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망중한 (1)
이름 모를 산자락에 함박눈이 쌓이고 있었다. 하얗게 덮인 산책로엔 발자국 하나 나있질 않았고, 눈꽃을 피운 가지들은 흔들림이 없는 정경(靜境)이었다. 가끔씩 무게를 못이긴 눈 더미가 푸스슥 떨어지는 소리 외엔 그저 장작 타는 타닥거림이 들릴 뿐인 고요한 산장. 참나무가 타면서 나는 냄새가 좋다. 요람처럼 흔들리는 의자에 앉아 성에가 낀 창문 너머로 정적인 경치를 바라보던 나는, 곧 내가 꿈을 꾸고 있음을 자각했다.
꿈은 욕망을 반영한다. 이 인적 없는 평화로움은 내 욕망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평생을 숨고 경계하며 조직을 성벽으로 삼아 스스로를 지켜온 나의 궁극적인 욕망. 아무도 날 해치려 들지 않는 세상에서 누구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시간을 영속적으로 누리는 것.
울리는 목소리가 말을 걸어왔다.
「사치스럽기 짝이 없는 욕망이다.」
“사치스럽기에 비로소 욕망하는 거다.”
대답한 나는 한숨을 쉬며 시선을 돌렸다. 산장은 비현실적인 선을 넘어 초현실적인 수준으로 길었고, 모닥불 타는 빛이 닿지 않는 곳부터는 수평적인 무저갱이 새까만 입을 벌려 놓았다. 그 경계에, 커다랗게 웅숭그린 스승새끼의 백색 유해가 있었다. 이런 꿈을 꿀 때마다 어김없이 보게 되는 지긋지긋한 뼈다귀가.
본격적으로 런던 공략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이래, 고질병처럼 나를 괴롭히던 소년기의 악몽은 빈도가 많이 줄어들었다. 그 반대급부로 늘어난 것이 바로 지금과 같은 자각몽. 이 또한 정상은 아닐지언정 얕은 잠이나마 길게 잘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선 만족스러운 변화였다. 잠을 30분 내지 한 시간 간격으로 끊어서 자던 시절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마냥 만족스럽지 못한 것은 날로 말이 유창해지는 개뼈다귀의 존재 때문이다. 말이 늘면서 귀찮은 정도도 늘어, 치우면 돌아오고 치우면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한다. 내 정신에 붙은 번거로운 혹이었다.
「혹이 아니다.」
어둠을 품은 백골이 내 생각을 읽고서 하는 말.
「내가 이제 단순히 크로우허스트 경(Sir Crowhurst)의 잔재만은 아니게 되었음을 너 또한 알 것이다. 죽은 자의 허상으로서 스러진 망념을 되풀이할 뿐이었던 과거의 메아리에 무엇이 깃들었기에 이렇듯 지성을 얻었는가?」
「너의 그늘이다. 네가 선을 긋고 거리를 두는 너. 네가 그토록 경멸하는 제국주의자들과 너 사이에 존재하는 공통분모란 말이다.」
“안다.”
나는 귀찮음을 담아 대꾸했다.
“그렇다고 해서 네가 온전한 내 일부가 되는 건 또 아니지.”
굳이 일부로 본다면 오염된 일부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저것은 깃들었다고 표현했으나, 실제로는 파인 자리에 빗물이 고이듯 어두운 자리에 비슷한 어둠이 고였을 따름. 내가 바란다면 이 정신세계에서조차 활성화되는 「황금기의 눈」은 저것의 실체를 낱낱이 보여주고 있었다.
저것은 내 갈등과 근심과 분노와 고뇌와 두려움과 자기혐오 등의 부스러기들을 연료삼아 작동하는 과거의 악의이자 우연의 기계에 불과하다. 기계에는 영혼이 없다.
영혼 없는 짐승이 말한다.
「너는 나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왜?”
「네 욕망을 이루려면 죽이거나 지배하거나 소유해야만 할 테니까.」
“뭐를?”
「너를 제외한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을.」
슬슬 무시하고 싶어졌지만, 무시하면 무시할수록 제멋대로 떠들어대는 정신 사나운 상대였다. 연료로 삼는 것이 나의 무의식이다 보니 그 내용을 마냥 신경 쓰지 않기도 어려워, 차라리 말을 붙여 논리와 방향성이라도 남겨두는 편이 나았다. 그러는 편이 그나마 휴식에 가까운 시간을 누릴 수 있다. 운이 좋으면 아예 입을 다물도록 만들어 줄 수도 있고.
내가 턱을 괴고 삐딱하게 응시하니 짐승이 제 말을 이어간다.
「네가 원하는 영속적인 평온은 진정으로 사치스러운 것이다. 사람은 어느 누구도 타자의 욕망과 인세의 인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느니. 빛과 진리의 원탁을 파괴한 다음에는 네가 정녕 자유를 얻겠느냐? 그때가 되어 모든 것을 놓고 은거한다면, 사람 사는 세상이 너를 번거롭게 할 일이 정말로 무엇 하나 없으리라 믿느냐?」
그렇지야 않겠지. 극단적으로 말해, 핵전쟁이라도 벌어진다 치면 그 분진이 바람을 타고 내 집 앞의 뜨락에도 떨어질 게 아닌가? 사소하게는 섬이 아름다워 머물기로 했더니 해류와 파도를 타고 온갖 국적의 쓰레기가 밀려오는 상황도 가정해볼 수 있겠다.
「그러하다.」
「인간은 욕망으로 빚어진 동물이며 인간의 문명은 세상 모든 것을 욕망하는 자들의 문명인즉, 그 같은 세상에 존재하는 너는 결코 고립된 자유를 누릴 수 없음이라.」
「황금기의 존재들과 같이 승천자가 되어 인과로부터 벗어나지 않는 한, 빼앗기기 싫다면 먼저 빼앗아야 하고 죽고 싶지 않다면 먼저 죽여야만 하느니라.」
「사람은 그렇게 살 수밖에 없다. 배타적인 소유와 절대적인 권력만이 오롯한 자유를 약속하리니, 완전무결한 자유란 결국 단 한 사람에게만 허락되는 것.」
「순금보다 아름답고 왕좌보다 높은 꿈을 꾸려면, 너는 결국 제국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니 나를 받아들여라.」
턱도 없는 소리. 스승새끼의 유해가 지껄이는 말이 나름의 논리를 품고는 있으나, 그 논리는 ‘크로우허스트 경’의 잔재가 평소의 내 고민과 걱정과 사색들을 제 골조(骨組)로 재단하여 주워섬기는 것. 요컨대 내 입장에선 이미 한번 소화한 주제들이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흔들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해소되지 않은, 혹은 해소될 수 없는 질문들일 지라도.
죽은 지 오래인 짐승으로선 결국 이 정도가 최선일 테지.
“짐승아, 나는 너와 다르게 욕망과 타협하는 법을 안다.”
「타협이라고?」
“그래. 원탁을 부수고 얻는 평화가 한때의 백일몽으로 끝나면 어떻단 말이냐. 나는 그 한정적인 평화조차도 누려본 적이 없는데. 그 평화가 깨어지면, 그때는 그냥 다시 얻어내면 그만이지. 그게 원탁을 부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은 아닐 테니까.”
「너는 거기서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그건 가봐야 아는 거지.”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글쎄. 남의 머릿속에서 굶어 뒈진 머저리의 말만 아니었어도 조금 더 진지하게 들어주었을 거다. 살아있을 적에도 제 앞날을 몰랐던 놈이, 죽고 나서 예언자 행세를 하려고 드나?”
「…….」
“더 할 말이 없다면 오늘은 이쯤에서 닥쳐줬으면 좋겠는데. 열등한 황인종 애새끼 하나 제대로 잡아먹지 못한 대마법사 크로우허스트 경.”
스승새끼의 유해와 내 무의식이 빚어내는 무작위의 짐승은 더 이상 나를 귀찮게 굴지 않았다. 이로써 꿈꾸는 산장엔 각별한 정적이 돌아왔다. 정신이 고단하지만 않았다면 이럴 때 마법사로서의 심상훈련을 하겠으나, 지금은 그저 무념으로 정적을 즐기고 싶은 마음뿐이다.
창틀에 쌓인 눈이 아까보다 조금 더 두꺼워진 것이 보인다. 나는 「황금기의 눈」을 끄고 창문 너머의 하얀 풍경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이렇듯 평범한 눈으로 평범한 풍경을 본다는 건, 내게는 이런 꿈속에서나 겨우 가능한 비현실적인 일이었다.
어깨로부터 부드러운 흔들림이 전해진다.
“형님. 일어나실 시간입니다.”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수연의 얼굴이었다. 나는 순간적인 불쾌감에 사로잡혔다. 너무도 좋았던 꿈이 남긴 반작용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수연 녀석이 내 어깨로부터 손을 거두어간다. 눈을 감으면 곧바로 다시 잠들 것 같은 피로감 속에서, 나는 억지로 일어나 마른세수를 했다.
“지금이 몇 시지?”
“20시 28분입니다.”
“……내가 알람도 안 맞추고 잤나?”
“예. 진동도, 울림도 듣지 못했습니다.”
“너무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군. 아직 중요한 거래가 남아있는데도.”
“그만큼 피곤하셨으니까요.”
오늘은 기사단장의 죽음으로부터 사흘째가 되는 날이다. 과다 복용한 각성제가 평소의 불면증과 상승효과를 일으킨 탓인지, 처음 이틀 동안은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깜박 잠이 들었다가도 금방 깨어버리고 말았던 것. 내 입장에선 눈을 붙였다기보다는 계속 깨어있는데 이따금씩 일이십 분 단위로 기억이 끊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어제는 끼니마저 다 거르면서 하루 종일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오늘 아침에야 겨우 잠다운 잠에 빠져, 이 시간까지 줄곧 사치스러운 소박함을 꿈꾸었던 것이다. 땀에 젖은 등허리에서 온기가 빠르게 사라져간다.
“애들은?”
“준비를 마치고 대기 중입니다.”
“알았다. 곧 나가마.”
“굳이 몸소 감독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조금 더 쉬셨으면 합니다. 식사도 너무 많이 거르셨고…….”
“시기가 수상하니 어쩔 수 없지.”
「북동부파」로 갈 상품을 실은 배는 입항을 앞두고 인근 해상에서 하루를 더 대기시켰다. 시가지의 교전은 당일의 해가 뜰 즈음에 다 마무리되었으나, 항구의 불안은 오늘까지도 이어지고 있었으므로. 「엘 마에스뜨레」의 행적은 묘연했고, 도블레 A의 패잔병들은 무기를 숨기고 가난한 사람들 사이로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그래도 계엄령이 발효되진 않았다. 우선 더 이상의 총격전이 벌어지지 않았고, 영국군이 체면상 자기네 피해를 있는 그대로 밝히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멕시코 정부가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사태 종결을 선포하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
예상한 결과이긴 하지만 다행스러운 일이다.
채비를 마친 나는 안전가옥으로부터 차를 타고 부두로 향했다. 사흘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던 나를 위해 수연이 올리는 간결한 보고를 들으면서.
21시 정각.
부두는 항만보안대 병력이 일찍부터 통제하고 있었다. 주둔지로부터 속보로 채 5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이니, 늦으면 도리어 이상할 일. 약정한 암구호를 주고받자 병사들은 어떠한 제지도 없이 우리를 통과시켜주었다. 현재 도시를 장악한 방위군과 FPDA+1 연합군은 설마 이럴 때 해군기지 바로 앞에서 대대적인 무기 밀수가 이루어지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것이었다.
더욱이 멕시코 해군은 육군에 비해 평판이 매우 좋은 편이었다. 육군 장교들은 카르텔에게 얼마나 매수당했는지 모를 지경이라 하지만, 해군은 그렇지 않노라고. 그러한 믿음이 감시의 사각지대를 만들어놓았다.
그러나 극심한 불황과 경기침체 속에서 해군 홀로 고고함을 유지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위성 주파수로 오간 로스 제타스 북동부파의 교신을 감청한 결과, 이곳 멕시코 해군 제8구역의 제독은 「엘 무니씨오네로」, 즉 나와 거래를 트는 데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이번 거래에서 발생한 또 하나의 변수였다.
이것이 이 부두에 꼰뜨라 알미란떼(후제독. 다른 국가의 준장 내지 소장에 준하는 직급) 마르띠네즈가 친히 왕림한 이유다. 수연의 보고를 토대로 판단하건대, 제독의 등장은 크게 경계할 만한 사건이 아니었다. 어차피 로스 제타스의 돈을 받은 시점에서 한시적으로 약점이 잡힌 사람이니.
부둣가에는 듬성듬성 선 가로등 불빛 아래 하얀 파도가 부서지고 있었다. 내 부하들에게 책임자를 불러올 것을 요구한 제독은 어두운 수평선을 바라보며 뒷짐을 진 채 나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내가 그 옆에 서자, 그는 조금은 딱딱한 어조로 물어왔다.
“당신이 책임자요?”
나는 같은 자세로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답했다.
“그렇습니다, 제독.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혹시 엘 무니 본인이신지?”
그놈의 별명은. 내가 “예.” 하며 고개를 까딱 끄덕이자, 제독이 이채로운 표정을 짓는다.
“뜻밖이군. 거래를 할 때마다 매번 이렇게 직접 나오시는 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면?”
“저는 어지간해선 만나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그러니, 제독께서 오늘 운이 좋으신 거라고 해두지요.”
적당한 유머는 협상의 윤활유다. 실제로는 위험요소를 조기에 발견하고 대응하고자 나온 것이지만. 마르띠네즈 제독은 시원하게 웃고 나서 대꾸했다.
“정말로 운이 좋은 것인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겠소마는, 어쨌든 반갑소이다. 내가 난생 처음으로 만나는 무기상인 치고 첫인상만은 나쁘지 않으시구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마침 배가 들어오는 것 같소.”
제독의 말처럼, 폭 220미터의 만 입구로 경하배수량 4천 3백 톤짜리 다목적 선박(MPV) 한 척이 들어서고 있었다. 위장용 일반 화물들 속에 적잖은 양의 무기와 탄약을 숨겨놓은 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