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66화 (66/561)

#12. 사냥꾼들 (1)

12월에 다시 찾은 미국은 중국과는 다른 문제들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인종갈등으로 촉발된 시위와 폭동, 각성한 능력자들의 강력범죄, 불안정한 경제 상황과 요동치는 실업률, 마지막으로 다종다양한 생물재해들에 이르기까지. 연방정부가 특별재난구역으로 선포한 지역이 전국적으로 4백여 개소에 달하는 지경이니 안정과는 거리가 썩 먼 상태라 하겠다.

거의 1년 만에 돌아온 유타 주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리는 「전율하는 거인」으로부터 40킬로미터나 떨어진 리치필드에서 우선 짐을 풀어야 했는데, 전번에 이용했던 별장 단지들이 일찌감치 숲에 잡아먹힌 폐허가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현재 거인의 숲을 중심으로 반경 8마일(약 12.8킬로미터)은 수시로 상태가 달라지는 안개로 인해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적으로 허용되고 있었다. 연방재난관리청(FEMA)은 시민들에게 안개의 중심부로는 접근하지 말라는 강력한 권고를 내놓았다.

이상은 부하들을 시켜 가져온 지역신문의 머리기사에 실린 내용이었다. 1면의 절반을 차지하는 커다란 항공사진은 반경 수 마일에 걸쳐 불투명한 연회색 장막에 가려진 기이한 고지대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야 그렇겠지. 숲이 추위를 견뎌야 할 테니.’

해발고도가 높은 땅의 12월은 이미 겨울의 중턱이라고 표현해야 어울릴 시기다. 이곳 리치필드만 하더라도 사방천지가 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었으니까. 그러므로, 지난 1월에도 그러하였듯이, 거인이 짙은 안개로 이불을 지어 덮은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해야 할 터였다. 낮과 밤의 온도변화에 따라 두께와 형태를 달리하는 이불을.

1면의 기사 대부분은 내가 이곳으로 오기 전에 미리 알아본, 그리고 예상한 내용들을 담고 있었다. 신문을 다음 장으로 넘기니 상단에 이런 표제가 붙어있었다.

「거인의 왕국(Realm) - 그 안쪽의 적막하고 소름끼치는 풍경들」

2-3면에 걸친 표제 아래로는 짧은 설명을 곁들여 게재된 여러 장의 사진들을 볼 수 있었다. 능력자들로 구성된 연방정부의 조사단이 위험을 무릅쓰고 진입하여 확보한 자료들이라고.

대개의 사진들은 대동소이한 정경들을 담고 있었다. 하얀 안개와 하얀 눈밭과 하얀 줄기의 포플러 나무들. 짧은 가시거리는 또한 색이 하얀 캔버스가 되어, 모든 사진을 붓으로 그린 공상처럼 느껴지도록 만들었다. 숲에 파묻힌 건물들, 이따금씩 괴상하게 휘거나 부풀어 오른 나무줄기들, 그리고 포플러 클러스터에 완전히 둘러싸인 호수 정도를 제외하면 내가 악마숭배자들을 죽일 무렵과 달라진 게 없어 보이는 광경들이었다.

하지만 규모 면에선 확실한 차이가 있었다.

「……이 모든 이상 현상의 원인으로 추정되는 포플러 숲 「전율하는 거인」의 면적은 작년에 비해 최소 열일곱 배 넓어진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비정상적인 속도의 생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어, 하루가 지날 때마다 2~3에이커에 달하는 숲이 새롭게 만들어지는 상황이다.」

「FEMA 관계자는 그러나 「전율하는 거인」이 현 추세대로의 확장을 이어나간다 하더라도 세비어 카운티(Sevier County)가 사라지기까지는 1,682년, 유타 주 전체가 파묻히기까지는 7만 4천 4백 년이 걸릴 것이라고 밝히며, 안개와 숲의 확장속도를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고 있으므로 주민들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해달라는 입장을 내놓았다.」

「한편 지난 11월 30일 유사시 주방위군을 동원해서라도 ‘거인의 침략’을 저지하겠다고 선언했던 스펜서 모리스 주지사는…….」

다들 아주 난리로군.

내가 보기엔 조만간 시들해질 걱정이자 공포들이었다. 적게는 8만 년, 길게는 100만 년을 존재해온 숲이 그 저력을 아낌없이 드러내고는 있으되, 숙성된 영혼의 격에 어울리는 생체질량을 확보하고 나면 성장속도는 큰 폭으로 둔화될 가능성이 높았다.

언젠가 경태에게 말해주었듯이, 영이 나무라면 생체는 화분이다. 그러므로 「전율하는 거인」은 지금 제 영에 걸맞게 분갈이를 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필요 이상으로 생체질량을 팽창시킬 경우 영의 밀도가 감소하는 결과로 이어질 테니, 장구한 세월을 견뎌낸 영혼의 질이 아무리 좋다 한들 분명한 성장한계가 존재하는 셈이었다. 작금의 상황과 조사한 자료들을 보건대 그 한계라는 게 족히 수십만 톤은 될 것 같지만.

딸랑, 딸랑-

현관으로부터 작은 종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건 머리와 어깨에 눈이 쌓인 경호실 인원들. 난롯가에 앉아 소식을 기다리던 나는, 눈을 털어낸 경태가 거실에 이르기를 기다려 신문을 접으며 물었다.

“그래, 이 집이 이 꼴이 난 이유는 알아냈고?”

내 물음을 듣고서 움츠러드는 녀석이 하나 있었으니, 맞은편에 벌 받는 학생처럼 서있던 비서실 차장 홍영식이었다. 그 앞의 소파엔 평소보다 더욱 표정이 없는 수연이 정자세로 앉아 바깥 공기와도 같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

원인은 술 마시고 운전대를 잡은 놈이 전속력으로 차를 몰아 뚫고 지나간 것처럼 생긴 숙소의 상태다. 나무로 만든 벽은 픽업트럭이 드나들고도 남을 크기로 부서져, 앞뒤로 시원하게 통하는 바람이 이따금씩 난롯가까지 눈발을 실어오곤 하는 것이었다.

오는 길에 본 바로는 비단 이 건물만 박살난 게 아니긴 했지만.

경태는 힐끗 수연을 살피고서 입을 열었다.

“요 앞 잡화점 아가씨한테 듣자니 「티-호그」의 소행이라던데요.”

“그게 뭔데?”

“천 파운드(Thousand pounds)의 두문자 T에 돼지(Hog)의 호그를 합쳐서 티-호그(T-hog)랍니다. 토그(Thog)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지만, 티-호그 쪽이 일반적이라고 하네요. 티-렉스(T-rex)랑 비슷한 어감이라 더 잘 어울린다나 뭐라나.”

마법의 시대가 낳은 또 다른 신조어로군. 하루걸러 하루 꼴로 새로운 표현들이 만들어지고 부침(浮沈)을 거듭하는 혼란스러운 시국인지라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한마디로 각성한 돼지가 저질러놓은 짓이다?”

“아주 크고 무거운 야생 돼지 각성체가, 마찬가지로 신체능력이 비범한 사냥꾼들에게 쫓기면서 날뛰고 지나간 흔적이죠. 바로 어제 일어난 따끈따끈한 사고랍니다.”

어쩐지. 실내에 탄흔 두 개가 남아있고 거리에도 탄흔과 혈흔이 흩어져있었기에, 이 작은 소도시에서 능력자들의 무장폭동이라도 일어났는가 싶었다. 탄흔들이 묵직한 중량탄의 흔적이기도 했고. 회로가 뚫린 야생동물과 사냥꾼들의 조합이라면 남기고도 남을 법한 난장판이었다.

“알 만하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수연이 너는 그만 화를 풀어라. 우리가 생각하던 일이 아니라지 않으냐.”

“……송구합니다.”

홍영식이는 본사 현장지원팀과 협력하여 이곳에 적합한 숙소를 마련하고 환경적 위협평가를 수행하는 임무를 맡았었다. 내가 이곳으로 올 때 항구에서 동원했던 전투인력의 8할을 본사로 돌려보낸 것은, 이곳에서 고강도 교전이 발생할 확률은 희박하다는 홍영식이의 보고서를 토대로 내린 결정이었다. 많은 인원을 끌고 다니는 게 무조건적으로 현명한 방책은 아니니까.

그런데 막상 와서 마주한 숙소라는 게 로켓이라도 맞은 것처럼 박살이 나있으니, 직속상사인 수연의 심기가 불편해질 수밖에.

허나 간밤에 일어난 사고라면 미처 확인하지 못한 것도 충분히 이해해줄 수 있는 범위다. 각성한 대형 야생동물이 차량이나 가택을 들이받아 박살내는 것 정도는, 이제 지역 뉴스에서조차 개별 사건 단위로는 잘 다루지 않는 흔한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각각의 사고를 넘어 일상과 통계의 영역으로 접어드는 단계라 하겠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홍영식 차장이 고개를 숙인다.

“다른 숙소를 찾아보려고 노력해봤지만, 보고드렸다시피 호텔이란 호텔들이 전부 다 만실이어서-”

나는 손을 들어 말을 끊었다.

“됐다. 좀 든든하게 먹고 자면 그만이지.”

신체강화 술식을 활성화시켜놓으면 영하 10도 어림의 추위쯤은 아무 것도 아니다. 추위에 비례하는 열량 소모가 있겠으나 이 또한 문제라고 볼 수는 없다. 불침번을 설 녀석들은 잠이 조금 부족해질 테지만.

이는 과거보다 회로의 가동률이 많이 향상되었기에 부릴 수 있는 여유였다. 회로 점유율이 낮은 술식이라면 자는 중에도 돌리는 게 가능해졌으니, 작은 술식 하나에도 최선을 다해야만 했던 시절에 비하면 말도 안 될 만큼의 발전을 이룩한 셈이었다.

‘그러고 보면 1년째가 되기까지 열흘밖에 안 남았나.’

마소의 갑작스러운 범람을 느낀 게 작년 12월 10일의 일이었으니, 앞으로 열흘만 지나면 마법의 시대가 돌아온 지 꼭 1년째가 된다. 처음 몇 달간은 마소가 다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자주 했었지만, 근래엔 그런 생각을 한 횟수가 손에 꼽을 만큼 줄어들었다. 의미가 없다는 것을 머리만이 아니라 가슴으로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형님.”

경태가 부른다.

“한 바퀴 쭉 둘러보면서 느낀 건데 말입니다, 이제는 이 근처에 고정적으로 인력을 배치해도 될 것 같지 않습니까? 어중이떠중이들이 하도 많이 진을 치고 있어서, 우리가 사무실 하나 더해봐야 아무런 티가 나지 않을 겁니다.”

“그 정도냐?”

“예. 일단 이것들부터 좀 보십시오.”

경태는 밖에서부터 들고 온 팸플릿들을 탁자 위로 주르륵 펼쳐놓았다. 그냥 잡다한 광고지인줄 알고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막상 눈길을 주니 밖에다 버리지 않고 가져온 이유가 있는 홍보물들이었다. 나는 그중 하나를 집어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이놈들이 대놓고 활동을 한다고?”

“남쪽에 있는 여관 세 동을 꽉 채운 게 바로 걔들입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깃발 걸고 캠핑하는 놈들도 세기 어려울 만큼 많고요. 재밌지 않습니까?”

“왜 보고서엔 이런 내용이 빠져 있었지?”

내가 슬쩍 바라보자, 다시 한 번 움츠러든 홍영식 차장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디까지나 위협 평가 보고였기 때문에, 그, 형님께 위해가 될 세력은 아니라고 봤습니다. 경찰의 통제에도 순순히 따르고 있고…….”

글쎄. 순수하게 위험한 정도만을 따진다면 광견병 걸린 들개 수준인 녀석들이긴 하지만, 그래도 보고서에는 이름을 올렸어야 할 놈들 같은데.

난 이런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수연의 온도가 다시금 떨어지고 있었던 까닭이다. 더욱이, 홍영식이는 이 녀석들의 이력을 몰랐을 것이었다. 미리 교육시킨 잠재적 적성단체 및 고위험 단체 목록에도 없는 단체이며, 그렇다고 악명이 높은 놈들도 아니니까. 잡다한 놈들의 정보까지 죄다 외우고 다니는 수연 쪽이 오히려 비정상인 것이다.

고로 실수는 실수이되 이 역시 이해를 해줄 수 있는 범위다. 홍영식이의 불행은 그런 실수가 두 번이나 겹쳤다는 것.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없는 단체라곤 하나 내 안전과 관련된 것이고 보면 조금 더 깊게 조사를 해봤어야 바람직하다.

나는 다시금 팸플릿을 들여다보았다. 익살맞게 생긴 요정 캐릭터가 두 손으로 지구를 받쳐 들고 환하게 웃는 그림 아래, 동화책의 표지에나 어울릴 법한 글씨체로 단체의 이름이 인쇄되어 있었다.

「지구해방전선(Earth Liberation Front) - 엘프(ELF)」

이 조직의 정체성은 요정 캐릭터가 휴대한 한 자루의 총에 집약되어 있다. 스스로를 요정들(Elves)이라고 부르는 이 친환경적 무정부주의자들은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파괴와 공포가 필요하다고 믿는 테러리스트 집단이기도 하다.

일반적인 오해와 달리, 미국에서 가장 많은 테러를 자행하는 집단은 극단주의 이슬람 세력도 아니고 극우 인종차별주의자들도 아니다. 극단적 환경주의자들과 동물보호 운동가들이지.

그중에서도 세력이 가장 강한 단체가 바로 이 지구해방전선이었다. 만들어지기는 영국 땅에서 만들어졌으되 악명은 미국 땅에서 더 높고, 회원들의 규모와 세력 또한 미국 쪽이 더 크다. 오죽하면 FBI가 미국 내에 존재하는 가장 심각한 위협들 가운데 하나로 지목했을까. 휘하엔 「지구해방군(Earth Liberation Force)」이라고 부르는 행동타격대마저 거느리고 있으며, 약자는 상급조직과 똑같은 ELF를 쓴다.

경태가 이 녀석들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던 건 지금보다 서열이 낮던 시절 장기 출장을 나와 ‘컨설팅’을 해주었던 기억 덕분일 터였다. 사제폭탄 제조법과 파괴공학 강의, 효과적인 방화기술 및 추적과 수사를 회피하기 위한 노하우 전수 등. 우리는 결코 완제품을 팔아서만 이익을 내는 조직이 아니다.

“지지자들이 어지간히 많아졌나보군.”

그렇지 않고서야 FBI가 테러단체로 지정한 놈들이 거리에서 홍보지를 나눠줄 수 있을 리가 없잖은가. 내 중얼거림을 경태가 긍정한다.

“그럴 만도 하죠. 포플러 숲이 엄청난 존재감을 과시하고 야생 돼지가 초능력을 쓰는 시대잖습니까. 단순한 신념을 넘어 종교가 만들어져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나는 홍보지를 펼쳤다. 두 번 접은 소책자의 안쪽 면엔 이런 문장들이 찍혀있었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들이 분노하기 시작했다!」

「죄 많은 인류는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겐 어떤 지혜가 필요한가?」

「이제는 위대한 자연이 전하는 영혼의 복음에 겸허히 귀를 기울여야 할 때.」

「우리 요정들은 언제나 새로운 친구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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