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44화 (44/561)

#9. 굶주린 항구 (6)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내가 말했다.

“베트남전 당시, 전장에 투입된 미군들은 셋 중 하나 꼴로 헤로인을 투약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다섯 중 하나는 상습적인 투약으로 중독증상을 보이고 있었죠. 그런데, 그 지역에서 처음 헤로인을 만들어 팔기 시작한 주체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글쎄. 그쪽 시장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 설마 미국인가?”

“아니요. 프랑스입니다.”

“아쉽군. 재밌을 뻔했는데.”

“아쉬워하실 것 없습니다. 50년대부턴 미국도 여기에 합류했으니.”

“그 둘이 왜?”

“서로의 이해가 일치했으니까요. 프랑스는 베트남을 계속해서 식민지로 두고 싶었고, 미국은 공산주의자들의 세력 확장을 저지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베트남 독립전쟁을 주도하는 세력은 다름 아닌 공산주의자들이었죠. 훗날의 월맹군 말입니다.”

“허. 이건 다시 재밌어지는데.”

프랑스는 이미 19세기부터 이 지역에서 아편을 재배해서 팔아치웠다. 그것은 민족세력을 약화시키는 수단이면서 통치자금을 마련하는 방편이기도 했다.

반면 미국은 처음엔 베트남을 독립시켜주자는 쪽이었다. 일단 독립을 시킨 다음 친미 정권을 세워 공산화를 막을 요량이었던 것. 그러나 프랑스는 미국이 자기네 편을 들어주지 않을 경우 소련과 손을 잡겠다며 으름장을 놓았고, 미국은 반쯤 끌려가다시피 프랑스의 편에 섰다. 미국은 이때부터 베트남 민족주의자들의 적이 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미국이 억울해할 것은 없었다. 프랑스가 월맹에게 처맞아 쫓겨난 다음엔 프랑스의 유산을 미국이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엘 후에고가 낮은 음계로 조소한다.

“요컨대, 미군 병사들을 중독시킨 헤로인이 실은 미국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었다?”

“비슷합니다. 엄밀히 따져서 그들이 맡은 건 유통 쪽이었고 생산은 여러 곳에 외주를 주었지만, 동남아 전체에서 가장 큰 손이었다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으니까요. CIA가 베트남 곳곳에 풀어놓은 마약은 돌고 돌아 미군 병사들의 손에도 들어갔을 겁니다.”

프랑스는 미국이 들어오고서 몇 년 뒤 완전히 철수했다. 오늘날까지도 악명이 높은 동남아시아 「황금의 삼각지대」는 절반 이상이 미국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후에고의 조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그 잘난 자기네 ‘시민’들에게 마약을 팔아먹는 건 아무래도 미국의 전통이었던 모양이야. 그쪽이라면 이것도 이미 알 것 같은데, 망할 놈의 CIA는 우리 시장의 대선배이기도 하거든!”

“당연히 압니다. 레이건 정권 때였죠.”

“아, 맞아. 당시 대통령 이름이 도널드 레이건인가? 그랬다고 들었어. 현 대통령도 꽤나 병신 같은 걸 보면 아무래도 도널드라는 이름이 재수가 없나봐. 하하하!”

도널드가 아니라 로널드 레이건이지만, 굳이 틀렸다고 고쳐줄 이유는 없었다.

레이건은 재임기간 동안 「마약과의 전쟁」에 힘을 실어준 대통령이었으나, 그 이면에선 미국 시민들을 상대로 마약을 팔아 니카라과의 친미 반공반군(콘트라)을 지원하고 있었다. 그때 상품 유통과 자금지원 전반을 담당했던 기관이 전통의 마약강호인 CIA다.

미국 내 마약중독의 확산이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버린 게 바로 이 시절의 일이었다. 어쨌든 CIA는 강력하고 유능한 조직이니까. 남미가 세계 최대의 마약산지로 거듭난 시기 역시 이 무렵. CIA가 생산조직들에게 지불한 돈은 남미 각지의 치안을 박살내 놓았다.

그래서 나는 마약문제에서 미국이 남 탓만 하는 꼴을 매우 개병신 같다고 생각한다. 누가 누구를 원망한단 말인가. 세계 3대 마약산지 중 두 곳의 창립멤버인 주제에.

“처음으로 돌아가서-”

난 이야기를 되돌렸다.

“미국은 그렇게 중독된 병사들이 본토로 돌아와서도 마약을 찾으리라 우려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예상과 정반대였죠. 전쟁으로부터 해방된 병사들에겐 마약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귀국 이후로도 중독자로 남은 사람은 백 명 가운데 하나 꼴에 불과했단 말입니다. 제법 유명한 일화인데, 혹시 들어보신 분 있습니까?”

엘 후에고는 입술을 구부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모른다는 몸짓이다. 눈길을 돌리자 첼리노 시장 또한 고개를 가로젓는다. 전자는 그럴 만해도 후자는 얼간이다. 정치인쯤 되었으면 사회학적으로 유명한 일화들은 귀동냥이나마 해봤어야 정상이지.

관련하여 「쥐 공원(Rat park) 실험」이라는 것도 있었다. 철창에 갇힌 외로운 쥐들과, 대조군으로 설정된 ‘공원’의 쥐들에게 각각 마약을 제공하는 실험. 여기서의 ‘공원’은 물론 쥐들의 낙원으로서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도록 만들어진 공간을 말한다.

결과가 어떠했을까. 동료가 없는 고독한 쥐들은 강박적으로 마약을 탐닉했으나, 동료가 많고 자유로운 쥐들은 주어진 마약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마약 용액에 설탕을 타주어도 그러했으며, 심지어 철창 쪽에 있던 중독자 쥐조차 ‘공원’으로 옮겨진 다음엔 마약을 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참으로 시사하는 바가 명료한 결과다. 나는 남은 말을 이어갔다.

“알고 보면, 마약을 구하기 쉽다는 이유만으로 마약에 중독되는 쾌락주의자들은 상대적으로 소수에 불과합니다.”

그 소수도 결코 가벼운 죄가 아니지만, 지금의 난 카르텔에게 면죄부를 발행하는 궤변론자다.

“미국인들이 마약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건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루를 벌어 하루를 버티는 불안정한 생활, 좋은 자극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환경, 가난 외엔 물려줄 게 없는 부모, 같은 처지의 친구들, 버려지고 낙오된 개인들을 돌아보지 않는 사회.”

나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절제된 냉소를 담아 말했다.

“미국인들을 마약중독으로 몰아넣는 가장 큰 원흉은 멕시코 카르텔도, 중국 트라이어드(삼합회)도 아닌 미국 그 자신이다. 이게 제 결론입니다.”

잠시 조용하던 실내에 뚝뚝 끊어지는 박수 소리가 울린다. 짝, 짝, 짝. 느리고 큰 동작으로 손뼉을 친 엘 후에고가 히죽거리며 나를 본다.

“당신, 미국을 꽤나 싫어하는 느낌이 드는군.”

“미국만이 아닙니다.”

“음-흠?”

“미국, 중국, 일본, 독일, 벨기에, 영국, 프랑스 등. 죄가 많은데 반성을 하지 않는 나라들은 다 싫어합니다. 하느님께선 이들이 벌인 일들을 결코 좋아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크핫! 설마 여기서 신이 나올 줄은 몰랐는걸? 재미있어, 정말로 재미있어!”

시장과 제 동료의 어깨를 두드리며 동조를 구한 엘 후에고가 내게 새로 묻는다.

“그래, 후앙 당신이 보기엔 우리가 미국보다는 낫다 이건가?”

“당신들은 물론 악인이지요. 그러나.”

“그러나?”

“여러분이 악인이든 아니든, 신께선 당신들을 좋은 곳에 쓰고 계시는 거라 봅니다. 주님은 무한히 선하신 분이시며, 이 세상의 모든 선한 결과들은 예외 없이 그분으로부터 비롯되는 까닭입니다.”

“들었나? 들었어?”

경박하게 웃어대는 엘 후에고.

“믿음이 깊은 인물이라길래 우리 동네 신부님처럼 고루하고 꽉 막힌 꼰대를 만나게 될 거라 예상했건만, 이걸 보라고! 할 일이 없는 사람 같았으면 우리 애들 교육이나 시켜달라고 했을 거야! 주일마다 꼬박꼬박 미사를 가는 애들이 완전히 뻑 갔을 텐데! 하하하!”

같은 테이블의 다른 둘은 엘 후에고의 경박함이 영 달갑잖은 기색이었다. 특히 집주인 쪽이 그러하다. 여당의 일원이자 경찰력이 비정상적으로 많이 배치된 관광 항구의 시장으로서 카르텔에 꿇릴 입장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사소한 일로 부대끼기 싫어 적당히 맞춰왔다는 느낌.

어쩐지 초면부터 하대를 찍찍 박아대더라니. 스페인어에도 공대와 격식체라는 게 존재하는데. 외국인 사업가의 기를 누르려고 일부러 무례했던 게 아니라, 그냥 평소부터 싸가지가 없는 놈이었던 모양이다. 이놈 혹시 나처럼 부모가 없나?

이제껏 묵묵히 듣고만 있었던 엘 띠로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돈 후앙. 당신이 알아둬야 할 게 있소.”

“그게 뭡니까?”

“그쪽이 내 일에 훼방을 놓았다는 것.”

“훼방이요?”

내가 반문하자 엘 후에고가 엘 띠로를 자제시키려 든다.

“나, 참. 이 친구 성급하기는. 좋게 좋게 이야기하자고.”

“성급하고 자시고, 정해진 날짜까지 할당된 숫자의 병력을 모을 수가 없게 됐다. 동네 백수에서 일개 거지새끼에 이르기까지 죄다 배가 처 불러서는 모병관 애들 말을 귓등으로도 듣질 않아. 다 이 외국인이 쓸데없이 오지랖을 부려놓은 탓이지.”

정확하게 내가 의도한 바이긴 하지만, 별로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사고에 관한 보험은 쓸 일이 없을 때가 가장 이상적인 것. 이 대포(Tiro)라는 새끼가 고기방패를 모으려 시도했다는 사실 자체가 내게는 하나의 흉조나 다름없었다.

‘이 도시에서도 전투가 벌어질 수도 있다는 뜻이니까.’

물론 교전지가 반드시 이 도시라는 법은 없다. 여기서 병력을 모아다 과달라하라에 꼴아 박을 생각일지도 모르니.

그러나 어쨌든 병력이 급하긴 한 모양이다. 아무리 싼 값에 막 쓰는 하루살이 고기방패들이라도 하루하루 유지비가 들어가기는 들어가고, 숫자가 많은 만큼 장기 운용 따윈 고려조차 하고 있지 않을 터이므로.

텅!

띠로 놈이 탁자를 내리치기에, 난 놓치지 않고 움찔 놀라는 시늉을 보여주었다. 띠로는 상체를 나에게 가까워지도록 기울이며 딴에는 위협적인 목소리를 내었다.

“내 용건은 이거요. 우리 구역에서 장사를 하고 싶다면 군자금을 내놓을 것. 그리하면 우리 카르텔이 당신의 편의를 봐주겠다고 약속하지.”

여기에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엘 후에고가 짜증을 내며 끼어들었다.

“아 거 성급하다니깐! 자네 꼭 이래야겠나?”

“내가 네 지시를 받을 입장은 아니잖나?”

“나는 이 항구의 책임자야!”

“그리고 나는 「도블레 A」의 부사령관이지.”

난 비로소 이 띠로라는 놈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도블레 A」, 달리 말해 「아르띠스따스 아쎄시노스(Artistas Asesinos)」는 「시날로아 카르텔」이 거느린 3대 무장 세력의 하나였다.

‘작달막한 것이 예상보다 거물이셨군.’

3대 세력 중 최정예인 「겐테 누에바(Gente Nueva)」는 지금 과달라하라에서 성전 기사들과 드잡이질 하느라 바쁠 테고, 남은 두 타격대 중 하나의 부사령관이 여기에 와있다는 사실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

만약 이 항구에서 싸움이 벌어진다면, 솔직히 좋지는 않아도 상정한 범위 내다. 고기방패들 없이 카르텔끼리만 교전을 치를 경우 이 지역의 군사력과 경찰력만으로 충분히 대응 가능하다. 최소한 단기간에 계엄까지 갈 일은 아니라는 뜻이다. 내 손으로 그렇게 만들어놓았다.

엘 후에고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튼! 내가 잘 이야기할 테니 자네는 좀 가만히 있어. 내 입장은 생각 안 하나?”

“…….”

엘 띠로가 떫은 표정으로나마 몸을 뒤로 빼며 팔짱을 끼는 것으로 보아, 조직 내에서 엘 후에고의 입지가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인맥이나 혈연 같은 것들. 단순히 한 항구의 보스라는 타이틀만으로는 「도블레 A」의 부사령관을 제지하기에 부족한 감이 있었다.

‘꼬락서니를 보니 의도적인 연출도 아닌 것 같고.’

이게 좋은 경찰 나쁜 경찰 흉내라면 FBI가 특채해갈 수준이다.

“설마 이 항구가 불바다가 되는 겁니까? 저 과달라하라처럼?”

내가 두려움을 억누르는 사업가의 모습으로 침을 삼키며 묻자, 투자를 유치해야 할 입장인 엘 후에고가 손사래를 치며 ‘후앙’을 안심시킨다.

“아니야, 아니야. 당신은 안심해도 돼. 이 친구의 임무는 우회타격이거든. 여기서 모이는 시카리오들은 삥 돌아서 저어 남쪽 미초아깐, 기사 흉내 내는 머저리들의 본거지를 털 거야.”

“이봐, 엘 후에고!”

“아 또 왜?”

“외부인에게 작전을 발설하다니, 제 정신인가?”

“뭐가 걱정이지? 태평양 건너에서 온 외국인이 설마 기사단의 첩자일까봐?”

“그래도 원칙이라는 게 있는 거다!”

“원칙은 씨발아, 사업을 하려면 서로 믿음을 보여줘야 하는 게 원칙이고! 오늘은 나와 첼리노가 자네한테 엄청 양보하는 자리라는 걸 몰라서 이러나?”

잘들 노는군. 눈싸움을 하던 둘은 첼리노 시장의 중재로 날선 시선들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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