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71화 (71/561)

#12. 사냥꾼들 (6)

하강으로 충돌을 회피한 더튼 측 헬기는 약 20미터 높이에서 정지비행을 하고 있었다. 파일럿이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는 와중에 대장이라는 놈은 몰상식한 책임전가로 시간과 연료를 낭비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럴 땐 아예 상대를 않는 편이 현명할 터. 그러나 헬기와 동료들, 그리고 마음에는 안 들지언정 어쨌든 지켜줘야 할 의무가 있는 고객 둘을 한꺼번에 잃을 뻔한 닐슨은 이번에야말로 꼭지가 돌아버렸다.

양측 사냥꾼들이 이렇게 시간을 흘려보내는 사이, 하늘을 쏘아보던 짐승은 몸을 돌려 숲 안쪽으로 백여 걸음을 더 들어갔다. 그 지점에서 다시 몸을 돌린 돼지가 마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한다. 시시각각 더 밝은 광채로 타오르는 영혼. 이는 곧 응축시키고 또 응축시켜서 한순간에 폭발시키려는 힘이었다. 끊임없이 도주해야 할 때와는 다른 방식의 마력운용이라 하겠다. 나는 눈에 핏발이 선 야수의 도전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았다.

경고?

내가 왜 그런 친절을 베풀어야 한단 말인가?

눈앞의 숲이 전율하는 거인이나 「대통령」이 있는 공원 같지 않아 다행이었다. 회로 뚫린 나무들이 제법 분포할지언정 가시거리가 큰 폭으로 줄어들지는 않는 환경이니까. 선물처럼 주어진 기대감 속에서, 나는 무의식적으로 이어질 도약을 예상해보았다.

‘수직시야는…… 대충 65도쯤일까?’

1도는 약 17.78밀(Mil). 더튼 측의 헬기가 20미터 어림에 체공 중이므로, 돼지가 표적을 눈으로 좇을 수 있는 최소의 거리는 23미터가 된다. 적어도 그만큼의 간격은 남겨두고서 도약해야 한다는 의미.

잠시 후, 기다리던 질주가 시작되었다.

육중한 거체의 가속은 곧 시각적인 진동이었다. 천 파운드를 초과하는 질량이 파괴적인 힘으로 땅을 박찰 때마다 주변의 모든 가지들이 요동치며 쌓여있던 눈들을 아래로 쏟아냈다. 이것은 숲의 바깥에서 통상시야로도 관측 가능한 현상이었다. 하얗게 덮여있던 가문비나무들이 직선을 그리며 제 색을 찾아가니 당연히 눈에 띌 수밖에. 돼지는 장애물을 피하면서도 최대한 곧은 궤적을 유지하며 속도에 속도를 더했다.

「어……. 저게 뭐야?」

당황한 파일럿의 목소리. 말다툼에 여념이 없던 닐슨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 3미터짜리 짐승이 경사진 바위를 발판 삼아 포탄처럼 솟구쳐 올랐다. 나는 나도 모르게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성공할 것인가, 성공할 것인가. 더턴 측의 반사적인 선회와 상승, 줄어드는 간격, 번뜩이는 총기의 발사섬광들. 세 발의 총탄은 돼지의 강화된 머리뼈를 뚫지 못했다.

지켜보던 이쪽의 파일럿이 내뱉는 욕설.

「Oh, Shit!」

유리가 깨지고 금속이 구겨지는 굉음이 헤드셋을 뚫고 들어왔다. 이제 보이는 것은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기 시작하는 돼지와, 팽이처럼 돌면서 탑승자들을 내팽개치는 헬리콥터의 모습이었다. 원심력에 퉁겨진 사냥꾼의 수는 셋. 그중 둘은 안전 고리 덕분에 즉각적인 추락을 면했으나 남은 하나는 아니었다. 중력에 사로잡힌 그는 비탈진 땅과 격돌하여 몇 번이고 다시 튀어 올랐다. 튈 때마다 피를 뿌리는 물수제비와도 같이. 하얀 눈 위에 뿌려진 피는 더없이 선명한 붉은 색이었다.

그러나 그가 특별히 더 운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와, 씨팔, 추락한다!」

보이는 광경에 압도당한 듯한 잭의 외침. 더턴 경기병대의 헬기는 이미 조종능력을 상실했다. 돼지의 몸통을 앞좌석으로 받아낸 탓. 파일럿은 즉사했고, 조종축이 기운 상태로 고정된 헬기는 고도마저 낮아지는 중이었다. 안전 고리에 묶인 둘은 빙빙 도는 헬기 동체를 따라 여느 놀이공원의 회전그네처럼 날아다녔다. 그러다가 하나는 가까스로 랜딩 스키드에 매달리고, 다른 하나는 가문비나무에 거칠게 쓸려 얼굴가죽이 벗겨지다시피 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찌그러지고 부서지며 단단하게 충돌하는 금속성의 굉음들이 울려 퍼진다. 소리에 놀란 새들이 산과 숲 곳곳에서 요란스럽게 날아올랐다. 고장 난 엔진으로부터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는 가운데, 깨진 동체로부터 새어나와 눈과 땅을 적시는 항공유에는 아직 불이 붙지 않았다.

아, 실로 훌륭한 볼거리였다.

「돼지는? 돼지는 어디로 갔지?!」

추락에 정신이 팔려 있다가 한 발 늦게 혼종 돼지를 찾는 여단장 닐슨. 그러나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녀석이 남긴 발자국들뿐이었다. 앞이 넓게 벌어진 네 개의 발굽들은 성난 짐승이 다시금 숲으로 들어갔음을 알려주는 흔적이었다.

「2호기, 3호기! 보이는 게 있나? 돼지의 위치든 추락현장의 상황이든, 뭐든지 좋아!」

2호기와 3호기는 고도를 높여 헬기가 떨어진 위치를 살피고 있었다. 난 이번에야말로 다시 청각을 조율하여 닐슨에게 오는 답신을 엿들었다.

「당소 2호기! 돼지는 아직 못 찾았고, 추락현장엔 생존자의 움직임이 있습니다. 숫자는 둘. 여기서 보기에는 둘 다 경상자로 추정됩니다. 부조종석에도 사람이 보이는데 살아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탑승칸 내부는 확인이 불가능합니다. 오버!」

「당소 3호기. 상동이라고 알림! 오버!」

당연한 말이지만, 이들과 달리, 내게는 돼지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놈은 추락현장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거리를 좁히는 중이었다. 그 움직임이 기회를 노리는 육식동물과도 같아 새로운 흥미를 자아낸다. 거친 숨결은 훅훅 번지는 뜨거운 공기의 색채다. 누가 보더라도 증오로 움직이는 짐승의 모습이었다.

그러고 보면 앞서 죽인 돼지들 중엔 미성체와 암컷들이 섞여있었단 말이지…….

재미있다. 정말로 재미있어.

그레이스와의 조우로 못내 심란하던 내게, 지금의 여흥은 꽤나 각별한 것이었다.

「당소 2호기. 구조를 시도합니까? 줄사다리를 내려주면 최소한 경상자 둘은 끌어올릴 수 있을 겁니다.」

경량 헬기의 출력이 썩 높지 못하다곤 하나, 그래도 승객을 정원까지 태운 상태에서 죽은 돼지 몇 마리쯤 추가로 매달고 떠오를 여력이 있다. 사람 둘을 끌어올리는 건 문제도 아니라는 이야기. 그러나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닐슨이 그것을 지적했다.

「안 돼, 위험해! 줄사다리의 길이를 생각해야지!」

「아차.」

「하다못해 매달린 사람이 공격당하는 것만으로도 사고가 날 수도 있어!」

합당한 판단이다. 이렇게 망설이는 사이, 하늘에 뜬 두 헬기를 경계하던 돼지가 마침내 후속 공격에 돌입했다. 장애물을 피해 방향을 꺾어가며 가속에 들어가는 녀석.

「돼지 출현!」

2호기의 뒤늦은 경고성. 두 몰이꾼 파일럿이 반사적으로 고도를 올리는 순간, 세차게 돌진한 혼종 돼지가 더턴 측 생존자 하나를 맹렬하게 들이받았다. 생존자의 허리가 꺾이며 새로운 피가 사방으로 튀어 나간다. 번식기의 혼종에겐 멧돼지를 닮은 어금니가 나있었다. 사람을 어금니에 꽂아놓고 달리던 돼지가 아래로 머리를 내렸다가 스스로의 한계까지 쳐올렸다. 그 목 근육의 힘만으로 가까운 나무들의 꼭대기까지 날아오르는 인체. 부욱 찢어진 자리로부터 인간의 뜨거운 내용물이 싸구려 폭죽처럼 뿌려진다.

「하나님 맙소사…….」

나와 가까운 민병대원이 흘리는 신음.

더턴 경기병대의 남은 생존자가, 아마도 비명을 지르며, 찌그러진 헬기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직후 180도 반전하여 달려온 돼지가 헬기의 잔해를 들이받는다. 헬기가 처음 추락할 때만큼이나 강렬한 충돌음이 발생한다. 쾅, 쾅, 콰쾅! 돼지가 온몸으로 들이받을 때마다 남은 잔해가 실시간으로 해체되어 간다. 테일 붐이 꺾이고, 동체는 공처럼 구르며, 돼지 발굽에 차인 주익은 엿가락처럼 휘어버렸다.

「사격! 사격!」

파이오니어 사냥꾼 여단이 돼지에게 조준사격을 퍼붓는다. 내키지 않았지만 나 역시 쏘는 시늉은 했다. 눈으로 내 뜻을 묻는 경태에겐 가만히 고개를 흔들어주었고. 혹시라도 사람이 맞을까 조심스러운 사선들은, 그래도 돼지가 몸을 피하도록 만들기엔 충분한 위협이었다.

사라진 돼지를 확인한 닐슨이 곧바로 지시했다.

「3호기는 그대로 체공! 돼지의 추가 공격을 막아! 1호기와 2호기는 숲 바깥에 착륙한다!」

「착륙이라구요?!」

「그래! 1호기에서는 나와 잭이, 2호기에서는 아론과 코너가 내려서 추락현장에 도보로 접근한다! 나머지는 다시 이륙해서 공중엄호를 제공해!」

「미쳤습니까? 저 꼴을 보고도 걸어서 들어가겠다니!」

「이견은 받지 않겠다!」

「명령하지 마, 닐슨! 우리는 군인이 아니란 말이야!」

「그래! 군인이 아니라 민병대이자 사냥꾼이지! ‘고위험 사냥’을 하겠다고 자원해서 들어온 사냥꾼들! 이 일이 위험한 줄 몰랐다고 할 거면 여단에서 당장 나가! 애새끼처럼 징징대지 말고!」

이 뒤로도 조금 더 고성이 오간 끝에, 결국 세 대의 헬기는 닐슨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한 사람의 이탈자를 제외한 나머지 전원이. 나는 이러한 결정의 배경에 사명감과 명예욕이 각각 얼마의 비중으로 깔려있을지가 궁금해졌다.

헬기가 숲 바깥의 완만한 땅을 찾아 착륙하는 사이, 닐슨이 경태와 내게 양해를 구한다.

「또 한 번 죄송하게 됐습니다. 이 이상 정상적인 투어가 불가능해 보이니, 요금은 전액 환불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경태는 내 쪽을 바라보았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대신 저도 함께 들어가게 해주시죠.」

「예?!」

「사람을 구하는 일에 손을 보태고 싶은 것뿐입니다. 지상으로 접근할 팀은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저 한 사람만 가세하겠습니다.」

자신을 두고 간다는 소리에 눈이 동그래진 경태가 손가락으로 스스로를 가리켜보였으나, 난 재차 고개를 저었다. 닐슨은 나 하나가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큰 부담을 느끼는 중이었으니까.

적당한 핑계를 댔음에도 불구하고 닐슨은 굉장히 난감해했다. 그는 여러 이유를 들어 날 만류하려 들었지만, 이게 요금을 환불 받지 않는 조건이라고 강조하자 머뭇거리며 경태를 바라보다가 우울한 표정으로 설득을 단념했다. 일단 길게 끌 시간이 없거니와, 가장들을 책임지는 가장으로서 우리가 지불한 5,336달러는 가질 수만 있다면 가지고 싶은 돈이었겠지. 나를 상대로 강하게 나오기가 어려울 이유다.

헬기에서 내린 내게 닐슨이 대열의 중간에 낄 것을 요구했다.

“들것 운반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거친 바람과 엔진 소음을 깔아놓고 하는 대화라 서로에게 소리를 지르게 된다. 사람과 구난도구를 내려놓은 헬기는 곧바로 재이륙하여 추락현장 상공으로 기수를 돌렸다. 나는 접힌 들것을 어깨에 얹은 채 남은 한 손으로 소총을 들었다.

나까지 총 7인의 구조대가 조심스러운- 내 입장에선 감질나게 느려터진 속도로 숲의 경계에 들어섰다. 곳곳에 분포하는 각성수들이 각각의 마력장으로 능력자들의 감각을 교란하는 까닭에, 숲은 기본적으로 위험도가 높은 사냥터일 수밖에 없었다.

‘가능하다면 한번 살려볼까.’

내가 따라온 이유는 사람이 아니라 돼지의 목숨이었다. 비록 코드는 대단치 않았으되, 녀석은 그렇게 힘을 쓰고도 종양이 번지거나 내장이 상할 기미가 없었다. 요컨대 자질이든 운이든, 둘 중 하나는 그럭저럭 타고난 녀석이라는 뜻.

그럼 되도록 멀쩡하게 살려두는 편이 조금이라도 더 이득이다. 혹시 아는가? 훗날 더 발전된 코드를 품고서 다시 마주칠 날이 올는지. 그때까지 숨이 붙어있다면 그 자체가 하나의 품질보증인 셈이고, 죽는다면 그냥 거기까지인 것이다.

타타타탕!

“젠장!”

코끝에 가늘게 스치는 초연. 방아쇠를 당겼던 민병대원이 입술을 깨문다. 그가 쏜 것은 수십 미터 거리를 두고 찰나에 지나간 돼지의 실루엣이었다. 그 근처의 수풀이 흔들리기도 잠시. 가문비나무 군락은 다시금 조용한 겨울의 숲으로 되돌아갔다. 다른 동물들이 진즉에 다 달아나버린 탓에 내려앉는 정적의 무게가 한층 더 무거웠다.

타타탕! 이번에 울려 퍼진 총성은 내가 갈긴 삼점사다. 총을 옆구리에 끼고 지향사격으로 쏜 중량탄 세 발은 막 돌진을 개시하려던 돼지의 이마를 치고서 도탄(跳彈)되었다. 튕겨나가라고 일부러 높여 쏜 것. 습격을 포기한 돼지가 자리를 이동한다.

세 번째의 사격은 하늘에서 가해졌다. 2호기와 3호기가 가하는 십자포화는 사람의 피를 맛본 돼지를 또 한 차례 물러나도록 만들었다.

네 번째의 견제는 불필요했다. 추락현장이 그다지 깊지 않은 곳에 있었던 덕분. 난 들것을 놓고 돼지가 느릿느릿 간격을 좁혀오는 방향으로 갑작스레 돌출했다.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닐슨이 기겁을 한다. 그러나 잠깐이라도 구조대에서 멀어질 필요가 있었다. 정말 잠깐이면 된다. 앞으로 뛰어 구조대와 최소한의 간격을 확보한 나는, 마력장을 전면으로 팽창시켜 대마법사의 존재감을 폭사했다. 동시에 무릎 쏴 자세로 가하는 위장용의 위협사격.

「뀌이이이이익!」

소리만 요란한 총성 사이로 돼지의 비명이 들려왔다. 내 마력장을 감지한 돼지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넘어져선, 다급히 머리를 돌려 숨기 좋은 수풀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렇게 숨고서도 시선은 여전히 이쪽을 향하는 점이 기특하다. 녀석의 두개골엔 나의 존재감으로도 중화할 수 없는 적의가 들끓고 있는 것이었다.

뭐, 쉽게 다시 덤비지 못할 정도면 됐다.

닐슨 이하의 민병대원들에겐 내가 총을 쏴서 돼지를 쫓아낸 것처럼 보였을 터. 돼지의 비명까지 들렸으니 의심 받을 여지는 없었다.

“미안합니다.”

닐슨은 제 위치로 복귀하는 나의 사과를 떨떠름하게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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