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굶주린 항구 (3)
「전율하는 거인」. 그 하얗고 안개 자욱하던 겨울날의 숲에서 물에 대한 구속력을 얻고부터 사소하게 편해진 점 하나가 있다. 실리콘 마스크와 피부 사이에 차는 습기를 간편하게 제거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멕시코처럼 더운 나라에선 엄청난 장점이다. 예전엔 이러한 위장기술의 원조인 CIA 요원들이 이걸 쓰거나 붙인 채 어찌 종일 활동하는가, 그들에겐 뭔가 다른 노하우가 있는가 싶었으나, 이젠 내게도 그럭저럭 수월해진 일이다. 그들의 기술과 인내를 일부 마법으로 대체할 뿐이지만.
그럼에도 며칠에 걸친 연속착용은 무리였다. 습기를 빼더라도 기름기는 남으며, 아무리 얇고 정교하게 조형된 마스크라 한들 답답한 착용감 자체는 개선의 여지가 없다는 게 문제. 또한 안면근육과의 완벽한 연동을 위해선 안면을 조이는 압력과 접착제 사용이 필수적으로 동반되기에, 소재의 탄성 내지 접착력이 떨어졌다 싶으면 여분의 마스크로 갈아줄 필요도 있었다. 지금 쓰는 것처럼 풀 커버(Full cover)형이 아닐 경우엔 더더욱 그러하다. 위장도와 착용감이 향상되는 만큼 손이 가는 부분도 많아지는 것이다.
따라서 외부에서 신분을 위장하고 활동할 때의 나는 혼자 방을 쓰는 일이 드물었다. 1차적으로는 물론 경호를 위한 조치이되, 2차적으로는 내가 실수로라도 휴식 중의 맨얼굴을 노출시키지 않게끔 하는 안전장치였다.
“잠시 봐드리겠습니다.”
푸에르토 바야르타에서 맞이하는 12일째의 아침. 수연은 나갈 채비를 마친 나의 마스크 착용 상태를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원래는 착용과 접착마감도 이 녀석의 손재주에 맡기던 일이었으나, 요즘은 거울을 보며 내가 직접 처리하고 있었다. 손이 아니라 정밀한 염동력 술식을 써서.
손끝으로 내 볼을 쿡쿡 찔러보기도 하고 턱을 잡고 이리저리 돌려보기도 하던 수연이 곧 까딱 끄덕여 오케이 사인을 냈다.
“이상 없습니다.”
합격점을 받은 나는 자유로워진 시선을 돌려 탁자 위의 유리병을 바라보았다. 텍사스의 흙 속에서 파낸 미친 개미의 여왕이 함께 납치당한 일개미의 도움을 받아 영양을 공급받는 중이었다. 휴스턴을 떠난 이후로 매일 아침 이걸 확인하기가 일과가 되었다. 부하들의 개인 휴대물 속에도 같은 유리병이 하나씩 들어있었다.
테이블 너머에선 아침햇살을 머금은 커튼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커튼이 벌어진 틈으로 강물처럼 반짝이는 잔잔한 바다가 보인다. 이 항구는 아직 평화로웠다.
“밖에서 페루쵸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수연의 보고에 나는 다 가시지 않은 졸음 속에서도 가볍게 실소했다.
“그 인간은 어째 네 자리를 욕심내는 것처럼 구는구나.”
“무슨 말씀이신지…….”
“마치 내 비서처럼 행동하고 있지 않으냐.”
단순한 농담이었는데도 수연 녀석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는다. 예전부터 종종 느끼는 것이지만, 자신의 자리에 대한 내 비서실장의 집착엔 확실히 꽤 강박적인 구석이 있었다. 스치듯 건드리기만 해도 욱 하고 반응해버리는.
‘결국은 제 오빠의 유산이기 때문이겠지.’
싱가포르에선 10년 전부터 자신을 위해 살고 있노라 답했던 수연. 그러나 내가 보기엔 아무래도 오빠의 몫이 되었어야 할 역할에 대한 동생의 소유욕이다. 강산이 변할 시간 동안 눈곱만큼도 달라지지 않은, 이 서릿발 같고 만년설 같은 소유욕.
그래서 이게 싫은가 하면 절대 그렇지는 않다. 내가 왜 싫어하겠나. 이 집착이 변치 않는 한 나에 대한 충성도 변치 않을 텐데. 나는 가벼운 질문으로 주의를 돌렸다.
“그놈이 오늘은 몇 시부터 와서 기다리고 있는 거지?”
“새벽 5시입니다.”
“아주 정성이로군.”
“어제는 집으로 돌아가지도 않았습니다. 이 호텔에서 묵었죠.”
그럴 돈은 있는 놈인가? 라는 의문은 금세 수그러들었다. 당연히 돈을 내지 않았을 것이다. 나와의 가까운 관계를 빌미로 호텔에 특혜를 요구했거나, 아니면 호텔 측이 알아서 기었거나. 지난 며칠간 충분히 그럴 인성임을 파악했다. 스스로는 남들과 다르다고 믿지만 실상은 다를 게 없는 소인배.
“다른 사이트들은? 간밤에 아무 이상 없었나?”
“없습니다.”
“그럴 애들도 아니겠다만, 한시도 방심하지 말라고 전해라. 여기까지 공을 들이고서 설계도도 없이 돌아갈 순 없어.”
“예.”
전언을 받는 대상, 다른 사이트들은 당연히 현장지휘소와 안전가옥을 말한다. 지금은 사업가 행세를 하느라 호텔 신세를 지는 나도 때가 되면 거처를 옮길 계획이고. 거기 배치된 녀석들은 위성과 드론을 이용해 내 시야를 벗어난 범위를 감시하는 중이다. 「북동부파」의 위성교신을 엿듣고 있음은 물론이고, 시날로아 카르텔의 무선 주파수를 수집하는 작업에도 공을 들이고 있었다. 하급 시카리오들의 채널들만 확보해 둬도 전체적인 움직임을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경태야.”
“넵?”
“적당한 시계 하나만 챙겨서 나가자.”
“누구한테 주실 물건입니까?”
“페루쵸.”
경태는 시계를 가져와 내게 확인을 받았고, 나는 무언으로 승낙하고서 발걸음을 떼었다.
“가자.”
스위트의 응접실을 지나 문을 나서자, 복도에서 하인처럼 대기하고 있던 페루쵸가 반색한다.
“프레지덴떼 후앙! 좋은 아침입니다.”
“예,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도 부지런하시군요,”
“이게 제 일이니까요. 프레지덴떼를 불편함 없이 모시는 것.”
아무리 봐도 진심으로 하는 소리라 우스울 지경이다. 처음 만났을 당시의 좀 귀찮아하는 듯하던 태도는 어디로 갔는지. 나를 부를 때도 꼭 회장님(프레지덴떼) 내지 경칭으로서의 돈(Don)을 붙여 부른다. 이제 와서는 실로 열렬해진 숭배였다.
“그건 참 고맙습니다만, 공무가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최근 복직되셨다고 들었는데요.”
내 말에 페루쵸의 얼굴에 찰나의 경련이 스쳤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차피 들어오는 배도 드문 항구, 무에 복잡할 일이 있어서 저까지 필요하겠습니까? 오히려 프레지덴떼의 사업이야말로 항구를 번창으로 이끄는 길이니, 저는 제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아부가 며칠 새 많이도 늘었군. 난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렇게 생각하신다면야. 그럼 조금 더 신세를 지겠습니다.”
“신세라뇨.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프레지덴떼.”
사실 페루쵸가 휴직에서 현직으로 전환된 건 벌써 이틀이 지난 일이었다. 그러나 이 배불뚝이는 자신이 회복한 지위와 업무에 아랑곳 않고 열성적으로 나를 따라다니며 현지인 비서 노릇을 도맡았다.
내가 이 배나온 하급 공무원을 계속 옆에 두는 이유는 단 하나. 만만하게 생겼기 때문이다. 동네 아저씨 그 자체인 이 만만한 배불뚝이를 볼 때마다 남녀노소를 불문한 모두는 자신의 것이 될 수도 있었을 우연과 인연과 행운을 되새김질할 것이었다.
까딱까딱. 난 손가락으로 경태를 불렀다. 곁들인 고갯짓을 이해한 경태는 페루쵸 앞에서 시계가 든 케이스를 열어보였다.
“이건……?”
사파이어 글라스 너머의 숫자판에 새겨진 푸른 물결무늬. 케이스의 내용물은 오메가 씨마스터의 중간급 모델이었다. 당황 반 기대 반으로 시계와 나를 번갈아 보는 복부비만 공무원에게, 나는 가벼운 손짓으로 확신을 주었다.
“시계가 낡아보여서 준비했습니다.”
“오, 세상에!”
“1만 달러도 안 되는 물건이니 편히 차고 다니십시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엔트리급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6천 달러를 넘어가는 제품. 공무원 급여로는 다섯 달쯤 한 푼도 안 쓰고 모아야 살까 말까한 사치스러운 물건이다. 시계를 바꿔 찬 페루쵸는 이제 맞지도 않는 정장을 처음 입어보는 사람처럼 굴기 시작했다. 손목에 채워진 시계가 너무나도 신경 쓰이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배불뚝이의 인상은 만만함을 넘어 머저리 같은 단계에 진입했고, 이게 바로 내가 바라던 바였다.
자신에게 배역이 주어진 줄도 모르는 배우의 연기력 향상에 6천 달러. 나쁜 가격은 아니지. 수십만 명을 상대로 사기를 치고 있을 때는.
로비에 도달하자 날 발견한 정문 밖의 인파가 열광으로 끓어올랐다.
후앙! 후앙! 후앙! 후앙!
그들이 연호하는 내 거짓 이름은 박자가 맞지 않는 거대한 울림이었다. 차단선을 친 무장경찰들이 인파를 통제하려 애쓰는 모습들도 보인다. 로비 현관을 통과하고부터는 정말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장외홈런이 터진 메이저리그 결승 무대의 한복판에 선 것 같은 소음 속에서, 나는 후앙을 사랑하는 시민들에게 한참 동안 손을 흔들어주며 시계 찬 배우를 노출시키고서야 대기 중이던 리무진에 올라탔다.
텁!
문이 닫히고서, 나는 마주앉은 페루쵸에게 말했다.
“제가 너무 과분한 대우를 받는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한 일이라곤 모두에게 먹거리를 조금씩 나눠드린 것밖에 없는데 말이지요.”
“과분하다뇨! 절대 아닙니다!”
손과 머리를 동시에 흔드는 배불뚝이.
“프레지덴떼께선 정부조차 해주지 못한 일을 저희에게 해주고 계시는 겁니다! 빌어먹을 정부는 우리에게 쌀 한 톨 옥수수 한 알 나눠주지 않았어요!”
배불뚝이는 흥분해서 허공에 주먹을 휘둘렀다.
“믿어지십니까? 이토록 어려운 시기에, 너무나도 힘들어하는 서민들에게 정부가 단돈 1페소도 베풀지 않았단 말입니다! 다른 나라들은 현금도 주고 음식도 주고 한다는데,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가 있습니까? 그저 세금 납부만 좀 미뤄주면 다랍니까?”
“진정하십시오.”
흥분한 배불뚝이를 진정시키는 데엔 차분하게 던지는 한 마디로 충분했다.
페루쵸의 말처럼, 멕시코 정부는 보건위기와 그에 따른 경제위기 속에서 생활이 어려워진 국민 개개인을 위한 구제조치를 무엇 하나 입안하지 않았다. 덕분에 내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나눠준 141페소어치의 구호물품은 이 굶주린 항구에서 실로 무시무시한 폭발력을 발휘했다. 멕시코 정부에겐 실로 고마운 마음뿐이다.
141페소. 한화로는 약 7,900원.
이 금액에 해당하는 1인당 지급물품은 다음과 같았다. 또르띠야 4kg, 쌀 4kg, 토마토 2kg, 바나나 2kg, 식용유 1리터, 계란 48구, 그리고 5백 그램짜리 흰 빵 한 덩이와 1kg의 닭고기. 이중에서 계란과 흰 빵은 도매가 대비 덤으로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 대량구매에 따른 단가 인하에 가톨릭 교구의 영향력이 더해진 덕분이었다.
이 일을 거들어준 아우틀란(Autlán) 교구 소속 페레즈 오르테가 주교는 만만한 배불뚝이로부터 출발하여 세 번의 다리를 건너 연결된 사람이다.
“저, 프레지덴떼. 한 가지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만…….”
“뭡니까?”
내가 바라보니, 페레쵸는 조심스레 눈을 굴리다가 아주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 실례되는 질문일지 모르나, 프레지덴떼께선 혹시 세뇨리따 초이와 특별히 가까운 관계이십니까?”
세뇨리따 초이, 즉 최는 수연이 써먹는 가짜 성씨다. 즉 이 복부비만 녀석은 수연과 내가 사귀는 사이냐고 묻는 것이었다. 질문이 나온 직후 수연은 얼음장 같은 무표정으로,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질문자를 응시했다. 페레쵸는 그 시선을 모르는 척하기도 버거워보였다.
“아닙니다.”
대답한 내가 조금 날선 질문을 돌려주었다.
“헌데 실례인 줄 알면서 그걸 왜 물어보시는지?”
“어, 하하……. 세뇨리따 초이가 워낙 빼어나기도 하고, 침실이 여럿이라지만 그래도 같은 스위트를 쓰시고, 돈도 많으신데 다른 여자를 부르지는 않으시는 것 같고, 항상 프레지덴떼 가까이에 있기도 해서 혹시 그렇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듣다보니 짜증이 난다.
“저는 혼전순결주의자입니다. 됐습니까?”
“물론입니다. 되었고말고요. 과연 신실한 신앙인이십니다.”
배나온 공무원은 끈으로 움직이는 인형처럼 부자연스럽게 정자세를 취했다. 나는 한숨을 억누르며 차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혼전순결주의는 무슨.’
내 비록 아직까지 ‘제대로 된’ 경험이 없는 몸이긴 하나, 그 이유는 멍청한 순결주의 따위가 아니다. 이 눈. 이 파내지도 못할 빌어먹을 놈의 눈알 때문이지.
피가 흐르는 혈관과 약동하는 심장과 담즙을 분비하는 간과 분변이 들어찬 대장 따위를 투시하면서 X대를 세울 변태새끼가 이 세상에 과연 몇이나 있을까? 심지어 그 모든 인간의 구성요소들이 온갖 정보와 영혼과 마력의 색채로 현란하게 번뜩이고 있기까지 하다면? 난 인체의 신비전을 보며 흥분하는 이상성욕자가 아니다. ‘객관적인’ 아름다움을 분석적으로 인식할 순 있을지언정 ‘주관적인’ 매력은 못 느낀다는 소리다.
사람의 성욕에서 시각적 자극이 차지하는 비중은 정말로 크다. 아마 그 사실을 나보다 더 절실하게 느끼는 이는 없을 터.
‘차라리 시각적인 자극의 백지상태가 나아.’
난 피와 살과 장기가 꿈틀거리지 않는 인간의 몸을 상상으로 그려보기조차 어려워하는 사람이다. 상리를 벗어난 시야에 그야말로 온종일 노출되어있다시피 하니까. 그림과 사진을 통해 인간의 객관적인 이미지를 유지하고는 있으나, 그 이미지를 본능의 영역에서 실제 사람과 연결짓기란 또 어려운 일이었다. 아마 성적인 면에선 선천적인 장님이 나보다 더 우월할 것이다.
허나 이런 나에게도 성욕은 쌓일수록 괴로워지는 욕구였다.
경험? 굳이 따지자면 있다고 봐야지. 이 바닥의 생리상 피하지 못할 순간들이라는 게 존재하고, 거기에 미리 대비할 필요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것은 겉보기로만 정교한 흉내와 기술적 축적으로 장애를 숨기는 수준이었을 뿐. 정상적인 행위라고 불러주기엔 많이 수치스러운 무언가다.
말하자면 나는 눈깔병신이다.
조금 전 수연이 드러낸 차가움은, 짐작컨대 내 민감한 부분을 멋모르고 건드린 데 대한 짜증일 테지.
차창 밖의 풍경은 북으로 흐르는 거리였다. 과달루페 성모 교회로 가는 멀지 않은 길. 견디기 어려운 순간이 지났다고 판단했는지 페루쵸가 다시 나불대기 시작했다. 자신의 딸이 착한 아이일뿐더러 대학을 중퇴했으나 돈만 있었다면 충분히 졸업을 하고도 남을 능력이 있었음을 어필하고, 한국이 무척이나 좋은 나라라는 이야기를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반복해서 떠들어대는 것. 남자에겐 참한 아내가 있어야 생활이 안정되더라는 경험담도 틈날 때마다 곁들인다.
듣다 못한 내가 말을 끊었다.
“페루쵸.”
“예, 프레지덴떼!”
“한국도 좋은 나라지만 멕시코 역시 좋은 나라입니다. 이만큼 아름다운 나라를 세상 어디에서 다시 찾을 수 있겠습니까?”
“…….”
배불뚝이 콧수염의 낯빛에 좌절이 깃들었다.