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엘 마에스뜨레 (6)
약실에서 연기가 올라온다. 화약이 연속으로 타고 남은 잔향. 나는 탄을 다 소진한 대물저격총을 등 뒤의 짐으로 거두었다.
방금 치른 교전에서 난 소모된 탄약 대비 세 배의 적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저격수였다. 매 차례의 사격마다 세 명 꼴로 관통시켰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니다. 맞지 않는 탄이라도 적의 행동을 억제하기는 충분했고, 그 사이에 돌입한 기사단장이 영국군의 모가지를 보이는 족족 쳐버렸다는 이야기지. 전쟁은 혼자만의 싸움이 아니다.
내 도움을 받은 거구의 흑기사는, 처참한 죽음이 만연한 자리에 멈춰 서서는 내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대체 누가 나를 돕는 것인가. 그런 불안한 의아함이 느껴지는 탐색. 그러나 투시력이 있지 않고서야 날 발견할 수 있을 리 없다. 놈과 나 사이엔 시야를 가리는 장애물이 너무나 많았으므로.
전투의 후유증이 어깨가 오르내리는 호흡 정도인 단장과 달리, 저마다의 칼과 방패와 총에 기대어 헉헉대던 부하들은, 가까스로 다시 움직여 죽은 영국군의 무기와 탄약과 물과 식량을 노획했다. 영국군이 휴대한 식량이라고 해봐야 시리얼 바에 홍차 티백, 에너지 드링크 분말 정도가 고작이었지만, 체력소모가 심각한 카르텔 기사들에겐 너무도 간절했을 열량 그 자체다. 단장은 부하가 건네는 수통에 음료 분말을 붓고는 대충 흔들고서 목구멍으로 털어 넣었다. 꿀꺽임 한 번 없이 식도로 부어넣는 꼴은 신기하다면 신기한 재주였다. 시리얼 바도 욱여넣다시피 하여 세 개를 단숨에 먹어치운다. 그 뒤에 다시 쏟아 넣는 한 통의 물. 저러고도 위경련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게 놀랍다.
기사단 생존자의 수는 내가 영상에서 보았던 것보다 많았다. 그러나 원래는 이보다 훨씬 더 많았을 것이었다. 즉 지금 보이는 아홉, 단장을 제외한 여덟은 「템플 기사단 카르텔」 최후의 정예라고 봐도 좋을 터.
단장은 부하가 바치는 가장 무거운 화기를 방패 안쪽에 결속하고, 다음으로는 탄창들을 받아 갑옷 위의 체스트 리그(Chest rig)에 끼워 넣는다. 탄창이 빽빽하게 꽂힌 탄입대와 전근대적인 형태의 갑주가 의외로 잘 어울린다는 사실이 뜻밖이었다.
‘그게 하필 영국제 탄입대라는 점이 웃기지만.’
돈 많은 카르텔 놈들답게, 이들이 기사로서 갖춘 무구는 죄다 티타늄 합금으로 제작된 것들이었다. 이놈들이 과시한 압도적인 근접전 역량의 절반 어림은 무구의 단단함과 가벼움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두껍고 경사진 갑주는 그것만으로도 어지간한 보병화력을 다 씹어 먹도록 만들어줄 방어력이었다. 여기에 방패까지 더해지면? 교전거리가 짧은 전장에선 칼을 휘두르는 죽음의 대리인이 되는 거지.
카르텔 기사단장은 내 쪽으로 십자가를 그어 보이고서 부하들을 추슬러 도주를 재개했다.
이 와중에 성호(聖號)라니.
영국제 체스트 리그는 참았어도 이번에는 못 참겠다. 내가 소리 내어 실소하자 경태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형님, 괜찮으십니까?”
각성제의 부작용을 우려하는 거다. 객관적으로 웃음이 나올 때가 아니었고, 나는 누적된 피로를 고려해 권장량보다 많은 양을 복용했으며, 부작용 목록엔 급격하고도 불안정한 감정기복이 포함되어 있으니까. 그러나 부작용이면 어떠하랴. 나는 지금 기분이 좋았고, 이 기분으로 영국 놈들을 더 잡아 죽이고 싶었다. 어쨌든 끝 모르게 우울해지는 것보다야 낫지 않은가.
영국군의 증원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번은 일단 통과시키자.”
충동을 인내하는 내 지시에 부하들이 자리를 고쳐 은신을 보강했다.
움직이지 않는다는 게 무위(無爲)를 뜻하진 않는다. 산만해진 의식을 날카롭게 벼린 나는 발화와 염동의 술식으로 마력장 내에 존재하는 모든 동물들을 자극했다. 이제까지의 이동 중에도 수시로 행한 일이다.
이처럼 밀도가 높은 숲에서, 고고도로부터의 적외선 감시는 동물의 열과 사람의 열을 쉬이 구분해내지 못한다. 더욱이 땅 자체가 높아 구름이 낮게 깔려있기까지 하다. 그러므로 나는 야생의 열원들을 몰아대는 것만으로도 우리에 대한 열추적을 교란하는 한편, 기사단을 쫓는 영국군의 속도를 늦춰놓을 수 있었다. 때로는 발화주문을 쓰거나 얇은 물의 막을 펼치는 것도 좋았다.
영국군과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내 마력장도 축소해야 했기에 긴 시간을 벌기는 불가능했으나, 그래도 이 정도면 기력을 회복한 기사단장이 나로 인해 빈약해진 전면의 영국군을 뚫기에 충분한 여유일 것이었다.
자박, 자박.
풀을 밟는 무거운 발소리들이 가까워진다. 잔뜩 긴장하여 교대로 전진하는 섬나라의 애국자들은, 죽은 동료들의 인식표를 떼고 눈을 감겨주고서, 불과 20미터 거리를 두고 우리의 매복지를 지나쳐갔다. 끝까지 조준을 유지하던 경태 녀석이 후우- 하고 몸을 이완시킨다.
저 먼 하늘에선 헬기가 비행하고 있었으나 전투공역으로는 감히 들어올 엄두를 내지 못했다. 각성자들이 온갖 중화기로 무장하고 싸우는 숲에 헬기를 저공으로 들이미는 건, 거기에 탄 탑승자들을 떼로 죽여 달라는 뜻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말했다.
“남은 밤이 길다. 우리도 이쯤에서 열량을 보충하고 가지.”
호텔에서 대기한 두 나절은 틈날 때마다 먹고 또 먹어두는 시간이었으나, 두 시간 가까이 최대효율로 발휘된 신체강화는 축적된 에너지를 빠르게도 잡아먹었다. 소모가 더 심해지기 전에 미리미리 열량을 보충해두는 편이 좋다.
우리가 준비한 비상식은 간단하다. 소금, 비타민, 포도당을 혼합한 가루. 나는 가루를 입에 털어 넣고 물로 녹여 삼켰다. 이런 식으로 각자 대여섯 번을 반복하면 끝. 먹기도 빠르고 흡수도 빠르다는 게 장점이었다.
1분 30초 남짓한 휴식 끝에 우리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짧은 휴식 중에도 기사단이 앞서간 방향에선 벌써 몇 번이나 총격을 주고받는 소음이 들려왔다.
그리하여 뒤쫓아 나아가는 길엔 기사단과 영국군이 여러 번에 걸쳐 격돌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난 영국군과 뒤엉켜 죽어있는 카르텔 성전기사를 발로 밀고, 그가 죽어서도 쥐고 있던 검을 염동력으로 띄워 올렸다. 피가 마른 자국들로 인해 본연의 광택을 잃은 장검이 두둥실 중력을 거스른다.
거의 다 왔구나.
저 기슭 아래 거주지의 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라스 팔마스 데 아리바(Las Palmas de Arriba). 푸에르토 바야르타가 가까운 위성 거주지다. 소수를 이끌고 다수와 싸워야하는 입장에선 숲보다 더 좋은 전장이 바로 도시였다. 장애물도 많고 숨을 곳도 많으며, 결정적으로 민간인들이 사방에 널려있으니까. 배부른 시민들이 고기방패 역할을 거부할지라도, 카르텔은 그들을 얼마든지 방패막이로 써먹을 수 있다.
그렇다. 기사단은 저곳을 거쳐 항구로 달려갈 것이다. 이 근방에서 가장 넓고 가장 유리하며 가장 익숙한 싸움터로. 인구밀도가 높으면서 숨을 그늘도 많은 시가지는 카르텔 성전기사들에게 열려있는 유일한 생문(生門)이다. 마을은 한나절을 버티기에도 좁을 전장이므로, 이 밤이 지나기 전에 반드시 항구까지 도달해야만 한다.
상황이 거기까지 악화될 경우 영국군이 당장의 추적을 포기할 가능성마저 있었다. 단기결전을 장기임무로 전환하는 것이다. 원래부터 개판이었던 과달라하라에서야 민간인들이 좀 더 죽고 다친다 한들 새로운 주목을 받지 않겠으나, 푸에르토 바야르타는 이제까지 평화로웠던 항구가 아닌가. 정치적인 부담이 원탁으로부터 받는 압력을 능가한다면 위정자들은 당연히 정치적인 결정을 내릴 것이었다.
시체들을 뒤져 대물저격총의 탄약을 확보한 나는, 내친 김에 영국군 시체 네 구를 검과 함께 띄워서 가져가기로 결정했다.
“흡!”
경태가 작은 소리로 기겁한다. 일순(一瞬)으로 조준한 라이플의 방아쇠가 격발 직전까지 당겨진 상태. 경태만이 아니라 가까운 부하 셋이 모두 그러하다. 찰나의 판단으로 표적이 시체임을 인식하고 방아쇠를 당기지 않은 것. 경태가 총구를 내리며 탄식했다.
“어휴, 깜짝이야. 하마터면 쏠 뻔했습니다, 형님.”
“미안하다. 미리 말을 했어야 하는데.”
“아닙니다. 근데 이것들은 어디다 쓰려고 하십니까?”
“불을 보다 확실하게 지르려고.”
“아, 시날로아 녀석들이요?”
“그래.”
끈에 묶인 인형처럼 일어선 네 시체가 괴상한 움직임으로 군장을 내려놓는다. 염동력에 가해지는 부하를 줄이기 위해서다. 그래도 무기만은 여전히 어깨에 걸고 있었는데, 이는 죽은 자들의 발포가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빛과 진리의 원탁」이 보유한 고대의 지혜 중엔 시체를 조종하는 마법- 보다 정확히는 생명활동이 정지된 유기체를 제어하는 마법이 있다. 그러나 스승새끼는 그 분야에 관심이 없었다. 그냥 그런 술식이 존재한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을 뿐. 지금의 나에겐 아쉬운 일이지만, 스승새끼의 입장에선 마소 결핍으로 써먹지도 못할 술식에 집착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었다.
우리는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바다로 흘러가는 물길을 찾고 빽빽한 나무그늘에 의지하여 항구로 나아갔다. 크게 돌아가기는 할지언정 기사단과 그 뒤를 쫓는 영국군, 어느 쪽과도 겹치지 않을 동선. 물이 풍부한 환경이라 열추적을 마법적으로 차단하기에도 좋았다. 다만 멀찍이 강에 걸린 다리가 보이는 시점에서 나는 잠시 발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정지!”
숲에서보다 시야가 트인 내가 수신호와 무전으로 이동을 중지시킨다.
군용 차량들 특유의 거칠고 투박한 배기음들. 아직은 내 귀에만 들리는 단계다. 산간 남쪽의 도로를 봉쇄하던 영국군 차량 행렬이 헤드라이트를 켠 채 교각 앞뒤로 줄줄이 멈춰서있는 광경이 보인다. 주변으로는 드론이 한 대 날아다녔다. 이미 탑승 병력을 다 내보냈어도 차량 자체의 방어력과 탑재화기, 그리고 부가적인 색적능력만으로도 무시하기는 어려울 전력. 대열 중간엔 이동식 지휘소인 지휘 장갑차도 한 대 눈에 띄었다.
헌데 이를 몰래 지켜보는 세력이 우리만 있는 게 아니었다. 일련의 아마추어스러운 무장집단이 마을 어귀 여기저기 웅거해서는, 몇몇을 민간인인 척 길가로 내보내 어정쩡하게 영국군의 동태를 살피는 중이다.
교량 너머 약 250미터 지점, 빛바랜 왕복 2차선로를 낡은 차들로 막아 영국군의 이동을 지연시킨 것도 바로 저들의 소행일 터였다.
시날로아 카르텔.
널리 알려진 사실은 아니지만, 영국은 멕시코 마약 카르텔, 특히 시날로아 카르텔을 정말로 싫어하는 나라다. 시날로아는 런던과 리버풀을 비롯한 영국 각지에 하부조직을 두고 있으니까. 카르텔은 영국인들을 고용하여 엄청난 양의 마약을 영국 본토로, 그리고 유럽으로 들여간다. 이는 잠수정을 통한 밀수와는 완전히 별개인 루트.
심지어 영국항공(British Airline) 직원들까지 매수당한 사실이 드러나 영국 본토가 발칵 뒤집혔던 적도 있다.
그러므로 영국군이 시시각각 접근해오는 이때, 당장의 표적이 아니라 한들 시날로아 카르텔의 세력이 경계상태에 돌입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들은 설령 오브라도르 대통령이 직접 연락해서 비밀협정 준수를 확약해주었어도 안심하지 못할 입장이었다.
결국 도둑이 제 발을 저리는 꼴이지.
어쨌든 이렇게 공들여 상을 차려 주었으니, 기왕 저린 발들을 더 저리도록 만들어주는 게 예의가 아니겠는가. 가지고 온 시체들을 예상보다 빨리 써먹게 생겼다. 마력회로에 부하(負荷)가 쌓이는 입장에서는 환영할만한 일.
“형님. 수연 누님이 이쪽 방면 퇴로확보조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묻는데요?”
교신이 직위별로 제한된 현재, 경태에게 붙은 통신 담당은 항구의 현장지휘소와 직접 연결이 허락된 몇 안 되는 부하 중 하나였다. 그렇잖아도 이쪽에서 연락할 참이었는데.
“합류지점과 시각을 통보하겠다고 해.”
“옙.”
“다른 방면은?”
“벌써 뒤로 물리는 중이랍니다. 예비대를 충원하겠다고.”
“행동이 빨라서 좋군. 지도.”
내 손짓에 경태가 부하를 시켜 지도를 펼치게 했다. 나는 간부들을 모이도록 하여 작전을 설명하고 각 팀에 알맞은 역할과 동선을 분배했다. 부하들은 희미한 적외선 전술조명에 의지하여 야시경을 쓴 채로 브리핑을 들었다.
“이견은 없나?”
“예.”
동시다발적인 짧은 끄덕임들. 중간간부 전원이 작전에 동의했다. 그러나 나는 굳이 한 번 더 확인했다.
“경태 너는?”
“문제없어 보입니다. 싸움은 역시 강 건너 불구경이 최고죠.”
혹여 내 판단력이 무뎌졌을 것에 대비한 검증이었다. 이 녀석은 내 권위에 짓눌리지 않고 냉정하게 검토해줄 몇 안 되는 부하 중 하나이니까.
“좋아. 지금 정한 사항을 지휘소에 알려라. 이후 푸에르토 바야르타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현재 등급의 무선제한을 유지할 거다. 야시경 배터리는 미리미리 교체해두고. 잔소리 같겠지만 퇴로확보조가 합류할 땐 아군 오사에 주의하도록. 개별 위치에 도달하는 시간은 10분 후로 설정한다. 준비 됐나? 셋, 둘, 하나…….”
딸깍. 신뢰성 높은 군용 방수시계 특유의 압력 높은 버튼이 자그마한 소리를 낸다. 이와 거의 동시에, 그저 우연의 일치로서, 도로 저편의 가난한 마을 외곽에서 갑작스러운 불길이 치솟아 어둠을 살라먹기 시작했다. 재앙을 몰고 다니는 카르텔 성전기사들의 소행일 것이었다.
험한 지형 속 어두운 숲에 지르는 불은 통제하기도 어렵거니와 벗어나기도 어렵다. 자칫하면 지르는 쪽부터 퇴로가 막혀 타죽을 환경. 중과부적으로 교전을 치르는 중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게다가 생체질량이 큰 각성수(覺性樹)들의 분포 역시 만만찮은 변수였다. 한곳에 뿌리내린 그것들이 필사적으로 일으킬 마법적 현상들은 어떤 예측이라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린다.
그러나 길이 뚜렷하며 구획이 분화된 인간의 거주지는 이야기가 다르다. 불이 통제를 벗어나더라도 막는 자만 없다면 얼마든지 빠져나갈 수 있다. 영국군과 거리를 두면서 도주 외의 행동을 할 여유도 생긴 참이다. 이 짧은 여유를 어떻게 활용하면 좋은가.
방화는 항공관측을 저지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 가운데 하나였다.
이게 단순히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이 아니라면, 즉 몸과 정신이 한계에 부대끼는 상황에서도 상황 변화에 따른 최적의 판단이 바로바로 이루어지는 녀석이라면…….
정말로 아까운 인재란 말이지.
예수에 미친 마약상 새끼만 아니었던들, 나는 녀석을 영입할 방법을 고민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