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61화 (61/561)

#11. 망중한 (3)

하역을 마치고 연료와 물자를 보충한 다목적선 사파이어 익스프레스 호는, 이후 다시 출항하여 마리에타 제도 인근 해상에서 엘 후에고의 요트와 접선했다. 섬 그늘에 숨어있던 요트의 화물은 무엇 하나 남김없이 다목적선의 갑판 아래로 옮겨졌다. 코카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리 조직은 마약류를 취급하지 않지만, 그래도 가치가 높은 전리품인 만큼 일단은 보관해 두기로 결정한 것이다.

하루가 지난 지금, 한적한 해변의 안전가옥에서 새 아침을 맞은 나는 수연으로부터 전리품의 상세를 듣고 있었다.

“정제 코카인 약 5톤, 2천 2백만 멕시코 페소와 미화 3백 8십만 달러, 은 227킬로그램, 금 45킬로그램, 백금 4킬로그램, 팔라듐 9킬로그램, 그 외에 약간의 로듐과 무기명 증권, 보석류 등이 있습니다. 현 시점에서 코카인과 보석류를 제외한 나머지의 합산 가치는 822만 7,833달러, 한화로는 약 98억 4천만 원이 됩니다.”

코카인의 가치는 산정하기 어렵다. 미국을 비롯한 주요 시장들의 평균 소매가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대략 15조 원에 달하는 물량이지만, 마약은 취급에 따르는 리스크가 크고 유통비용이 많이 드는 상품인 데다 내겐 이것을 현금화할 계획이 없었다.

나는 수연에게 질문했다.

“배는 어디로 가는 중이지?”

항구에서의 마지막 사냥은 예정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하역을 마친 화물선의 행선지 또한 원래의 계획과는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결정권자인 나는 사냥을 끝내고서 사흘간에 걸쳐 거의 혼수상태에 빠져있다시피 하였으므로, 사파이어 익스프레스의 다음 정박지를 결정한 사람은 사실상의 2인자인 수연이었다.

수연이 질문에 답했다.

“피지의 레부카 항입니다.”

레부카는 피지 공화국의 옛 수도로서 태평양 남서해역에 면한 작은 항구도시였다. 나는 살짝 미간을 좁혔다. 그 항구에 해상밀수용 거점이 있다는 사실까진 기억하고 있었으나, 자주 이용하는 거점이 아니었기에 자세한 사항들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쪽 창고가 코카인을 묵히기에 적합한가? 몇 년 전에 크게 박살이 났다는 보고를 받은 기억이 있다만.”

“16년의 태풍 윈스턴 때입니다. 당시 손상된 원래의 시설을 복구하는 대신, 지대가 높은 부지들을 매입하여 다섯 동의 새로운 위장창고를 건설하도록 지시하셨습니다. 완전면진(完全免震) 설계를 적용하여 18년의 대지진도 견뎌낸 견고한 시설이니, 코카인이 상할 우려는 없다고 보셔도 무방합니다.”

아아, 이제야 기억이 되살아난다. 그때 어떤 보고를 받았는지, 어떻게 일을 처리했는지. 기억이 정확해진 나는 수연의 설명에 한 가지 사소한 오류가 있음도 깨달았다.

‘지시가 아니라 승인이었을 텐데.’

그때는 수연이 비서실장 자리에 오르기 전이었지만, 전대 실장은 이 녀석을 이미 제 후임자로 점찍어둔 상태였다. 전대 녀석이 말하기를, 자기가 자리를 오래 지킬수록 오히려 불충이 되게끔 만드는 인재라던가. 자신의 자리를 바라는 묵묵한 열망에 기가 질린다고도 했었지. 내가 보기에도 전대 놈은 반쯤 도망치는 것처럼 자리를 옮겨갔다.

레부카의 시설이전은 당시에도 이미 실세였던 수연이 주도적으로 추진한 사안이었다. 원양어선들의 기착지로서 외국 선박이 자주 드나들어도 의심을 받지 않으리라는 점, 약간의 돈으로도 권력의 비호를 받을 수 있다는 점, 재해가 잦아 다른 조직들은 거점을 설치하기 꺼릴 거라는 점 등을 근거로 들어, 한 번만 잘 공을 들여놓으면 각국 수사기관들의 감시를 피해 상품을 은닉하기 좋을 장소라고 했었지. 이는 추후 태평양 도서지역의 거점들을 보강하는 계획으로 이어졌으며, 이 계획 역시 수연의 주관 하에 이루어졌다.

그런데도 승인을 지시로 바꿔 말한 이유가 뭘까. 거짓으로 아첨을 할 녀석은 아니건만. 내가 이런 아첨을 싫어한다는 것도 알고.

‘혹시 기억이 바뀌었나?’

부하들 가운데 종종 그런 녀석들이 있었다. 충성심이 과해서 저가 다 이룬 일도 진심으로 내 덕분이라고 믿어버리는. 이는 한편으로는 심리적인 의존이기도 했다. 이성과 마찬가지로, 기억은 감정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수연이라고 예외가 될 순 없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나는 내가 무의식중에 이 녀석을 모든 군상의 예외로 취급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결코 그럴 수가 없는데도. 이건 나라는 인간의 허술함이었다.

수연이 길어지는 정적을 오해하여 묻는다.

“배의 행선지를 바꿀까요?”

“아니.”

상념을 떨친 나는 화제를 무난한 쪽으로 바꾸었다.

“이번에 얻은 코카인은 어떻게 써야 이상적일 것 같으냐?”

“현재로선 두 가지 방안이 있습니다.”

언제나처럼 빠르게도 나오는 대답.

“첫 번째는 현금을 갈음하는 지불수단으로서 특정 조직에 블록 딜로 넘겨주는 것입니다. 「브라츠키 크루그」와 「야마구치구미」라면 이 물량을 받아낼 여력이 있을 겁니다.”

“다음.”

“두 번째는 공격과 외교의 도구로 활용하는 것입니다. 형님께서 교육하신 바 악마숭배교단 「칠각기사단(O7A)」은 교주 그레이스가 런던의 원탁과 원수나 다름없는 관계라고 하셨지요. 우리는 5톤의 정제 코카인을 선물함으로써 그들에게 막대한 자금력을 부여할 수 있습니다. 영국은 마약중독과 범죄율 증가, 그리고 종교적 테러리즘 확산의 삼중고를 겪게 될 겁니다.”

“…….”

첫 번째는 너무 뻔했지만 두 번째는 아니었다.

그래. 칠각기사단의 수중에 들어간 코카인은 훌륭한 폭발력을 발휘할 것이다. 고순도 정제 코카인 5톤은 크랙(Crack)으로 가공하면 1억 8천만 명이 투약하고도 남을 양이니까. 순도를 쓰레기 수준으로 낮출 경우 2억 3천만까지도 가능하겠다. 가공하기도 매우 쉽다. 베이킹파우더를 넣고 볶기만 하면 끝이므로. 칠각기사단쯤 되는 놈들이 그 간단한 제법을 모르진 않겠지.

그레이스와의 협력체제 구축은 나 또한 틈 날 때마다 숙고를 거듭하던 화두다.

가능할까?

‘그러자면 저쪽에 내 존재를 드러낼 수밖에 없는데…….’

바보가 아닌 이상, 그레이스가 이쪽의 정체도 모르면서 고맙다고 선물을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저 원탁의 추적을 반세기 넘게 따돌려온 마녀가 아닌가. 객관적으로 그녀는 나 이상의 도망자이자 나를 능가하는 투사이다. 한화로 15조 원, 100억 파운드어치의 마약이 공짜로 굴러들어오면? 당연히 의심부터 하고 보겠지.

문제는 그 여자의 정신상태다. 그녀의 정신머리가 과연 온전하기나 할까? 대화가 성립하는 합리성은 도망자와 투사로서의 역량과 별개의 요소이다. 상관관계는 있을지언정 반드시 비례하지는 않는. 필요에 따라 소화하는 역할이라곤 하나, 상대는 인신공양을 기본으로 아는 미치광이들을 반백년 간 이끌어온 교주였다.

무엇보다, 내 존재를 설명할 방법부터가 마땅치 않다. 원탁의 마스터가 나이 어린 영혼 하나를 어쩌지 못하여 애 머릿속에 갇혀 마력고갈로 뒤졌노라 말할 경우, 그레이스가 보여줄 가장 유력한 반응이란 한바탕 웃고 나서 이쪽에다 총탄과 마법을 갈겨대는 것일 테지.

“자, 두 분. 식사하실 시간입니다.”

경태가 큰 쟁반에 식기와 먹거리를 올려 가져왔다. 메인은 멕시코 식으로 지은 쌀밥과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고기 스튜의 일종이었고, 사이드는 한 바구니의 아보카도와 토핑용 베이컨 칩이었다.

수연과의 논의는 자연스럽게 중단되었다. 탁자 위의 서류를 한쪽으로 치우자 경태가 그 위에 천을 깔고 식기를 세팅한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제가 직접 만들었거든요.”

“직접? 이게 무슨 요리냐.”

“기사도(Guisado)라는 치킨 스튜입니다. 인터넷에 레시피가 있더라고요.”

“…….”

“처음 해보는 멕시코 요리인데도 의외로 잘 됐지 뭡니까. 형님께 올리기에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말이죠. 하하!”

기사도와 아보카도라니. 경태다운 메뉴 선정이라 해야 할 것이다.

마약류를 제외하면, 아보카도는 멕시코가 수출하는 가장 가치 있는 상품작물이었다. 멕시코는 세계 제일의 아보카도 생산국이며, 그 산출의 대부분이 미초아깐 주(州) 한 곳에서 나온다. 그리고 이 미초아깐 주는 그제부로 소멸한 템플 기사단 카르텔의 근거지였다.

텍사스의 리까르도가 가짜 성전기사들을 농부라고 불렀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카르텔이 직접 과일 농사를 지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들은 아보카도가 아니라 아보카도를 실은 트럭이나 결실을 맺은 농장들을 수확했다. 이는 그들이 기사도에 따라 거두는 세금이었다. 수연이 사전에 세력정보를 수집한 바, 템플 기사단이 이 「녹색 황금」을 취급하여 벌어들인 순이익은 작년 한 해에만 약 40억 페소에 이른다. 한화로는 대강 2천억 가량 되는 금액.

바구니에 담긴 아보카도는 알이 굵으면서 숙성 상태가 좋았다. 후숙을 거치고도 겉이 너무 물러지지 않는 신선함. 출하기의 산지가 바로 아래에 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 기사단의 영지에 거하는 농부들은 짧은 평화와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었다. 다른 카르텔이 그들을 찾아가기 전까지는.

‘이런 작물도 보다 귀해질 날이 오겠지.’

수확을 마친 작물들 또한 마소의 영향을 받는 유기체이긴 마찬가지 아닌가. 씨앗엔 식물의 영혼이 잠들어있다. 그러므로 얼마간의 시간이 더 흐르고 나면, 저장창고에서 죽지 않는 암세포들이 생겨나거나 씨앗이 마력을 양분삼아 발아하는 등등의 일들이 빈발할 것이다. 나는 일찌감치 여의도 김씨에게 식량자원에 대한 투자를 늘리도록 일러두었다.

국자를 잡은 경태가 삼인분의 그릇에 스튜를 퍼 담는다. 내 몫은 다른 그릇에 담긴 양의 두 배였다. 닭 한 마리 분량의 살이 다 들어간 듯하다. 따로 주는 밥의 양도 만만치 않았다.

“많이 드셔야 합니다, 형님.”

“……다른 애들은?”

“걱정 마십쇼. 잘 먹고 잘 쉬게끔 조치했습니다. 이런 데서는 각자 좋을 대로 만들어먹는 재미가 있죠.”

“잘했다.”

둘이 기다리는 가운데 내가 먼저 스푼을 들어 스튜를 맛보았다. 간이 조금 센 감이 있으나 전반적으론 나쁘지 않다. 요리사에 대한 편견 때문일까, 외견상으론 걸쭉한 고추장찌개처럼 보이는 것이 이국적인 향과 산미를 거북스럽지 않게 담아내고 있었다.

“괜찮구나.”

“그렇지요?”

“너희도 들어라. 따뜻할 때 먹어야지.”

“옙.”

경태는 좋다고 웃으며 그릇과 식기를 함께 들고 먹기 시작했다. 첫 입에 한 번 눈을 찌푸렸던 수연도 조용하게 그릇을 비워간다.

식후엔 아보카도에 무알콜 샴페인을 곁들였다. 들을 보고도 많고 밀린 결재도 많은데 진짜 술을 입에 댈 순 없는 노릇이니까.

“알코올 기운이 없으니 좀 서운하네요.”

군용 대검(帶劍)으로 아보카도를 자르는 경태의 아쉬움. 대검은 영국군에게서 노획한 전리품이었다. 열매를 반으로 가른 경태가 과육에 박힌 크고 동그란 씨를 칼끝으로 찍어 뽑아낸다. 가볍게 비트는 것만으로도 똑 떨어져 나오는 씨앗. 남은 껍질을 세로로 그어 한쪽씩 차례로 벗겨내니 가장자리에 녹색이 감도는 노란 과육만이 남는다. 큼지막한 덩치가 작은 열매를 쥐고 집중하여 칼질을 하는 모양새가 우습다.

“자, 이것도 형님부……터?”

내 앞엔 벌써 편편이 썰린 과육이 한 접시 놓여있었다. 경태가 수연을 돌아본다. 수연은 차분히 두 개째의 열매를 손질하는 중이었다.

“에이…….”

쓸데없이 실망하는 경태로부터 왠지 모를 데자뷰를 느낀다. 이 녀석들이 종종 헛짓거리를 하는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니까. 저가 자른 과육을 내 접시에 더한 녀석이 이제 제 몫을 준비하며 묻는다.

“형님. 그 마르띠네즈 제독은 얼마나 키워주실 생각이십니까?”

“키운다고?”

“사실상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말고는 판로도 없고, 돈을 줘도 이쪽에서 세탁까지 끝내서 줘야 하고, 현재로선 공급 가능한 물량이 많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상품이 특별하거나 단가가 싸지도 않고……. 결국 그 사람이 얼마나 커지느냐는 형님께서 얼마나 떠먹여 주시는가에 달려있는 거죠.”

“그렇다 치고, 특별히 물어보는 이유가 있나?”

“제가 어제 그 우나쁘로쁘(항만경비대) 친구들을 쫙 살펴보지 않았겠습니까? 형님께서 제독과 대화를 나누시던 중에 말입니다.”

“그런데?”

“그 친구들 천생 군인이더라고요. 그런 친구들이 제독을 엄청 따르는 티가 나더라 이겁니다. 다들 훈련소를 갓 나온 신병들처럼 빳빳하게 서서는 눈에 쌍으로 불을 켜고 있는데, 와, 감탄스럽던데요? 겉으로만 그럴듯한 기강이 아니었습니다.”

“그랬단 말이지…….”

“예.”

거기까지 신경 쓰진 못했지만, 경태가 그렇게 보았다면 정녕 그러할 것이다. 이는 제독이라는 인간의 품질보증이었다.

산지 근처에서 먹는 아보카도는 원래 기억하던 맛보다 조금 더 기름지고 조금 더 고소했다. 열매의 느끼함과 스파클링 와인의 산뜻함이 좋은 조화를 이루었다.

경태가 말한다.

“수연 누님처럼 이것저것 다 계산하고 드리는 말씀은 아닙니다만, 그 제독 잘만 키워주면 어려울 때도 믿을 수 있는 거래처가 되어주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니 기왕 키우실 거라면, 그 왜 하얀 추장한테 하셨던 것처럼 초기투자를 빠방하게 때려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제독에게 엔젤 투자자가 되어주는 거죠. 가뜩이나 멕시코는 돈이 곧 힘인 나라 아닙니까.”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말하자면 하얀 추장 같은 인간을 하나 더 만들어보자는 이야기였다.

마음은 한번 경태의 감을 믿어보자는 쪽으로 기운다. 모든 투자에는 시기가 있는 법. 빠르면 빠를수록 강한 인상을 남기기에 좋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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