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엘 마에스뜨레 (1)
영국과 멕시코의 관계는 전통적으로 썩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독립 멕시코의 주권을 처음으로 인정해준 국가가 바로 영국이었고, 채권 회수 관련하여 불편하던 시절이 있었으되 직접적인 무력충돌까지 빚어지진 않았다. 그나마도 19세기 중반에 정리된 갈등이며, 20세기 초엽부터는 줄곧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왔다. 심지어 포클랜드 전쟁이 벌어졌을 땐 암암리에 영국 편을 들어주었을 정도. 표면적으로는 중립을 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랬던 놈들이 지금은 아르헨티나를 지지한다는 게 웃기지만.’
국제외교라는 게 다 그런 것 아니겠는가. 윤리는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는 명분이요 이익은 언제까지고 변치 않을 하나뿐인 진리이다.
어쨌든, 멕시코와 영국의 우호는 21세기 들어서도 계속해서 강화되어 왔다. 저 혐오스러운 섬나라의 모든 행보에 예민한 나는, 브렉시트로 자충수를 둔 영국이 어떻게든 뒷수습을 해보려고 멕시코 같은 나라들과 FTA를 논의하는 꼴을 흥미롭게 지켜본 바 있었다. 갖은 시도들이 다 실패하여 그대로 망해버리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랐던지.
잠수정 설계도와 맞바꿀 화물이 도착하기까지 이틀이 남은 오늘, 멕시코의 주요 공중파 채널들은 아침부터 비슷한 내용의 속보들로 도배되고 있었다.
「마르셀로 에브라드 외교부 장관의 담화에 따르면, 과달라하라 사태에 대한 이번 「FPDA+1」 국가들의 군사적 지원은 「FPDA+1」에 속한 국가들이 먼저 연명으로 제안하고 멕시코 정부가 이를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이에 따라 현지시각 새벽 1시 30분, 미겔 이달고 이 코스티야 국제공항에 영국 공군 수송기가 착륙하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호주, 뉴질랜드,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 등 총 6개국이 파병한 치안유지부대들이 기습적으로 멕시코 땅을 밟게 되었습니다. 이 부대들은 구성원 전원이 「축복받은 자」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들 치안유지부대들은 도착과 동시에 우리 방위군을 보조하는 작전행동에 돌입, 오전 7시 경엔 이미 과달라하라 시가지의 3분의 1을 안정화시킨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영국군이 템플 기사단 카르텔과 세 차례에 걸쳐 교전을 벌여 스물여섯 명의 저주받은 자들을 사살하는 데 성공했으나, 악명 높은 「기사단장(El Maestre)」을 체포하거나 척살하는 데엔 실패했다는 소식입니다. 영국군의 피해는 따로 발표된 바가 없습니다.」
시가지의 3분의 1이라.
기습의 결과물임을 감안하더라도 대단하기는 하다. 그 까다롭다는 시가전에서 민간인들을 방패로 삼은 카르텔 미치광이들을 이토록 빠르게 밀어버리다니.
‘교전 장면은 공개하지 않은 건가.’
분명 헤드캠으로 녹화된 전투 당시의 영상들이 있을 것인데, 그런 영상들은커녕 죽은 카르텔 단원들의 시체조차도 보여주지 않는다. 뉴스는 영양가 없는 건조한 정보들만을 나열할 뿐.
뉴스 영상에서 그나마 건질 만한 장면이 있다면 시가지 위를 비행하는 무인기들의 숫자 정도였다. 한 화면에 잡힌 것들만으로도 사단급 자산에 필적한다. 시가전임을 감안하여 정찰전력을 이례적으로 많이 할당한 모양이다.
하기야 「빛과 진리의 원탁」으로부터 능력과 지혜를 빌렸을 영국과, 그런 영국으로부터 걸러진 노하우를 전수받았을 나머지 다섯 국가들이 자기네 전력을 그렇게 간단히 노출하진 않을 것이었다. 어쩌면 카르텔 기사단장과 충돌했을 때 상정 밖의 피해를 입었을 가능성도 있겠고.
뉴스가 이어서 보여주는 각국의 능력자 특수부대 관련 영상들은 영국이 가장 볼 만했고, FPDA의 나머지 네 회원국이 다음이었으며, +1인 인도는 유달리 수준이 떨어졌다. 인도가 공개한 능력자 부대의 영상자료란 달리는 차량 위에 사람으로 올린 4층짜리 역 피라미드였기 때문이다. 뉴스 캐스터는 이것이 인도군의 기존 최고기록을 단번에 2층이나 갱신한 것으로서, 기네스북에 등재된 최대 크기의 인간 구조물이라고 첨언했다.
보고 있노라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능력을 꼭 저딴 식으로 과시해야만 하는가 싶다. 저 인도 특유의 서커스 감성은 참으로 이해해주기가 어렵다…….
화면이 바뀌고, 주멕시코 영국 대사가 등장하여 허무맹랑한 개소리를 지껄였다. 영국 상류층의 전형이 고까운 발음으로 떠드는 와중에 스페인어 자막이 달린다.
「“멕시코에 대한 이번 「FPDA+1」의 지원은 어떠한 정치적 목적도 없이, 순수한 인도적 차원에서 내민 우정과 인류애의 손길임을 분명히 해두는 바입니다. 우리는 멕시코를 도와 이 땅에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할 것입니다.”」
웃기고 있네.
간밤엔 거의 잠들지 못했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삼십 분쯤 눈을 붙였을 따름. 그럼에도 지금 느껴지는 것은 피로보다는 긴장이었다. 빨라진 맥박과 평소보다 더운 체온. 조금씩 마르는 입. 스트레스로 말미암아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는 감각이다. 가늘게 떨리는 손끝이 자극당한 생존본능과 공격적인 증오를 웅변하고 있었다.
기어코 이런 날이 오고야 말았다.
스승새끼가 내 영의 미궁에서 탈진으로 뒈진 이래, 런던의 존재감이 이렇게까지 가깝게 밀려온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언제나 스스로를 감추고, 감추고, 또 감추기만 하는 인생을 살아온 나이기에.
이것은 내게 악재인 동시에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내 흔적을 남기지 않으면서 저것들을 잡아 죽일 수만 있다면, 나는 원탁의 제국주의자들이 세계에 영향력을 투사하려는 계획에 초장부터 똥을 뿌리게 되는 것이었다.
‘원탁의 시선을 한동안 멕시코에 고정시키는 효과도 있겠지.’
런던의 마스터들이 기반을 닦아주었을 각성자 집단을 한낱 자연적인 천재 따위가 제거할 수 있을 리 없다. 마스터들은 당연히 「황금기의 눈」을 가진 자- 스승새끼가 개입했을 가능성부터 의심할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잘못 든 길에서 헤매는 사이, 나는 보다 자유롭게 운신하며 런던 공략의 준비단계들을 밟아나갈 수 있을 터였다.
내 안색을 살피던 수연이 조용히 묻는다.
“커피를 준비할까요?”
“아니.”
지금 필요한 건 따로 있다.
“각성제나 좀 다오.”
내가 휴대하는 분량도 있지만 이건 단독행동이 불가피할 때를 대비한 준비물이다. 수연은 짧게 한숨을 쉬곤 짐에서 약을 찾아 물 한 잔과 함께 가져왔다. 약은 2백 밀리그램 정제로 다섯 알이나 되었다. 신체강화에 따른 약효 감소를 고려한 오버도즈(Overdose). 정확한 연구가 뒷받침되지 않은, 약간의 시행착오와 감에 의존한 투약이다.
“전혀 안 주무실 생각이십니까?”
꿀꺽. 난 정제 다섯 알을 한 번에 삼키고서 건조하게 대꾸했다.
“앞으로 48시간은. 어쩌면 더 길어질 수도 있겠고.”
방금 복용한 프로비질은 모다피닐 계통의 각성제로, 과거에 사용되던 암페타민에 비해 부작용이 적었다. 「빌딩 503」, 월터 리드 미 육군 연구소에선 이 약이 80시간 이상의 연속적인 임무 수행을 가능케 한다는 연구결과를 내놓은 바 있다.
물론 부작용이 적다는 게 백 퍼센트 안전하다는 뜻은 아니다. 잠들어야 할 뇌를 억지로 깨워놓는데 아무 이상도 없을 리가 있나. 사용 시간이 길어질수록 공격성이 강해지며, 논리적으로 사고하기가 어려워지고, 심할 땐 환각에 시달리기까지 한다.
이 중에서 환각은 나도 경험해본 바다. 조직이 완전히 자리를 잡기 전, 보다 위험한 현장에서 직접 뛰어야 할 일이 잦았던 시절의 오래된 이야기.
돌이켜보면, 아귀가 안 맞는 꿈이 현실에 덧씌워지는 듯한 감각이었지.
깜빡, 깜빡. 간헐적이고 순간적으로 현실을 침식해 들어오는 허상. 그건 눈을 뜨고 있음에도 뇌의 일부가 꾸벅꾸벅 조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수면부족이 일상화된 나이기에 이런 부작용에도 다른 사람보다 취약할 수밖에 없다. 각성제를 요구했을 때 수연이 한숨을 내쉰 이유였다.
대화가 끊어진 짧은 정적을 뉴스 앵커의 단조로운 목소리가 메운다.
「「FPDA」는 영연방의 아시아-태평양 지역 안보 공동체로, 가맹국은 영국, 호주, 뉴질랜드, 말레이시아, 싱가포르의 다섯 개 국가입니다. 이들 회원국 사이의 군사협력은 본디 수동적인 상호방위조약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으나, 올해 7월 27일, 종주국인 영국의 주도 하에 공수(攻守)를 함께하는 군사동맹으로 격상되었습니다. +1인 인도는 9월 5일을 기하여 준회원국으로 가입했습니다.」
「외교와 안보 분야의 전문가들은 영국의 이러한 행보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라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홍콩을 둘러싼 갈등이 심화되자 중국을 군사적으로 압박할 카드가 필요해졌으리라는 분석입니다.」
「여기에 코로나 바이러스 대유행 당시 중국으로부터 정치적인 무역제재를 당한 호주, 중국의 지속적인 남중국해 영유권 주장에 위협을 느끼고 있던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등이 적극적으로 영국을 지지하고 나서면서 군사동맹으로의 승격이 급물살을 탄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번 지원은 「FPDA+1」이 국제적으로 군사력을 투사할 능력이 있음을 증명하는 첫 번째 행보이자…….」
「미국과 중국의 반응은 극명하게 엇갈렸습니다. 백악관 대변인은 「FPDA+1」의 단결력이 세계평화 증진에 기여하고 있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나, 중국의 왕이 외교부장은 「FPDA+1」의 이번 파병이 중국의 주권을 침해하려는 세력들의 전쟁모의나 다름없다며 강한 불쾌감을 드러냈습니다.」
가만히 생각에 잠겨있던 경태가 말했다.
“아무래도 의도적으로 전력을 분산시켜 놓은 것 같지 않습니까?”
“뭐가?”
“멕시코 정부 말입니다. 치안 안정화를 위해 시날로아 카르텔의 세력 확장을 용인했다는 말을 들었을 땐 그냥 ‘여긴 멕시코니까.’ 하고 그러려니 했는데, 이제 보니 시날로아 측의 전력분산을 유도한 후 기사단의 다음 차례로 쓸어버릴 작정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
그렇잖아도 나 또한 비슷한 추론에 도달한 참이다. 도블레 A가 이 항구로 전진배치됨으로써 카르텔의 핵심 근거지인 시우다드 후아레스 시(市)엔 시날로아 휘하 3대 무장 세력의 마지막 하나, 「로스 메히끌레스(Los Mexicles)」만이 남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로스 메히끌레스는 표면적인 머릿수는 거의 4만에 달할지언정 그 태반이 동네 양아치에 불과한 집단이었다. 허수를 제외한 진짜배기는 최대로 잡아도 2천 이하라는 게 중론이다. 그 2천조차 기껏해야 민병대 수준일 거라고. 이들은 의사소통에 희귀한 나우아틀 어(語) 방언을 사용하여 비밀유지 능력이 탁월하지만, 전투력 면에선 다른 두 무장 세력에 미치지 못했다.
이들 이외에도 추가로 다른 무장 세력들이 존재하기는 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카르텔의 군대라기보다는 지역별 마약영주들의 사병집단에 가깝다고 봐야 했다. 카르텔의 발상지, 시날로아 주(州) 쿨리아칸에 거점을 둔 「로스 안뜨라스(Los Ántrax)」가 대표적인 경우다. 중앙군과 지방군이 분리된 체제인데 지방군의 자율성이 높은 경우라 하겠다.
‘이 도시의 경찰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걸 보면 대통령이 아예 처음부터 함정을 판 건 아닐 듯하지만…….’
이 가정이 옳다면, 처음엔 진짜로 시날로아와의 불가피한 협력을 염두에 두었다가, 중간에 영국으로부터 형편 좋은 제안이 들어오면서 방향을 튼 것이 아닐까 한다. 차도살인(借刀殺人)의 칼을 갈아치우는 것이다.
다만 외국군의 국내 활동이 너무 장기화되는 것은 대통령으로서 감당하기 어려울 부담이다. 이미 누적된 민간인 피해도 적지 않은 만큼, 시날로아와의 협정을 준수하면서 사태를 빠르게 종결지으려 들 가능성도 낮지 않겠지. 그 빠른 안정화는 대통령의 선택이 올발랐다는 여론을 끌어내기에 좋을 근거다.
종합적인 확률은 반반 정도일까.
때마침 뉴스 앵커가 오브라도르 대통령이 정치적 역풍을 맞게 되었다는 내용을 전한다. 이는 의회의 동의도 없이 외국의 군대를 멕시코 영토에 들인 데 대한 야권 전체의 반발이었다. 심지어 여권 일각에서도 이런 흐름에 동참하고 있노라고.
그러나 모든 일을 비밀리에 진행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미리 의회의 동의를 받겠는가. 그 의원들 중엔 틀림없이 카르텔에게 정보를 누설할 자가 있을 것을.
“도블레 A와 군경(軍警)은 여전히 미적지근하게 대치하고 있나?”
내 질문에 수연이 바로 끄덕인다.
“예. 시날로아 카르텔 측도 일이 묘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눈치챘겠지만, 당장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 듯합니다. 지금쯤 멕시코시티 쪽의 연줄을 총동원하고 있겠지요.”
수연이 귓가에 손을 대고 인-이어(In-ear) 리시버에서 들리는 소리에 집중하더니, 곧 나를 돌아보며 새로운 정보를 알린다.
“현장지휘소로부터의 보고입니다. 17분 전 촬영된 위성사진을 분석한 결과, 영국군 차량대열이 과달라하라를 이탈한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방향은 서쪽, 경로는 15번과 70번 국도입니다.”
“그래?”
“예. 정황상 놈들의 목표인 기사단장이 서쪽으로 도주했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현재 과달라하라 상공에서 내 눈이 되어주고 있는 위성(Cubesat)의 수는 셋이었다. 하나는 조직의 소유이고 남은 둘은 조직 계열사 명의로 계약을 해놓은 사설 위성업체의 소유. 620km 고도를 비행하는 위성들은 각각 2시간 3분을 주기로 지구를 공전하며 푸에르토 바야르타를 향해 사진 데이터를 쏘아 보냈다. 각 위성의 공전 간격은 7분 30초, 41분 1초, 74분 29초. 그 간격으로 과달라하라 일대의 현황이 손에 들어오는 것이다.
창가로 다가간 나는 닫힌 커튼 틈을 손끝으로 살짝 벌려보았다.
“이 멕시코라는 나라에 좋은 점이 하나 있어.”
긴장에 짓눌린 도시는 적막에 휩싸여 있었다. 모두가 곧 태풍이 불어 닥치리란 사실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그 배불뚝이 페레초조차 후앙을 찾지 않았다. 내가 먹을 것을 나눠준 시민들에겐 풍랑을 무릅쓰고 고기잡이에 나서야할 동기가 없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에는.
나는 돌아서서 창틀에 기대며 말을 맺었다.
“그건 바로, 우리가 무슨 짓을 벌여도 카르텔이 대신 의심을 받아주는 사냥터라는 거야.”
도심 한복판에서 폭탄을 터트리고, 그 이상으로 폭발적인 마법을 사용하며, 사방으로 기관총과 로켓탄을 쏴 갈긴다 한들 당국은 곧장 어딘가의 카르텔을 범행 주체로 지목하리라. 왜냐면 멕시코 카르텔은 그게 어느 카르텔이든 폭탄과 기관총과 로켓탄을 대량으로 보유하고 있으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체를 감추기 위한 약간의 노력뿐이다.
잠수정의 설계도와 제국주의자 사냥. 나는 둘 중 어느 쪽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