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42화 (42/561)

#9. 굶주린 항구 (4)

“멕시코는 아름다운 나라지요. 하지만 결코 좋은 나라는 못 됩니다, 프레지덴떼.”

억지로 꾸미던 밝음을 걷어낸 콧수염이 마른세수를 하며 음울하게 탄식했다.

“땅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았어도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은 타락해버린 지 오래예요. 똥 덩어리들을 욕하지만 본인부터가 똥 덩어리인 대통령, 국민들이 굶어죽든 말든 자존심이 더 중요한 정부, 축복받은 땅을 피와 마약으로 더럽히는 카르텔, 카르텔 하나 어쩌지 못하는 무능한 군대, 온 사방에 넘쳐흐르는 애비 없는 애새끼들…….”

정부의 자존심 운운하는 건 필시 시날로아 카르텔의 빈민구호활동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멕시코 최강의 카르텔이 자기네 본진인 북서부와 주요 경합지대 일부에서 구호활동을 펼치자, 체면이 상한 오브라도르 대통령은 “그 짓을 그만 두라.”며 불쾌감을 표시했다.

‘솔직히 이해는 가지. 그렇게 살리는 수보다 마약과 총질로 죽이는 수가 더 많으니.’

대통령의 요구는 그딴 위선보다는 조직간 전쟁과 기타 범죄활동을 중지하는 편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리라는 뜻이었으나, 도움을 받는 빈민들의 입장에선 “빈민들을 돕지 말라.”라는 소리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 배 나온 콧수염은 지금 그 약자들의 분노를 대변하는 것이다.

카르텔 서열 1위는 언제나 다른 모든 카르텔들의 롤 모델이었다. 「시날로아」가 북서부에 확고한 왕국을 건설하는 것을 본 경쟁자들은 각각의 본거지에서 크든 작든 비슷한 행동에 착수했다. 그러한 지원이 이루어진 모든 마을에서 연방정부의 위신이 땅에 떨어졌음은 물론이다.

구호활동에 나선 카르텔들은 예외 없이 자신들이 ‘정부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과달라하라가 어떤 꼴이 났는지 보십시오. 멕시코는 희망이라곤 없는 죄인들의 땅입니다. 이 소돔과 고모라에서 마리는 아무런 꿈도 꿀 수 없어요. 천박한 미혼모나 되지 않으면 다행이겠고, 마약중독자가 되지 않으면 다행이겠으며, 제명을 다 살고 죽으면 또 한 번의 다행이겠지요. 프레지덴떼, 저는 제 딸에게 더 나은 미래를 선물하고 싶습니다.”

나름 절절한 부정(父情)이긴 하다만,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다. 그리고 본인 역시 뇌물 깨나 받아봤을 입장이면서 나라의 불의에 분개하는 꼴도 우스꽝스럽다. 배에 붙은 살의 절반은 부정(不正)으로 찌웠을 텐데. 요 며칠 내 이름을 팔며 하고 다닌 짓들을 보고받은 바로는 이놈도 결국 멕시코의 공무원이었다. 약함과 착함을 혼동하는 흔한 약자인 것이다.

그러나 제 역할을 다해야 할 배우가 어둡게 기가 죽어있는 건 문제였다. 시계까지 채워준 보람이 없지 않은가? 난 내 무심함에 꾸며낸 연민을 덧씌웠다.

“그래서 나와 엮어주려고 했습니까?”

“예. 한국이 좋은 나라이긴 하나, 이단자와 무신론자, 그리고 대머리 이교도들이 많다고 들었는데, 프레지덴떼께선 혼전순결을 지키시는 보기 드문 신앙인이시고 성품도 훌륭하셔서 더 볼 것도 없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사과는 됐고, 이렇게 합시다.”

“예?”

“이 도시에서의 볼일이 끝나는 대로 마리 양의 일자리를 알아봐드리도록 하죠. 한국이든 미국이든, 원하는 곳에 터를 잡을 수 있도록. 내가 보증하는 일자리를 의심하진 않겠지요?”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충고인데, 자식의 연애사는 부모가 함부로 간섭하는 게 아닙니다. 스스로의 선택에 맡겨야 할 일이란 말입니다. 마리가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면 하느님께서 도와주시겠지요. 당신이 나를 만난 것처럼. 그렇잖습니까?”

“예! 그렇고말고요!”

단지 내게 집적대는 게 싫어서 한 말이긴 해도 정론은 정론이다. 페루쵸는 지금 잡은 끈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물론 실제로 일자리를 알아봐줄 생각은 없다. 어디에 꽂아주든 그 회사가 ‘후앙’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할 텐데, ‘후앙’은 이 도시에서의 행적을 마지막으로 사라져야 할 인물이므로. 내가 미쳤다고 불필요한 흔적을 남기고 다니나?

나는 표정이 밝아진 배불뚝이의 어깨를 두드렸다.

“높으신 주 하느님께 맹세하건대, 나 후앙이 살아있는 한 이 약속은 반드시 지켜질 겁니다. 그러니 구체적인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합시다.”

“감사합니다, 프레지덴떼!”

“그런데 지금이 몇 십니까? 의외로 차가 좀 막히는군요. 미사에 늦으면 곤란한데.”

“여, 열 시 이십 분입니다! 아직 여유는 충분합니다!”

시간을 확인한 페루쵸는 이제 다시 귀한 시계가 신경 쓰이는 사람이 되었다. 좋은 일이었다.

리무진 탑승칸 정면에 붙은 액정화면은 뉴스 채널에 맞춰져 있었다. 저화질 영상 속의 과달라하라 시가지는 전쟁터처럼 불타오르는 중이다. 난 볼륨을 키워보라고 지시했다.

「과달라하라 광역권의 폭력 사태가 벌써 14일차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한동안 ‘고기방패들의 전쟁(Guerra de los Escudos humanos)’으로 불렸던 이 카르텔간의 분규는 이제 ‘저주받은 자들의 전쟁(Guerra de los Condenados)’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습니다. 지역 빈민들에게 총칼을 들려 앞세우던 카르텔들이 이제 ‘저주받은 자들’로 편성된 부대들을 투입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원시마법 각성 능력자를 부르는 표현은 본디 「축복받은 자(벤데시도)」였으나, 카르텔의 능력자들은 「저주받은 자(콘데나도)」로 불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적어도 공중파에서는 그럴 수밖에. 초인적인 능력으로 하고 다니는 짓들이 죄다 사악한 것들뿐이니까.

「엘 카카스 대통령은 두라조 몬타노 안보 및 치안부 장관에게 도시의 핵심적인 기능들과 안정적인 거주지들을 우선적으로 보호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이를 두고 야당 진영은 부유한 자들만을 보호하는 차별적인 조치라고 비난했으나, 여당은 지난해 말 쿨리아칸에서 벌어졌던 비극을 기억해야 한다며 정부의 결정에 지지를 표명했습니다. 다만 일부 여당 의원들은 당론에 찬성하지 않는다는 개인적인 입장표명들을 내놓아 사실상 야당 진영에 손을 보탰습니다.」

쿨리아칸은 시날로아 카르텔과 정부군이 격전을 치렀던 도시다. 시가전에 휘말린 시민들의 무수한 희생들은 정부군에게 철수 이외의 선택지를 남겨두지 않았다.

‘지금도 시민들이 떼죽음 당하긴 매한가지지만, 어쨌든 직접적인 책임은 피하겠다는 거로군. 하여간 정치인들이란.’

대통령의 선택은 다분히 사업가적인 것이었다.

「한편 이 전쟁을 촉발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 「템플 기사단 카르텔」의 지도자 「엘 마에스뜨레」는 오늘 새벽 과달라하라 시가지 내 라스 훈타스에서 차단작전을 전개 중이던 방위군과 충돌, 방위군 마흔한 명을 참살하고 세 대의 차량을 손상시킨 뒤 부하들과 함께 남은 차량을 훔쳐 도주했습니다.」

바뀐 화면은 토막 난 시체들과 파괴된 차량들을 차례로 보여주었다. 시체들의 상흔은 모자이크 처리로 인해 제대로 관찰할 수 없었으나, 반으로 갈린 무기나 차량에 남은 칼자국들만은 분명하게 확인 가능했다. 차량들은 나름 방탄판을 덧대고 있었음에도 날붙이에 관통당한 흔적들이 제각각 수십 개씩에 달한다. 한 대는 아예 방탄 문짝이 사선으로 잘려있기까지 하다. 절단면이 깔끔한 방탄판과 방탄유리. 의심의 여지없이 단 한 번의 칼질로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좌석 시트엔 흐르다 마른 핏자국들이 가득하다.

이때 TV 소리가 줄어들더니 운전기사가 차내 스피커로 도착을 알렸다.

「도착했습니다. 성모교회입니다.」

미사 시작까지는 아직 반시간 이상 남아있음에도, 성당 정문 좌우로 빠지는 좁은 길은 미사를 보러 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 ‘후앙’이 참석한다는 사실 때문에 집에서 가까운 성당을 두고 먼 걸음을 한 자들이 대부분일 터. 정면의 도로를 경찰이 통제하고 있지 않았다면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부터 걸어와야 했을 것이었다.

차에서 내리자 경찰들이 경례를 올린다. 내가 경례를 받을 지위인가 여부는 상관이 없었다. 이곳은 카르텔이 시경청장을 임명하기도 하는 이상한 나라이니까.

군 계급으로는 대위쯤 될 경찰 간부(1° Oficial)가 성당을 향해 손을 펼쳤다.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돈 후앙. 안으로 드시죠. 다들 기다리고 계십니다.”

기다리는 자들은 물론 이 도시의 고위 관계자와 사업가 및 지역 유지들이다. 이들이야말로 내가 연출한 무대의 주연 배우들이었다.

‘직접 하기 어려운 일은 잘하는 놈들을 찾아 외주를 주면 되는 거지.’

이 도시를 음양으로 지배하는 속 검은 자들의 연합은, 시민들에게 희망을 줄 그럴듯한 계획과 구상을 짜내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지난날 그렇게 해먹은 경험이 너무나도 풍부한 것이다.

즉 필요한 건 계획이지 결과가 아니다. 아무리 엄청난 비용이 들어가는 계획이더라도 나는 그 초기비용의 일부만을 지불하면 그만이니. 빈민 고용 촉진 계획, 지속적인 구호물자 보급 계획, 시가지 구획 재정비 계획, 관광시설 확장 계획, 이런 계획, 저런 계획, 아무튼 그 밖의 많은 계획들. 정치가와 사업가와 그 외의 높으신 잡것들이 모인 사기꾼 집단은 멍청할 정도로 착한 외국인 사업가의 자금을 뜯어먹을 계획들을 끝도 없이 내놓았고, 발표했으며, 가난한 시민들의 가슴에 희망을 불어넣어주었다.

이 탁월한 일처리들을 보면서 나는 주식 판을 흔드는 작전세력들을 떠올렸다. 본질적으론 동일하지 않은가? 실물 없는 희망으로 사람들을 열광하게 만드는 것이.

이 시점까지 지출한 금액은 약 8천 2백만 페소. 한화로는 45억 원 가량.

처음에 각오한 지출 상한이 300억이었으니 이 정도면 매우 선방한 것이다. 앞으로 사흘만 더 버티면 되는데, 그 사이에 추가지출이 많이 생길 것 같진 않으니까.

“돈 후앙.”

1시간에 걸친 주일미사가 끝나자, 부패한 자들 중 하나가 의젓하게 말을 걸어왔다.

“살라자르 바퀴야노 시장님.”

“어허, 후앙. 우리 사이에 뭐가 그리 딱딱합니까. 편하게 첼리노라고 부르시라니까는.”

마르셀리노 살라자르 바퀴야노. 이 배고픈 항구의 배부른 시장. 복부비만 항만 공무원으로부터 다섯 다리를 올라가 연결된 인물이다.

“좋습니다, 첼리노. 제게 뭔가 볼일이 있으십니까?”

내 물음에 시장이 웃으며 긍정한다.

“아아. 있지요, 있지요. 볼일이라기보다는 소개시켜줄 사람들이 있는 것이지마는.”

여섯 다리째는 과연 누구일까. 연방정부의 관계자일까, 집권여당의 유력인사일까. 그것도 아니면 카르텔의 지방영주라는 가능성도 있겠지. 어느 쪽이든 환영이다. 희망을 더 부풀리는 한편으로 이 도시에서 ‘후앙’이 사라질 명분을 더 확실하게 만들어줄 테니까.

“그거 기대되는군요. 첼리노와 아는 사이라면 분명 귀한 인연들일 겁니다.”

“하하하! 그렇게 친절하게 말씀해주시니 이 사람의 체면이 삽니다. 자, 괜찮다면 지금 바로 이 사람과 함께 가십시다.”

“당장 말입니까?”

“괜찮다면 말이지요. 그들 중 한 친구는 뭘 해야겠다 싶으면 바로 해치워야만 직성이 풀리는 유형이고, 다른 한 사람은 먼 곳에서 와서 바쁜 시간을 쪼개어 참석하는 이인지라. 혹여 돈 후앙께선 달리 급한 용무가 있으신가?”

“아닙니다. 사업가는 기회를 놓쳐선 안 되는 법이고, 시장님께서 소개해주는 분들이라면 있는 일정을 취소하고서라도 안면을 익혀놔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떤 분들을 뵙게 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군요.”

“하하! 좋아요, 좋아. 훌륭한 마음가짐입니다. 그들이 누구인지는 만났을 때의 즐거움으로 남겨두도록 하십시다.”

‘첼리노’ 살라자르 바퀴야노는 나를 항구 북쪽 부세리아스(Bucerías)에 위치한 자신의 저택 「바다의 꿈(Casa Sueños Del Mar)」으로 이끌었다. 미사를 본 과달루페의 성모 성당으로부터 간선도로를 타고 40분이나 북으로 올라가야 하는 위치였다.

이름이 붙어있는 시점에서 이미 보통이 아닌 이 저택은, 몇 시간을 걸어도 끝이 나지 않을 기나긴 백사장을 앞에 두고 있었다. 한국에서 가장 긴 모래해변을 가져온들 여기에는 미치지 못할 터. 멋이 떨어지는 호텔들과 거리를 구경하는 외국인들의 존재가 이 부촌의 유일한 흠이라 하겠다.

이 부세리아스에서도 간선도로를 기준으로 빈부가 갈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저 멀고 화창한 수평선으로부터 파도와 바다 내음을 몰아오는 오후의 서남풍은, 집집마다 정원이 있는 거주지를 거치며 청량함을 많이 덜어내고서야 비로소 가난한 자들의 골목으로 스며든다. 간선을 달리고 있노라면 그 좌우의 대비가 너무도 선명하게 보였다. 왼쪽으로 빠지는 차들은 이 시대에 속한 것들이었고 오른쪽으로 빠지는 차들은 지난 시대에 속한 것들이었으니. 이 도시에선 시대의 변화도 바람처럼 걸러지며 스며드는 것이었다.

내가 탄 리무진을 포함하여 범퍼가 깨끗한 차량 대열은 옛 스페인 식으로 포장된 비탈길을 내려가다가 차도가 끝나는 지점에서 멈춰 섰다. 사유지로 들어가는 게이트 앞엔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사복 차림의 경비가 둘 서있었으며, 담장을 따라서는 먼저 도착한 고가의 차들이 줄줄이 주차되어 있었다.

“프, 프레지덴떼!”

주차된 차 가운데 하나, 은회색으로 번뜩이는 포르쉐 911 카레라 S를 본 배불뚝이 페루쵸가 창백한 낯빛으로 속삭이듯 외쳐 경고했다.

“조심하십시오! 저건 「엘 후에고(El Juego)」의 차입니다!”

나는 알면서 되물었다.

“그게 누군데요?”

“「시날로아 카르텔」 바야르타 플라자의 헤페인데, 굉장히 잔인하고 음험한 인간입니다. 그 작자가 이 항구로 돌아온 후 반년 만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실종시켰는지 아십니까? 어쩌면 프레지덴떼를 납치해서 몸값을 요구하려는 함정일지도 모릅니다! 누구도 시장의 초대를 의심하진 않을 테니까요!”

“진정해요, 진정해.”

긴장한 채 속사포로 말을 쏟아내는 페루쵸를 가만히 두드려 진정시킨다. 게이트에선 시장이 웃는 낯으로 어서 오라며 손짓하고 있었다. 나는 곧 따라가겠다는 사인을 보내고서 겁에 질린 콧수염을 상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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