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73화 (73/561)

#12. 사냥꾼들 (8)

투자에 관한 실무는 수연이 담당하는 영역이었다. 갑작스럽게 결정된 투자임에도 불구하고, 수연은 사전에 정해진 업무를 처리하듯 담담하게 일을 진행했다. 내가 미처 고려하지 못한 부분들이 있다면 실무적인 과정에서 조정될 것이었다.

수연이 닐슨을 상대하는 사이 경태는 안전가옥과 수차례에 걸친 통화를 완료했다. 이동 중에는 사용이 불가능하고, 신호를 잡기까지 최소 1분 이상이 필요하며, 그나마도 실외에서만 연결이 가능한 게 위성전화였지만, 이 보험적인 연락수단이 없었더라면 나는 지금쯤 상당한 초조감에 쫓기고 있었을 터였다. 이는 내가 연간 약 190만 달러를 지불하면서까지 조직 전반에 3백 대의 위성전화를 보급해놓은 이유다.

경태가 보고했다.

“경계와 주변정찰을 강화하도록 지시해두었습니다만, 형님께서 말씀하신 인상착의와 일치하는 인물은 발견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은 했다.”

그레이스 그 마녀가 어떤 의도로 이곳을 찾아왔든, 검고 흰 수녀복은 지나치게 눈에 띄는 차림이었다. 그녀에 대해 아는 자들이라면 결코 몰라볼 수가 없을 뚜렷한 표식.

‘어쩌면 나만이 볼 수 있었던 모습일지도.’

그때 난 당황한 상태였고, 상대를 주의 깊게 관찰하지 못했다. 그레이스가 모종의 술식으로 자신을 은폐하고 있었다 한들 이상할 게 없다는 소리다. 과연 그게 마법적으로 가능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녀는 나보다 오랫동안 도피생활을 한 마법사인즉 그런 쪽으로도 사고를 열어두는 편이 현명할 것이었다.

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그레이스를 목격한 뒤로 현재까지 경과한 시간이 1시간 47분. 스스로를 미끼삼아 함정을 판 것이라 치면 무슨 일이 터졌어도 벌써 터졌어야 정상이다. 그녀의 목적이 무엇이든 소란을 일으키는 것과는 거리가 있는 모양.

“주의할 필요는 있겠지만 일정을 바꿀 것까진 없겠구나.”

“그렇습니까?”

“그 마녀가 나를 노리고 이곳에 왔을 확률은 낮다.”

난 얼마 전에도 했던 생각을 곱씹으며 말을 이었다.

“일단 원탁에 대한 스승새끼의 배신을 알고 있을지부터가 의문인 데다, 설령 알고 있다 쳐도 그녀와 칠각기사단의 가장 큰 적은 원탁이니까. 뭔가 음모를 꾸미는 중이더라도 소재조차 모르는 배신자 ‘크로우허스트 경’보다는 런던의 원탁을 겨냥하고 있을 확률이 높겠지.”

“그럼에도 다시 조우한다면요?”

“전에도 비슷한 말을 했던 기억이 나는데……. 전쟁을 하는 사람이 안전한 자리만 골라서 다닐 순 없는 노릇 아니냐. 아직 준비가 덜 된 만큼 일부러 찾지는 않겠지만, 괜히 피하느라 내 기회비용을 낭비하지도 않겠다.”

혹시라도 다시 마주친다 한들 상대를 먼저 식별하는 건 내 쪽이 될 확률이 높다. 그때는, 눈에 띄는 다른 위험이 없다는 전제 하에, 직접 뒤를 밟아 뭔가를 알아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지. 꼭 마주치지 않더라도, 이곳을 떠나기 전에 리치필드 일대를 한 번 더 돌아보기는 해야 할 것이고.

애초에 그레이스가 알고 있을 원탁의 지식 속에서 「황금기의 눈」은 나처럼 눈 대신 달고 다니는 유물이 아닐 터다. 정해진 제식(祭式)을 통해 한시적으로 경이로운 시야를 열어주는 마법적 도구일 뿐. 영혼과 마력회로가 아예 유물과 융합되어버린 나의 존재는 스승새끼의 남다른 영감(靈感), 끈기, 지성, 그리고 광기가 빚어낸 산물이었다.

고로 나는 그녀가 미처 고려하지 못했을 영역에 숨어있는 자다. 이 점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내게 최소 반수의 이득을 벌어줄 것이다.

잠시 후 남은 비행이 재개되었다.

비록 헌팅 투어는 엉망이 되었으나, 닐슨은 귀환하기 전에 「전율하는 거인」을 하늘길로 돌아보고 싶다는 내 요청을 기꺼이 받아주었다. 그 정도의 비행은 충분히 소화할 연료가 남아있었고, 지불한 요금은 그대로였으며, 나는 아주 좋은 조건으로 투자를 약속한 투자자였으니까.

그리고 그는 꽤나 기운을 회복한 상태였다. 계약서를 작성하는 즉시 법인계좌에 이체해주기로 한 3백만 달러의 거금은, 그가 리더로서 직면해 있는 많은 인간관계상의 문제들을 단숨에 해소해줄 터이므로. 돈이 곧 권위인 것이다.

닐슨은 다만, 수연과의 대화에서, 내 자금의 출처가 사실 중국이 아닌가를 걱정스레 물어보았다고 한다. 실무적인 조율을 마치고서 수연이 중간보고로 전하기를,

「애국자는 누구도 중국을 가까이해선 안 됩니다. 그들은 자유의 적이니까요.」

라 했다던가. 이 나라에 연초부터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반 중국 정서 내지 중국공포증(Sinophobia)의 평범한 단면이었다.

「저기 보이는 안개 속에 그 유명한 「전율하는 거인」이 있습니다. 온갖 기현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작금의 세계에서도 제일가는 신비로 꼽히고 있는 포플러 나무 군락지죠.」

내가 이곳을 처음 보는 줄 아는 닐슨이 가이드처럼 설명하는 말.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오지만 보통은 지금처럼 안개만 잔뜩 보고 돌아가게 됩니다. 날씨가 포근하고 하늘이 맑은 날이면 정오를 전후해서 안개의 수위가 수관(樹冠) 아래로 내려가곤 하는데, 유감스럽게도 그게 오늘은 아닌가 봅니다.」

어제 눈이 내린 하늘이 오늘도 맑지는 않아, 산의 한쪽 사면을 통째로 뒤덮은 안개는 가지가 하얀 숲의 희미한 윤곽만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었다. 땅을 따라 기울어 흐르는 안개는 그 자체로도 하나의 장관이었으되, 누군가는 흐릿한 숲의 모습에 실망감을 느낄 법했다.

어디까지나 통상시야로는 그렇다는 이야기.

나는 보이는 광경에 충분히 만족했다.

‘이 정도 거리를 두고 봐도 「생문」과 「사문」이 어딘지는 대충 알겠군.’

생문과 사문. 예전에 경태가 언급했던 기문둔갑 상의 개념. 처음엔 표현 자체에 대한 거부감을 다소 느꼈으나, 명확한 용어가 있어야 부하들과의 소통이 편해지고, 달리 적합한 표현도 없고 해서 지금은 그냥저냥 의미를 바꿔 쓰는 중이다.

일찍이 숲을 조사한 바가 없었더라면, 그리하여 숲이 보유한 영적 회로의 중심부와 근간을 땅 속 깊은 곳까지 숙지해두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쉽게 생사의 갈림길들을 파악하진 못했을 것이다. 그릇이 커지거나 작아진다고 하여 본질까지 달라지는 건 아니니까. 물질적인 성장이나 손실이 영혼에 미치는 영향은 문자 그대로의 팽창과 수축이었다.

쿠궁, 쿵, 쿵!

공업용 폭약이 터지는 소리들. 안개로부터 백 미터쯤 떨어진 자리에선 땅을 직선으로 파헤치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폭 수 미터의 빈 공간을 만든 다음 양쪽 빗면에 콘크리트를 발라 뿌리가 뻗어나갈 자리를 없애버리려는 것이었다.

요컨대 ‘거인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한 군사작전의 일환이다.

이 와중에 서로 다른 방향에서 안개 속으로 진입하는 여러 무리의 사람들이 눈에 띈다.

「패스파인더(Pathfinder)들이로군요.」

내 시선을 좇았는지, 묻기도 전에 닐슨이 그들의 정체를 입에 담는다.

「저 안개 속 포플러 숲을 탐험하고 안전한 길(Path)을 개척하는 대가로 보상을 약속받은 친구들입니다. 얼마나 깊은 곳까지 들어갔는가, 여러 차례 왕복하고 나서도 건강상의 문제가 없는가에 따라 개척한 루트의 평가가 달라진다고 들었습니다.」

「보상을 얼마나 주기에 저런 일을 맡습니까?」

「대중은 없지만 기본적으로 후하게 주는 편이랍니다. 타우-러너가 아니고선 선발 자체가 되지 않고, 또 전 세계적으로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니까요. 주정부와 연방정부부터 시작해서 탐사를 후원하는 기업과 단체들이 많은 걸로 압니다.」

이런 쪽으로도 새로운 경제가 탄생하는구나. 흥미로운 일이다. 나중엔 길에 대한 지적재산권과 그 이용료를 요구하는 날이 올 수도 있겠다.

「혹시 파이오니어 사냥꾼 여단의 이름도 이런 쪽의 일감을 의식해서 붙인 겁니까?」

직역하면 ‘길을 찾는 자’가 되는 패스파인더만큼 직관적이진 않아도, 파이오니어 역시 개척자라는 의미를 공유하기는 마찬가지다.

물론 민병대는 마법이 돌아오기 전부터 있던 조직이겠으나, 영리법인으로 전환하면서 별도의 법인명을 만들었을 가능성은 있었다.

질문을 받은 닐슨이 짤막하게 웃는다.

「우연의 일치입니다. 우리는 단지 가까운 산의 이름을 따왔을 따름이죠. 그래도 언젠가 패스파인더로서도 의뢰를 받아볼까 하는 마음은 있습니다. 돈도 돈이지만, 다방면에서 명성을 쌓아야 정부계약을 수주하기에 좋을 테니 말입니다. 이건 경영인으로서 투자자에게 드리는 브리핑임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기억해두겠습니다. 전망이 괜찮다면 추가 투자를 해드리죠.」

「저야말로 그 말씀을 기억해두겠습니다.」

정부계약 수주라. 사업가로서 미숙하긴 할지언정 방향은 제대로 잡고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각성한 원시마법 능력자들의 무장집단으로서 이 사냥꾼들은 결국 사설군사기업(PMC)들과 비슷한 방향으로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는 훈련된 능력자들을 어떻게, 얼마나 동원할 수 있느냐가 국가안보에서 중요한 문제로 다뤄질 테니까.

헬기는 거인의 영지를 남쪽으로 돌아 동쪽의 계곡을 타고 북상했다. 그렇게 산간의 저수지에 이르기까지, 나는 발 아래로 구불구불 이어지는 도로와 강물을 따라 탐험가와 사냥꾼들의 캠프 다수가 설치되어있는 풍경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캠프들마다 여지없이 깔려있는 게 여러 기업들이 보낸 이동식 매장과 트레일러들이었다. 리치필드에서 처음 이륙하기 전에 보았던 월마트의 탄약수송차량들도 보이고, 평탄한 땅에 선을 그어놓은 간이 활주로와 헬기 이착륙장엔 정유사들이 보낸 항공기 급유차들마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각각의 캠프들은 외곽마다 울타리와 더불어 망루들을 세워놓았다. 망루 위에선 무장한 인원들이 경계를 서는 중이다. 사냥꾼들의 수요가 사냥꾼에 대한 수요를 낳는 현장.

닐슨이 말했다.

「올 초까지만 하더라도 유타의 산골짜기가 이렇게까지 북적이는 날이 오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세상이 달라진 걸 이렇게도 실감하게 된다고나 할까요.」

이제 헬기는 두 개의 높은 산봉우리 사이를 지나 저수지 상공을 가로질러 점점 더 고도를 높여갔다. 이제 안개에 잠긴 포플러 숲은 헬기의 비행경로에서 좌측에 위치했다.

「우리는 지금 빅 플랫(Big flat) 봉우리를 지나고 있습니다. 이 일대에서 가장 높은 지형이죠.」

이름과 달리 전혀 평탄하지 않은 외딴 봉우리는 형형색색의 등산복을 입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순전히 ‘세계 최대의 신비’가 끌어들였을 사람들. 여기선 하늘마저도 부산스러워, 관광객들을 태운 헬기, 군인들을 태운 헬기, 사냥꾼들을 태운 헬기, 방송사에서 띄운 헬기 등등이 가을철의 잠자리들처럼 빈번하게 날아다녔다.

봉우리 위엔 최근에 지은 듯한 전망대가 하나 서있었다. H빔 등의 형강(形鋼)으로 바람이 통하는 골조를 짜고 그 위에 목재를 올려 마무리한 시설이다.

경태가 바글거리는 인파에 감탄했다.

「어휴. 아주 그냥 관광지가 따로 없네요.」

따로 없는 게 아니라 관광지 그 자체다.

이 위치에서 내려다보는 포플러 숲은 또 새로운 면이 있었다. 숲의 영토가 아래로만 넓어진 것이 확연하게 보였기 때문. 물을 얻고자 집어삼켰을 호수만이 그러한 확장의 예외였다. 마법의 숲이 자신의 생장에 유리한 환경을 찾아가는 것이다.

저 숲이 원하는 땅이 모두 사람에게 속해있다는 점이 문제겠지만…….

그건 단지 사람이 멋대로 그어놓은 선일뿐이지.

나는 인간에게 특별한 권리가 있다고 믿는 멍청이가 아니다. 모든 생물종에게 주어지는 생존투쟁의 숙명에서 인간만이 예외일 순 없는 노릇. 다만 인류는 우월한 힘에 힘입어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그 사실- 자신들 또한 먹이사슬의 일부라는 사실을 새로운 차원에서 깨닫는 중일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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