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엘 마에스뜨레 (8)
밤이 자정을 넘어 새벽으로 깊어질 무렵, 마침내 항구가 전장이 되었다. 영국이 기어코 더러운 진창을 밟기로 결정한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는 반쯤 「도블레 A」의 떨거지들 덕분이었다. 영국군 차량대열을 격퇴한 이 신나는 마약쟁이들은, 내가 던져준 시체들을 차에 매달고 질질 끌면서 승리한 군대처럼 항구로 돌아왔다. 수백 발의 총탄을 하늘에 난사하며 승리의 함성을 질러대는 야만스러운 개선식은 시카리오들 자신의 SNS 계정들을 통해 생중계되었다. 그 여파가 어떠할지 생각조차 해보지 않는 기특한 어리석음들. 마약과 전투흥분의 상승효과가 놈들의 이성을 완전히 날려버린 듯하다. 카르텔 지도부의 머리 좀 굴린다 하는 놈들은 아랫것들이 저지른 만행에 머리를 움켜쥐었을 것이다. 경태가 들려준 요즘 세대의 유행어처럼, SNS는 참으로 인생의 낭비였다.
이로써 저 혐오스러운 섬나라는 기사단장을 어찌하기 이전에 도블레 A와 시날로아 카르텔부터 손을 봐줘야 할 입장이 되었다. 영국의 외교부와 정보부처가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한들 언젠가는 널리 퍼질 사진들이고 영상들이고 정보들이었으니. 여기서 유의미한 전과를 거둬가지 못하면 그 후폭풍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일 것이다.
무엇보다, 내가 산간에서 주워온 시체들은 영국으로 하여금 한 가지 오해를 하도록 만들기에 충분할 증거였다. 앞서 그들을 습격했던 의문의 세력이 확실하게 시날로아 카르텔이었노라고.
그러므로 이 틈에 내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기사단장을 죽이는 것.’
원탁이 왜 살아있는 기사단장을 원하는지는 모르겠다. 고대의 지혜를 기적과 계시로 포장하여 광신적인 추종자로 맞이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실험용 모르모트를 원할 따름인지. 하지만 그 어느 쪽이라도 오늘 여기서 죽는 것만은 못한 결말이 될 터였다. 나에게도 그렇고 기사단장에게도 그렇다.
그러니 내 손으로 죽여주리라. 이 밤의 초엽에 다짐했던 대로, 나름의 존중과 성의를 담아서. 기사단장의 「코드」를 수집하는 건 덤으로 따라오는 이득이다.
섬나라 놈들 사냥은 그 다음에 마무리 지어도 좋을 일이었다.
차박, 차박.
느리게 걷는 걸음 아래 진득하게 고인 피 웅덩이가 찰박인다. 이 많은 피를 쏟아낸 건 갈라지거나 뭉개져서 죽은 무장경찰들. 갈라진 쪽은 칼로 쪼갠 시체들이고 뭉개진 쪽은 방패와 몸통으로 들이받은 시체들이다.
느긋하게 추적하며 지켜본 바, 항구의 거리로 돌입한 순간부터, 거짓된 「템플 기사단」의 성전기사들은 군과 경찰과 시날로아 카르텔의 재앙으로 돌변했다. 악에 받칠 대로 받친 그들을 목숨 아까운 군경과 시카리오들 따위가 무슨 수로 저지한단 말인가. 그 선두에 기사단장이 서있건만. 과달라하라에서 푸에르토 바야르타까지, 격전을 거듭하며 험난한 산지를 관통해온 그는 어제의 그와는 격이 다른 폭력으로 거듭났을 터였다.
기사단장은 또한 도로변의 전신주도 닥치는 대로 부러뜨려 놓았다. 그리하여 가까운 거리에선 인공적인 조명들이 사라졌다. 그럼에도 이따금씩 길을 밝히는 빛들은 바로 건물과 차량을 가리지 않는 방화에서 비롯된 것들이었다. 그러한 불가를 지날 때마다 피로 젖은 도로는 기름을 바른 것처럼 번쩍거렸다.
대체 어찌 이렇게나 많은 불들을 질러 놓았는가?
방법은 간단하다. 불경스러운 기사들은 가지고 있는 장검으로 길가에 널린 차들을 콱콱 찔렀다가 확 뽑아냈을 뿐. 그러면 검과 차체의 마찰로 빚어진 순간적인 고열이 연료통의 유증기(油蒸氣)를 폭파하는 것이었다. 혹여 불이 붙지 않으면 연료가 쏟아진 아스팔트를 방패 모서리로 긁어 불티를 튀겨주었고.
나 역시 그러한 방화를 한번 따라해 보았다.
텁-
배낭에 가로로 고정시켰던 칼을 수중으로 불러들여, 피와 기름으로 무뎌진 칼날을 염동력으로 벼려낸다. 사아아아악 갈리는 마찰음과 함께 광채와 첨예함이 되살아나는 장검. 나는 준비를 끝낸 즉시 갓길에 대어진 승합차 후미를 수직으로 베어버렸다. 퍽 하고 유증기 터지는 소리가 나더니, 금속성의 불티가 훑고 지나간 균열로부터 불붙은 연료가 콸콸거리며 흘러나온다. 재빨리 물러난 나는 차체를 옆으로 걷어차 철창을 두른 상점에 처박아주었다.
이렇게 하는 거로군.
나는 빠르게 번지는 불길을 보며 간단하면서도 영리한 발상이라 여겼다. 언젠가는 도움이 될지 모를 노하우다.
부하들의 충실한 엄호를 받으며 걷는 길은 의외로 적막했다. 기사단의 목숨을 건 폭주와 그로인해 발생한 무지막지한 병력손실, 그리고 도시 곳곳이 불타오르는 혼돈에 압도당한 군경이 이 일대의 수십 개 블록에서 병력을 완전히 철수시켜버린 탓이다. 사실상의 전면적인 패주다.
그들이 병력과 화력의 밀도를 높여 돌아오기까지는 적잖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었다. 하는 꼴들을 보건대 적어도 오늘 밤 안으로는 어려울 테지.
애초에 내가 목격한 군경들은 야간전을 위한 장비조차 구비하고 있지 못했다. 이는 카르텔 기사단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강화된 자들의 밤눈은 대개 그렇지 못한 자들보다 밝다. 그들로선 대피하는 주민들을 보호한다는 핑계로 뭉그적거리는 편이 합리적인 것이다.
이렇게 나아가 내가 도달한 장소는 성당을 앞둔 작은 광장이었다.
이쯤 되면 참 일관성이 있다고 해야 할까…….
스페인 양식으로 건설한 성당의 외벽은, 반쪽으로 여윈 달과 꺼멓게 물드는 하늘 아래에서도 한줌의 월광만으로 희미하게 빛났다. 여섯 개의 종을 매단 두 개의 첨탑 위로는 한 쌍의 십자가가 높게 솟아있다.
석조 버트레스 사이에 난 정문은 그 위로 악마를 물리치는 대천사 미카엘의 부조가 새겨져 있었다. 갑옷 입은 천사는 높이 든 검으로 발아래의 사탄을 찔러 죽이려는 참이다. 이 성당 안에 검을 들고 성전기사를 자칭하는 자들이 들어가 있음을 고려하면 얄궂은 우연의 일치라 하겠다.
허나 이제부터 벌어질 것은 천사와 악마의 싸움이 아니라 마귀와 또 다른 마귀의 싸움에 불과하다.
그래. 나 또한 한 마리의 마귀일 뿐이다. 소망하는 바는 일신의 생존과 평온에 불과하나, 그 평온함에 도달하기 위하여 무엇이든 죽이고 부수고 불태울 각오가 되어있는 더러운 마귀. 내가 이 사실을 잊지 않고자 함은, 하찮은 양심의 호소 때문이 아니라, 나 자신이 나의 적들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존재이기를 바라는 까닭이다.
불교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업이 많은 사람이다. 업을 많이 쌓은 나는 언제고 천사를 만난 악마처럼 죽을 수 있다. 미카엘에게 짓밟히는 저 사탄과 같이, 추하고 약하고 비참한 모습으로. 남을 잡아먹는 자는 스스로도 잡아먹힐 각오를 해둬야 하는 것이었다.
지옥도 윤회도 사람이 꾸며낸 공상에 불과하다는 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무신론자인 나는 성당 속 기사들을 직시하며 말했다.
“저것들은 내가 직접 장사를 지내주고 싶구나.”
“형님.”
경태가 가만히 만류했으나 나는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상대는 겨우 넷이고 그 외에 보는 눈은 없다. 가까운 건물은 거의 다 비어있지. 이런 상황에서 내가 저들에게 상처 하나라도 입을 것 같으냐.”
“설마 그렇기야 하겠습니까만, 평소와 다르셔서 그게 좀 걱정스럽습니다.”
“평소와 달라?”
“예. 분위기가.”
글쎄. 욱신거리는 열감(熱感)이 머리 뒤쪽을 자극하고 있기는 하다. 철야 후의 단잠이 고작 10분 만에 끊긴 듯한 불쾌감. 일이 너무 잘 풀려서 흥분한 것일까, 아니면 권장량의 여섯 배나 집어먹은 각성제의 영향일까. 그러나 우려하던 환각은 없었고, 오감은 여전히 명징하게 느껴진다. 속이 조금 더부룩하긴 하나,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충분히 정상이었다. 복잡한 마법술식 연산이 아직 원활하게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또 다른 근거였다.
평소보다 다소 감상적인 것 같긴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가끔은 이럴 때도 있는 거지. 나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짐을 내려놓았다.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잠시만 자리를 지키고 있어라.”
총도 내려놓은 난 오직 장검만을 들고 성당을 향해 걸었다.
규모가 썩 크지 않은 성당은 배랑(拜廊)과 중랑(中廊)의 구분도 없이 내부의 모든 공간이 트여있는 구조였다. 그리하여 건물의 규모에 비해 실내에서 느껴지는 공간감은 상당했다. 가장 안쪽의 제대(祭臺) 너머엔 붉은 삼나무를 깎아 만든 커다란 예수상이 걸려있다. 예수의 승천을 묘사한 커다란 조각상은 십자가가 빠져있다는 점이 특이했다. 제대 뒷벽에 십자가를 두지 않는 성당이라니. 누가 보면 이단인 줄 알 것이다.
예수상 아래에 모여 제례용의 커다란 촛불들을 켜놓고 기도를 올리던 진짜 이단자들은, 정문 계단을 오르는 내 발소리에 반응하여 하나둘 일어나 뒤로 돌아섰다. 한 놈은 숫제 갑옷까지 벗어놓고 있었다. 부상을 치료하기 위함인가?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와중에 보여줄 여유는 아니겠으나, 광신도의 사고방식을 일반인의 기준으로 판단해도 곤란할 것이었다.
또 모르지. 우연히 마주친 성당이 일종의 계시처럼 보였을지도.
무턱대고 도망치는 길에 성당이 나올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저것들은, 특히 기사단장은 교전이 한창이던 산중에서도 성호를 긋던 미치광이다. 여기선 신의 보호가 있으리라 믿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 미치광이가 나를 향해 묻는다.
“너는 누구냐.”
비록 반말이어도 카르텔 두목 치곤 점잖은 말투. 하기야 역할극에 심취한 놈이니 이상한 일은 아니지. 지들이 군인인 줄 아는 새끼들도 있는 마당에.
단장의 부하들은 벌써 각자의 총으로 나를 겨냥하고 있다. 그럼에도 대뜸 쏴재끼는 대신 투구 안쪽의 면면마다 모호한 표정들을 짓고 있는 것은, 다른 무기 없이 칼 한 자루만 달랑 들고 들어선 내가 마약쟁이들이 보기에도 기이하기 때문일 것이었다. 하물며 내가 든 칼은 저들의 동료가 쓰던 무기. 이 정도면 잠시 상황을 관망할 만하다.
쿵! 촛불을 등진 기사단장이 커다란 방패로 바닥을 내리찍는다.
“누구냐고 물었다.”
대리석 바닥에 금이 가는 게 보인다. 다시 들어 올리는 방패의 모서리로부터 푸스스 떨어지는 돌가루들. 티타늄 합금으로 만들어졌어도 결코 가볍지 않을 전신방패다. 페인트로 칠해놓은 십자가가 흠. 나는 중랑과 익랑(翼廊)이 교차하기 직전에 멈춰 카르텔 기사단장의 질문에 대답했다.
“너희를 죽이러 온 사람.”
어둑한 제전이 세 차례 번쩍였다. 단장의 부하 셋이 반자동화기 셋을 저마다 한 발씩 발포한 것. 그러나 그렇게 발사된 탄자는 염동력에 붙잡혀 허공에서 정지했다. 단순히 튕겨내는 것보다 어려운 상급의 기교. 이는 저들에게 있을 수 없는 이적(異蹟)이었다.
발포한 기사들은 움직임을 잃었다. 내게는 급격히 빨라지는 그들의 심박이 보였다. 기사단장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말씨를 고쳐 제 무리의 경악을 대변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이 공간의 마소에 대한 장악력을 내 능력의 한계까지 끌어올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나를 중심으로 뻗어나간 강대한 마력장이 저들의 마력장을 쥐어짜듯 수축시킨다. 기사들이 일시에 전율했다. 능력자로서의 감각으로 느끼는 마스터급 마법사의 존재감이란 과연 어떠한 것일는지.
오직 기사단장만이, 그와 같은 전율 속에서 검과 방패를 들어 임전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면서 또 다시 묻는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칼끝이 떨리는 게 흠이지만 그래도 덩칫값을 하는 녀석이다. 이러한 담력이 없었다면, 아무리 불세출의 자연 각성자라 한들 여기까지 무사히 오지를 못했겠지. 진즉에 붙잡혔거나, 혹은 산간에서 식어가는 시체가 되었거나.
카카캉!
세 개의 머리가 피와 뇌수를 흩뿌렸다. 아직까지 허공에 붙들어놓았던 세 발의 탄자에 염동력을 실어 날린 결과였다. 시체가 된 가짜 성전기사 셋이 털썩털썩 쓰러지는 소리들. 눈구멍을 파고든 탄자들은 투구에 갇힌 채로 튕겨지며 쇠가 쇠를 치는 소리들을 냈다. 당연히 머리는 곤죽이 되고 만다. 투구를 벗어뒀던 하나만이 깔끔한 관통상으로 죽었을 따름.
기사단장은 좌우의 죽음들을 돌아본 뒤에 다시 나를 응시했다.
내가 말했다.
“그러니까, 너희를 죽이러 왔다고 했을 텐데.”
불경스러운 기사단의 우두머리는 짐승처럼 포효하며 나에게로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