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굶주린 항구 (7)
엘 후에고는 소파를 내 쪽으로 가까이 당겨 앉고서 몸을 팔걸이에 비스듬히 기대었다.
“잠시 못 볼 꼴을 보였군.”
“……아닙니다.”
“너무 무서워하진 말라구. 띠로 이 친구가 지금 신경이 예민해서 그래. 본대가 상륙하기 전에 병력을 모아야 하는데, 이대로는 사령관한테 왕창 깨지게 생겼단 말이야.”
“아까 말이 나온 군자금이라는 게 혹시, 사령관님께 바칠 뇌물입니까? 실패를 무마하기 위해서?”
“이야! 사업가라 그런지 눈치가 빠르군! 맞아, 바로 그거야!”
쉽게 긍정하는 엘 후에고. 뇌물이라는 단어가 나왔는데도 엘 띠로는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사고방식이 다른 이들에겐 당연한 생리인 것이다.
“한 4천만 페소 정도면 괜찮을 것 같은데, 어때? 이 도시의 평화유지비라고 생각하면 나쁘지 않잖아? 그걸 달러로 주면 더 좋겠고. 요즘은 멕시코 돈이 영 불안해서.”
4천만 페소면 한화로 대략 20억 어림인 금액이다. 까짓 거 주려면 줄 수도 있는 돈이지만, 피할 수 있는 낭비는 피하는 게 좋겠지. 나는 머리를 굴리며 내게는 무의미한, 그러나 ‘후앙’으로서는 자연스러울 질문을 던졌다.
“페소든 달러든 그만한 돈을 조건 없이 드릴 순 없습니다. 아까 분명 조직 차원에서 편의를 봐주신다고 하셨죠. 구체적으로 제게 어떤 편의를 봐주실 수 있습니까?”
‘후앙’이 사업 환경의 위험성을 크게 보거나 혹은 겁에 질려 이 항구를 손절하기로 작정하면 엘 후에고는 많이 곤란해질 처지다. 이미 제 입에 올린 ‘양보’라든가 ‘내 입장’ 따위가 단서였다. ‘후앙’에게 온건할 수밖에 없는 입장으로서 엘 후에고가 제안했다.
“이 항구에서 당신이 소유하는 사업체들에 한해 10년간 면세혜택을 주겠어.”
“면세요?”
“그래, 면세! 「바닥의 권리」, 즉 조직이 거두는 보호세 말이야.”
“음…….”
“우리가 보통 영업이익의 10%를 세금으로 받거든? 동일 업종의 경쟁업체와 치킨 게임을 벌일 때 10%의 차이가 얼마나 유리하게 작용할지 상상해봐. 어지간한 경쟁자들은 장사를 할 엄두도 못 낼 거야! 내가 주려는 건 사실상의 독점권이나 진배없다고!”
“그건…… 확실히 유리하겠지요.”
솔직히 말해 조건 자체는 상당히 좋다.
‘당연히 끝까지 지켜질 약속이 아니지만.’
일단 ‘후앙’이 이 항구에서 많은 것을 가지게 되면, 그리하여 쉽게 발을 빼지 못할 처지가 되면, 엘 후에고는 그제야 비로소 마각을 드러낼 심산일 것이었다. 약속을 철회하고, 점점 더 무리한 요구를 하면서, 외국인 사업가가 아슬아슬한 손익의 줄타기를 하며 단물을 뱉도록 만드는 것. 이익으로 묶어놓는 사육.
도박판에서나 사업판에서나 범죄가 횡행하는 바닥에서나, 사람 사는 지혜는 결국 다 비슷한 것이다. 이 건방진 놈의 속을 모를 수가 있나. 엘 후에고의 유혹은 무례한 태도 속의 기술적인 부드러움으로 이어졌다.
“그래, 그래. 그리고 조직과의 연줄이 있으면 여기 저기 「급행료」를 낼 필요도 없어진다니까? 우리 카르텔의 영역 내에선 어떤 공무원 나부랭이도 자기한테 「기름」을 발라달라고 하지 못할 거라고. 내 이름을 걸고 확실하게 약속하지.”
급행료와 기름. 이 두 단어는 멕시코의 사업 환경을 함축적으로 요약하고 있었다. 특히 기름 쪽은 아예 「멕시코의 기름(Ungüento mexicano)」이라는 관용어구가 존재할 정도였다. 기계에 윤활유를 치듯 관료제에 기름을 바르지 않으면 사업이 계속해서 삐걱거릴 수밖에 없다는 뜻.
관용어구에 들어가기 전의 기름(Ungüento)은 본디 약으로 쓰는 유성(油性) 연고 내지 시체에 부패를 지연시킬 요량으로 바르는 향유(香油)를 의미했다. 시체의 부패와 관료제의 부패. 어느 쪽에 바르는 기름이든 부패의 악취를 가려준다는 점에선 공통분모가 있다 하겠다.
내가 끄덕이며 말했다.
“요컨대 앞으로 필요한 모든 비공식적인 지출을 일시불로 내는 거라고 보면 되겠군요? 아주 큰 폭의 할인을 받아서?”
“그렇지! 말이 통하는군.”
“……좋습니다.”
“알레루야(할렐루야)!”
“그런 거라면 더 크게 투자하도록 하죠. 이번 기회에 엘 띠로 님과도 좋은 관계를 만들어 두고 싶으니까요.”
“황인종이라 그런지 계산이 아주 빠르군! 그래서 얼마를 쓰실 생각이지?”
“지금까지 오간 조건들을 시장님께서 문서로 공증해주신다는 조건 하에, 나흘 뒤까지 이백만 달러를 현찰로 준비하겠습니다. 단, 공증문서엔 세 분의 지장(指章)을 찍어주십시오. 서명만으로는 안 됩니다.”
사흘 후면 내 배가 부두에 닿는다. 어차피 나가지도 않을 돈이니 금액을 크게 불러주기로 했다. 정치적 자살을 담보로 설정해야 할 첼리노는 매우 곤란한 표정을 지었으나, 어차피 그러려고 이 자리에 있는 인물일 것이었다. 수수료를 받아먹기도 할 터이고.
“잠깐, 지장이라니…….”
첼리노가 불편한 기색으로 뭔가를 말하려 들었으나, 벌떡 일어나 두 팔을 치켜드는 엘 후에고에게 가로막혔다. 스스로에게 도취되어 무언으로 환호하던 엘 후에고는, 잔뜩 흥분해선 따발총 쏘듯 엘 띠로에게 떠들어댔다.
“봤냐? 봤어? 대화는 이렇게 하는 거다! 이 엘 후에고 님을 본받으라고, 이 근육 덩어리 새끼야! 이백만 달러다! 따라 해봐! 이, 백, 만, 달, 러!”
엘 후에고의 폭발하는 경박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엘 띠로는 의외로 기분이 나쁘지 않은 기색이었다. 당연히 돈 때문이다. 평소 큰돈을 만지는 카르텔 간부들에게도 일회성 뇌물로 이백만 달러는 절대 작은 금액이 아닐 터.
“그래도 4일 뒤는 너무 늦는데. 벌써 출정하고 난 다음일 테니까.”
띠로가 조금 곤란하다는 투로 하는 말에 후에고가 대꾸한다.
“원정이 끝날 때까지 내 쪽에서 맡아두면 되지. 초모에겐 같이 말을 해줄 테니 안심하라고.”
맥락상 초모(Chomo)는 도블레 A 사령관의 애칭일 것이었다.
‘애칭이 초모라면 본명은 아마 제로니모겠군.’
후에고의 경솔한 발언으로 말미암아 띠로가 살짝 찡그린 낯으로 나를 살피기에, 나는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한 척을 해주었다.
일반인들에겐 의외의 사실이겠으나, 범죄자들 사이의 거래는 신용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범죄조직 내부의 거래에선 더더욱 그러하다. 사기를 쳤다간 상대의 계파와 사생결단을 내야 하는 까닭이었다. 사기를 당하지 않도록 계파를 만들어두는 것은 그 개인의 능력이다. 당하는 놈이 등신인 것이다.
“어쩔 수 없군.”
띠로가 내게 고갯짓을 해 보인다.
“그렇게 합시다. 돈은 고맙게 받겠소. 당신은 내 호의를 산 걸 후회하지 않을 거요.”
“저 역시 이게 좋은 투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후 첼리노는 떠밀리다시피 공증문서를 작성했다.
“계약서에 지장을 찍는 건 많이 낯설군요. 이걸 꼭 해야만 합니까?”
“그것만큼 확실한 증명이 또 없을 테니까요. 동양의 문화라고 생각해주십시오.”
“…….”
첼리노는 스탬프용 잉크 패드를 앞에 두고 영 내키지 않는 태도로 머뭇거렸다. 지장(Sello dactilar) 찍기가 멕시코에 아예 없는 문화는 아니어도 일반적이지 않은 것은 사실. 공직자로서 이런 데다 지문을 남기기가 카르텔 간부들보다 훨씬 더 부담스럽기도 할 것이었다.
그가 답답하게 굴자 엘 후에고가 짜증스럽게 한 마디 한다.
“이봐, 첼리노. 뭘 그렇게 꿈지럭대는 거야? 언제나 그랬듯이 5%는 당신 거라고. 열심히 벌어야 더 넓은 집으로 이사도 가고 승진도 하고 쌔끈한 어린애들도 새로 사귀고 할 거 아니야?”
수수료 조로 5%를 떼어주겠다는 말에도 첼리노는 썩 기뻐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가뜩이나 부담스러운 보증을 하게 된 판국에, 카르텔 간부들이 큰돈을 쉽게도 받아 처먹는 꼴이 배가 아프겠지.
그러나 엘 띠로마저 슬슬 눈초리가 사나워지고 있었으므로 첼리노가 버티는 데엔 한계가 있었다. 결국 4인분의 서명과 4인분의 지장이 찍힌 네 장의 문서가 완성되어 네 개의 봉투에 봉입되었다. 우습게도 공문서용인 봉투엔 주 정부의 로고와 전화번호가 찍혀있었다.
‘물을 다루는 능력이 있다는 게 이럴 때도 편하군.’
잉크 패드가 수성(水性)이었으므로, 나는 지장을 찍을 때 물에 대한 구속력을 발휘하여 지문의 형태를 왜곡시킬 수 있었다. 그저 꾹 누르고 있음으로서 시간을 벌기만 하면 되었다. 정교한 회로에서 나오는 정밀한 술식제어능력은 그만큼 정확한 위조를 가능케 해주었다.
유성 잉크라도 조작하기가 어렵지는 않다. 물과 기름이 서로 섞이지 않는 성질을 이용하면 틀로 찍어내듯 지장을 위조할 수 있었다. 수분을 제어하여 틀을 만들어두고 잉크를 비벼대면 그만인 것이다.
내 몫의 문서를 갈무리한 나는 막 떠오른 것처럼, 중요하지 않은 태도를 가장하여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다 끝났으니 드리는 질문입니다만, 만약 제가 군자금을 드리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엘 후에고가 반문한다.
“그게 왜 궁금하지?”
“단순한 호기심입니다. 이방인으로서 멕시코의 현실이 궁금하다고 해두지요.”
“하긴, 당신은 미국에 대해서도 꽤나 자세하게 알고 있었지.”
납득한 후에고는 카르텔의 간부답게 살벌한 허세를 부리기 시작했다. 거래가 체결되었으니 무서운 소리들을 늘어놓아도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다. 이로써 나는 부족한 감이 없지 않던 재료, 그러니까 편집에 쓸 발언들을 넉넉하게 녹음할 수 있었다.
“한 가지 더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뭐든지.”
“이 도시엔 군과 경찰 병력이 굉장히 많던데, 카르텔 시카리오 분들이 여기서 대규모로 집결을 하는 게 가능한 일이긴 합니까? 시장님께서 해군, 육군, 경찰, 방위군 모두에 영향력을 발휘하시기라도 하는 겁니까?”
방위군(Guardia Nacional)은 헌병과 연방경찰을 겸하는 멕시코 특유의 조직으로서, 연방내각에 속한 안보 및 치안부 장관 직할의 전투 병력이다. 즉 로페즈 오브라도르 대통령이 직접 고삐를 쥔 군사력이라는 의미. 아무리 집권여당의 일원이라지만, 일개 시장이 카르텔 전투 병력의 대대적인 집단행동까지 커버를 쳐줄 순 없다. 뇌물로 매수했다면 또 모를까.
‘하지만 뇌물을 썼다면 시장에겐 손해 보는 장사가 될 테지.’
첼리노 시장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 사람이 거기까지 할 순 없어요.”
“그러면?”
“간단합니다. 질서회복을 위해, 대통령께서 이번만은 시날로아 카르텔의 세력 확장을 용인해주기로 한 것이지요.”
음. 막장이군. 시날로아가 과달라하라의 어두운 구석들을 장악했을 땐 곪아터진 속이야 어쨌든 표면적으론 평화로웠다 이건가. 실로 멕시코에서나 가능할 정치적 결단이었다.
‘카르텔끼리 싸우는 거면 원망도 1차적으론 카르텔이 다 받아줄 테니까.’
작년 말, 쿨리아칸에서 시날로아 카르텔과 결전을 벌였던 정부는 끝도 없이 누적되는 민간인 피해로 인해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악화된 민심이 지금까지도 대통령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게 현실.
따라서 대통령이 시도하는 이이제이는 대단히 차가운 정치적 결단이었다. 시날로아는 세력을 확장해서 좋고, 정부는 평화를 회복하는 동시에 시날로아의 이미지를 실추시킬 수 있어서 좋다. 시날로아가 기사단의 근거지를 터는 과정에서도 무수한 민간인 피해가 발생할 터이므로. 정부의 무능함 역시 부각되기야 하겠으나, 작년 말에 추락한 위신을 아직까지도 회복하지 못한 정부로선 실보다는 득이 더 많아 보인다. 그 와중에 시날로아의 전력이 깎여나가면 금상첨화일 것이고.
엘 후에고가 적절하게 꼴값을 떨어주었다.
“알겠나, 돈 후앙? 우리 카르텔이 이 정도란 말이야. 이 멕시코의 또 다른 정부지.”
악마의 편집에서 화룡점정을 찍어줄 법한 발언이다.
“그렇군요. 저 같은 일반인은 그저 엘 후에고와 엘 띠로, 두 분의 아량에 기댈 따름입니다.”
“그래, 그래. 당신은 진짜 좋은 끈을 잡은 거야. 앞으로 잘해보자고.”
잘해보기는 무슨. 난 단꿈을 꾸는 세 얼간이들과 다시 한 번 악수를 나누었다.
이로써 나는 남은 사흘이 흘러가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리라 믿었다.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니 방심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노력으로 치울 수 있는 모든 방해요소를 치워놓았노라고.
허나 아무리 치밀하게 일을 진행한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돌부리에 차이는 게 사람의 인생인 법이다.
잘 돌아가던 판을 엎은 건 시날로아 카르텔도, 템플 기사단 카르텔도 아니었다. 비밀리에 외국의 지원을 받아들이기로 한 멕시코 정부의 결정이었지. 그리고 그 외국엔 세계에서 가장 먼저 초능력자만으로 편성된 특수부대를 창설한 국가, 영국이 포함되어 있었다.
즉 원탁의 마스터들이 멕시코 성전기사들의 우두머리에게 주목한 것이다. 비정상적으로 강력한 자연 각성 능력자, 템플 기사단 카르텔의 수장, 바로 「엘 마에스뜨레(El Maestre)」를.
나는 이 머나먼 타역에서 원탁의 첨병과 처음으로 근접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