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망중한 (6)
첫째. 나 개인의 문제.
내가 필요하다면 핵이라도 밀수해서 터트리겠노라 언명한 바 있으나, 그건 말 그대로 필요할 경우- 고쳐 말해 그것 이외의 선택지가 없을 때의 이야기였다. 나는 그 필요의 선을 어느 수위에 그어야 하는가? 어린애들을 포함하여 수백만을 몰살시키면서까지 승리를 쟁취해야만 하는가? 필요의 선 말고도 내가 고려해야만 하는 선이 하나 더 있지는 않은가?
이것은 양심의 외침이기 이전에 혐오의 외침이다.
나는 제국주의자들이 싫다.
옳고 그름을 떠나 그냥 생리적으로 싫다.
내 비록 그들과는 다른 가치와 결과를 지향한다지만, 방법론적인 차원에서 그들과 나를 구분 짓는 선은 대부분 단위에 달려있을 따름이다. 욕망의 저울에 올려놓는 희생물의 단위. 그 단위를 지나치게 키우는 길은 내게 있어 바퀴벌레가 급류처럼 들끓는 터널을 맨발로 나아가는 길과 같다. 목숨이 경각에 걸리기 전엔 짜증이 나서라도 걷기 싫은 길인 것이다.
동기가 윤리와 무관하기에, 제국주의자들의 세계질서 건설 저지란 그저 부하들에게 주입할 사상적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여기서 두 번째 문제가 파생된다.
이 잔혹한 계획을 누구에게 맡겨야 좋은가?
명분으로 수단을 정당화하는 데엔 한계가 있는 법. 생물학적 테러를 준비하는 과정은 충성스러운 부하들에게도 도덕적인 고뇌를 안겨줄 것이다. 질병의 확산 제한이 백 퍼센트 성공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그렇다고 저 위에서 허구한 날 주체의 핵탄이니 뭐니 지랄하는 머저리들 수준으로 부하들을 세뇌하려 들었다간, 합리적인 사고능력을 잃어버린 부하들이 무슨 사고를 터트릴지 모를 노릇이었고.
경태와 수연을 비롯해 전직 비서실장과 경호실장 등 몇 명 정도는 믿어 봐도 되겠지. 흔들릴 여지가 전무하다기보다는, 흔들리더라도 반드시 내게 먼저 털어놓을 녀석들이라는 점에서. 그러나 이들 소수에게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과정을 맡기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싱가포르에서 수연이 했던 말을 회상했다.
「저는 형님께서 원하신다면 당장이라도 칼을 들고 나가서 눈에 띄는 모든 사람들을, 애와 어른을 가리지 않고 찔러 죽일 수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든, 내가 의지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맹목성.
내 시선을 느꼈는지 수연이 고개를 돌린다. 보기 드물게 아리송한 표정으로.
“혹시 페루쵸가 신경 쓰이십니까?”
“뭐라고?”
“마리아 양의 아버지, 항만공무원 페드로 산토스 산체스 말입니다.”
“안 잊어버렸다. 그런데 그놈 이야기가 왜 나오는 거냐?”
“……뉴스를 들으시고서 이쪽을 보시는 줄 알았습니다. 아니었나보군요.”
뉴스? 나는 이제야 늘어진 이어폰 한쪽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인지했다. 이제까지는 그저 배경소음으로 흘려듣고 있었던 아나운서의 음성을. 내 관심을 의식한 수연은 앉아있던 의자를 틀어 대화하기에 좋은 각도를 잡고, 노트북으로부터 이어폰 잭을 제거하여 항구의 근황을 전하는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하도록 만들었다.
「……사망한 엘 후에고의 자택에서 발견된 한 장의 계약서가 푸에르토 바야르타 지역사회에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었죠. 이 계약서상에 존재하는 바퀴야노 시장의 서명과 지장이 위조가 아닌 것으로 판명됨에 따라, 한국인 사업가 후앙의 실종사건이 정치적인 스캔들로 비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의혹의 중심에 선 바퀴야노 시장은 기자회견을 열어 “계약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시날로아 카르텔 측의 협박과 위협이 있었다.”고 밝히고,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후앙과 더불어 바퀴야노 자신 역시 한 사람의 피해자에 불과하다고 해명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바퀴야노 시장의 혐의를 처음으로 제기했던 항만사무소 주사보 페드로 산토스 산체스 씨는 시장의 해명을 터무니없는 거짓이라고 일축하며, 자신이 보았던 시장의 미소는 결코 강압의 결과물이 아니었노라 주장하였습니다. 산체스 씨는 또한 자신과 함께하는 시민들의 연대가 바퀴야노 시장을 비롯한 부패 관료들을 반드시 심판대에 세울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주멕시코 한국 대사관은 ‘후앙’이라는 사업가의 신분 확인이 어렵다며-」
“이상하군.”
뉴스를 듣던 나는 페루쵸에 대한 의문을 느꼈다.
“분명 이렇게까지 나설 만한 인간이 아니었을 텐데. 목숨이 아깝지 않은 건가?”
내가 보았던 그 배불뚝이는 약함을 올바름과 혼동하는 자기중심적 소시민 그 자체였다. 후앙을 추종하는 그의 동기는 오로지 그 자신과 딸의 인생에 국한된 것이었고. 비록 후앙의 실종이 그에게 크나큰 좌절을 안겨주었을지라도, 그 울분과 생존을 저울질한다면 반드시 생존으로 눈금이 기울 그런 소인배였다.
지금 페루쵸가 하는 짓은 사실상의 자살행위에 가깝다. 바퀴야노 시장이든 길거리로 숨어든 엘 띠로와 그 부하들이든, 주제도 모르고 자신들을 도발하는 하급 공무원을 살려두려고 하지 않을 것이었다.
수연이 내 의문에 답했다.
“마리아 양이 죽었답니다.”
“어쩌다가?”
“그날 밤, 도시를 빠져나가던 도중 괴한의 총에 맞았다고 하더군요. 치명상은 아니었지만, 습격자에게 차량을 강탈당한 데다 병원까지 가는 길이 봉쇄되어있었기 때문에 제때 치료를 받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페루쵸는 습격자의 정체가 시날로아 카르텔의 패잔병이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안면에 시날로아 특유의 문신이 있었다는 모양입니다.”
아아. 그림이 그려진다. 피를 흘리며 점차 서늘하게 식어가는 딸을 안고서, 본인은 땀과 눈물을 흘리며 총성과 매연이 가득한 밤거리를 헤매는 배불뚝이 공무원의 그림이.
그런 경험을 했다면 사람이 달라질 수도 있을 테지. 그것이 비가역적 변화인가, 아니면 분노와 슬픔이 타오를 동안의 한시적인 변화인가까지는 알 수 없겠지만.
“오래 살진 못하겠구나.”
죽든 살든 큰 차이는 없는 인간이어도, 알아서 죽어준다면 나쁠 것 없다. 위장신분으로서의 후앙이 남긴 흔적은 이르게 지워질수록 이로울 테니까.
그러나 수연은 다른 예측을 내놓았다.
“어쩌면 의외로 명줄이 길어질지 모릅니다.”
“왜?”
“후앙을 추모하는 시민들이 그를 중심으로 모여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장에 대한 의혹을 제기함으로써 얼굴과 사연이 매스컴을 탄 덕분이겠죠. 그러한 움직임의 중심인물로서, 페루쵸는 멕시코 정부와 FPDA+1이 내세우기에 좋을 새로운 얼굴입니다. 지역사회가 맞이한 긍정적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줄 간판 말입니다.”
“……그 인간을 정치판에 내보낸다고?”
“현 시장이 탄핵을 당하여 보궐선거가 실시된다면 가능성은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죽은 후앙에 대한 시민들의 호감을 높은 비율로 흡수할 수 있습니다. 공개적인 자리마다 형님께 붙어 다니며 현지 비서 역할을 수행했었으니까요.”
“의도치 않게 선거운동을 도와준 셈인가.”
“예.”
“조금 곤란한데.”
수연의 예측은 의외로 현실적인 것이었다. 지지기반이 후앙의 도움을 받은 시민들이고 내세울 경력도 후앙의 측근 노릇을 했던 것뿐이므로, 지역 정계에 등판한 페루쵸는 정치생명이 이어지는 한 계속해서 후앙의 이름을 주워섬길 수밖에 없었다.
죽일까?
나는 손끝으로 팔걸이를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위장신분으로서의 후앙이 문제를 일으킬 여지는 희박한 편이었다. 태어난 국가만 한국으로 되어있을 뿐 실제 국적은 콜롬비아에 두었으며, 콜롬비아는 현재 주변국과 전쟁 중인 상태였다.
‘일개 사업가의 신분확인을 위한 요청에 성실하게 응할 만한 상황이 아니지. 하물며 국가 차원의 요청조차도 아닐 것을.’
한편 내가 후앙의 이름으로 사용한 모든 자산은, 그 애플 사(社)의 악명 높은 탈세구조 이상으로 복잡하게 꼬아놓은 페이퍼 컴퍼니들 간의 자금이동을 통해 준비되었기도 하다. 이러한 자금운반 경로는 현장지원팀이 10년 넘게 공을 들여 완성한 작품이었다.
그럼에도 페루쵸를 살려두자니 영 개운치가 않은 것이다.
“그 녀석을 어떻게 하면 좋을 것 같으냐?”
이쯤에서 나올 질문을 예상하고 있었는지, 수연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죽여도 좋고 살려도 좋습니다.”
“죽여서 좋을 이유는 알겠다만, 살려서 좋을 이유가 뭐지?”
“후앙의 죽음은, 가장 화제가 되어야 할 지금도 국제적인 주목은커녕 국내적인 주목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홍콩 행정장관 암살 미수 사건, 중국 공산당 고위 공직자 자택 연쇄 도난 사건, 서구진영과 중국의 대립, 급증하는 해적 피해, 일본 어선들의 연이은 실종, 아프리카 전역에 걸쳐 격화되는 내전, 끝이 보이지 않는 미국 흑인들의 무장시위와 약탈, 파리에서 발생한 테러, 남미에서 터진 전쟁…….”
국제적인 토픽들을 무작위로 나열한 수연이 고개를 저어 보인다.
“형님께서도 알고 계시잖습니까. 한동안 세계가 조용해질 일은 없을 거란 사실을. 후앙의 죽음은 원탁의 이목을 끌 법한 사건이 못 됩니다. 차라리 누구든 페루쵸를 이용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는 편이 이득이죠. 배후세력들의 관심이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집중될 테니까요.”
하긴…….
기실 나 역시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되, 순간적으로 도진 사냥감으로서의 강박증이자 강박증이 부른 원근감의 왜곡이었다. 이렇게 크게 볼 일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주제 자체가 맥락 없이 나온 것이다 보니 내놓는 말에 사려가 깊지 못한 면도 있었다. 이 순간에도 흐르는 의식의 절반쯤은 런던 공략계획의 딜레마에 기울어 있었으므로.
재차 곱씹어보건대, 죽여야 한다고 친들 나중에 죽여도 무방할 듯하다. 페루쵸에 대한 관심들이 잦아들기를 기다려서. 지금은 많은 시민들이 페루쵸를 지지해주고 있더라도, 정치판에 진출하고서 자신의 지지층을 실망시키지 않는 정치인이란 희귀동물보다도 드물기 마련이었다. 개인의 성향을 떠나 환경상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어버리기에.
하물며 그 환경이 부패한 멕시코의 정계라면야. 페루쵸에겐 멕시코의 기름이 없다. 정치적인 배경도, 경제적인 자산도. 그런즉, 그는 채 1년이 지나기도 전에 컬트적인 지지자들을 제외한 나머지 지지층 전부를 상실할 확률이 높다.
생각이 조금만 더 길었어도 하지 않았을 질문을 한 셈이다.
“못난 모습을 보였구나.”
“아닙니다. 편집한 녹취록은 페루쵸가 불리해질 경우 익명의 제보로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좋겠지.”
조금 불편해하는 수연을 위해, 나는 화제를 무난한 쪽으로 바꾸었다.
“「흑해자당」에 관한 새로운 소식은 있나?”
흑해자당(黑孩子黨)이란 요즘 중국에서 의적(義賊) 활동에 매진하는 각성자 무리가 스스로를 자칭하는 이름이었다. 공산당 간부들의 집만 골라서 털어대는 명분 좋은 도둑 집단.
“다른 사안들과 함께 나중에 보고 드리려 했습니다만, 지금 들으시겠습니까?”
지금은 좀 더 쉬셔야 하지 않겠느냐는 뜻을 완곡하게 담은 수연의 반문. 애초에 페루쵸 이야기도 의도치 않게 나온 것이었으니. 그러나 이미 김이 빠져버린 휴식이었다.
“듣겠다.”
“……국제사업부 서갑수 부장과 박미주 차장이 현지의 인맥들에게 수소문해본 결과, 광둥성과 하이난성에서만 최소 일곱 명의 지방 상무위원급 간부가 피해를 당한 것으로 추정된답니다.”
“일곱? 상무위원급으로 일곱 건이라고?”
“예. 광저우시 서기 마오샤오두(毛晓渡), 하이난성 상임위원회 사무차장 양홍종(杨鸿忠), 하이난성 규율검사위원회 지방국장 펑춘란(彭春兰), 광둥성 선전장관 쑨시(孙希)…….”
수연이 불러주는 직급과 이름들을 듣고 나서, 나는 다소 어이없는 심정으로 말했다.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면 중국 경제에 폭탄이 터지게 생겼구나.”
한낱 도둑질을 가지고 경제에 폭탄 운운하는 것도 우습지만, 난 결코 농담으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