하면 집을 잃은 사람들이 옮겨갈 곳이 부족해지지 않겠습니까? 회를 거듭할 때마다 불만을 무마하는 데 들어갈 돈이 늘어나겠지요.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임대료를 따라.”
“아.”
“또 있습니다. 깨진 유리창 효과(破窗效应)를 들어보셨습니까?”
“음? 아. 아아!”
가오슈센이 탄성을 내뱉는다. 이런 걸 보면, 욕심이 사고를 흐려서 그렇지 교육을 못 받은 놈도 아니고 머리가 모자란 놈도 아니었다.
“오늘 같은 일이 반복되면 도시 전체가 못 봐줄 꼴이 되어버린다 이 말이시구려! 그게 치안 유지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고!”
“예. 그들 자신이 느끼지 못하더라도 윗선에선 제동을 걸 겁니다. 외신에 나가는 도시의 모습이 나날이 개판이 되어갈 테니까요. 최종 보고를 받은 높으신 분들은 후발주자들을 이렇게 평가하겠지요. 한 번으로 끝냈으면 좋기만 했을 일을 무분별하게 따라하려 들다가 망쳐놓고 말았다고.”
“하하! 과연, 과연! 제 무덤을 파는 격이 따로 없겠소!”
나는 즐거워하는 가오슈센을 조금 더 즐겁게 해주기로 했다.
“한 가지 더.”
“뭐요?”
“알 까심은 재료만 주어진다면 하루가 지나기 전에 무반동포와 대전차로켓까지 제작 가능한 집단입니다. 흑해자당이 바보가 아닌 이상 벌써 주문을 넣어놨겠지요. 그들에겐 아주 많은 돈이 있고, 많은 돈은 많은 일들을 가능케 하는 법입니다.”
그들은 장차 증원될 기갑세력에 대비해야 할 입장이다. 주문을 넣지 않았을 리 있나.
하다못해 기왕 만들어둔 폭발성형 관통탄들을 지뢰처럼 활용하기라도 하면 오늘 같은 시도는 초장부터 좌절될 수밖에 없었다. 건물 바닥에 관통탄을 상향(上向)으로 매설해놓고서 방 안에다가 인계철선을 걸어두는 것이다. 그러면 트럭이 건물을 뭉개며 지나가는 순간, 쾅! 운전석이 아래쪽에서부터 날아가 버리는 거지. 혹은 차체의 축이 부러져 버리거나. 땅에 묻어서 쓰면 낭비되는 폭발력도 줄어 발사체의 위력이 강화될 것이다.
“다른 걸 다 떠나, 사람들은 어차피 첫 번째만을 기억하기 마련입니다. 모방은 어디까지나 모방일 뿐. 겔룬부(哥伦布/콜럼버스의 음차) 이후 많은 사람들이 달걀을 세워봤겠지만 그들 중 누가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습니까?”
엄밀히 말하면 내가 든 예는 사실과 다른 것이었다. 세간에 알려진 바와 달리, 달걀을 처음으로 세운 자는 15세기의 건축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라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는 피렌체의 양모조합이 낸 “달걀을 세우시오.”라는 건축설계 문제에서 아래를 깬다는 답안을 내놓음으로써 피렌체 대성당의 설계권을 따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이 어떠하든 간에 뜻은 충분히 전해졌고, 오늘 내가 첫 블록을 밀어버린 도미노에서 이득을 볼 자는 여기 있는 사람들밖에 없다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공산귀족이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듣다 보니 정신이 맑아지는 듯하구려. 동사장께선 어찌 그리 내 근심을 올올이 다 풀어주시는지. 우리는 앞으로 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듯하오.”
“……그리 말씀해주시니 고맙군요.”
전투흥분으로 잊고 있던 두통이 슬금슬금 고개를 드는 중이다.
“이제 여기선 더 도와드릴 일이 없어 보이니, 나와 내 애들은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행동에 대해선 오늘 저녁에 추가로 논의하기로 하지요.”
내 말에 가오슈센은 사교적인 도구로써의 당황을 꾸며냈다.
“아, 이런. 그러도록 하시오. 내 쉬어야 할 사람을 붙잡고 있었구만.”
귀족의 배웅을 받으며 떠나는 길에, 나는 보상금 지급에 관한 공표를 듣고서 멀거니 모여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분명 보상금의 구체적인 액수를 들었을 것임에도, 지저분한 그들의 얼굴엔 오직 불안과 절망만이 감도는 중이다.
그야 그렇겠지. 신분이 불안정한 농민공과 이재민들의 입장에서, 당국의 약속은 언제나 공허한 공수표에 지나지 않았을 테니까. 실제로 돈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안심할 수가 없는 것.
나는 그들의 면면에 두었던 시선을 나른하게 거둬들였다. 내가 바라보는 세상에선 딱히 특별할 것도 없는 광경이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