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88화 (88/561)

#14. 부정한 자들의 금맥 (3)

테니스코트와 수영장, 유럽식으로 다듬어진 정갈한 정원. 두 동의 별채를 낀 산중의 저택은 참으로 부르주아적인 미학의 극치였다. 이게 어딜 봐서 공산당 간부 개인의 자산이란 말인가. 마르크스가 보았다면 이곳에야말로 계급투쟁이 필요하다고 부르짖었을 것이다.

새벽을 앞둔 심야. 경계근무자들을 제외하고 취침에 들어있던 적들의 대응은 지리멸렬 그 자체였다. 비록 철갑탄이 벽을 뚫어대는 소음에 깨어난 자들이 있기는 했으나, 조직적인 대응이 가능할 숫자는 못되었다.

살아남은 적들의 탈출구가 완전히 봉쇄된 시점에서, 나는 비탈을 내려와 저택의 너른 부지로 진입했다. 시끄럽게 짖던 개들은 총탄을 맞고 식어가는 고깃덩이들이 되어있었다. 나는 산책하듯 정원을 가로지르는 와중에도 꾸준히 부하들에게 정보를 전해주었다.

“1-1이 2-1에게. 다음 모퉁이에 매복한 적 2인. 둘 다 95식(QBZ-95)에 50발들이 드럼탄창을 쓰고 있다. 여분의 탄창이나 보조화기는 없고, 방탄복은 한 명만 입고 있는데 레벨 3짜리로 보인다는 통보.”

“1-1이 4-1에게. 귀소의 현 위치로부터 웨이포인트 B-3까지는 어떤 위협도 없다. 전속으로 전진하여 위치를 확보하고 3-3이 B-2로 진출할 때까지 측면엄호를 제공하도록.”

“1-1이 3-2에. 현재 교전 중인 적에게 남은 잔탄은 탄창 하나의 절반 이하다. 한 명은 탄약을 가져오기 위해 이탈하였고, 왕복에는 1분 정도의 시간이 걸릴 것으로 판단된다…….”

교전의 모든 장면들이 이런 식이라 적의 승산은 전무하다.

「2-1이 1-1. 상황실 장악 완료.」

이 보고를 받을 때쯤 나는 본관에 첫 발을 들였다. 대리석을 깔아놓은 바닥에 핏물이 흥건하여 내딛는 매 걸음마다 끼긱끼긱 거슬리는 마찰음이 났다. 여기에 전자음과 노이즈가 낀 아우성들이 더해진다. 발원지는 눈 뜬 채로 죽은 엽사들의 상용 무전기였다.

「빌어먹을! 거기 누구 없어?!」 「적이 너무 많아! 화력에서 압도당하고 있다고!」 「살려줘, 너무 아파…….」 「일단 다 닥쳐봐, 자라새끼들아! 무전망이 개판이잖아! 제발 상황 파악부터 어떻게 좀-」 「상황실! 상황실! 야! 위루이 병신(傻屄) 새끼야! 처자고 있냐, 씨발!」 「엄마, 엄마!」 「어어어엉-」 「특경대(特警队/경찰특공대)는 언제 와! 비상 걸리면 와준다고 했잖아!」 「전화! 전화 되는 놈 없냐고!」 「씨바아아아알!」

매초마다 더 급해지고 절박해지는 절규들. 그렇게 우는 무전기 곁을 흐르듯 지나치며, 나는 상황실을 장악했다는 2-1, 즉 경태에게 물어보았다.

“혹시 거기 방송 시스템이 있나?”

「당소 2-1. 그런 건 없습니다만……. 무슨 일이십니까?」

“적 생존자들에게 항복을 권할까 했다만, 없으면 되었다.”

내 시야에 방송용 스피커 같은 건 눈에 띄지 않았으나, 대신 방마다 설치된 인터폰이 보였기에 혹시나 싶어 물어본 것이었다. 전 단말기 동시통화 같은 형식으로 가능할 수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하나하나 일일이 연결하여 항복을 권해야 한다면 번거로워서라도 그냥 죽이는 편이 나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2-1이 되물어온다.

「항복한다면 살려주실 생각이십니까?」

“그럴 리가. 산 채로 잡아서 참수 영상이나 찍을까 했지.”

내 뇌리엔 흑해자당 바이크 돌격대의 잔혹함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둘로 토막 친 사람의 목에 올가미를 걸어 끌고 다니던 자, 적의 목을 자르고 그 머리를 들어 쏟아지는 피를 맞던 자, 저항을 포기한 적들을 줄지어 무릎꿇려놓고 참수형을 집행하던 자.

그런즉 흑해자당에게 혐의를 뒤집어씌우려는 우리는 그들의 잔혹함 또한 모방해야 한다. 한평생 계급제도의 그림자로만 살아온 자들의 원한을. 우화의 시기를 맞이하여 분노를 노래하는 그들에게 일말의 자비라도 남아있다면 놀라운 일일 것이었다.

그들이 꿈꾸는 혁명에서 공산귀족과 그 하수인들의 죽음은 절대로 빼놓을 수 없을 기본적인 구성요소다.

‘여기선 교전 영상을 확보하는 정도로 만족할까.’

부하들이 치르는 교전을 편집하여 온라인에 업로드한다면 괜찮은 디코이가 되어줄 것이었다.

“다 죽여라.”

내가 다시금 강조했다.

“전투원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무장 여부도 중요치 않아. 이 저택에 있는 모두가 ‘인민의 적’이니까. 그러니 단 한 사람도 남김없이 모조리 죽여라. 배를 가르고 몸통을 걷어차서 내장이 쏟아지는 꼴들을 만들어놔. 사람의 혁명은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이니.”

「알겠습니다. 그리 전파하겠습니다.」

이로써 당초의 방침이 재차 확고해졌으므로, 부르주아의 저택이 살육의 박람회장으로 변모하는 과정이 한층 더 가열차게 변모했다.

‘참 많이도 고용했군.’

이제 전멸을 눈앞에 둔 적 엽사들은 전체적인 규모가 2개 중대에 필적할 지경이었다. 몸값만 따져도 한두 푼이 아니었을 터. 어디까지나 사태가 가라앉을 때까지의 일시적인 고용에 불과했겠으나, 시당 서기가 제 재보를 지키겠다고 큰 지출을 한 셈이었다.

엽사들의 배치는 자신들이 어디를 가장 중요하게 지켜야 하는지조차 모르는 느낌이 강했다. 그냥 저택을 방어한다 수준.

하기야 엽사들도 외부인들이긴 마찬가지인즉, 비밀금고들의 존재를 알려주는 건 멍청한 짓이었겠지. 금과 지폐가 톤 단위로 쌓여있는 마당에 누가 값싼 신의를 지키려 들겠는가. 엽사들도 이를 짐작은 하고 있었겠으나, 폐쇄회로 카메라들의 감시 아래에서 금고의 위치를 탐색하고 다닐 순 없었을 터였다.

공포 영화의 장면들을 닮아있는 복도를 지나, 피가 여울처럼 흐르는 층계를 내려간 나는 드디어 첫 번째 보물의 방 앞에 도달했다. 금고의 입구는 책으로 가득한 서가 뒤쪽에 가려져있었는데, 서가를 치우고 나서도 겉보기로는 평범한 벽처럼 보일 따름이었다. 규모가 다소 크다는 점만 제외하면, 한국에서도 국세청의 단속을 피하고 싶은 부자들의 별장에 흔하게 설치되는 형식의 위장 금고다.

“촬영 중인가?”

내가 묻자 팀장급 부하가 그렇다고 답한다. 여기서 기록되는 영상은 내가 가오슈센에게 약속했던 분배의 기준이자 가짜 흑해자당으로서의 프로파간다에 사용할 재료다.

경태처럼 발라클라바를 착용한 나는 책장을 치워낸 벽면으로 다가갔다. 금고의 개폐장치는 콘센트로 위조되어 있었다. 겉모습만 흉내 낸 게 아니라 코드를 꽂으면 실제로 전기가 공급되도록 조치해놓은 정교한 위장이다.

빠각-!

콘센트를 강하게 잡아당기니 번호를 입력하는 패드가 끌려나온다. 나는 비밀번호를 누르는 시늉을 하며 마력으로 회로를 조작했다.

철컹! 그그그그긍-!

잠금장치가 해제되고, 맞물리는 톱니들이 회전하며 금고의 문이 개방되었다. 단단한 합금 안쪽에 갇혀있던 묵은 공기가 메마른 종이 냄새와 함께 흘러나왔다. 내용물을 이미 알고 있던 나와 달리, 부하들은 감탄하는 소리들을 냈다. 대단한 양의 지폐와 채권과 여러 형태의 금붙이들. 그리고 오래된 골동품과 동서양의 회화들. 이게 전체의 일부에 불과하기에 부하들의 감탄이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뭐하나? 어서 빼가지 않고서.

내 수신호에 부하들이 곧바로 반응했다. 이 금고에서의 우선순위는 역시 무기명 채권 및 주식증서와 금붙이들이다. 달러를 비롯한 외화가 그다음이며, 골동품, 미술품, 위폐가 많아 쓰기도 까다로운 위안화 등은 마지막으로 챙겨도 무방했다. 무기명 채권의 우선순위가 높은 이유는 출처를 세탁하기가 쉬운 데다 암시장에선 소정의 프리미엄이 붙기 때문이었고.

금고 안엔 유사시 물건을 담아 빼내기 위한 가방과 완충제 따위가 무더기로 비치되어 있었다. 관계당국의 눈을 피하고 싶은 비밀금고는 어디나 다 비슷한 꼴이었다.

나는 이 현장을 등지고서 다른 금고들을 마저 개방하고 다녔다. 규모는 첫 번째보다 손색이 있었으되, 장의자 시트 아래 박혀있던 가장 작은 크기의 금고는 값비싼 옥(비취) 세공품과 그 감정서들로 가득했다. 한국에선 다단계꾼들이 팔아대는 옥장판 탓에 옥이 싸구려라는 인식이 퍼졌으나, 거기에 들어가는 옥은 옥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수준의 쓰레기들일 뿐이다.

중국인들이 선호하는 진정한 옥, A급의 천연 비취는 색이 그윽한 목걸이 한 줄에 2천 7백만 달러까지도 호가한다. 중국 시장에 한하여 다이아몬드보다 비싸게 거래되는 보석인 것이다.

감정서들을 살펴본 나는 이 작은 금고 하나에만 8억 위안 상당의 옥이 들어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한화로는 천 5백억에 달하는 보물들.

‘현금화하기는 까다롭겠지만.’

감정서가 있다는 것은 감정기록도 있다는 것이다. 고로 이만한 물량의 최고급 옥 세공품들을 암시장에서 안전하게 처분하려면 적잖은 시간과 공을 들여야만 했다. 판로가 거의 중국으로 제한된다는 점도 처분의 어려움을 가중시키는 요소였다. 적어도 몇 년은 바라보고서 계획을 짜야 할 일.

그러므로 이건 따로 빼돌리거나 할 게 아니라 증거품으로 쓰는 게 최선이었다. 광둥 삼합회의 사업장 가운데 한 곳에서 이 녹색 보석들이 무더기로 나오는 순간, 삼합회는 즉시 흑해자당의 협조세력으로 낙인찍힐 테니까.

뭐, 그래도 한두 개 정도는 꽌시에 먹일 뇌물로써 비장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이렇듯 차례차례 숨겨진 금품을 찾아낸 끝에, 나는 저택의 마지막 은닉처 앞에 섰다. 이번엔 벽으로 위장된 금고가 아니라 벽 그 자체가 하나의 은닉처였다. 회로의 출력을 끌어올린 난 회칠을 해놓은 하얀 벽을 통째로 잡아 뜯어냈다.

콰르르르르-!

얇은 석회질이 깨지며 그 너머의 묵직한 벽돌들이 쏟아진다.

상황이 종료된 후 폐쇄회로를 파기하고 합류한 경태가 묻는다.

“어디 보자, 이 위치면……. 금이네? 설마 이게 다 금괴입니까?”

코를 소매로 막고 내가 그려준 도면과 현재 위치를 대조한 끝에 나온 질문. 나는 붉은 벽돌로 꾸며진 금괴들을 응시하며 끄덕였다.

“그래. 오래 전부터 써먹던 유서 깊은 수법 아니냐.”

역사 속에선 중국인과 유대인들이 이 수법을 애용했다. 중국인들은 나라에 난리가 잦아서, 유대인들은 민족 자체가 차별과 박해의 대상이어서. 겉에다 흙을 발라 구워내기만 하면 그만이니 만들기도 쉽다. 지금도 중국의 고택(古宅)에서는 재개발 중에 옛 사람들이 숨겨놓았던 금괴가 쏟아지곤 한다.

내가 지시했다.

“여기는 폭파해서 흔적을 지워라. 이 벽돌들은 가오슈센이 모르게 먹어야겠으니.”

“옙.”

여기 있는 금괴만 합쳐도 족히 천만 달러는 될 것이다. 여객선보다는 마카오 쪽으로 보내어 시간을 두고 빼가는 편이 좋겠지.

이렇게 찾아낸 보물들을 저택의 차고에 모으자 내가 처음 눈대중으로 어림잡았던 양, 2.5톤 트럭 다섯 대에 조금 못 미치는 양이 쌓이게 되었다. 도자기와 회화 등 쓸 데 없이 부피가 큰 고미술품과 유물들을 제외할 경우엔 석 대를 다 채우지 못하겠고.

염동술식을 써서 상차(上車)를 단숨에 끝내버린 나는 경태와 같은 차에 올라타 저택 부지를 빠져나갔다. 이제 돌아가는 일이 남았으나 내 눈이 있고 위장신분도 있으니 큰 어려움은 없을 터. 속으로 만족스러운 사냥이었노라 자평하고 있는데, 운전대를 잡은 경태가 이상한 소리를 지껄였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우리가 중국을 적잖이 도와주게 생겼네요.”

“무슨 말이냐, 그게?”

“그렇잖습니까? 이 근방에서 수확하는 재보의 일부만 증거품으로 쓴다고 쳐도 최소 조 단위의 자금이 국고로 환수될 텐데요. 어지간한 애국자들보다 훨씬 나은 거죠.”

“국고로 환수된다고?”

나는 경태의 착각을 깨닫곤 조금 어이없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나름 이 바닥에서 오래 일한 녀석의 착각이라기엔 지나치게 순박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내 반응으로부터 이상을 감지한 경태가 시선을 전방에 두고 조심스레 묻는다.

“어, 뭔가 잘못됐습니까?”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지. 솔직히 당황스럽기까지 하구나. 넌 설마 압류된 자산이 얌전히 국고로 들어가리라 생각했던 거냐? 더는 썩을 데가 없을 만큼 썩어버린 이 나라에서?”

“앗, 윽.”

괴상한 소리로 신음하는 경태.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형님. 죄송합니다.”

“죄송할 일은 아니지.”

어떤 일이든 별 생각 없이 넘어가는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이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숙청에서, 패자의 황금은 곧 승자의 전리품이었다. 범죄와의 전쟁을 통해 확보하는 부정한 수익 또한 권력을 쥔 자들의 전리품이 되기는 마찬가지였고.

그러므로 이 대륙에 흐르는 부정한 자들의 금맥은 단 한 순간도 끊어진 적이 없다. 배금주의의 짐승들이 서로를 잡아먹고 또 잡아먹으며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황금의 연속성을 만들어낸 것. 일부가 다른 대륙이나 바다 건너로 흐르기는 했어도.

오늘 우리는 그 더러운 역사의 작은 지류 하나를 강탈해온 셈이다. 나 역시 부정한 자이니 이 역사를 잇기에 부족함은 없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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